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12 회)

4. 훈장집아씨

 

(4)

 

어린시절부터 서당지기로 고달픈 생활을 하면서도 공부를 할수 있었던 《행운》을 졸지에 잃어버린 량세봉은 고마운 스승마저 떠나가자 허우룩하고 서글픈 마음을 도저히 달랠수 없었다.

학문의 세계에 들어갈수록 나날이 솟구쳐오르던 향학열이 《한일합병》으로 무서리에 꽃잎지듯 사라져버린 지금 량세봉은 더는 배울길 없는 절망감에 미칠것만 같았다.

그래 며칠동안 량세봉은 강서명이 주고간 룡천검을 지게에 올려놓고 뒤산에 올라 해종일 휘두르다가 솔가지 한짐 꺾어메고 어슬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감자 몇알 먹고는 인차 웃방에 올라가 목침을 베고 네활개를 펴고 누워버리군 하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량세봉에게서 웃음이 사라지고 노상 눈에서 정기를 잃고 뚝해 지내니 집안에도 활기가 없고 모두가 량세봉의 눈치를 살피였다.

어느날 량기화가 저녁상을 물린 뒤끝에 장죽에 써레기담배를 꽁꽁 다져넣으며 밥상머리에서 일어나려는 량세봉에게 물었다.

《맏이야, 이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아버지의 물음에 량세봉이 일어서다말고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량세봉은 아버지의 물음이 며칠새 무위도식하고있는 자기에게 하는 엄한 질책이라는것을 알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언제인가부터 량기화는 량세봉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는가 하면 눈에 거슬려도 동생들앞에서는 말하지 않고 꼭 해야 하는 말도 이렇게 에돌아 자기 뜻을 담는다.

더구나 강서명을 떠나보내고나서는 아들에게 크게 빚진 심정을 금치 못하며 밤이면 홀로 가슴을 쥐여뜯는다.

어떤 때는 강서명의 딸과의 청혼을 고집스럽게 마다한것을 놓고 자신이 때이르게 망녕이 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하군 하였다.

여기 세리고을은 물론이고 철산군을 뒤져야 다시 찾아볼수 없는 혼수감을 뿌리치다니. 반상은 물러간 세월이요, 세봉의 앞날이 촉망된다고 그래서 손끝으로 키운 따님을 세봉의 짝으로 맞춰주련다고 여러말을 하면서 청혼을 했는데 내가 무슨 억하심정이 돼서 그냥 도리질을 했느냐.

하기는… 하기는…

량기화는 이렇게 다시금 자기의 속대를 세워보며 그날에 강서명에게 했던 대답을 되뇌여본다.

아, 참! 세상도!… 가난때문에… 째지게 못살아온 농사군의 주제꼴이 너무도 한심스러워…

량기화는 아직도 강서명이 청혼한 일은 량세봉에게 내비치지 않았다.

아무리 자기 피를 받은 자식이라 해도 아들에게 그 말 하는것이 너무도 죄되는 일 같았던것이다.

그리고 말을 해줘야 량세봉의 가슴에 일생토록 뽑히우지 않을 못을 쳐박는것으로 될것이였다.

량세봉은 인차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대답이란 너무도 뻔하다.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나서는 학문탐구도 사람이 하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나도 훈장님같은 다문박식한 학자가 될수 있다고 자신만만해지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나도 가난한 집 아이들을 모아들여 눈을 깨쳐주고 그들을 장차 나라찾는 싸움에로 준비시킬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학문에 자신감이 생겨도 가난때문에 외지에 나가 공부를 더 할수가 없으니 이제는 부모님들을 도와 부지런히 농사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량세봉이 잠시동안 대답이 없자 입에 장죽을 물고 볼이 맞붙도록 뻐금뻐금 빨고있는 량기화도 그옆에 한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아들의 대답을 기다리던 김씨도 한숨만 쉴뿐 구태여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후에야 량세봉이 입을 여는데 동문서답이다.

《아버지, 강냉이걷이를 해야 할것 같습니다.》

《추석이나 지나고 보자. 아직 강냉이알들이 채 여물지 않았더구나.》

《논물을 찌워야 되겠어요.》

《음. 네 생각대로 하려무나.》

량기화는 그것도 좀 이르지 않느냐고 대답을 줄가 하다가 량세봉의 의사를 존중해주고싶어 그 일은 그의 재량에 맡기였다.

량세봉은 이렇게 여러해만에 청운의 꿈을 걷고 다시 농사일로 돌아앉았다.

농사일이란 이 고을의 땅을 한손에 거머쥐고있는 지주 박치서의 땅을 5할로 소작을 부치는것이였다.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서 지주에게 땅값으로 절반을 주고 남은 낟알을 인두세요, 물세요, 소품값이요 하고 바치고나면 설전에 절량에 떨어지고만다.

그래 농한기라고 하는 겨울이 오면 량기화가 량세봉의 동생들을 다 거느리고 20리나 되는 먼산에 가서 솔가래기를 긁어다가 읍거리에 내다 팔고 김씨가 밤을 새워 무명낳이를 하여 살림을 겨우 이어간다.

아무리 등살이 벗겨지고 기름을 말리우며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을 해도 세월따라 가난은 더욱 조여들고 생활이 펴일 날이 없다.

량기화가 백합처럼 곱게 핀 며느리감을 마다한것이 우연이 아니였다.

량기화는 훈장집아씨를 생각할 때면 자기의 마누라를 생각하군 하였다.

집안에서 안팎으로 고생살이를 제일 하는것은 김씨였다.

식솔많은 가정의 살림살이를 도맡아안고 지내는 김씨는 밑빠진 살림을 두손에 거머쥐고 돌이라도 와작와작 씹어넘길 한창시절 자식들의 끼식을 보장하고 식솔들의 입을것을 마련하며 집안을 거두어야 한다.

여름내 터밭남새를 가꾸어 시장에 내다 판 돈을 모았다가 가을철에 목화 서너근을 사온다. 그걸 밤새껏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 무명낳이를 하고 삼실을 뽑아 잉아살에 오리오리 꿰여서는 불을 놓고 풀을 먹여 말리운 다음 북채살을 고루어 씨실을 메운다.

그리고는 베틀에서 부지런히 손과 발을 놀려가며 가물거리는 등잔불밑에서 밤새껏 무명이나 베를 짰다. 그게 보통고역이 아니였다.

녀인들이 삼낳이를 하지 못하고 남자들이 짚신삼을줄 모르면 사람구실을 하지 못하는 세월이였다.

그러고나면 허리와 팔이 뚝 떨어지는듯 쏘고 온몸이 노근노근하여 금시 땅바닥에 잦아들것만 같다.

하지만 다시 부엌에 나가야 했다.

수천년 내려오며 그냥 이어져온 인간생활의 변함없는 이 고통과 지겨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 나라 녀인들의 고달픈 삶이였다.

김씨는 하루날 하루밤 꼬바기 이어가며 굵은 석새무명은 20자정도 짜고 가는 새무명은 10자정도 짜냈다. 녀인들이 너나없이 김씨가 짜낸 무명과 베에 혀를 찬다.

무명천이 발이 곱다고 동네방네에 소문이 자자해서 많이 찾아와 주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씨의 고역은 이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다.

겨울철을 보내면 농사일에 한몫을 하면서도 짬짬이 들나물, 산나물을 부지런히 뜯어 식솔들의 허기진 구복을 채워주어야 했다.

들나물중에서 사라구는 으뜸가는 량식이다.

슬쩍 데쳐 건져서 물을 찌워 강냉이가루나 콩가루를 섞어 소금이나 된장에 무쳐먹으면 제법 근기가 있어 그것만으로도 끼니를 에운다.

바깥이들은 고된 농사일과 쪼들리는 살림에 한숨이라도 쉬지만 녀인들에게는 한숨을 내쉴 겨를도 없다. 어쩌다 고뿔에 걸려도 아래목에 누워 땀내볼 경황이 없는게 녀인들의 고달픈 숙명이다.

그러면서도 언제한번 짜증을 부리지도 않고 탓하지도 않는다.

그 무슨 서러운 일을 당하면 저 혼자 뒤뜰안에 나가 소리없이 흐느껴울다가는 식구들이 볼가봐 눈굽을 훔치고 천연한 모습을 되찾아가지고 집안에 들어선다.

량기화도 안해의 그런 정상을 목격하고 절로 눈굽을 적신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이런 고역살이를 어찌 훈장네 아씨에게 지우랴. 걸머지운들 그 분꽃같이 연한 아씨가 당초에 집안의 온갖 세파를 이겨낼수 있으랴.

하지만…

량기화는 이렇게 일고잦는 아릿한 생각에 시달리며 량세봉과 함께 끝이 없는 농사로 날과 달을 넘겨갔다.

세월의 무정한 년륜은 덧없이 여러줄기를 감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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