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2. 신념의 침로

대 결

(1)

 

벌써 두석달이 지나갔다.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 광진자신도 놀랄지경이였다.

려객렬차 하나를 정시운행한다는 알림문이 나붙고 탄광에서는 정상조업을 시작했으며 원산, 신포의 가재미장사들이 화물차방통에 앉아 흥정을 벌리고있다. 청진, 신흥, 의주, 강계, 혜산, 맹산, 곡산 어디를 가나 군이나 면, 리에 인민위원회가 나오고 학교마당에서는 아이들이 뽈을 굴리고 장작이나 김장남새를 실은 달구지가 꼬리를 물고 거리로 들어온다.

이것이 이 나라 풍경이며 양상이다. 얼핏 보건대 비슷비슷하게 들끓고있는것 같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두가지 색갈을 띠고 날을 따라 그 선명도가 높아지고있다.

남쪽에는 운무가 짙고 한소나기 퍼부을 음산한 기운이 덮였다면 북쪽에는 찬란한 해빛아래 모든것을 활짝 드러내놓은 맑은 날씨이다. 습기를 한껏 머금은 구름이 남해로부터 거슬러 태백산쪽으로, 한강을 낀 저지대쪽으로 쏠리고있다.

민족의 위대한 령도자 김일성장군님을 환영하는 평양시군중대회와 평양시내 각계대표들이 베푼 환영연회,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에서 베푼 환영연이 있은 이후 김광진은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우선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학습하고 그대로 집행하는것을 습성화하였다.

인간이 인간의 사랑과 정에 끌려 반하는것이 의리심으로 표현된다면 위인의 뜻과 사상에 끌려 매혹되는것은 신념으로 굳어지는 법이다.

토지개혁의 전권대표로 강동군에 나간 김광진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가르치심대로 토지몰수와 분배를 하여 당시의 강동군에 여러차례 현지지도 나오시였던 그이께 기쁨을 드리였다.

중요산업국유화법령에 따라 도시의 주요공장, 광산, 기업소들을 국유화하는데서도 사소한 편향과 착오가 없이 집행하였다.

바로 이것으로 하여 조만식과의 대결이 있었다.

원래 조만식과의 의견대립은 3, 7제문제에서부터였다.

주체34(1945)년 10월 16일에 열린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제1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 일제와 친일지주의 토지를 일체 몰수하며 3, 7제를 실시하는것을 비롯한 토지문제에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우리 당은 방송과 신문, 구두선전과 직관선전 등 모든 선전선동수단들을 동원하여 이 결정에 대한 해설사업을 대대적으로 벌리였다.

하여 우리 당의 정책과 의도를 똑똑히 알게 된 농민들은 한결같이 3, 7제를 지지하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섰다.

그런데 이무렵 반동분자들의 책동으로 하여 3, 7제실시를 위한 투쟁앞에는 새로운 정황이 조성되게 되였다.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의 책임적인 자리에 틀고앉아있던 친일주구이며 민족반역자인 조만식과 그 일파는 3, 7제의 실시를 반대하고 우리 당의 새 조국건설투쟁을 파탄시킬 목적으로 반동적인 《소작에 관한 규정세칙》이라는것을 조작하여 발표하였던것이다.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 명의로 된 소작세칙은 얼핏보면 공산당에서 제시한 3, 7제결정을 정권기관의 명의로 시책화한듯 한 인상을 주고있지만 그 세칙을 깊이 따지고보면 지주에게 유리하게 만든 점이 많았다.

금비대, 종곡대, 수세 등을 농민에게 부담시킨것이라든가 농민이 응당 가져야 할 짚마저 일부밖에 차지하지 못하게 한것을 비롯하여 모든 조항이 다 구체적으로 따지고 해부해보면 지주에게만 리롭게 된 규정이였다.

여기에 3, 7제를 하되 경우에 따라서는 재래의 방법도 무방하다고 한것만 보아도 이것이 바로 빛좋게 앞에다 3, 7제를 내걸고 뒤에다는 얼마든지 3, 7제를 못하게 할수 있는 큰 구멍을 낸것이다.

결국 빈농들의 리익을 위하는 농민본위의 세칙이라고 했지만 실지로는 지주본위의 시책이였다.

광진은 저도모르게 불끈 주먹을 그러쥐였다.

세칙을 따져볼수록 조만식의 위선적인 허울이 불쾌감을 자아냈다.

(농민들의 무지를 리용해서 교묘하게 지주편을 들어주는게 아니고 무언가. 하긴 그 령감자체가 부농이니. 두루마기입은 십년묵은 구미여우같으니…)

김광진은 《소작에 관한 규정세칙》을 내려보내여 농촌사업에 혼란을 조성하고있는 조만식을 만나 단단히 항의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때 조만식은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과 민주당 당수라는 어마어마한 직관을 얹고 평양과 평안남도일대에서 제왕과도 같은 권한을 행사하고있었다. 꽁무니에 수류탄을 차고 권총과 보총으로 무장한 호위원들이 인민정치위원회청사와 집주변에서 순찰근무를 하거나 신변호위를 하느라고 줄줄이 따라다니는 광경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군 하였다.

서선지방의 지배자가 될것을 꿈꾸는 조만식에게 얼마전에는 서울에서 조만식을 초청하려 한다는 풍설까지 나돌았다.

한때 《이것은 세상에 불고내리는 바람과 비를 막아 민족의 넋을 지켜주는 나의 투구》라고 명명했던 그 말총모자를 쓰고 다니던 조만식은 차림도 놀랄 정도로 수수했다. 나비날개같이 해서 흰 머리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짧은 두루마기에 백고무신을 신었다.

광진이 조만식을 찾아간 날 그는 테가 동글동글한 은테안경을 끼고 앉아 무슨 서류인가를 쓰고있었다. 천대받는 조선농사군들의 체모를 따른다고 오늘은 말총모자대신 머리에 평안도 로친들같이 광목수건을 올려놓고있었다.

《무슨 일로 이 초라한 도청에 왕림하셨소?》

《다름이 아니라 도인민정치위원회에서 발표한 그 소작에 관한 규정세칙에 리해되지 않는 점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지 아니면 무시할수 없는 경력을 가진 이 경제학자의 론거에 어떻게 맞설것인가 여유를 찾는것인지 조만식은 쓰던 서류를 밀어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나이에 비해선 걸음걸이에 저력이 있어보인다. 그무렵 조만식은 방금까지 거세찬 연설을 하고나서도 지친 표정이란 가뭇 찾아볼수 없는 왕성한 혈기로 살아가고있는터였다.

잠시후 조만식은 앉았던 자리로 유유히 돌아오며 광진을 야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표정으로 보아 무엇이 리해되지 않는지 말해보라는 거드름이 짙게 내풍긴다.

《그래, 소작에 관한 규정세칙이 빈농보다 지주의 편에 더 유리하게 작성된것이라는걸 선생은 모른단 말입니까?》

조만식은 그 어떤 도전에도 다 응수할 준비가 되여있다는듯 한 자세로 턱을 건뜻 쳐들고 사발시계를 쓰다듬었다.

《나는 민심을 반영해서 그 세칙을 만들었소. 그래, 해방된 오늘에도 모든 사람들이 대동단결하지 않고 작인이 지주를 치고 로동자가 업주를 치는 류혈전을 벌려야겠소.》

아무리 말이 없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하기를 삼가하는 광진이기로서니 해방의 열광과 건국의욕으로 충만된 사람들의 순결한 넋을 혼동에로 몰아가는 이 오만방자하고 황당한 무정부주의자앞에서 어찌 침묵을 지킬수 있었으랴.

김광진은 굳은 돌이라도 토막낼듯 한 어조로 들이댔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해방된 농민의 기쁨이 어디에 있겠는가. 왜정때와 같은것이 아닌가. 당신이 이런 태도로 나오니 도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의 한 사람인 오윤선은 일제시기처럼 소작료를 받다가 큰 물의를 일으키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결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던 광진은 걸음을 멈추었다.

《단단히 알아두시오! 김일성장군님의 뜻은 곧 법이요. 그것은 우리들의 신조이고 생명선이요. 저 하늘의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울수 없듯이 감히 장군님의 뜻을 어기는자들에게 어떤 운명이 차례지는지 당신도 잘 알거요.》

광진은 쓰거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조만식은 도인민정치위원회에서 언제나 자기의 패가 공산당을 따르는 사람보다 적은것을 두고 한탄하였다.

도인민정치위원회 위원 30여명중 반수이상이 공산진영이고 나머지가 조만식의 패였다.

무슨 회의가 있을 때면 조만식패에는 결석자가 있군 하였고 이미 월남한자도 몇이 있었으니 다수가결로써는 도저히 무슨 문제토의에서도 이길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주장은 언제나 민주주의적인것이 못되여서 도저히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김광진과 조만식은 모르는 사이가 아니였다.

일본류학은 서로 다른 시기에 갔지만 조만식이 조선일보사 사장을 하던 1930년대 초기에 김광진은 경성제국대학과 보성전문학교에 있으면서 문필활동도 했고 그자신이 조만식의 《조선일보》에도 글을 싣군 하였던것이다.

게다가 두사람이 다같이 평안남도(당시는 평양시도 평안남도에 속할 때였다.)사람이였던것이다.

김광진이 평양으로 귀향한 이듬해 조만식은 《매일신보》에 《학도에게 고한다》는 글을 발표하여 조선청년들이 지원병으로 나가서 일제의 대포밥이 되라고 선전하였다.

《매일신보》의 《격려문》에는 수백명의 젊은 조선청년들을 향해 웨치는 조만식의 열기띤 목소리가 울리는듯 했다.

《대동아전쟁은 바야흐로 나날이 처참가렬하여가고있다. 얼마전에 대본영발표로 알게 된 부겐빌도 근해 해공전의 전과같은것은 과연 통쾌무쌍한 일대 쾌사라 할수 있다. 허나 총후를 지키는 우리 국민은 이 혁혁한 황군전과를 다만 통쾌하다고만 생각하고있을 때는 아니다. 더구나 명년부터는 우리 반도에도 광영의 징병제가 실시될것이니 어느 누구보다도 국가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전문이상 학교에서 고등학문안에서 배우고있는 청년학생들로서 어찌 이 광영을 앞두고 그대로 안한히 있을것인가…》

이것이 바로 《학도에게 고한다》(일사보국 나갈 길은 하나다)라는 제명으로 조만식이 세상에 웨친 《격려문》의 서두이다. 《격려문》은 자자구구가 너무도 친일적이여서 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붉어지게 하고 어안이 벙벙해지도록 아연케 만든것이다.

조만식이 신문에 낸 이런 반역적이며 반민족적인 《격려문》을 본 다음부터 김광진은 그를 천하에 둘도 없는 위선자, 애국의 너울을 쓰고 매국을 하는 역적으로 치부하고 그와 절교하였다.

민족의 넋을 지키는 《애국자》로 자처하던 그, 그러다가는 문득 《격려문》을 써서 조선청년학도들을 일본군의 대포밥으로 내몬 그, 소작세칙에 3, 7제라는 조항을 박아넣고 빈농들을 맞아들여 련민의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친일지주들의 악행을 곁들어주는 그, 참으로 조만식은 요지경속에 비치는 그림처럼 조화스러운 사람이여서 대중할수 없는 인물이였다.

광진의 눈가에는 복잡한 사칙문제를 앞에 두었을 때와 같은 착잡한 표정과 무수한 말마디들중에서 선후차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듯 한 표정이 안개처럼 뽀얗게 서리였다.

조만식과 한자리에 앉아 호흡하며 일하자니 아무리 해방의 감격을 안고 사업상 감정을 섞지 않으려 해도 그로서는 그이상 고통이 없었다.

게다가 조만식은 과거를 반성하고 애국의 길로 나가는것이 아니라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시는 건국로선을 사사건건 반대하여 나서는것이였으니 그와의 대결은 언제나 치렬하였다.

그러던 1945년말, 조선반도는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정이 일으킨 정치지진으로 하여 새로운 풍랑속에 말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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