(제 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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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털이를 밀어주시니 백광명은 기계적으로 다시 담배를 붙여물었으나 피울 생각은 잊어버린듯 멍하니
《무송에 장동무라는 내 어린시절의 동창생이 한사람 있습니다. 그 동무도 백선생과 같이 부농의 아들이고 또 정신생활에서도 백선생과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 동무도 이런저런 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결국 지금 자기의 처지를 극복하고 혁명의 편에서 잘 싸우고있습니다. 이렇게 놓고볼 때 문제는 본인의 자각과 각오에 있는것이지 외부의 그 어떤 평가에 있는것이 아닙니다. 우리 조선인테리의 처지를 두고 말한다면 가정이 부유한 까닭에 로동자나 농민들이 배울수 없었던 과학이나 지식을
가지게 되였는데 그것을 침략자들이나 착취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을 찾기 위한 인민대중의 혁명위업에 바쳐야 할것입니다. 이것은 혁명의 요구이며 또 그렇게 하는 길만이 자기를 참되게 구원하는 길일것입니다. 우리 인테리는 식민지인테리로서 민족적차별과 압박을 직접
당하고있는 피압박대중의 한 성원입니다. 이와 같은 사정이 바로 백선생과 같은분을 혁명의 편에 서라고, 또 설수 있다고 부르는 근거로 될것입니다.
말하자면 혁명은 망국노인 백광명선생을 자기 편으로 부르고있습니다. 근로자들의 피땀우에 구축해놓은 백선생네의 그 부유한 생활처지는 첫째라는 소년이
그렇게 적의를 품고 규탄한것이 어느모로 보나 정당한것이고 그때문에 선생
《저는 그 질문이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하루에도 몇번씩 그 질문을 받군 합니다. 마치 넋에다 잔침질하는것처럼 무시로 찔러대는 그 질문으로
하여 제 심장은 마침내 갈가리 찢어질 지경입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혁명의 편이다.>하고 떳떳이
대답하고싶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만 저에게는 부농이라는 처지가 있을뿐이지 실상 저
백광명은 구원을 부르듯 이미 불꺼진 담배를 쥔채 두손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백선생의 머리속에 그와 같은것이 얼른거린다면 철저한 혁명가가 되기는 힘들것입니다. 그러나 보매 백선생은 그다지
재물을 탐내는분 같지는 않습니다. 백선생이 그런 계급적처지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는것도 사실이고 그러면서도 그 처지가 빚어낸 사상관념을 어느 정도 보존하고있다는것도 사실이며 따라서 그에 대한
인민들의 응당한 경계도 정당한것입니다. 이것은 사상상에 있어서 준엄한 계급투쟁입니다. 여기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며 진리를 위해서는
모든것을 내던져도 좋다는 정의감에 불타는 백광명선생이 부농의 아들 백광명을 종국적으로 꺼꾸러뜨리고 승리해야 합니다. 이것은 장구한 시일을 두고
간고한 싸움을 통해서만 이루어질것입니다. 인민들의 비판은 선생의 투쟁에 좋은 방조를 주는것입니다. 우리 조직도 백선생을 힘껏 돕겠습니다. 약속할수 있습니다. 그러니 백선생
《백선생! 용감하십시오.》
《…》
백광명은
자정이 넘을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였다. 백광명은 빚어세운 조각처럼 머리를 숙인채 몇시간동안
이윽해서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그는 개울을 따라 걸어올라가다가 잔디가 한벌 덮인 언덕에 걸터앉았다. 하늘에는 뭇별이 총총한데 때마침 달이 솟아오르고있었다. 그는 풀밭에 벌떡 드러누워 검푸른 하늘을 향해 두손을 올려 뻗치였다.
《아! 나는 오늘 비로소 세상에 태여났다!》
생에 대한 의지와 긍지를 뼈저리게 통감한 그는 온 세상이 들으라는듯이 큰소리로 웨치였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떴다하면서 이것이 진정
꿈이 아니고 생시라는것 그리고 오늘 밤 이 시각이 한 인간을 재생시킨 장엄한 순간이였다는것을 자기
《백선생! 같이 걸읍시다. 간고하기는 할것이지만 이 길만이 살길이며 참된 혁명의 길입니다.》
다정하게 들려주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앉았다.
《그렇습니다. 꼭 그 길로 가겠습니다. 혁명을 따라가겠습니다. 가다가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고 또 쓰러지면 또 일어나 가겠습니다. 그래서 이밤에 주신 한 인간에 대한 신임과 준절한 가르치심에 보답하겠습니다.》
목이 꽉 메여오른 그는 가슴을 움켜잡고 눈물을 떨구었다. 가슴속에서 뿜겨오른 커다란 불기둥이 빙하처럼 얼어든 한쪽가슴을 여지없이 녹여내는것이였다.
다음순간부터 그는 자기라는것을 완전히 잊어버린듯 한 평온을 느끼였다. 조잘조잘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물, 새날이 들어서까지 지칠줄 모르고 울고있는 풀벌레 그리고 가볍게 볼을 스치는 봄바람, 그런것들에 도취되여 무료히 앉아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걸었다. 한참 걷다가 그는 문득 좌우를 둘러보았다. 이때 그는 아무것도 시각에 들어오는것이 없었지만 분명히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조선인테리들의 길다란 횡대행진을 보는듯 하였다.
어디선가 닭이 홰를 치며 울었다.
오래지 않아 날이 밝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