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40 회)

11. 왕청문

 

(5)

 

량세봉은 강서명의 주장에 공감이 컸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뜻높은 애국지사의 넋이고 지향이며 량심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스승의 주장을 따르기로 하고 두달간에 걸쳐 벌어진 물끓듯 한 론쟁에서 그냥 입을 기워맨듯 량편의 주의주장을 듣기만 하였던것이다. 그런데 끝내 자기가 그렇게도 걱정하고 우려하던 독립운동과 무장부대의 분렬이라는 국한의 결과가 현실로 육박해온것이다.

강서명은 처절한 빛이 서린 옛 제자의 옆모습을 찬찬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사태를 되돌려세울수는 없을것 같네. 하지만 이보게 벽해, 사태가 확대되는걸 난 바라지 않네. 흑하사변을 생각해보라구. 세상에 조선사람망신을 시키고 일제놈들이 바라는대로 반일세력이 뿔뿔이 갈라지지 않았나. 그러니 새로운 불집이 터지지 않도록 자중해야 하네. 만약 그러지 않으면 만주에서 우리 독립운동이 주저앉고말걸세. 만주에 있는 조선백성들이 우리를 지켜보고있다는것을 알아야 하네. 난 이게 걱정일세.

강서명은 자못 침통한 어조로 일깨워주었다.

《예. 제 생각에도 새로운 불집이 터질가봐 속이 조마조마합니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일제를 때려부시자면 당파와 주의주장을 초월하여 독립운동에 나선 각당, 각파 모든 인사들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하신 말씀의 참뜻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지금이야말로 힘을 합쳐야 할 땐데 갈라지게 되였으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그분께서 계셨더라면 일이 이렇게 험하게 번져지지 않았을거네. 김형직선생님도 오동진총영장도… 독립운동의 기둥들이 사라져가니 독립운동이 참 어수선해졌네.

벽해 이 사람, 임자가 혁명당 중앙위원회를 주관하여볼 생각이 없나? 지금 혁명당 중앙위원회 중진들과 마주앉아보면 너무 대진내가 나는 사람들일세. 이제는 세대교체가 되여야 할 땐데… 난 임자를 이렇게 만나고보면 언제나 새힘이 솟고 머리가 거뜬해지네. 김형직선생님께서 어찌하여 하많은 사람들속에서 독립운동에 나선지 얼마 안되는 임자하구 의형제를 맺었는가 하는 그 의미가 실감이 가지.

임자가 혁명당 중앙위원회 키를 잡으면 우리 독립운동에 무게가 더 실리고 신선한 진보의 바람이 일것만 같네. 어떤가 벽해? 이건 우리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망일세.》

강서명은 량세봉의 손을 끌어다가 잡았다.

량세봉은 얼른 무릎을 세워 강서명의 두손을 마주잡았다.

강서명은 그의 손등을 쓰다듬어주면서 간곡한 눈길로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량세봉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에 대한 선생님의 기대와 믿음은 정말로 고맙고 가슴이 더워집니다. 그런데 아직은… 아니, 저는 독립운동을 이끌만 한 재목감이 못됩니다. 정사를 다룰만 한 준비가 안되였습니다. 저에게는 지금 총과 칼이 맞습니다.》

그 소리에 강서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한숨을 내그었다.

《그래, 임자의 금언 내 잊지 않고있지. 열사람의 제갈량보다 한명의 병사가 더 필요한 때라는 말. 하지만 지금은…》

량세봉은 커다란 기대가 어린 옛 스승의 눈길을 슬그머니 외면하였다.

그런데 강연희의 눈길이 그를 좇고있었다. 그 녀자는 방 한구석에 벽을 기대고 앉아 바느질을 하다가 량세봉쪽으로 고개를 들고 스스럼없이 말을 하였다.

아버님께서 이따금 오빠의 말씀을 하시군 해요. 진심이라는것을 알아주세요. 그리고 저의 판단에도 우리 아버지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것 같습니다. 우리 아버님의 말씀을 깊이 헤아려주시기를 저도 바랍니다.》

그 녀자는 량세봉에게 진정을 고여 부탁하였다.

량세봉은 강연희의 눈길을 피해서 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지 않는다.

량세봉의 인간됨을 알고 거기에 매혹되여있는 여러 지기들이 이러루한 권고를 하여온다. 그들은 오동진이 령어의 몸이 된 그때부터 계속 량세봉을 조선독립군의 수위에 올려세워야 한다고 뒤공론까지 벌려가면서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량세봉은 언제나 그의 첫 독립군의 상급이였던 최시흥대장의 간곡한 당부를 생각하군 하였다.

《천놈의 왜적을 쓸어눕혀라. 그러면 왜놈들이 망하는 날이 올게다!》

그날 내가 어떻게 맹세를 다지였던가. 천놈의 왜적을 쓸어눕히리라, 그래서 왜놈들이 망하는 날을 앞당겨오리라!

아직은 멀었다. 조선독립운동에서 내가 맡은 최상의 임무는 천놈의 왜적을 족치는것이다.

그는 강서명의 두손에 팔을 잡힌채 조용히 대답하였다.

《선생님, 선생님과 강연희비서의 믿음과 고무에 그저 고맙고 송구스러울뿐입니다. 그런데 용서하여주십시오. 이 량세봉은 선생님께 다시금 맹세를 드립니다. 저는 천놈의 왜적의 목을 친 다음에 다른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이건 저를 이 대오에 세워주신 천마산무장대의 최시흥대장이 저에게 준 과업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저에게 그러루한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임무를 우리의 신성한 독립운동이, 우리의 민족이 저에게 내린 평생의 과제라고 페부에 새기고있습니다.》

강서명은 그의 저력있는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이였다.

《그래, 벽해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난 더 권고하진 않겠네. 우리가 잡은 무장이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독립운동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걸세.

난 여전히 벽해를 믿고싶네.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또 후련해지는구만. 광복의 그날이 눈에 보이는것 같애.

벽해는 이제 한두해 지나면 천놈의 왜적의 목을 딸것 같네. 그러니 나도 기다려보겠네.》

《고맙습니다, 선생님!》

량세봉은 강서명이 모처럼 꺼내놓은 제의를 거두자 이렇게 말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참 선생님, 언제부터인가 선생님과 의논하자고 별러왔는데 차일피일 미루어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루어온 얘기? 그게 뭔데? 내앞에서 서슴을게 무언가? 어서 말하게.》

《다름이아니라 저 강연희비서에 대한 이야기올시다. 저렇게 그냥 슬하에 끼고계시겠습니까?》

그 소리에 강서명이 어설픈 미소를 짓고 나직이 한숨을 내그었다. 그때 강연희가 《오빠!》하고 더 말을 꺼내지 못하게 눈을 흘기며 자리에서 선뜻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강서명이 허허 김빠진 웃음을 터쳤다.

《나도 내옆에서 서른을 넘긴 딸을 볼 때면 가슴이 알알하구만. 경신년 대토벌에 숨이 꺼진 저애 어머니가 구천에서 날 얼마나 욕하겠나. 그런데 그애가 통 말을 들어줘야지.》

《그런데 어떻게 되여 강연희비서가 안팎으로 절색인데 혼기를 놓치게 하시였습니까?》

《엉? 그걸 임자가 모르고있나?》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허허… 그래? 그러니 벽해도 춘부장어른으로부터 들어둔 소리가 없었던 모양이구만.》

《무슨 말씀입니까?》

《으흠… 그분이 끝내 그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구만. 이보게, 저애가 혼기를 놓친건 임자, 벽해때문일세.》

《예? 저때문이라니요? 아, 제가 어떻게 했다는겁니까?》

량세봉은 강서명의 허거픈 미소가 어린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때없이 속이 철렁해지였다. 어찌하여 강연희가 혼기를 놓친것이 나때문이란 말인가.

무슨 큰일이 나 몰래 있었던게 틀림없다. 아니면 내가 그에게 무슨 죄된 일을 했던것이 틀림없다. 강서명의 말이니 캐여볼 여지가 없다. 그게 무얼가?

강서명의 창백한 얼굴에 또다시 서글픈 미소가 떠돌았다.

《허… 세월도 멀리 지나갔으니 이제는 옛말이 됐지.

뭐, 그 옛말을 못할것두 없네. 이러했네. 그때가 생각나나? 내가 철산을 떠나올 때 임자와 춘부장을 우리 집에 불러 리별주를 들던 때 말일세.》

《예, 생각나고말고요. 제가 어찌 그때 일을 잊을수 있겠습니까. 전 아직도 그때 있었던 일들을… 선생님의 목소리며 손세며 눈빛이며 어느 하나도 잊어본적이 없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주신 책들은 아직도 저의 집 가보로 되여 우리 동생들이 읽고있으며 이 룡천검도 저와 함께 이제는 여러해 전투장으로 함께 출전하군 합니다. 저는 정말 한시도 그때 선생님께서 들려주시던 뜻과 기개가 높은 말씀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있습니다.》

량세봉이 감회깊은 어조로 나직이 부르짖었다. 량세봉의 진지한 말에 강서명도 감회가 깊어져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참 나도 그때 일을 잊을수가 없다네. 헌데 말일세. 그날 내가 춘부장어른께 말씀을 드렸지. 우리 연희를 임자와 짝을 무어주자고 말일세.》

《예?! 저의 아버님께요? 원, 저런… 연희아씨와 저를 말입니까? 제가 연희비서의 짝으로 물망에 오르다니, 그게 될법 한 일입니까.》

량세봉은 처음 듣는 꿈같은 소리에 덴겁하여 눈을 크게 뜨고 강서명의 말을 받았다.

《벽해, 왜 그렇게 놀라나? 하긴 그때 춘부장어르신도 몹시 놀라더구만. 그런데 끝내 어르신께서 사양하셨지. 난 그때 사실 우리 연희의 의향도 물어보고 우리 딸을 맡아달라고 했는데 이렇게저렇게 걱정스러운 말을 하시더구만. 그러니 일은 그렇게 된거라네.

그런데 세상에 벽해같은 대장부를 어데서 또 골라낸단 말인가? 만주에 건너와서 청혼은 여기저기서 들어왔는데 저애 눈에 찰리가 만무하지. 저애가 사내로 세워놓은 기준은 벽해 자네일세. 그래서 이래저래 해를 넘겨서 이제는 서른고개도 넘게 된거라네. 허허… 옛말일세.》

말끝에 강서명은 또 허거프게 웃었다.

소리없는 그 웃음이 량세봉의 마음에 아프게 감겨들었다.

강서명부녀의 지극한 기대와 사랑이 가슴 가득 더운 눈물이 차들게 하였다.

량세봉은 고마움에 넘쳐 속죄를 하듯 진심을 고여 인사를 드렸다.

《예… 그런데 저는 여적까지 어떻게 되여 그런 일을 모르고 지냈을가요? 저 연희비서가 저를 정이 뚝 떨어지는 사내라고 얼마나 욕을 하였겠습니까. 하기는 저도 그때에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아마 펄쩍 뛰고 삼십륙계 줄행랑을 놓았을겁니다. 서당지기 량세봉이 고명한 훈장님의 문명개화된 아씨님과 어방이나 되였겠습니까.》

《허허, 하지만 나나 우리 딸은 임자의 오늘을 그때 벌써 내다보았던거라네. 나무될건 떡잎때부터 안다고 하지 않나.》

《그런즉 이제라도 제가 저때문에 빚어진 강연희비서의 현 신상에 보상을 해야 되겠습니다. 정도 엎음갚음이라는데 제가 우리 연희비서의 일에 더이상 무관한다면 어떻게 사람구실이 되겠습니까. 제 이미 점찍어온 대장부들이 있습니다. 말씀드리랍니까?》

《허허. 이왕지사는 덮어두고 들어보세.》

《저… 저의 글방친구들입니다. 4중대장 석태무.》

《석태무? 참, 그 사람은 왜 여적 외짝이라던가?》

《너무 어린시절에 천마산무장대에 들어가 지금까지 줄곧 전장터에서 세월을 보내왔으니 어떻게 색시건사를 할수 있었겠습니까.》

《그래, 딴은 그렇지. 우리의 독립전쟁이 참 기막힌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어가네. 석태무야 나도 글방시절부터 잘 알지. 임자의 짝패가 돼서 쫓아다니던것도 잊지 않고있네. 지금 중대장노릇을 하는걸 보면 사람이 강하고 손탁도 세서 믿음이 가는 사람이지.》

《헌데 이번에 그 사람이 리진택총사령을 따라갔습니다.》

량세봉이 너무 실망스러워서 입을 다시였다.

《이보게, 사람평가는 그렇게 단순하게 하는게 아닐세. 그 사람은 화성의숙에 가서 중대장을 할 때 김형직선생님의 자제분이랑 자주 만났다고 하더구만. 거기서 공산주의바람을 단단히 쐬고 온것 같애. 그러니 좀더 지켜보세. 나는 석태무의 사람됨도 크게 믿고있네.》

《한명 사위후보자가 또 있습니다.》

《음, 최현수 말인가?》

《예.》

《음… 사람은 얌전하게 생겼는데…》

강서명은 길게 말꼬리를 뽑다가 아퀴를 짓지 않고 넘어갔다.

《처가 결혼한지 두해 지나 왜놈한테 욕보고 잘못되였답니다. 그후로 홀로 살아오고있습니다.》

《나도 들은바가 있네. 하여튼 벽해, 마음을 써줘서 두루두루 고맙네. 우리 연희가 이따금 벽해소리를 해주네. 벽해가 독립운동의 거목으로 솟아오른게 무척 기쁘다나. 사람의 마음이란 참 요지경이라니까. 난 그애가 자식 거느린 벽해를 만나면 어쩌랴싶었는데 쓸데없는 로파심이였지. 그애 마음이 수정같이 맑고 바다처럼 깊은게 내 마음에 들어. 우리 연희를 누이동생처럼 거들어주게.》

두사람의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연희가 우동 세그릇에다가 술 한병을 받아가지고 왔다.

강서명은 자기는 술을 못하겠으니 벽해가 홀로라도 마시라고 그냥 권해서 량세봉은 하는수없이 강연희가 따라주는 술 몇잔을 받고 함께 우동을 들었다. 강서명은 헤여질 때에도 벽해가 나서서 빨리 사태가 더 험하게 번져지지 않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량세봉은 옛 스승의 스러져가는 자태를 들여다보는듯싶어 한동안 구슬픈 마음을 금치 못하다가 중대로 떠났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쫓기던 량세봉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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