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2. 신념의 침로

태양을 옹위하여

(2)

 

1917년 4월부터 평양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던 김광진이 3학년되던 때인 1919년이였다.

일제의 야만적인 《무단통치》하에서 모진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온 조선민족의 쌓이고쌓인 울분과 원한이 마침내 3월 1일에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으로 폭발하였다.

《한일합병》날조후 근 10년은 조선을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어버린 중세기적공포정치의 총검밑에서 우리 민족이 언론,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권리와 재부를 강탈당하고 끝없는 고통속에서 신음해온 수난의 시대, 암흑의 시대, 기아의 시대였다.

《한일합병》날조후 일제를 반대하는 비밀결사운동과 독립군운동, 애국문화계몽운동을 활발히 벌려온 우리 민족은 이 암흑의 시대, 수탈의 시대를 그대로 감수할수가 없어 분연히 궐기하였다.

천도교, 그리스도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 인사들과 애국적인 교원, 학생들의 주도하에 3. 1인민봉기는 면밀하게 계획되고 추진되였다. 갑신정변과 위정척사운동, 갑오농민전쟁, 애국문화계몽운동, 의병투쟁을 통하여 줄기차게 이어지고 쌓이고쌓여온 우리 인민의 민족정신은 마침내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화산처럼 분출하였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종소리를 신호로 수천명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장대재에 있는 숭덕녀학교운동장에 모여들어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것을 엄숙히 선포한 다음 《조선독립 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리였다. 시위대렬이 거리로 밀려나오자 수만명 군중이 이에 합세하였다.

이 운동의 주도적력량은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이였으며 특히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선생님께서 일찌기 혁명의 씨앗을 뿌리신 평양숭실중학교의 애국적인 학생들이 운동을 끌고나갔다.

일제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3월 1일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평안남도에서 벌어진 독립시위운동은…숭실중학교학생들이 모두 그 주동이였다.》라고 밝히고있는것이다.

정각 13시 청년학생대표가 높이 세워진 연단에 뛰여올라 목청껏 소리높이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진 조선은 독립국가임을 엄숙히 선포하였다.

청년대표의 선언은 전체 참가자들의 가슴속에 불타오르던 애국의 열정을 순간에 폭발시켰다.

하여 평양중심 제일 높은 장대재언덕에서는 일시에 《조선독립 만세!》의 우렁찬 함성이 터져올랐다. 이 웨침소리는 평양의 온 거리와 주변농촌에로 메아리쳐갔다.

일신학교가 페교되고 교원들이 체포되여 옥중에서 옥사하거나 그 후유증으로 한많은 세상을 떠났을 때 조국의 해방과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자고 맹세한 김광진도 동무들과 같이 시위대오의 최선두에 서서 기발을 날리고 구호를 웨치고 만세를 부르며 용감히 싸웠다.

김광진을 비롯하여 애국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을 선두로 수많은 평양시민들이 시위에 떨쳐나섰다.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 만세!》

시위대렬이 웨치는 함성은 점점 높아가고 대오는 더욱 불어나 삽시에 1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당황망조한 일제놈들은 이 대중적인 시위를 막아보려고 수많은 경찰과 100여명의 군대와 별동대격인 소방대까지 내몰았다.

총칼과 쇠갈구리까지 들고 인민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는 속으로 학생들과 시민들은 적수공권으로 행진하면서 련속 구호와 노래를 불렀다.

 

    동포들아 나아가자 용맹하게

    적수공권일지라도 두려울소냐

    정의와 인도의 광명 미치는 곳에

    원쑤들의 천군만마도 타승하리라

 

김광진을 비롯한 학생청년들은 평양 남문밖에서부터 3개 방향으로 나뉘여 행진하여 일제놈들과 싸웠다.

한 대오는 평양경찰서로 향하고 다른 대오는 평남도청으로 또 한대오는 평양감옥으로 행진해가서 애국자들을 당장 석방하라고 강경한 요구를 들이대면서 시위투쟁을 계속하였다.

이 싸움에서 수많은 애국적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숨졌다.

고등보통학교 3학년이던 김광진은 동무들과 함께 이날을 위해 서울에서 온 학생들과 련계를 취하면서 수천매의 기발을 만들고 만단의 준비를 갖추었었다. 그 기발이 피로 물들고 프랑카드가 찢겨나갔으나 학생청년들은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평양에서 이런 용감한 투쟁이 벌어지고있을 때 서울의 소위 민족대표 33명은 군중이 모여 기다리는 탑동공원(빠고다공원)으로 간것이 아니라 《태화관》이라는 료리집으로 모여들어 먹자판부터 벌려놓았다.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의 비겁한 행동에 격분한 청년학생들이 곧 3명의 대표를 뽑아 《태화관》에 파견하고 당당한 독립선언을 어째서 이따위 료리집에서 하려 하는가고 따지고 당장 군중이 모인 탑동공원으로 가서 예정대로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시위를 벌리자고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자들은 결코 《배타적감정》이나 란폭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집회장소로 나가기를 거절하였다.

원쑤 일제와 싸워 조선독립을 쟁취하려는 마당에서 《배타적감정》이니, 《란폭한 행동》이니 하면서 폭력투쟁을 거부한 민족대표 33인(그중 4명은 결석)은 료리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랑독도 하지 않고 불교대표 한룡운의 간단한 연설로 《집회》를 끝내고 스스로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전화를 걸어 《자수》한다는 비겁하고 너절한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정대로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시위투쟁으로 넘어갔다. 14시 30분이였다. 평양보다 1시간 30분이나 늦어서였다.

그 과정에 김광진은 체포되고 그의 아버지도 감옥으로 끌려갔다.

남편이 체포되고 사랑하는 아들이 감옥에 갇히자 김광진의 어머니는 돗자리를 깔고 경찰서앞에서 앉아버티기를 하면서 죄없는 남편과 아들을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고 그러한 절규와 항의는 며칠째 계속되였다.

경찰들은 일이 시끄럽게 되였다고 광진의 어머니를 차고 치고 하였으나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을 내놓기 전에는 죽어도 이 자리를 뜨지 않겠다고 밤을 새우며 버티고 시민들도 이에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3. 1인민봉기에서 시위의 주동인물로 지목되여 1919년 8월부터 11월까지 평양감옥에 구금되였던 광진은 아직 미성년인것으로 하여 불기소로 석방되였다.

그 가혹한 옥고도 그의 심장속깊이 간직되여있는 애국의 넋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지를 말살해버리지는 못하였던것이다.

출옥후 그는 의기소침해진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국적열정으로 더더욱 심장을 불태웠다. 다른 청년들도 다를바 없었다.

그들은 모임도 가지고 토론회도 열면서 테로와 압박이 판을 치는 암흑의 조국땅을 떠나 국외에 나가서 혁명대오를 뭇고 일제와 무장으로 싸우자는 의논도 하였다.

김광진은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민족적대단결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진보적사상과 리론을 배워야 한다는것을 통감하고 그 실천을 위해 노력하였다.

우선 배워서 알고 왜놈을 압도하는 지식을 가지고 무력을 가져야 한다는것이 그의 지론이였다.

3. 1인민봉기는 그의 의지와 신념을 검열한 최대의 시련이였다.

광진은 후날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뭐니뭐니해도 나의 정치적각성을 높이고 나자신을 혁명의 소용돌이속으로 끌어들인것은 1919년 3월 1일 일어난 3. 1인민봉기였습니다.》

김광진이 출옥했을 때에는 그토록 치렬했던 투쟁도 거의 진압된 때였다.

그러나 반일항쟁의 불길은 전국의 232개의 부와 군가운데서 229개의 부, 군을 휩쓸었을뿐만아니라 중국의 동북지방에 사는 조선사람들과 로씨야일대, 일본각지와 하와이 등 해외에서 사는 조선인거주지에서도 전면적으로 일제를 반대하여 들고일어나 《조선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김광진은 조선인민은 제국주의침략의 그 어떤 야수적폭압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강의하고 애국적인 인민이며 견결한 혁명정신을 가진 용감한 인민이라는것을 절감하였으며 스스로 조선민족된 긍지와 자부심이 생기였다.

하지만 어째서 온 나라가 한마음으로 떨쳐나 싸웠으나 독립운동이 실패했으며 수많은 조선인민이 참살당하고 감옥에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는가 하는 물음을 두고서는 며칠동안 모대기지 않을수 없었다.

광진은 우선 그것이 조선인민이 일치단결되지 못한데 있다고 보았다.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이 운동을 지도한다고 소문을 요란스레 냈으나 독립선언서조차 읽지 못하고 제스스로 적들에게 투항하는 그들의 불견실한 무저항주의, 정치적투기행위가 어떻게 이런 거족적인 투쟁을 지도할수 있었겠는가.

국력을 키워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총을 가지고 오는 놈은 총창으로, 대포를 가지고 오는 놈은 대포로 맞서싸운다면 조선은 반드시 독립된다고 믿었다.

3 .1운동이 실패한 가장 주요한 원인은 이 운동을 령도할만 한 혁명적계급과 혁명적당이 없는데 있었다.

3 .1인민봉기는 인민대중이 민족적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이룩하자면 반드시 혁명적당의 령도밑에 옳바른 전략전술을 가지고 투쟁을 조직적으로 벌려나가야 하며 사대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자체의 혁명력량을 튼튼히 마련해야 한다는 심각한 교훈을 남기였다.

하지만 그때 광진은 아직 혁명적계급과 혁명적당의 지도에 대해서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다만 그 《독립선언서》라는것자체가 떨떨하다는것을 절실히 깨닫고있을뿐이였다.

밤을 새워가며 기발도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여기저기 날라다주기도 하면서 그 내용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총칼로 조선을 강점한 악귀같은 일본침략자들에 대해 기껏 한다는 소리가 《오늘 우리들의 임무는 자체로 건설하는데 있을뿐이고 결코 타인을 파괴하는데 있지 않다》느니, 《량심상의 엄숙한 명령으로써 자기가 새로운 운명을 개척할것이요 결코 지난 시기의 원한과 일시적감정으로 남을 미워하거나 배척하는것이 아니다》느니 하는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타인을 파괴하는데 있지 않다》는데 조선을 강점하고 식민지로 만든 일제, 모든 조선적인것을 파괴하는 날강도무리들에 대해 우리는 무저항으로 죽었소 하자는것인가, 또 《지난 시기의 원한으로 남을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않겠다》고 하니 구천에 사무친 원쑤 일제에 대한 원한을 복수하지 않고 어떻게 자기 나라를 찾고 독립을 한단 말인가!

광진은 이러한 생각으로 동무들과 국력을 키우는 문제를 가지고 자주 론쟁했으며 경제를 발전시키는것을 토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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