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52 회)

 

16. 송악에서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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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돌을 한계단, 한계단 밟아내려오는 왕유의 발걸음은 천근인듯 무거웠다. 마지막으로 밟는 대돌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계단을 다 내려오니 최언위대감이 손짓으로 만나자 부르고있었다.

왕유는 훤칠한 키에 수염발이 장쾌한 최언위에게 스적스적 다가갔다.

고려건국 초기에는 서로가 자제하면서 먼발치에서 수인사나 하는게 둘사이 교제의 전부였었다. 왕유도 최언위도 자기들의 존재를 내비치는것을 꺼려한때문이였다. 조정안에서조차 이들은 사람들의 눈에 비쳐지는것을 바라지 않았었다.

최언위는 고려조정에 들어와서 초기부터 공개적인 관직이라고는 볼수 없는 태자사부라는 왕실의 한모통이일에 만족하고있었다. 실은 고려국의 외교의례업무를 도맡다싶이 한 그였지만 태조 말기에 재상이라는 형식상의 관직을 2년정도 가지고있은 외에 2대조에 가서 림종할 때까지(최언위는 944년 12월에 죽었다.) 1년정도 원봉성 태학사에 평장사를 지내면서 조정의 원로대신으로 공개적인 직함을 가져보았을뿐이다. 하지만 그는 신라 경주귀족출신으로 17살때에 당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당나라관료로 있다가 마흔한살에 신라로 돌아와 집사성 시랑, 서서원 학사 등으로 관리생활에 쩌들대로 쩌들어보았을뿐아니라 신물이 난 사람이였다. 하기에 국토와 겨레의 통일을 지향하여 왕건을 찾아와서도 관직은 사양한채 왕건의 외교업무와 문서작성일반을 전문으로 맡아 보좌하는 공개되지 않은 일로 만족해하였었다. 숨겨진 모사라는데서 왕유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차이나는것이 있다면 나이가 왕유보다 20년 우인것이였다.

하면서도 두사람은 왕궁안방일을 보는거나 최언위는 신라, 왕유는 후백제 이렇게 남쪽변방을 겨누고 심리정보전을 하면서도 고려의 동서북방을 재간껏 개척하려 한데서 서로가 일맥상통했고 나이차이를 가리지 않고 서로 실력을 인정하고 서로가 대등하게 존대해왔다.

둘 다 권력에 욕심이 없고 성격이 원만하고 리해심이 깊었던지라 오해나 마찰이란 있을수가 없었던것이다.

조정에 들어와서 처음에 두사람은 왕건을 통해서 둘사이의 견해가 전달되고 왕건의 분부와 실행과정을 통해서 서로의 견해가 일치되고있다는것을 짐작하군 하였다.

두사람사이가 본격적으로 밀접해진것은 통일결전전야부터 왕건이 두사람을 대신들앞에 공개시키면서였다.

이때부터 왕유는 특별히 왕규의 표적이 되였다.

왕유가 왕건에게 매운 소리라도 싫다 하지 말고 듣고 참작하옵소서한 둘사이의 약조를 알리 없는 왕규는 왕건이 버럭버럭 짜증을 내면서도 왕유가 간언하면 틀림없이 들어주는것이 놀라웁기도 하고 한편으론 시샘이 나서 죽을 지경이였다.

자기는 도마뱀앞에 달팽이처럼 왕건앞에선 숨소리도 저어하며 몸사리기에 급급인데 왕유 저것은 허리도 굽히는둥마는둥 하고 눈을 멀쩡히 뜨고 마주보기가 일쑤인것이 부러웁기까지 한 왕규였다.

자기는 발바닥이 닳도록 올리뛰고 내리뛰며 지방호족들과 밤낮으로 입씨름하느라 목이 쉬고 상것들의 등껍질을 벗기느라 손톱이 모지라지면서도 칭찬받기가 수월치 않은데 왕유 저것은 별로 하는 일도 없는것이 왕건의 꾸지람보다는 칭찬을 더 받고 꾸지람을 하더라도 뒤끝에는 술상이 례사이니 이거야말로 귀신이 곡할 일이 아닌가.

조정의 일등공신들조차 눈아래로 보는데 버릇된지 오랜 왕규의 눈에 왕유는 이마전을 내쏘고 날아가는 모기처럼, 사채기에 스며들어 꼬집어쏘는 벼룩처럼 손바닥으로 쳐죽이고 손가락으로 비벼죽이고싶은 존재였다.

왕유에 대한 왕규의 이러한 시기와 질투심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최언위였고 그래서 왕유와 한맥락에서 왕규를 경멸하고 경계하는 최언위였다.

그도 그럴것이 며칠전에 지방호족들이 왕규의 전횡과 비행을 타매하는 항소문을 련명으로 작성하여 올려온것을 최지몽과 왕유, 최언위 셋이서 함께 읽고나서 심중히 론의한 끝에 왕유가 왕건에게 상주하였는데 같은 시각에 왕건을 찾아들어왔다가 탁자우에 펼쳐져있는 항소문을 얼핏 훔쳐보고 급급히 몸을 사려 도망치듯 되돌아나온 왕규가 요즈음은 만사 제치고 왕유탄핵안을 짜고 졸개들을 규합하는데 혈안이 되여 뜀뛰기를 하는 판이다.

이 사실을 어제낮에 알려주면서 조심하라 일렀던 최언위였다.

(마침이로구나, 만나지 못하고 떠난다 했더니.…)

최언위는 왕유의 두손을 스스럼없이 잡았다.

《우린 지금까지 눈빛만 보고서도 서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아는 사이였지요?》

《그렇소이다. 그러니 소신의 결심을 알으셨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동안 학사어르신에게서 많은걸 배웠소이다.》

왕유는 왕건이 얼마전에 최언위에게 한림학사라는 공직을 내린것을 상기하고 관직으로 그를 불렀다.

《나 역시 많이 배웠소. 섭섭하긴 하오나 기왕에 떠날 마음이면 어서 떠나시오. 왕규가 왕유도사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끝내 준비했소. 몇몇 사람들이 합세한 모양이던데… 내용은 별게 아니고… 그런데 후백제간자의 독살기도를 사전에 차단하지 못했다는 죄목이 시끄러울것 같소. 까짓놈이 아무리 그래봤자 페하께서 그어버리실 대목이지만…》

《페하의 안전에 관한 문제이라 누구에게든 책임을 지워 해치려들수 있는 일이지요. 나의 목을 따지는 못한다 해도 도덕적책임을 부각시켜 먹칠이라도 해주자는것이겠지요.》

《그것까지도 페하께선 막으시겠지오만 나는 상대도 안되는 그 사람을 가르치겠다고 도사어른이 괜히 나설가보아 걱정했소이다.》

《고맙소이다. 살다보면 더러워서 피하는 때도 흔히 있는 법이 아니오니까. 전 개의치 않으려오이다. 한가지… 왕규에게도 장점은 있소이다. 나라의 모양이 지금의 지방할거중심에서 빨리 벗어나야 할터인데… 중앙통치구도를 잡아나가는데선 그래도 페하를 제일 만족시켜주는이가 바로 왕규대광이 아니겠소이까.》

《포섭으로 응해나오게 해야지 지금처럼 강박 하나로야 될리 없지요. 지방토호들의 권위도 세워주면서 감싸안아 그러쥐여야지 왕규처럼 하인배들 다루듯 하다가는 홍두깨대접밖에 받을게 없지요. 그보다 걱정되는건 왕규의 권력야심이지요. 복지겸대광어른이 앉아계실 때까지는 그런 걱정을 안했는데…》

최언위가 지난해에 작고한 복지겸을 떠올리는 바람에 왕유도 복지겸이 그리워났다. 왕규를 사사건건 따라가며 그런대로 신칙하던 사람이 바로 복지겸이였다. 왕규는 이전에 면천두견주 일로 체면을 떼운것을 생각해서인지 복지겸이앞에서만은 량수거지가 제법 단정했었다. 왕건에게 찾아들어가다가도 복지겸이 눈을 치뜨고 머리를 가로저으면 머리를 주억거리며 부시시 돌아서기가 일쑤였었다.

하지만 복지겸이 없는 지금의 왕규는 새앙쥐 풀방구리 드나들듯 내전출입이 제 생각나는대로였다.

이제는 창업1등공신들중에 남아있는이가 한명도 없었다. 신숭겸은 통일이전에 공산전투에서 죽었고 홍유는 통일결속전을 벌리는 과정에 그리고 통일된 해 마지막달에 배현경이 병으로 죽고 지난해에는 유금필대광과 함께 복지겸이도 세상을 하직했다.

박술희대광이 내전수비를 본다고 하지만 그도 최언위와 함께 태자사부소임에만 낯을 돌리고 정사에 한해서는 참견을 안하는 자세였다.

《왕식렴대광어른이 있지 않소이까. 그가 견제할것이오이다. 우리 고려의 지방호족들이 왕식렴의 말은 듣는것으로 알고있는데요.… 왕식렴이 지방호족들에게 조정의 조치를 정히 따르도록 타이르기도 하고 조정관리들이 지방호족들과 호흡을 잘 맞추면서 일을 내밀도록 길을 대주게 해야지요.》

《옳은 말씀이오이다. 그리고 조정엔 최지몽도 있으니 그가 왕식렴과 같은 목소리를 내면 다 따라설것이라 생각하오이다. 젊은 그가 있어 조정의 기강은 흔들리지 않을것이외다.》

《안심하고 떠나라고 해주시는 말씀 고맙게 들었소이다. 그럼 전 떠나겠소이다.》

《참, 도사어른의 거처지는 어디로 정하시였소? 이후에 안부라도 알아보고싶어 그러오이다. 아들과 부인이 가있는 골암진쪽이오이까?》

《딱히 어디라고 정해놓지는 아니하였사오나… 아마 마지막종착지는 그곳이 되여야 하겠지요. 최언위어른께서 그토록 북방개척에 마음을 쓰시는데 내가 동북방 한쪽만이라도 개척하는데 재간껏 보태다가 죽어도 죽어야지요.》

왕유의 이 말에 최언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하셔야지요. 어련하겠소만… 내 지금껏 거란에 관심하고 자꾸 들여다보는것도 실은 조상의 땅을 어떻게든 수복하여야 하리라는 그 생각때문이오이다. 하지만 내 재간이 그저 그 모양이라 서북방에만 치우치고있는것이 늘 마음에 걸려있었는데 왕유도사께서 아들은 물론 가족까지 떠나보내면서 동북방수복에 몸을 아끼지 않으려 하시니 고맙소이다. 머리가 숙어지오이다.》

최언위는 진심으로 감심해서 머리를 숙여보였다.

《이러지 마시오이다. 학사어른의 웅지를 따르고자 함일뿐이오니 이후에도 잊지 말고 가르치심을 주시오이다. 난 마음은 언제나 송악에 두고있을것이오이다. 그리고 참, 내 래년 여름쯤해서백두산엘 꼭 올라가보려고 하오이다.》

《백두산에요?!…》

최언위의 얼굴도 밝아졌다.

《우리 아들애가 한 말이 생각나오이다. 백두산마루에 올라가 사방을 굽어보면 알수 있으리니 백두산은 이 나라 조종의 산이요, 박달겨레의 넋이 깃든 하늘아래 제일성산이라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겨레의 땅인것을…》

왕유가 읊조리는 소리에 최언위는 주먹을 쥐며 절규했다.

《옳거니, 백두산마루에서 뻗어내린 산줄기, 강줄기가 끝나는 곳까지가 우리 겨레가 살 땅이고말고…》

《그럼… 최언위어른, 편안히 계시오이다.》

《잘 가시오이다.》

최언위는 초연히 서서 왕유를 바래주었다.

대궐중문을 나서던 왕유는 문가에 다소곳이 머리숙이고 서있는 나리와 마주쳤다.

《도사님!…》

나리는 주저주저하며 왕유를 불러놓고는 다음말을 잇지 못하고 쭈빗거렸다.

《나리야!…》

왕유는 저도 모르게 이전의 나리를 대하듯 불렀다.

《호괴는 인츰 돌아올게다.》

왕유는 호괴가 자기의 정보선들을 점검하느라 잠시 산동 등주로 떠나가있다는것을 상기하자 그를 만나지 못하고 떠나는 아쉬움을 금할수없었다. 이들의 성례를 치르어주지 못한것이 속에 걸렸다.

《그가 오면 페하께 너희들사이를 아뢰여라. 페하께서도 짐작은 하고계실거다. 왕후마마의 부탁이라 여쭈고 둘이 함께 행복하게 살거라. 끝까지 도성안에서 페하를 받들어야 하느니라.》

《알겠소이다, 도사님!》

《그리고… 은초를 부탁한다. 그 애에게 페하를 위하는 마음 일생 변치 말고 잘 모셔야 한다고 이 아비가 당부하더라고 꼭 전해라.

페하의 강녕이자 통일고려국의 부흥이란걸 잊지 말라고… 꼭!》

왕유는 목이 메여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잘 알아들었소이다, 도사님!…》

나리도 목이 메여 흐느끼였다.

《나는 때가 되였구나. 페하를 그만 괴롭히고 난 물러가련다. 후에 나를 찾느라 하지 말아. 난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걸 바라지 않는다. 그럼 부디 잘있거라.》

《도사님!…》

왕유는 나리의 흐느낌소리를 등뒤로 들으며 천천히 대궐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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