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 회)

제 5 장

9

 

가락맞게 울리는 방치질소리는 깊어가는 밤의 정적을 흔들었다. 세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게 울리는 고르로운 그 음향은 듣기좋은 음악의 박자처럼 부드러웠다. 김정숙동지께서 다듬이질하시는 소리였다. 방치돌우에 놓인 천은 군기를 만들게 될 붉은 비단이였다.

이제 정규무력건설을 선포하면서 사단과 련대들에 처음으로 군기가 수여된다. 군기는 정규군의 명예와 위용의 상징이다.

1948년 1월 하순 김정숙동지께서는 장군님께서 군기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자신께서 그 일을 맡겠다고 하시였다. 피복공장에 맡길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수예를 할줄 아는 로동자가 없었다. 군기를 만들자면 재봉과 수예를 겸비하여야 했다. 녀사께서는 재봉대원으로 싸우실 때 그 두가지 기능을 다 익히시였다. 함께 싸우시던 녀투사들중에도 재봉과 수예의 솜씨를 갖춘 전우들이 적지 않았다. 군복을 함께 짓던 군관가족들중에도 그러한 녀자들이 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군복제작을 끝낸 그들도 군기제작에 동원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녀투사들을 다시 모여놓고 군기제작을 위한 의논을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마련된 비단의 주름을 펴는 일부터 시작하시였다. 어떤 녀자들은 다림질을 하자고 했다. 물론 다듬이질보다 다림질이 빠르고 쉬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천발이 보다 매끈하고 윤기가 흐르자면 다듬이질을 하여야 했다.

방안에는 녀사께서 홀로 계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시였다. 방치질소리만 아니면 방안은 호젓했을것이다. 밖에서 어둠이 짙어갈수록 방안의 전등은 더욱 밝게 빛났다.

김정숙동지께서 두손으로 번갈아 두드리실 때마다 비단우에 아롱지는 전등빛이 부서진다. 마치도 방치끝에서 붉은빛이 발산하는듯 했다. 그 빛발이 잊을수 없는 추억을 불러냈다. 붉은기에는 장군님의 장구한 항일의 혈전사가 어려있다. 화전에서 추켜드신 《ㅌ.ㄷ》의 기발, 안도의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서 대오를 정렬한 첫 유격대앞에 나붓긴 기발… 문득 강반석어머님에 대한 생각이 뒤따르시였다. 유격대창건의 그날에 입으셨던 장군님의 군복과 대오앞에 나붓기던 기발을 강반석어머님께서 만드셨다고 하셨지. 언제 장군님께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셨던가? 만강에서였던지, 아니면 조국진군의 나날에 있었던 어느 숙영지에서였던지… 지명은 떠오르지 않으나 《사향가》를 불러주신 끝에 노래가 불러오는 감회에 잠기시며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장군님의 모습만은 기억에 생생하셨다. 전에없이 추연하신 장군님의 얼굴에는 그윽한 빛이 흐르고있었다. 붉은 기폭에 《반일인민유격대》라는 글발을 수놓으시던 강반석어머님, 눈앞에 안겨오는 그밤의 어머님모습과 일찌기 돌아가신 어머님을 다시는 뵈올수 없는 절통한 감정이 장군님의 심중에서 교차되였을것이다.…

방치질소리가 낮아졌다. 불현듯 녀사의 눈앞에 강반석어머님의 모습이 그려지셨다. 한번도 만나뵈오신 일은 없다. 장군님께서 무수히 들려주신 이야기를 통해 어머님의 모습이 련상되셨을뿐이다.

《어머님, 기뻐해주세요. 소사하에서 손수 만드셨던 반일인민유격대기발이 오늘은 정규군의 군기로 이어지고있어요.》

마음속으로 뇌이시였다. 참말이지 강반석어머님께서 지금까지 계시여서 군기가 만들어지는 오늘을 보신다면 얼마나 감격하시랴!강반석어머님과 다정히 마주앉으셔서 함께 다듬이질을 하는듯 한 환영에 사로잡히시였다.

시간이 흘렀다. 또 다른 생각이 뒤따랐다.

붉은 기폭에는 먼저 간 투사들의 피가 물들어있다. 청춘의 붉은 피를 결전장에 뿌리고 쓰러진 전우가 그 얼마나 많았던가. 빨찌산에서는 쓰러진 전우들을 붉은 기폭으로 감장했다. 생전에 목숨을 걸고 지켜싸운 붉은기를 죽어서도 자기 몸에 지니게 하였다. 살아도 죽어도 혁명선렬들의 넋은 붉은기와 함께 있었다.

잇달려 떠오르는 추억은 시간과 공간을 날아넘으며 여러갈래로 뻗었다. 그것을 더듬으실수록 다듬이질을 하시는 손에 힘이 솟구치셨다. 더 힘있게, 더 정성스레 방치를 두드리시였다. 항일전의 그 나날에 나붓기던 붉은기의 넋과 색조가 군기를 만들 비단천의 오리오리에 스미고 배이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강렬하게 치솟는것을 의식하시였다 .

아드님의 잠소리에 머리를 돌리시였다. 아드님은 곁에서 잠들고계셨다. 높아가는 다듬이질소리에 잠을 깨는것일가. 아니 꿈속에 잠긴것 같다. 총소리를 자장가소리로 들어온 아드님이 지금은 다듬이질소리를 자장가로 듣고계셨다.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보시였다. 그러시자 문득 떠오르는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아드님의 손목을 잡고 사령부귀틀집을 나서신 어느날이였다. 간밤에 내린 눈에 천리수해가 포근히 잠겼다. 희디흰 눈빛과 대조를 이루며 지붕우의 기발은 여느때없이 붉은빛이 선명했다. 한참 말을 배우던 아드님이 물으시였다.

《어머니, 우리 집 지붕에는 왜 붉은기가 언제나 걸려있나요?》

밀영의 다른 귀틀집과는 달리 사령부귀틀집 지붕에만 붉은기가 나붓기는것이 이상스레 여겨지셨던 모양이다. 납득이 되도록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가.

《아버지장군님께서 계시는 곳엔 늘 붉은기가 나붓긴단다.》

한순간 생각을 굴리시던 끝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언제면 네가 커서 그 붉은기의 의미를 알고 그 뜻이 어린 군기를 메고 대오의 앞장에서 나가게 될가? 대답끝에 이런 생각이 뒤따랐다. 그랬었는데 지금 어리신 아드님은 녀투사들이 지어준 장군복을 입은채로 잠드셨다. 잠들 때도 좀처럼 벗지 않으려고 하신다. 제일 좋아하시는 옷이였던것이다. 아드님에게 장군복을 지어준 녀투사들의 고마운 마음, 그들도 나처럼 우리 정일이가 어서 커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갈 이 나라의 장군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있다.

일시 방치질을 멈추고 사랑과 기대가 함뿍 어린 눈길로 아드님을 바라보시였다.

밖에서 자동차 멎는 소리가 났다. 방안에 들어서신 장군님께서는 전에없이 그늘이 비낀 안색이시였다. 아무 말씀도 없이 녀사에게 가방과 모자를 넘겨주시였다.

녀사께서는 조심히 그이의 안색을 살피시였다. 묻기조차 서슴어지리만큼 그 무슨 충격적인 일이 있는듯싶으시였다.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왔으니 차리지 마오.》

《?!》

장군님의 음성은 갈리시였다.

《동녕현성과 화룡현에서 네 아이를 새로 찾아서 데려왔다기에 유자녀학원에 갔댔소. 그 애들을 만나니 꼭 함께 싸우던 그 애 부모들을 만난것 같더란 말이요. 저녁때가 되여 돌아오자고 했는데 학원아이들이 어디 놓아주어야지.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오는 길이요.》

녀사께서는 불시로 눈시울이 화끈해지시였다. 지난해 여름에 장군님을 모시고 학원에 나가셨던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시였다. 여러 곳에서 모여온 옛 전우의 아들딸들, 헐벗고 굶주리며 방랑생활을 하던 전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아이들을 가슴에 부여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던 기억이 생생하셨다.

개선하신 직후에 혁명가유자녀들을 위한 학원을 세우실 구상을 품어오신 장군님께서는 지난해 봄부터 본격적으로 그 사업을 추진시키시였다. 만경대에 학원의 터전을 잡아주시고 여러 곳에 일군들을 파견하여 유자녀들을 찾아오도록 하시였다.

모여온 아이들은 청사가 건설될 때까지 간리에 있는 건물을 림시교사로 리용했다. 녀사와 함께 그곳에 나가셨던 장군님께서는 람루한 아이들의 정상이 너무도 가슴이 아프셔서 점심을 건느시였다.

《맨발에 허름한 옷차림이 부끄러워서 철이 든 아이들은 내 품에 선뜻 안기기를 주저했소. 철없는 애들은 마구 매달리는데… 그 애들에게 하루빨리 옷을 지어줍시다.》

그날 장군님께서는 수행한 일군들을 돌아보시며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며칠후에 학원복도안이 그려졌다. 도안은 여러가지였다. 과거의 학생복을 본딴것도 있었고 귀족들의 아이들이 다니던 유년사관학교 군복처럼 군모에 닭털깃을 멋스럽게 꽂은것도 있었다.

녀사께서도 손수 도안을 그리시였다. 우리 군대의 군관복을 본따려고 하시였다. 그리고 혁명의 피줄기를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바지에 붉은 띠를 두르고 팔소매에도 붉은 띠로 사람 인(人)자를 새기시였다. 유자녀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고심어린 탐구를 거듭하신 끝에 창안하신 도안이였다. 보는 사람마다 환성을 올리며 공감했다.

아이들에게 그 도안대로 지은 학원복이 공급되였을 때였다. 녀사께서는 새 학원복을 타입은 아이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시였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의 옷은 품에 맞지 않았다. 녀사께서는 그런 아이들의 옷을 거두어서 몸에 맞도록 품을 줄여주자고 원장에게 당부하시였다. 후에 학원에 다시 나가보셨는데 금옥이라고 불리우는 녀자애 하나만은 여전히 후렁한 옷을 입고있었다. 어찌된 사연인지를 알아보시니 철없는것의 공연한 의심때문이였다. 금옥이는 다른 아이들이 품에 맞지 않는 옷을 바칠 때 누구도 몰래 자기 옷을 침대밑에 감추었다. 그렇게도 멋진 옷을 처음 입었는데 바쳤다가 도로 내여주지 않으면 어쩌랴 하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꼭 맞게 고쳐진 옷을 다른 애들이 타입을 때 그 애는 슬그머니 감추었던 옷을 꺼내입었던것이다.

《이런 철부지라구야. 장군님께서 너에게 지어주신 옷인데 누가 도로 빼앗겠느냐. 너는 누구의 딸이지?》

녀사께서는 빙긋이 웃으며 어린애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였다. 금옥이는 부끄러워서인지 고개를 틀며 입을 열지 않았다. 곁에 섰던 부원장이 그 애 아버지는 홍두산전투에서 희생된 기관총수 아무개라고 하였다. 순간 녀사께서는 뜨거운것이 불쑥 가슴에 치미는것을 느끼시였다. 그 애 아버지도 잘 아시지만 어머니는 처창즈에서 함께 투쟁하던 녀자였다. 친언니이상으로 다정히 지내던 사이였다. 그 녀자는 유격구가 해산될무렵에 희생되였다.

《네가 최옥실언니의 딸이란 말이냐?》

아이의 팔목을 잡고 흔드시였다.

어린것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아이의 얼굴을 여겨보시니 눈매며 입모습이 신통히 제 어머니를 닮았다. 세찬 충동에 사로잡히며 그 애를 와락 품에 안으시였다.

《이제 나와 함께 재봉실로 가자. 옷을 품에 맞게 고쳐줄테니까.》

《녀사님, 그애 옷은 저희들이 고쳐주겠습니다.》

부원장의 말이였다.

《아니예요. 이 애 어머니를 대신해서 내손으로 고쳐주어야 마음이 좀 가벼워질거예요.》

녀사께서는 그 애를 데리고 재봉실로 가시였다. 후렁하던 교복을 고쳐서 입혀주고나니 금옥이는 그 이름처럼 더 곱게 보이였다. 고개를 젖히고 마주보는 금옥이의 눈에 물기가 가랑가랑 어리고 파들파들 입술이 떨리였다. 마침내 떨리는 입술사이로 가슴을 흔드는 부름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머니!》

어머니! 녀사께서 학원에 나가실 때마다 유자녀들모두가 그 정다운 이름으로 부르군 했었다.

장군님께서 오늘 학원에 가시는줄 알았으면 저도 함께 가보는걸 그랬습니다.》

《아닌게아니라 나도 집에 들려서 함께 갈가 하는 생각을 하였댔소. 군기제작이 바쁜줄 알기에 혼자 갔댔소.》

장군님께서는 방치돌우에 놓인 붉은 비단천에 시선을 주시였다.

방안에는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두분의 가슴속에 차넘치는 뜨거운 정이 소리없이 학원에로 나래쳐가고있었다.

녀사께서 먼저 침묵을 깨치시였다.

장군님, 이제 만경대학원에 말입니다. 아이들이 그렇게도 늘 장군님을 뵙고싶어하는데 학원청사에 장군님의 동상을 세웠으면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서서히 머리를 돌려 녀사를 바라보시였다.

《그건 안되오.》

나직이 응대하시였다.

《아이들의 간절한 심정이야 헤아려주셔야지요.》

장군님께서는 이 저녁 헤여지기를 아쉬워하며 옷섶에 매달리던 아이들을 생각하며 더는 말씀이 없으시였다.

녀사께서는 기어이 학원에 장군님의 동상을 세우리라 결심하시였다. 이미전부터 품어오신 생각이였고 김책을 비롯한 여러 간부들과 진작 의논하신바도 있었다. 혁명가유자녀학원 학생들이 장군님을 아버지라 부르는것처럼 그들은 모두가 다 장군님의 아들딸들이다. 그들은 앞으로 장군님군대의 핵심들로 자라날것이다. 학원의 창립은 우리 나라 정규군의 미래를 앞당겨오는 또 하나의 사변이였다.

녀사께서는 며칠안으로 틈을 내여 또다시 학원에 나가보실 생각을 품으시였다. 수많은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가 밤하늘의 총총한 별무리처럼 반짝이는것을 느끼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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