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 회)

제 5 장

8

 

정신옥에게는 모든것이 꿈만 같았다. 장례까지 치르고 돌아왔지만 분영이가 죽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꿈과 구만리장래를 앞에 둔 꽃나이 분영이가 그 모든것은 저버리고 어떻게 땅속에 묻힐수 있단 말인가. 해주에 내려가서 겪은 일들이 현실적으로는 있을수가 없고 꿈결에서만 필쳐질수 있었던것처럼 생각되였다. 분영의 시신은 도녀맹회의실에 안치되여있었다. 화장을 곱게 한 분영은 백포를 덮고 조용히 누워있었다.

-어머니, 어떻게 오셨나? 하고 금시라도 살포시 감은 눈을 번쩍뜨고 반겨일어날것만 같았다.

-엄마는 네가 보고싶어서 왔지.

-인차 공연을 끝내고 돌아갈텐데…

넋없이 시신앞에 서있던 정신옥은 분영이와 눈물속에 속삭였다.

장례는 엄숙히 거행되였다. 이름없는 한 처녀의 장례식이라고는 생각할수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것은 령구앞에서 문화선전공작대의 동료가 가슴에 받쳐들고 나가는 고인의 모습이였다. 사진이 아니였다. 정신옥은 발인식에 분영이의 사진이 필요할것을 예견하고 가져가야겠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럴만한 경황이 없었다. 다행 분영이의 품에서 본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나타났다. 청중을 향해 무엇인가를 열렬히 호소하는 모습이였다. 도당위원장이 그 그림을 발인식에 들고가자고 하였다. 정신옥은 커다란 충격속에 동의했다. 분영이가 출장을 떠나면서도 그 그림을 품속에 간수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해주는가를 깨달았다. 언제부터 분영이가 정하를 사랑하게 되였는지는 알수 없었다. 그 그림은 문화선전의 나날에 류다른 힘과 용기를 주었을것이다. 분영이는 그림의 모습그대로 대중을 선동하려고 했을것이다. 그림의 한쪽끝은 피에 절었다. 원쑤의 흉탄에 흘린 피자욱이였다. 그 피자욱이 분영의 모습에 처절하고 비장한 색조를 가미해주었다.

꽃속에 묻힌 령구를 문화선전공작대원들이 메고나갔다. 해주시의 많은 녀성들이 장례행렬에 들어섰다. 령구앞에서 동료의 두손에 떠받들린 분영은 청중을 향해 여전히 부르짖고있었다. 살아서는 말로써, 죽어서는 피로써 원군을 호소하고있었다.

정신옥은 장례를 끝내고 오늘 오전에 평양으로 돌아왔다. 해주에서는 비애를 함께 나누는 여러 사람들속에 끼여있다보니 그렇게도 모질게 가슴이 저린줄을 몰랐었다. 집에 돌아와서 호젓한 방안에 앉고보니 새로운 슬픔이 뼈속을 파고들었다. 일제의 감옥에서 숨져간 벗이 남긴 어린 분영이를 데려온 때부터 애지중지 키워온 20여년의 나날들이 돌이켜졌다. 자기가 낳은 기환이보다도 분영이한테 더 지극한 사랑과 정을 기울여왔다. 그것을 알아서인지 분영이는 자라면서 언제 한번 말썽을 부리는 일 없이 이 엄마에게 곰살궂고 살뜰했다. 순탄치 않았던 지나온 생애에는 어려움도 많았고 속상한 일도 많았다. 이 엄마의 기색이 좋지 않을 때면 분영이는 담쑥 목을 껴안으며 속삭였다.

《엄마, 내 노래를 불러줄가?》

《어서 그래라.》

어린 분영이가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면 울적하던 기분이 순간에 가셔지군 했었다. 옆에 있다면 지금도 분영이는 그때처럼 속삭여줄것이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내가 이렇게 살아있지 않나요.》

《그래, 내 마음속의 너는 죽지 않았다.》

부지중에 소리내여 응대했다.

해주에 다녀온 이야기를 듣고 웃방에 올라갔던 기환이가 내려왔다. 어머니앞에 눈물을 아니보이려고 자리를 떴던 기환이의 눈은 벌겋게 부어올랐다.

《어머니, 정하동무를 데려오겠어요.》

《정하를?

정하는 아직 분영이가 죽었다는것을 모를것이다.

《아무래도 알려야지요. 그가 명복을 빌어주면 분영이는 무척 기뻐할것입니다.》

《좋도록 해라.》

기환이가 밖으로 나갔다.

정신옥은 분영이의 죽음을 놓고 누구보다 정하가 슬퍼할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나 오빠보다도 정하는 더 애절한 비애를 느낄것이다. 군복입은 사위를 달갑지 않게 여겨온탓으로 분영이는 생전에 자기의 사랑을 이 어미에게조차 숨겨온것이 아닌지… 막급한 후회가 가슴에 밀려들었다.

한시간쯤 지나서 기환이가 정하를 데리고 나타났다. 정신옥은 일어나서 방안으로 들어서는 정하의 팔굽을 잡았다.

《이 사람, 나를 용서하게.》

정신없이 달려온 정하는 아무런 전제도 없는 그 말에 어리둥절하였다.

신옥은 자기 심정을 설명할 계제가 못된다는것을 깨닫고 정하를 웃방으로 이끌었다.

웃방에는 초졸한 제상이 차려져있었다. 제상우에는 장례식때에 들고나갔던 그림이 세워져있었다. 그앞에 꿇어앉은 정하는 분영이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눈물없이 울고있는 그의 목에서 이물거리는 뼈마디소리가 울렸다. 오열을 참으며 급하게 오르내리는 울대뼈마디가 갈리는듯싶었다.

《자, 어서 잔을 받게.》

아까부터 술을 따라서 잔을 들고있던 기환이가 나직이 속삭였다.

정하는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아서 제상우에 놓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애인의 령전에 머리숙이며 목메여 부르짖었다.

《분영동무, 내 원쑤놈들을 천백배로 복수하겠소!》

정신옥은 애통한 그 부르짖음이 흥벽을 울리며 공명되여오는것을 느꼈다. 결코 분영이의 죽음을 헛되이 할수 없다는 피맺힌 감정이 치받쳤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에 정신옥은 기환이와 정하에게 말했다.

《얘들아, 이 어미와 함께 가볼데가 있다.》

이 순간에는 정하도 기환이처럼 친자식으로 느껴지는것이여서 그렇게 말했다. 딸 없는 사위는 불꺼진 화로라고 하지만 정하에 대한 정은 이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어데로 가자는겁니까?》

기환이가 아니라 정하가 물었다. 그 역시 지금에 와서는 이전에 체험해보지 못한 뜨거운 정을 신옥에게서 느끼고있었다.

《총을 파내와야겠다.》

기환이와 정하는 눈길을 마주쳤다. 느닷없는 어머니의 말에 어정쩡했다. 정신옥은 회오가 짙은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해방직후였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서울에 있을 때였다. 내가 패망한 일제군경의 무장을 해제한 일이 있었다. 어리석게도 당장은 누구도 총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독립국가를 세운 다음에 군대를 꾸려야 한다고만 여겼지. 그래서 남몰래 바위밑에 묻어두었다. 그것을 파오자.》

기환이와 정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것이 놀라왔다.

정신옥이 먼저 일어섰다. 두 젊은이가 따라일어섰다. 총을 묻어둔 곳은 룡악산중턱이였다. 수십리길이여서 걸어서는 여러 시간 걸릴수 있었다. 신옥은 그들을 이끌고 중앙녀맹에 들렸다. 거기에는 경리용으로 쓰는 소형화물자동차가 있었다. 일행은 그 차를 타고 룡악산으로 향했다. 산기슭에 이르자 차를 세웠다. 신옥은 옛 기억을 더듬으며 산으로 올랐다. 어깨에 삽을 멘 기환이와 정하가 뒤따랐다. 좀처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곳에 이끼를 들쓴 바위가 있었다. 2년전에 청년들을 데리고 총을 매몰했던 장소가 분명했다.

《여기를 파보아라.》

정신옥은 기환이와 정하에게 이르고 곁에서 숨을 돌리였다. 산길을 톺아올랐더니 숨이 턱에 닿았다. 역시 나이는 어쩔수 없는것이다. 이마에 드리운 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대기를 걸탐스레 마셨다. 기환이와 정하는 바위밑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쯤 흙밥을 젖혔을 때 딱딱하게 삽날에 맞치는것이 있었다. 삽을 놓고 손으로 조심스레 파헤쳤다.

《어머니, 총이 있어요.》

정하가 총 한자루를 찾아들고 소리쳤다. 정신옥은 기쁨에 넘쳐 다가갔다.

《어디 좀 보자.》

정하의 손에서 총을 넘겨받았다. 해를 넘기며 땅속에 묻혔던 총은 군데군데 녹이 갔다. 정신옥은 어리석은 자기의 불찰로 억울히 버림을 받고 수난을 당했던 그 누구와 상봉을 하는듯 한 죄스러운 심정이였다. 용서를 빌듯이 총을 쓰다듬으며 흙을 털어냈다.

기환이와 정하는 부지런히 일손을 놀렸다. 다 파낸 다음 헤여보니 32자루였다. 그들은 한자루씩 격발기를 열어보았다. 어느것이나 청소를 하면 쏠수 있었다.

일을 끝내고 참나무그늘밑에서 휴식을 했다.

정신옥은 푸른 하늘가에 초점없이 시선을 겨누고 말했다.

《나는 해방된 조국에 새로운 원쑤가 나타나는 준엄한 현실을 볼줄 몰랐다. 왜놈들에게서 빼앗은 총을 인민이 다시 틀어잡아야 자기의 생존과 존엄을 지킬수 있다는 생활의 진리를 몰랐다. 이 어머니는 그만큼 어리석었다.》

기환이와 정하는 쓸쓸하게 회오가 비껴흐르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신옥은 천천히 머리를 돌리며 기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서울에서 돌아왔을 때 이 어미가 아니였다면 너도 정하처럼 평양학원에 갔을것이다. 이 어미의 강경한 요구가 그만 네 뜻을 꺾었댔지.

때는 늦었지만 너도 인차 총을 메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어머니.》

기환은 총무지에 시선을 박고 대답했다. 평양학원으로 못 가게 한 어머니를 두고 오래동안 품어온 원망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심각한 반성에 잠기는 어머니에게 그 원망을 터칠수 없었다. 때늦게나마 생각이 달라진 어머니가 반가왔다.

이윽하여 그들은 총을 여러번 날라다가 차에 실었다.

《이제 이 총들을 내무국으로 가져가야 하겠지요?

운전사가 물었다.

《그것은 차후 일이고 이 길로 김정숙녀사를 찾아가야겠네.》

운전사는 물론 기환이와 정하도 어머니의 대답이 너무도 뜻밖이였다. 어째서 총을 싣고 김정숙녀사를 찾아가는지 알수 없었다.

정신옥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심각한 사색이 흐르는 얼굴로 운전실에 올랐다. 기환이와 정하는 총을 실은 적재함에 올랐다.

시내로 들어온 차는 어느 집앞에 멈춰섰다.

《이게 누구네 집입니까?》

정하가 차문을 나서는 정신옥에게 물었다. 장군님의 저택을 다녀간바있는 그는 낯선 집앞에 차를 멈춘것이 의아했다.

《녀투사 김명화네 집이다. 달포전부터 녀사께서는 이 집에서 여러 녀인들과 함께 군복을 짓고계신다. 녀사를 탁아소에 모셨던 날에도 내 이 집에 찾아왔댔다.》

정신옥의 말을 확증하듯 집안에서 울리는 여러대의 재봉기소리가 울타리밖에서도 들리였다.

《그렇군요. 그럼 여기 계십시오. 제가 녀사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적재함에서 뛰여내린 정하는 집으로 들어갔다.

정신옥은 기환이와 함께 자동차곁에서 기다렸다.

잠시후에 김정숙동지께서 정하를 데리고 나타나시였다. 땀발에 젖은 흰 적삼에는 보위색실밥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분주히 재봉기를 돌리다가 나오신것이 분명했다.

《녀사님!》

정신옥은 잠긴 어조로 부르며 다가갔다.

녀사께서는 한껏 련민이 실린 시선으로 마주보시였다.

《해주에서 언제 올라오셨습니까?》

《오늘 아침차로 왔습니다.》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녀사께서 우리 분영이 장례를 잘 치르어주자고 도당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주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쉬시지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반가움과 고마움에 넘치던 정신옥의 얼굴에 심중한 빛이 떠올랐다. 달라지는 표정과 함께 목소리도 무거운 어조를 띠였다.

《제가 녀사님을 처음 만나뵈옵던 날에 말입니다. 녀사께서는 내가 왜놈군경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 총들을 어찌했는가 물으시였습니다. 기억나시지요?》

《기억납니다.》

《그때 저는 어리석게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정신옥은 치밀어오르는 자책과 수치감에 머리를 떨구었다.

정하와 기환은 어머니가 총을 싣고 이리로 온 까닭을 비로소 알았다.

정신옥은 가슴속에 서렸던 그 무엇을 토하듯 날숨을 길게 내불고 머리를 들었다.

《제 오늘 저 사람들을 데리고 룡악산에 가서 숨겨두었던 총들을 파냈습니다. 다행히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총을 가지고 녀사께 속죄를 하러 왔습니다.》

《속죄는 무슨 속죄를 하겠습니까. 정선생, 저는 더없이 기쁩니다.》

녀사께서는 다시 고개를 떨구는 정신옥의 손을 뜨겁게 잡으시였다. 진정으로 그의 사상전환이 기쁘시였고 총을 찾은것이 기쁘시였다.

정신옥은 적재함에 실은 총을 가리켰다.

《도합 32자루입니다. 저는 총물계를 모르지만 저 사람들이 보더니 모두 쓸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집에 가서 녹을 벗기고 깨끗이 닦아서 총알만 재우면 쏠수 있게 한 다음 해당 기관에 바치렵니다.》

《선생님은 우리의 건군위업에 참으로 큰 기여를 하십니다.》

《무슨 말씀을… 여적 방해를 해왔지요. 녀사의 속을 태우면서… 참말로 부끄럽습니다.》

《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선생님에게 존경이 가고 믿음이 갔습니다. 반드시 오늘이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지난날에 그와 얽혀졌던 사연들이 생생히 떠오르며 무량한 감개가 가슴에 젖어드는것을 의식하시였다.

 

×

 

청명한 가을 어느날이였다.

군대로 나가는 초모생들이 평양역을 떠나고있었다. 역두에서 취주악이 울리고 꽃보라가 날리였다. 정신옥은 기환이를 바래주고있었다. 떠나는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아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까지 군대로 나가면 혼자 계실텐데 얼마나 적적하시겠어요.》

환갑이 넘은 로모를 홀로 두고 군대로 나가는 아들의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내 걱정은 말아라.》

정신옥은 눈을 슴벅이며 웃어보이였다.

곁에 섰던 정하가 기환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어머니는 내가 모시겠네.》

그는 정신옥에게 머리를 돌렸다.

《어머니, 제가 래일 군관합숙에서 집으로 숙소를 옮겨도 일없겠지요?》

《그렇게 해준다면야!…》

정신옥은 감격했다. 마주보는 정하의 얼굴에 얼핏 분영의 모습이 겹놓이였다. 인제는 정하가 분영이를 대신할수 있는 살뜰한 존재라는것을 현실적으로 확인했다. 정하는 부모가 없다. 정녕 그의 어머니가 되고싶었다. 정하의 가슴에서 분영이를 잃은 상실의 비애가 가셔지면 다른 처녀에게 장가를 들도록 할것이다. 분영이는 없어도 정하는 또 한명의 자식으로 남아있을것이다. 정하가 제먼저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호각소리가 길게 울렸다. 렬차에 오르라는 신호였다.

작별의 마지막순간이 다가왔다. 환송곡은 더 높이 울리고 떠나는 사람과 바래우는 사람들의 초조한 목소리들도 더 높아졌다.

기환은 어머니에게 인사를 남기고 렬차에 올랐다.

이윽하여 기적을 울리며 렬차가 떠났다.

정신옥은 차창밖으로 얼굴을 내민 아들을 향해 손저어주며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이 나라의 모든 어머니들과 안해들이여! 아들딸들과 남편들에 대한 그대들의 사랑이 아무리 열렬하다 하더라도 눈물의 호소로써는 지켜낼수 없다. 오직 그대들의 가슴에 불타오르는 그 순결한 사랑은 총대로써만 지킬수 있다. 사랑이 귀중하고 지극하거든 그대들의 아들딸들과 남편의 어깨우에 총을 메우라!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0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