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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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영은 자기의 가슴속을 응시하듯 머리를 소곳이 숙였다. 사랑의 고백은 어느때든지 남자가 먼저 해야 하는것일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결혼의 주도권이 남자에게 있다고 여겨온 낡은 관념이다. 남녀는 사랑과 결혼에서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고있다. 어느쪽이 주도적이고 어느쪽이 피동적이여야 한다는 관념이 해방된 오늘에는 있을수가 없었다. 한해전에 남녀평등권법령이 발포되지 않았는가.

《정하동무.》

처녀는 조용히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정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전에 없이 세차게 뿜겨지는 처녀의 눈빛에 어리둥절했다.

《피차 서로의 감정을 계속 숨기고있을 필요가 없지 않을가요? 전 출장을 떠나기 전에 우리의 관계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찾아왔어요.》

분영은 길게 숨을 내쉬였다. 벼르던 말의 꼭지를 떼고보니 가슴 한귀가 열리는듯싶었다.

처녀의 말뜻을 깨닫은 정하는 머리가 핑 도는듯 한 현기증을 느끼였다. 순간마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며 금시 숨이 막히는듯 했다. 그는 자신을 진정한 잠시후에야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분영동무를 오래전부터 사랑해왔습니다. 그러나 분영동무에 비해 짝이 기운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려고 했습니다.》

《무엇때문에 동무는 자신을 그렇게 비하하는건가요?》

분영은 저도 모르게 불만에 찬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여나가는것을 억제할수 없었다. 정하는 그 목소리가 귀로 흘러드는것이 아니라 심장에 마쳐오며 세찬 충격으로 자기 몸을 허공에 떠올리는듯 한 환각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분영동무.》

얼결에 맥락없는 인사를 보낸 그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말했다.

《내가 또 한가지 우려하는것은 동무의 어머니였습니다. 언젠가 어머니는 군복을 입은 총각은 사위로 맞을수 없다고 했지요. 동무가 나를 좋게 생각한다는것은 이미 느끼고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머니가 완강히 반대하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적…》

《그만해요!》

분영은 상대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리고 명백한 어조로 계속했다.

《사랑은 그 선택의 권리가 어디까지나 본인에게 있어요. 그것을 리해하지 못할 우리 어머니가 아니예요.》

《그렇다면 여러가지로 내가 잘못 생각하고있었습니다.》

정하는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듯이 고개를 숙였다.

《전 출장을 다녀온 후에 어머니한테 우리의 관계를 말하겠어요.》

《분영동무!》

정하는 목메인 음성으로 부르며 머리를 들었다. 달빛이 푸르게 아롱지는 그의 눈에서 무엇인가가 세차게 끓어번지고있었다.

분영은 그가 덥석 포옹해주든가 힘있게 손을 잡아주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정하는 굳어진듯이 그냥 서있었다.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될 신성한 존재로 처녀를 여기는지도 모른다. 분영은 제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 그제서야 정하는 처녀의 손을 포개여 감싸쥐고 영원히 놓지 않으려는듯이 힘을 주었다. 맞잡은 손길을 통하여 서로의 체온과 맥박이 상대의 혈관속으로 흘러들었다. 숨막힐듯 한 환희가 애달픔처럼 두 청춘의 심장을 비틀었다. 뚫어지게 마주보며 한동안 그대로 서있었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그들은 이 순간 가슴속에 끓어번지는 감정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얽히고 부딪치는 눈빛만이 자신의 심정을 상대에게 전할수 있었다.

얼마후에야 대동문쪽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황해도에 나가서 뭘합니까?》

이번에는 정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전에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참 이런, 깜빡…》 정하는 게면쩍은 웃음을 지었다. 《황해도에 순회공연을 나간다고 했지요.》

《오늘 우리는 탁아소에 나오신 김정숙녀사를 만나뵈왔어요. 어머니와 동무에게서 녀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댔지만 정작 만나뵈옵고보니… 그분의 풍모에서 받은 인상을 뭐라고 표현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녀사께서는 우리가 준비한 공연종목을 료해하시고 내용이 좋다고 하시면서 군복생산을 위한 목화기증을 호소하는 선동도 포함시켜달라고 하셨어요. 녀사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그 순간에 내가 누구를 생각했는지 아시겠어요?》

분영의 두눈이 새물새물 웃고있었다. 정하는 한번 고개를 기웃하더니 어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웃고있던 분영의 표정이 서운한 기색으로 돌변했다.

《바로 군복을 입고있는 동무를 생각했어요.》

정하는 가슴이 뭉클해오는 행복감에 취해버렸다. 서서히 머리를 돌려서 눈을 슴벅이며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분영을 처음 만난 그날부터 북받치는 사랑의 갈망에 가슴속에 재가 일도록 애를 태웠다. 그 갈망은 영원히 가닿지 못할 미지의것이였고 자기로서는 도저히 열수 없는 보물함처럼 여겨지는것이여서 스스로 단념하려고도 했었다. 그럴수록 심장은 애달픈 그리움으로 불타올랐다. 달랠길없는 심장의 호소에 떠밀리우며 조용한 틈을 타서 그를 찾아가군했었다. 분영은 여러번 산보길에 나서면서도 언제 한번 자기의 가슴속을 헤쳐보이지 않았다. 정중하고 단정한 자세를 고수하여왔다. 그래서 마지못해 산보길에 응한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 나날에 그처럼 진실하고 열렬한 감정이 분영의 가슴속에서도 자라고있을줄이야!

지금 생각하면 여러달을 두고 속을 태운것이 오늘의 행복에 비해서는 너무도 적은 대가가 아니였던가싶었다.

《분영동무!》

얼굴을 보지 않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처녀의 고운 눈빛이 자기의 볼편에 와닿는것을 느꼈다.

《동무가 순회공연을 하고 돌아오면 말입니다. 그때 나는 한가지 선물을 주겠습니다. 어떤건지 알아맞춰보오.》

《역습인가요?》

머리를 돌려보니 분영은 웃고있었다.

《우리들사이에 보복심리란 있을수 없습니다. 어서 알아맞춰보라니까요.》

두눈을 반짝이며 한동안 침묵하던 처녀는 살래살래 머리를 저었다.

정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청중을 향해 군복생산을 위한 목화기증을 호소하는 동무의 모습을 유화로 그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걸음을 멈추고 마주보는 처녀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버드나무가지사이로 흘러드는 달빛에 가랑가랑 고이는 행복의 눈물이 령롱하게 반짝였다.

이튿날 아침이였다.

문화선전공작대원들이 해주행 렬차에 오르고있었다.

《분영동무!》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리였다.

승강대에 오르려던 서분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림정하가 렬차를 향해 달려오고있었다. 홈에 내려선 분영은 그를 마주 향해 다가갔다. 어제 저녁에 작별인사를 나누었는데 왜 다시 나타났을가?

《무슨 일이예요?》

급히 오느라고 땀발이 돋은 정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 이걸 받소.》

정하는 종이에 싸서 들고온것을 내여밀었다.

《이게 뭐예요?》

《목화기증운동을 호소하는 동무의 모습을 그린거요. 실은 천천히 그려서 동무가 돌아온 다음에 주려고 했지만 간밤에 붓을 들었소. 동무와 헤여진 후 어디 잠을 이룰수가 있어야지. 동무의 모습이 그냥 눈앞에 어른거려서…》

정하는 어줍게 웃고있었다.

분영은 그가 주는 그림을 소중히 받아서 종이를 펼치고 바라보았다. 연탁에 마주선 처녀가 청중을 향해 한손을 높이 들어 허공을 후리며 호소하고있다. 커다랗게 뜬 두눈에서는 광채가 뿜겨지고 흰이를 드러낸 입에서는 불같은 말이 쏟아지고있었다. 이것이 과연 나의 모습인가? 자기가 여태껏 찍은 그 어느 사진에서도 볼수 없었던 아름다움과 열정이 묘사되였다. 정하의 눈에는 자기가 정도이상으로 매력있고 열정적인 처녀로 비꼈다는것을 의식했다. 가슴이 설레이고 심장이 뛰였다.

《정하동무, 고마워요.》

분영은 그림을 소중히 간수했다.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길 바라오.》

정하가 손을 내밀었다. 분영은 열기가 느껴지는 그의 손을 잡았다. 어제 저녁 사랑을 고백할 때처럼 그들은 말없이 오래도록 마주보았다.

출발을 재촉하는 기적소리가 울리였다.

분영은 정녕 놓고싶지 않은 그의 손에서 풀려나 렬차에 올랐다. 오래도록 손저어주는 정하의 바래움을 받으며 해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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