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2. 신념의 침로

대 결

(2)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쏘, 미, 영 3국외상회의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후 국제적으로 처리하여야 할 일련의 문제들을 토의하면서 조선문제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는데 이 결정에 의하면 조선을 독립국가로 부흥시킬것을 예견하여 우리 나라의 정당, 사회단체들과의 협의하에 민주주의림시정부를 수립하며 조선이 독립국가로서 민주주의적, 자주적발전을 이룩할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쏘, 미, 영, 중 4개 국이 5년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후견을 실시하기로 되여있었다.

이 결정을 둘러싸고 그것을 지지할것인가 반대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온 나라가 죽가마끓듯 하였고 《친탁》과 《반탁》이라는 상반되는 물결이 서로 밀치고 삼키며 거대한 해일마냥 조선의 북과 남을 휩쓸었다.

12월 28일 라지오방송을 통해 공개된 이 결정은 열대성폭풍과도 같은 충격으로 조선반도를 뒤흔들었다.

《친탁》이냐 《반탁》이냐 하는 두가지중에서 어느것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만 한 리성의 움직임도 없었고 감정적여유도 없었다.

김구는 대노하여 조선의 독립은 련합국측이 이미 국제적으로 공약한것이 아니냐, 그런데 이제 와서 후견제라니 이 무슨 잠꼬대같은 망언이냐 하고 분격을 터뜨리였다.

그리고는 이 결정은 《을사5조약》이나 같다고 하면서 《짚신감발》을 하고라도 끝까지 반대하겠다고 《반탁위원회》까지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온 남조선은 3국외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반탁》 운동으로 들끓어올랐다.

김구가 이끌고 서울로 돌아온 상해림시정부에는 1945년 12월 29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조직되였다.

다음날 공포된 《림정포고 제1호》는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행정기관들이 림정의 지도아래로 들어올것을 명령하였다. 격렬한 《반탁》시위가 주야로 서울시가를 휩쓸었다.

사태는 복잡하고 수습할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이런 혼란을 그대로 방치해둔다면 건국의 앞길에는 엄중한 난관이 조성될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후견제를 《신탁통치》와 같은것으로 생각하고있었다.

남조선을 강점한 외세는 이 결정을 뒤집어엎고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후견》을 《신탁》이니, 《위임통치》이니 하면서 역선전하였고 그에 놀라 국내인사들이 이 결정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사태가 남조선에서는 벌써 3국외상회의가 결정을 발표하기 전부터 시작되였다.

국토분렬과 민족분렬의 위기가 닥쳐온것을 간파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결정이 조선의 장래와 관련되는 중대한 정치적문제이므로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부장들과 한번 더 토의한 다음 이 결정에 대한 우리 당의 태도와 립장을 공식표명하기 위하여 주체34(1945)년 12월 31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부장협의회를 여시고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의 본질에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3국외상회의 결정에 대한 옳은 립장과 태도를 가지려면 우선 이 결정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인식하는것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3국외상회의 결정원문을 보면 알수 있지만 이 결정에서 중요한것은 조선을 독립국가로 부흥시키기 위하여 민주주의림시정부를 수립한다는것이라고, 즉 조선을 민주주의독립국가로 부흥발전시킬것을 예견한것이 이 결정의 진의라고 말할수 있다고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여 우리 나라를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하는것은 우리 당의 정치로선이므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에 지적된 조선에 민주주의림시정부를 수립할데 대한 문제는 우리 당의 정치로선에 부합되며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우리 인민의 요구에도 부합된다고 생각한다고 교시하시였다.

계속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총체적으로 보아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은 우리 나라의 통일을 하루속히 실현하고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기 위한것이라고 하시면서 전체 당원들과 각계각층 인민들이 3국외상회의 결정에 대하여 옳은 인식을 가지도록 해설선전사업을 광범히 전개할데 대하여서와 그 결정을 지지하는 정치공세를 전개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조만식은 3국외상회의 결정을 반대함으로써 통일독립과 림시정부수립에 큰 장애로 되였다.

물론 조만식은 철저한 반공, 반쏘분자였다.

그는 공산주의가 하는것은 다 그르고 쏘련이 하는 일은 다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리유의 하나가 그 회의가 쏘련에서 진행된데 있었다.

사실은 전후에 외상들이 돌림으로 회의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 차례가 되여 모스크바에서 한 회의인데 조만식은 그것을 리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반공, 반쏘사상은 화석화된 완고한것이였다.

그는 후견제를 《신탁통치》라고 했고 《신탁통치》를 받으면 쏘련의 식민지가 된다고 하였으며 남조선에서 떠드는 말을 그대로 받아외우면서 그 결정을 《을사5조약》의 재판이라고 공공연히 말하였다.

쏘, 미, 영, 중 4개국의 후견제인데 유독 쏘련의 식민지로만 되겠는가고 따지면 조만식은 쏘련의 수도에서 쏘련의 주장에 의해 채택된 결정이니 쏘련이 좌지우지한다고 우기였다.

위원장이 이러한 립장이다보니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내에서도 서로 견해가 각이하여 방향을 잡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때 김광진은 위대한 수령님의 로선을 높이 받들고 견결히 투쟁을 벌렸다.

주체34(1945)년 12월말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에서는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에 대한 립장과 태도를 명백히 하기 위하여 협의회가 진행되였다.

말이 협의회이지 그것은 조만식에 대한 성토대회와 같은것이였다.

장내에는 귀가 저릴만치 정적이 깃들고 그와 함께 싸늘한 랭기가 흘렀다.

그것은 방안사람들의 각이한 심리에 의해 빚어진것이였다. 그들은 이미 각기 제나름으로 여기 모이게 된 까닭을 해석하고있었으며 그것으로 해서 례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였던것이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였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마치 들끓고있는 평양 한복판이 아니라 그 어떤 산악으로 둘러싸인 호수안에 들어앉은것 같이 바람도 물결도 느낄수 없었다.

회의에서 김광진은 조만식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3국외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면 쏘련의 식민지가 된다고 하는데 쏘련은 약소국가에 대한 원조자이지 결코 식민지를 강탈하려는 침략국가가 아니다. 후견제는 《신탁통치》가 아니라 우리의 독립을 지원해주겠다는것이다. 옳바른 견해를 가지고 3국외상회의 결정을 대하며 옳바른 로선을 따라나가야 한다고 피력하고 규탄도 하였다.

그무렵 조만식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에 대하여 자신은 찬성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으며 그저 중간립장에 서있겠다느니, 남조선에 나가서 그곳 사람들의 생각도 알아보고 대답하겠다느니 하면서 지어 신탁은 《쏘련이 기안했다.》는 말을 듣고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찬성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기 의견도 전혀 근거가 없는것이 아니라고까지 하였다.

김광진을 비롯한 진보적인사들이 조만식의 이러한 반동적, 반민주주의적행위를 그대로 묵과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회의를 열고 3국외상회의 결정의 찬부여하를 빨리 표명하자고 강경히 요구하였던것이다. 그러나 조만식은 《침묵》이요 뭐요 하면서 여전히 반대하였다.

후날 김광진은 자기의 회상수기에서 우선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에서 3국외상회의에 대한 립장과 태도를 결정하기 위한 협의회를 가진데 대해서와 회의결정에 대한 지지와 반대의 의견대립이 심각하였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에 조만식패가 아직도 많았기때문이였다.

조만식은 위원장으로서 주석단에 버티고앉아 여전히 후견제는 《신탁통치》이며 《신탁통치》를 받으면 쏘련의 식민지로 된다고 계속 억지를 부리면서 《을사5조약》과 같은 3국외상회의 결정을 자기는 지지할수 없다고 공언하였다.

회의 첫날 조만식은 《오늘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에 대한 문제를 토론하기로 하였으니 토의해주기 바랍니다.》라고 사회의 말 한마디를 하고는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고 눈을 지리감고 앉아있었다.

이때 김병연(조만식의 졸개)이란자가 벌떡 일어나 백만대군을 무력으로 항복시켜도 필부의 마음을 꺾지 못한다고 고아댔고 박현숙은 자기는 조선녀성의 립장에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일수 없다는것을 명백히 한다고 악을 썼다.

김광진을 선두로 공산당원들은 쏘련군은 해방군이고 후견제는 《신탁통치》가 아니라는것을 설명하고나서 루즈벨트가 조선사람에게는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40년간의 수습기간》이 필요할것이라는 말을 했고 모스크바에서 미국측은 조선에서 쏘미량군이 군정을 실시하며 그것이 끝난 다음 10년동안 쏘, 미, 영, 중 4개국이 《신탁통치》를 하여야 한다고 한 사실을 까밝히면서 조만식일당의 반동적, 반인민적, 반민주주의적태도를 규탄하였다.

김광진의 토론을 지지하여 절대다수가 조만식을 규탄하였다.

회의는 련 사흘이나 계속되였다.

김광진 등은 이제는 3일이나 토론을 했는데 빨리 결정을 짓자고 들이댔다.

그러자 조만식은 움쭉 일어나더니 《이렇게 답변을 끝까지 강요하면 나는 오직 침묵을 지킬따름이요. 조선사람을 속박하는 이 문제를 통과시킬수 없소. 나는 위원장자리를 사임할따름이요.》 하고는 주석단에서 터벅터벅 내려갔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박현숙, 김병연 등이 그뒤를 따랐다.

김광진은 그자들에게 조소를 던지며 어서 나가라고 길을 비켜주고 말하였다.

《력사는 누가 진리의 편인가 똑똑히 가르쳐줄것이요.》

고령의 로인답지 않게 늘 정기가 즈르르하던 조만식의 그 눈망울에서 침통하고 쓸쓸한 좌절의 빛만이 구름장처럼 어른거리였다.

온 육신에 엄습해오는 위축감에 사로잡힌 조만식은 퇴장했다.

광진은 자기를 에워싼 주위의 대기가 무척 청신해진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거리도 그 거리, 하늘도 그 하늘, 날씨도 달라진것이 없고 하늬바람도 바다바람으로 바뀌지도 않았건만 그 어디에서도 대할수 없었던 신선한 인간미가 풍겨나고 그것이 대기까지 신선하게 정화시켜주고있는듯 한 감각을 체험했던것이다.

조만식의 뒤를 따른자들중 일부는 그날로 월남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주체35(1946)년 1월 1일 《신년을 맞이하면서 전국인민에게 고함》을 통하여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에 의하면 38계선을 철페하고 조선에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쏘, 미, 영, 중 4개국이 조선에 대하여 5년동안의 후견제를 실시하기로 되여있다는데 대하여 지적하시면서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튼튼히 결성하고 단결하는가 못하는가 하는데 달려있다는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신년연설을 받아안고서야 북과 남의 전체 조선인민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게 되였으며 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들은 그해 1월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남조선의 민주정당, 단체들도 이에 호응해나섰다. 결국 《반탁》모략은 사실상 풍지박산나고말았다.

주체35(1946)년 1월초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를 비롯하여 정당, 사회단체들이 모두 3국외상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성명을 냈으나 오직 조만식의 민주당과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만은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았다.

《정로》에는 《평남도정치위원 일부 개선. 조만식씨 위원장사임》이라는 기사가 조그마하게 나왔다.

조만식은 민주당 위원장직에서 쫓겨났다. 그는 민주당내에서의 혁신파들에 의해 규탄되고 자리를 내놓지 않을수 없었다.

이리하여 북조선의 제정당, 사회단체와 주요기관, 기업소에서는 모두가 일치하게 3국외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민주주의림시정부수립을 위해 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반동분자들 배제, 당의 혁신강화 도모.》

주체35(1946)년 1월말 《정로》신문에 이러한 기사가 나갈 때까지 김광진과 조만식의 대결은 실로 심각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끝내 물러나고 김광진은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서 새 조선건설의 대로를 주야를 가림없이 분투노력하며 걷게 되였다.

《반탁》의 모두는 이렇게 사라졌다.

조만식은 자기가 김광진과 리주연을 건준(건국준비위원회)과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에 끌어들인것이 최대의 실수였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김광진개인과의 대결로 인한 운명이 아니라 태양의 광휘로운 빛을 거부하고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력사의 반동들에게 차례지는 필연적인 말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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