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39 회)

11. 왕청문

 

(4)

 

회의가 끝난 후 두 세력은 숨을 가라앉히고있었다.

외견상 왕청문에는 정적이 드리워져있었다.

회의소식이 한입두입 건너 퍼져 사람들은 긴장해졌다. 무엇인가 상서롭지 않은것을 예감하며 불안속에 잠겨있었다.

량세봉은 회의에 독립군의 중진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몇번 자리에서 일어나 고인허의 립장을 지지하여 토론하고는 자리에 앉아 두쪽의 립장에 귀를 기울이였으나 불길한 그 무엇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듯싶었다.

어느날 오후 만사가 시들해진 량세봉은 자기가 집행하게 된 훈련지도를 부중대장에게 위임하고는 자기 방에 웅크리고앉아 고민에 빠져들었다.

모여앉기만 하면 개개명창들인 독립군원로들이라 자처하는 인물들이 목에 피대를 세워 부르짖던 주장들이 귀가 멍멍하게 되살아났다.

어느 주장이 옳으냐?

이 소리 들어보면 이 소리가 옳은것 같고 저 소리 들어보면 그 소리에도 일리가 있는것 같았다.

크게는 두갈래로 갈라져 이마받이 하는데 나름대로 명분이 서있는것 같았다.

분명한것은 이제는 의견상이가 분렬로 번져지게 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이였다.

있어서는 안되는 비극적인 충돌을 피할수는 없을가?

흑하사변이라는 독립운동권에서 벌어졌던 류혈적인 대결도 이렇게 시작된것이 아니였던가.

량세봉은 토벽에 허리를 붙이고 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는 고개를 늘어뜨리고 괴로운 상념에 빠져들었다. 어떤 때는 번열증에 걸리기라도 한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지 않은 방을 급하게 오락가락하기도 하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선두에 서시여 모처럼 이루어주신 민족주의세력의 단합이 또다시 깨질수 있다는 위구심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참으로 우리 독립운동이 오늘처럼 국민부라는 단일한 정치세력으로 집결하고 하나의 기발을 추켜든 무장부대를 만들기까지는 얼마나 쓰라린 곡절을 이겨내며 왔던가.

이 길에서 량심적인 독립운동가들이 피와 땀을 아끼지 않고 수천수만리 림해설원을 헤쳐왔다.

바로 김형직선생님께서 그렇게 한생을 깡그리 불태워 그 간고하고도 험한 길에서 얻은 병마로 너무도 때이르게 돌아가시지 않았던가.

량세봉은 김형직선생님이 그리워졌다.

선생님께서 제일 미워하고 타매하시는것이 분렬이고 당파싸움이였다.

제일 기뻐하시는것이 단합이고 화목이였다.

우선 뭉치자, 독립의 기치밑에 뭉쳐 싸우자! 이것이 독립운동에 대한 김형직선생님의 지론이고 그분께서 독립운동에 남기신 유지이다.

아마도 그분께서 지금 계신다면 이 엄중한 사태를 슬기롭게 바로잡아주시였을것이다.

아, 이 량세봉은 언제 가면 그분의 뜻과 열을 담은 제 목소리를 내겠는가?

처절하고도 안타까움속에 김형직선생님을 모시고 살아온 그 행복하고 꿈같은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으로 흘러갔다.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 그 고결한 추억에는 일찌기 왜놈의 밀정으로 몰렸다가 말그대로 화가 복이 되여 선생님을 처음 뵙고 그이의 가르치심에 황홀해지던 일이며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들이 생길 때면 그분의 가르치심을 받고저 팔도구와 무송의 댁으로 달려가던 일이며 무시로 찾아드는 자신을 언제나 반기시며 심원한 독립운동의 원칙과 전략과 전술을 가르쳐주시고 하해같은 사랑을 안겨주시던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인자한 모습도 자리잡고있었다.

김형직선생님과 혈육의 정으로 얽혀들던 일들은 지금도 어제런듯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미소가 령롱하다.

더듬을수록 가슴뜨거워지는 추억이고 그리움이였다.

지금 그분께서 계시지 않으니 독립운동내부가 또 소란스러워지고 두쪽으로 갈라질 위험이 눈앞에 박두하였다. 가슴이 저려들고 마음이 급해지는 일인데 자기의 지위나 발언권을 가지고서는 속수무책이여서 생각할수록 막막하고 속에 재가 찰뿐이였다.

회의기간에 량세봉은 두 세력의 격렬한 싸움이 미구에 분렬로 이어질수 있다는것을 생각할 때마다 노상 그분께서 지금 이자리에 계신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나가시겠는가 생각하군 하였다.

그 누구들보다도 현정세속에서 공산세력의 우산밑으로 들어가겠다는 제안을 내놓음으로써 파국적인 정황을 만든 리진택총사령과 그의 추종세력이 미워졌다.

그러나 그는 리진택의 희생적인 투쟁정신과 전투장에서 보여준 과단성있는 지휘능력을 깊이 신뢰하여왔으므로 속으로 터져나오는 울화를 꾹 누르고 일관하게 입을 다물고있었다.

문득 문두드리는 소리에 뒤엉킨 구름처럼 종잡을수 없던 사색이 중단되였다.

《들어오시오.》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방문이 홱 열리더니 더운 바람을 몰고 석태무중대장이 문턱을 넘어왔다.

《뭘하오? 대원들은 칼춤 추느라고 비지땀을 짜고있는데.》

《보다싶이… 고민중이요.》

《제기랄, 고민은 뭘…》

석태무는 량세봉의 흐려져있는 기색을 힐끔 일별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안으로 문부터 잠그어놓았다.

그는 량세봉의 맞은편에 와서 걸상을 끌어당기고 앉았다.

량세봉은 빗장까지 지르고 달려든 친구가 무슨 굉장한 비밀을 들고 온것 같아서 속으로 은근히 긴장을 느끼면서도 느슨하게 웃어보였다.

《문부터 잠글 때에는 임자가 무슨 비밀회동이라도 하자는건가? 외인들의 눈을 피할 일이라면 모반이라도 할셈이 아닌가?》

량세봉은 이미 들어둔 말도 있어 이렇게 빈정거렸다.

《제기랄, 귀신 한가지로군. 모반이면 모반이지.》

《자네 정말 리진택총사령과 같이 공산세력쪽에 넘어가겠다는건가?》

량세봉은 엷게 떠올린 웃음을 지워버리고 랭담한 어조로 따지고 들었다.

그는 이즈막에 관전현일대를 기본활동무대로 하고 국경일대에서 왜놈들과의 격전을 치렬하게 벌려온 석태무가 은근히 리진택을 자주 찾아다니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문까지 닫아걸고 들어선 석태무가 무슨 말거리를 안고 들어섰겠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량형, 난 량형이 이번 회의에서 몇마디 발언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있소. 내 듣고싶은것은 량형의 립장이요.》

《나의 립장?!…》

량세봉은 긴장해진 석태무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며 반문하였다.

《좋아, 내 먼저 알고싶은것은 석중대장 당신의 립장이요. 회의소식이야 다 들었겠지?》

《아무렴, 다 들었지. 난 자신을 속이고싶지 않네. 그리구 량형을 속일수도 없구. 나의 량심이야 총사령도 지지하고있고 참모장도 기울어지고…》

《참모장도 지지한다? 그럼 어느 길을 갈셈인가? 에돌지 말게.》

《량심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야지.》

《량심이 가리키는 길?! 흥미있소. 그렇다면 당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비량심의 길을 간다는거겠소? 명백히 꺼내놓소.》

《아니, 나는 량형의 립장을 알고싶소. 먼저 대답을 주오.》

《내 립장? 난 누구의 지도를 받는다는것을 구태여 상정시킬 때가 아니라는거요. 난 이쪽이요 저쪽이요 편가름을 하는것이 질색이요. 어떻게 된 단합인데 이걸 깨버린단 말이요.

당신은 김형직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소? 뭉치자, 우선 뭉치자. 뭉쳐가지고 일본놈과 항전을 하자. 바로 이거란 말이요.

우리 독립군이 선생님의 뜻에 따라 하나의 기발밑에 단합되고 우리 무장부대도 이제는 하나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게 됐는데 이제 와서 딴 처마밑으로 간단 말이요? 안 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결국 분렬이지. 김형직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오늘 선생님의 유지를 어기는 일에 난 타협을 할수 없소.》

《량형, 놀랍소.

김형직선생님께서 생전에 우리 나라 민족주의운동도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고 얼마나 간곡하게 가르쳐주셨소.

량형이야말로 우리 독립군에 늦게 참가했으나 별처럼 빛을 뿌리는 신진이며 때묻지 않은 애국자요. 그래서 김형직선생님께서 당신을 의형제로 삼고 그렇게도 믿어주신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사상은 그리도 보수적이요? 우리 혁명군도 그냥 독립군으로 부르자고 고집하더니 량형, 나와 함께 공산세력쪽으로 갑세.》

《안돼, 그건 분렬이야. 그래선 안돼! 우선 뭉치자는 김형직선생님의 지론에 대한 배신이야. 난 분렬은 결사반대요.》

《이미 총사령은 결심하였소.》

《결심이라니?!》

《민족주의두령들이 여전히 고불통을 물고 고집을 하고있소. 그래서 자기를 따르는 세력을 끌고 공산세력의 밑으로 가겠다는거요.》

《뭐라구?!》

량세봉이 무섭게 격노해서 꽥 소리치며 허리에 두팔을 거느즉이 올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석태무도 맞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사람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성난 황소들처럼 뿔을 세우고 가쁜숨을 씩씩거렸다.

량세봉이 씹어뱉듯 분연히 부르짖었다.

《석태무! 그건 참말로 모반이야. 우리 독립운동에 대한 배신이야. 력사가, 백성들이 용서할것 같은가?!》

《천만에! 력사는 누가 옳았는지 공정하게 판결할거네. 그래 나와 함께 가겠나?》

《아니! 나도 안 갈것이며 임자도 못 가게 하겠네.》

《그렇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쓰겠네.… 분렬은 멸망이야. 석태무, 정 가겠으면 내 목을 치고 가게. 그전에는 못 가!》

《량형, 눈을 크게 뜨오. 세계를 돌아보란 말이요. 민족주의로선으로는 빼앗긴 나라를 구원하지 못하오. 그래 일본놈들을 몰아내고 임금나라를 다시 세우자는것이 우리 독립운동의 목표로 되여있는데 우리같은 농사군자식들이 또 그 지긋지긋한 봉건의 질곡속에서 지주놈의 소작살이를 다시 해야 하겠는가. 난 티끌만치도 그럴 생각이 없소.》

석태무는 문을 잠갔던 걸쇠를 절꺽 제끼고 출입문을 홱 열고 나가버렸다.

량세봉은 그가 나가버린 문쪽을 구멍을 낼듯 쏘아보며 한동안 방 한가운데 장승처럼 우뚝 버티고 서있었다. 가슴속에서는 친구에 대한 분노가 굴뚝처럼 뻗어올랐다. 그리고 속 한구석으로는 그렇게도 믿어마지않았고 사랑해왔던 고향의 친구가 자기곁을 떠나는 가슴아픈 리별에 속이 쓰리기 그지없었다.

다음날 왕청문에서 벼락이 터지고야말았다.

새벽에 리진택이 무장부대의 적지 않은 력량을 끌고 조선혁명당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여러명의 측근들까지 데리고 사라졌던것이다.

거기에는 석태무와 그의 중대원 120여명도 있었다.

석태무중대에서 그를 따라가기를 거절한 몇명의 지휘관들과 대원들이 량세봉을 찾아왔다.

량세봉은 분노에 앞서 커다란 비애와 허탈감에 휩싸였다. 그는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장 고인허를 찾아갔다가 거기에 독립군원로들이 모여들어 당장 리진택일파와 그를 끌어당긴 공산세력패거리들을 모조리 쳐없애야 한다고 윽윽대는것을 보고는 말없이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진종일 룡천검을 가지고 솔밭에 올라 미친듯이 악악소리를 내며 검을 휘둘렀다.

량세봉은 저녁을 치르자 설설 끓는 속을 홀로 진정할수 없어 강서명을 찾아갔다.

강서명은 자리에 누워있었다. 해소병이 심해졌던것이다. 마침 강서명의 처소에는 강연희도 와있었다.

《중대장이 왔구만.》

강서명이 이렇게 기운이 빠진 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것을 량세봉이 얼른 도로 눕혀주고 이불을 꽁꽁 여며주었다. 그리고는 강서명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선생님,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량세봉은 참고참아오던 울화를 터뜨리듯 천정이 드르릉 울리도록 세차게 부르짖었다.

강서명은 량세봉의 처절한 부르짖음에 입을 꾹 다물고 미더운 제자의 옆모습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강서명도 회의에 참석하였었다. 그도 회의에서 두어번 발언하였다.

…물론 우리 민족주의운동이 새로운 시대적사조에 등을 돌려대서는 안된다. 김형직선생님께서도 우리 민족주의자들에게 관전회의와 여러 모임에서 간곡히 가르치심을 주시지 않았는가. 이제는 민족주의운동도 방향전환을 해야 할 때라고.

손중산선생도 련쏘련공의 기치를 들고 승리를 거듭하지 않았는가. 지금 장개석이 그 구호를 버린탓으로 패전을 거듭하고있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당장 공산세력의 기발아래 들어가야 되겠는가. 나도 현하시국에서 그것이 시기상조라는 말을 하고싶다. 좀더 지켜보자.

지금 공산세력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환멸뿐이다. 공산세력의 리론이 훌륭하다면 공산주의운동도 고상해야 되겠는데 조선공산주의운동내부가 파쟁뿐이다. 싸움이 잦은 집안이 번성할수 없는 법이다.

나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공산주의사상과 리론을 배워주는것은 찬성한다.

그러나 현 상태에서 공산주의자들과의 조직적련합은 반대한다.

좀 지켜보자. 그들이 똑똑한 로선과 방략을 가지고 나설 때가 꼭 오리라고 본다. 지금은 공산주의기발아래 들어간다 해도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분파싸움에 말려들기마련이다. 그러니 시간을 두고 좀 지켜보자…

이것이 강서명의 주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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