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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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윽고 걸음을 멈춘 황상이 뒤로 돌아섰다.

그 순간 술예도 흠무도 뚝 멈춰섰다.

그들에게로 눈길을 겨눈 황상이 동안을 두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아직 저들의 청을 받아들일수가 없어.》하고 중얼거렸다.

벌써 며칠째 이들은 당나라에 가있는 계루왕을 대신하여 자기들이 숙위로 가겠다고 조르고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노리는 당나라것들의 음모를 짓부시려고 강심을 먹고간 태자이니 돌아오라고 해서 돌아올것도 아니거니와 또 지금 불러와서도 안될것이다.

지금 태자만큼 당나라의 형편에 환한 사람도 없거니와 그보다 총명한 사람도 없으니 이번 싸움이 끝난 다음 형세를 보아가며 불러들여도 좋을것이다.

술예와 흠무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고 다시 돌아선 황상은 스적스적 걸음을 옮기였다.

그의 두눈이 또다시 분노로 번쩍였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뭐, 칙지절선로말갈사라구?》라는 부르짖음이 울려나왔다.

그때가 열세해전이였다.

그해 황상은 성무고황제의 태자로서 발해를 찾아온 당나라사신과 회담탁을 마주했었다.

당나라사신의 이름은 최흔이고 그의 관직은 홍려(대외관계의 일을 맡은 관청)의 우두머리인 경이였다.

회담장의 분위기는 자못 랭랭하였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은 발해라면 처음부터 덮어놓고 적대시하던 적국인 당나라의 사신을 마주했기때문이였다.

발해가 수천년의 력사와 문명을 자랑하는 박달겨레의 강대국임을 미워하던 나머지 우매한 말갈인들이 세운듯 억지로 말갈이라고 깎아내리던 당나라가 제먼저 화친코저 사신을 보내온것도 못미더운 일이지만 국서에서 발해를 친근한 이웃으로 존중하겠다니 더욱 믿지 못할 일이였다.

그때 성무고황제는 제먼저 허리를 굽히고 사신을 보내오지 않으면 안되였던 당나라의 속심을 꿰뚫고있었다.

남의 강토를 마구 앗아가진것으로 하여 해족이며 거란족, 돌궐 같은 이웃종족들과의 싸움에 지친 당나라는 상투적으로 써오던 속임수를 발해와도 써먹으려 했던것이다.

그게 어떤 속임수인지를 환히 꿰뚫고있었기에 성무고황제는 태자에게 그것들이 어떤 제의를 해올것이니 즉석에서 일축해버리라고 분부했었다.

과연 회담탁에 나앉자 최흔은 저희 임금의 부탁이라면서 발해가 대군을 일으켜 거란과 해족의 뒤통수를 쳐달라고, 그러면 국서에 보내여온대로 다시는 발해를 말갈이라 헐뜯지도 않고 그 은혜를 영원한 화친으로 갚겠다는것이였다.

이웃들과 화목하게 살기 위해 애쓰는 박달겨레와 달리 남을 부추겨 남을 치게 하고 그들이 맞붙어 싸우다가 지칠 때 다진 언약을 헌신짝처럼 차던지고 그 둘을 다 쳐눕히여 제 욕심을 챙기는것이 당나라가 조상대대로 써오는 술책이였다.

성무고황제의 덕으로 적국의 속심을 환히 알고나선 태자는 최흔에게 우리는 대대로 이웃들과 화목하게 살기 위해 힘써왔고 남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 한 누구에게도 돌멩이 한개 던져본적 없는 그 전례를 절대로 어기지 않을것이라는 명쾌한 대답으로 당나라사신들을 보기좋게 눌러버렸다.

저희들의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그 앙갚음으로 최흔은 빈손으로 돌아가는 길에 더러운 속심을 그대로 드러내고야말았다.

고려후국의 환산(료동반도의 려순에 있는 산)기슭에 이른 최흔은 그곳에 두개의 우물을 파게 한 다음 그옆의 큰 돌에다 《칙지절선로말갈사》 다시말하여 《황명으로 말갈을 위로하기 위하여 파견되여온 사신》이라는 너절한 글을 새기였다.

회담탁에 나앉아서는 거듭거듭 발해를 두번다시 말갈이라 깎아내리지 않겠다는 저희 조정의 뜻을 알리고서는 돌아서기 바쁘게 이런 못된 짓을 저지른것은 비단 최흔의 혼자생각이 아닌 바로 당나라것들의 본심이였다.

일부러 우물을 파놓아 쉬여가던 길손들이 그 자리의 너절한 글을 보게 함으로써 발해사람들을 분노케 한 이 하나만을 통해서도 당나라와의 화친을 기대한다는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수 있지 않은가.

《아, 어떻게 해야 이 원쑤를 갚겠는지…

냅다 밀고나가 한이나 풀었으면… 그것들때문에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것이 아닌가.》

황상은 의분이 끓어올라 이를 사려물었다.

《아, 해야 할 일은 많고많은데…》

강대국의 체모에 맞게 도읍을 더 크게 꾸려야 하고 하늘을 살피는 첨성대도 일떠세우고 태묘며 사직단도 보다 웅장하게 고쳐지어야 했다.

어찌 그뿐이랴.

도읍에서 동서남북의 모든 고을들로 통하는 큰길도 내야 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국고도 넘쳐나게 해야 했다.

허나 틈만 생기면 발해를 어째보려 독을 쓰는 그 못된 당나라때문에 나라방비에 온 나라가 전심해야 하다보니 부국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있었다.

《황상마마.》하고 등뒤에서 울리는 흠무의 부름소리에 황상은 속이 좋지 않아졌다.

조용히 혼자있고싶은데…

두눈을 치뜬 황상이 천천히 돌아섰다.

(?!…)

뜻밖에도 흠무와 술예앞에 갑옷우에 전포를 덧입은 군사가 투구를 손에 받쳐들고 군례를 차리고있었다. 처음보는 군사였다.

이런데까지 찾아온걸 보면 대단히 긴요한 소식을 가져온 모양이였다.

《넌 누구뇨?》

군사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황상마마, 소신은 반안왕의 수하장수 유격장군(5품이하의 무관벼슬) 양소라 하오이다. 전하가 황상께 올리는 상주문을 가지고 왔소이다.》

황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눈에 피발이 지고 얼굴에 피로가 쌓인걸 보면 유격장군이 밤낮으로 말을 달려온것 같았다.

《일어나라.》

황상의 분부에 양소가 가져온 가죽주머니를 머리우로 쳐들었다.

흠무가 얼른 가죽주머니를 받아다 황상에게 올리였다.

황상이 가죽주머니에서 글이 씌여진 흰 비단천을 끄집어내자 양소가 머리를 떨구었다.

곧 그의 이마며 목덜미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돋았다.

지금 양소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싶은 심정이였다.

아, 나는 왜 골라골라 제일 못된 소식을 나라님께 전해야 하는가 하고 그가 속으로 한탄하는데 《유격장군은 돌아가보라.》하는 황상의 음성이 울리였다.

어깨가 축 처진 양소가 물러가니 황상이 말했다.

《죽을 때까지 깨우치는것이 있다더니만… 제정신을 잃은자가 갈길이란 나라를 등지는 그 길뿐이로구나.》

몹시 놀란 흠무가 황상을 쳐다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이까?》

황상은 대답대신 움켜쥐였던 비단천을 내밀었다.

비단천을 받아들고 급히 글줄을 더듬던 흠무가 부르짖었다.

《아니, 이럴수 없소이다. 삼촌이 지은 죄가 두려워 도망치다니…》

그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술예가 흠무의 손에서 비단천을 집어들었다.

인차 그도 고개를 저었다.

《둘째형님이?!… 아니, 그럴수 없소이다. 이건 모함이오이다.》

황상이 비분에 몸을 떠는 술예의 어깨를 꽉 움켜쥐였다.

《인정하기엔 괴롭지만 그건 사실이다.》

황상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이건 나라의 수치이다. 더우기 우리 집안에서 이런 상역적이 나왔으니 어찌 참을수 있단 말이냐.》

가슴을 두드리는 황상앞에서 흠무는 고개를 떨구며 치를 떨었다.

삼촌이라는 사람이 무엇이 부족해서 적국으로 살길을 찾아 도망을 친단 말인가. 그래 그에게는 부모가 묻혀있는 고향도 저를 친근하게 대해주는 혈육도 동족도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뭐나 다 누릴수 있는 더할바없이 존귀한 황족도 다 싫고 예로부터 우리를 해쳐온 당나라가 그리도 좋아보였단 말인가. 어쩌면 머리통이 그렇게도 썩어버렸을가.

황상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흠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부르짖었다.

《그가 누구든 제 나라와 숨결을 달리한다면 문예처럼 되는 법이다.》

일은 이렇게 된것이였다.

급히 말을 몰아 불녈의 본영에 이른 반안왕은 즉시 문예를 파면시키라는 어명을 전하였다.

문예를 파면시킨 반안왕은 그가 황족이라는 점만 생각하여 옥에 잡아가두지 않았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아무리 도성을 멀리 나가있는 군장이라 할지라도 이런 큰 국사를 뒤엎고는 목이 무사치 못하다는것을 너무도 늦게야 깨달은 문예는 그날 밤 제놈과 배가 맞아돌아가던 부하 몇명을 데리고 황급히 줄행랑을 치였다.

다음날에야 당나라로 가야 살수 있기에 떠나간 자기를 찾지 말라는 문예가 남긴 글쪽지를 보고 사태를 알아차린 반안왕은 즉시 수하장수를 불러 이 사실을 황상에게 알리는 동시에 군사를 풀어 문예를 따라가 잡도록 하였다.

그러나 날랜 준마를 타고 달아난 문예를 따라가 잡겠는지는 두고보아야 알노릇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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