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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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정숙동지께서는 쪽걸상을 끄당겨 앉으시였다. 잠시후에 밖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리는듯 하였으나 홍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 기다리셨지만 여전히 무소식이였다. 이상한 생각이 드시여서 문을 열어보시였다. 문밖에는 고개를 떨군 맨머리바람의 홍구가 서있었다.

선뜻 들어서기가 주저되여 주밋거렸던 모양이다.

《왔으면 들어와야지. 왜 그러고 서있어요? 어서 들어와요.》

만나면 의분이 터지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예상외로 목소리가 부드러운데 스스로 놀라시였다. 잔뜩 주접이 든 그를 처음 대하시던 때의 감정이 은연중 되살아나셨던것이다.

지금의 모습이 그때를 련상시켰다.

무거운 발을 들어 힘겹게 문턱을 넘어선 홍구는 몸을 가누기가 힘겨운듯 지칫거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넙적 엎드리며 흐느꼈다.

《녀사님, 뵈올 낯이 없습니다. 이 부실한 놈이… 장군님을 받드는 훌륭한 군인이 되라시던 녀사님의 당부를 어기고죄를 지었습니다.》

《홍구동무, 눈물을 거두고 여기 걸상에 와앉아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의분이 담긴 엄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하지만 홍구는 그냥 꿇어앉은채 어깨를 떨며 흐느낄뿐이였다. 이런 꼴로 녀사를 뵈옵게 되니 땅속에라도 잦아들고싶은 모양이다.

《듣지 못했어요? 어서 앉아요.》

여전히 엄하게 이르시였다.

그제서야 홍구는 꺽꺽 갑시며 책상 건너편의 쪽걸상에 엉거주춤히 앉았다.

《무단외출을 해서 백주에 처녀에게 달려들었다는게 사실이예요?》

《네?!》

홍구는 소스라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게 사실이냐 말이예요?》

《무단외출을 한건 사실이지만…》

《나는 홍구동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요. 어서 말해봐요. 어떻게 된 사연인지…》

《녀사님께만은 모든걸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홍구는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사연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춘심이를 만난 그날부터 홍구의 가슴은 그에 대한 열렬한 감정으로 불타올랐다. 한달음에 달려가서 다시 만나고싶었다. 그러나 남포시내에 외출을 할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학원규률은 개별적으로 병영밖에 나가는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요일만은 례외적이였다. 조장의 승인을 받고 제한된 시간에 대동강에 나가 빨래를 하거나 목욕을 할수 있었다. 바로 어제가 일요일이였다. 홍구는 빨지 않아도 좋을 내의와 발싸개를 꿍져가지고 조장의 승인을 받았다. 그는 위수구역을 나서자 대동강이 아니라 남포시내로 나갔다. 빨래감은 돌아오는 길에 찾을셈으로 풀숲에 감추었다. 춘심이를 다시 만날수 있다는 생각으로 걸음은 나래라도 돋친듯 했다. 먼저번에 당부한대로 글을 배우고있는지.… 기양호가 그전처럼 춘심이를 구박한다면 단단히 혼뜨검을 내줄테다, 춘심이한테는 고개를 들고 버젓이 살라고 다짐을 할테다, 학원을 졸업하고 군관이 되면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할테다. 여러가지로 생각을 굴리며 춘심이가 얹혀사는 기양호의 집에 이르렀다. 그런데 대문앞에서 녀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나오는 통에 굳어져버렸다.

《야 이년, 네따위 종년이 글은 깨쳐 뭘해? 대서방을 볼테냐, 과거를 볼테냐. 다시 한글학교에 나가면 종아리를 꺾어놓을테다.》

그러자 춘심이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수 없었다. 입안의 소리로 응대를 하는가싶었다. 주인녀자의 목소리가 다시 터졌다.

《뭐, 뭐라구, 나도 사람이다?… 게다가 문맹퇴치를 반대하는건 반동이라구? 이렇게 기막힐데라구야.… 여보, 빨랑 나와서 이년이 뭐라고 지껄이나 들어봐요. 이 쌍년이 인제는 나를 반동으로 몹니다그려.》

벌컥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방안에 있던 기양호가 마당으로 달려나오는 모양이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응? 네년이 인제는 그따위 아가리질을 해? 내가 그만큼 신칙을 했는데 저녁마다 도적고양이처럼 대문을 빠져서 한글학교에 다닌단 말이냐? 이년, 버릇을 떼야겠다!》

으름장을 놓더니 막대기로 춘심이를 후려치는 소리가 울렸다.

홍구는 자기의 정수리에 타격이 가해지는듯 했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서려는데 악에 받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나한테 함부로 매질을 하던 때는 지나갔어요! 나같은 사람도 버젓이 살수 있는 새세상이 왔다는것을 알아두라요!》

먼저번 만났을 때 홍구가 깨우쳐준 말을 지금 춘심이가 용기를 다해 부르짖고있다. 그날에는 아무런 응대도 없이 조용히 듣고있었지만 심장에 새긴것이 분명했다.

《이년, 네 애비가 죽으면서 갚지 못한 빚이 얼마인지 아느냐. 해방이 되였다구 내앞에서 감히 엇설테냐?》

기양호의 그 목소리는 홍구에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기억을 깨우쳤다. 지난 겨울 평양의 길가에서 만났을 때 기양호는 홍구에게도 과거에 진 빚을 거들면서 단장으로 삿대질을 하였다. 그때에 축이 잡혀서 쩔쩔 매던 자신을 오늘에 생각하면 부끄럽기가 그지없었다. 그날의 자신에게 반발하듯 힘껏 대문을 걷어찼다. 빗장을 질렀는지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주먹이 터져나가도록 두드렸다.

《대문을 여시오!》

《누군데 큰 소리요?》

《만나면 알것 아니요. 두말 말고 여시오. 그렇지 않으면 부셔버리겠소!》

빗장을 뽑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열리였다. 단장을 들고있던 기양호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네놈이?…》

얼결에 한마디 하고는 군복을 입은 름름한 홍구의 모습을 훑어보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놀랍기도 했지만 어지간히 기도 질린 모양이다.

홍구는 와락 기양호의 손에서 단장을 앗아서 꺾어버렸다. 방금 춘심이에게 매를 안기였고 지난 겨울에 자기의 배를 쿡쿡 찌르던 단장이였다. 눈에서 불이 일었다.

《왜 춘심이를 때리는거요?》

기양호가 무엇이라고 변명을 하였지만 홍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드디여 이쪽을 알아보고 강렬한 빛을 뿜으며 날아오는 춘심의 시선이 온넋을 앗아갔다. 두 청춘의 눈길이 얽히며 불꽃을 날리였다. 행패를 당한 춘심의 처절한 모습이 홍구의 가슴을 찢었다.

《한글학교에 가는 춘심이가 뭘 잘못했다고 매를 드는거요?》

주인내외를 번갈아 쏘아보며 소리쳤다.

《함부로 호령질을 하는걸 보니 그사이 보안서원이라도 된것 같구나.》

기양호가 홍구의 군복차림을 새삼스레 훑어보며 뇌까렸다.

《아니요, 난 평양학원 학생이요!》

《어느새 춘심이년과 눈이 맞아서 찾아왔느냐?》

홍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성큼성큼 춘심이에게로 다가가서 손목을 이끌었다. 대문을 나서며 어리둥절한 기양호내외를 향해 한마디 뒤를 다지였다.

《춘심이한테 다시 행패질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소. 나도 인제는 총을 잡았소!》

홍구는 춘심이를 데리고 지난번에 만났던 느티나무밑으로 갔다.

《찾아주어서 고마워. 인젠 그것들이 전처럼 나를 구박하지 못할거야. 거기서 나를 좋아한다는걸 아니까. 지난번에 만난 다음부터 나는 마음속에 기둥이 생긴것 같애. 그래서 오늘도 그들과 맞섰지.》

자리에 앉은 춘심은 정겹게 속삭였다. 눈물자욱이 남아있는 눈에 애젊은 미소가 피여올랐다.

《잘했어. 우리 세상이 되였는데 두려워할게 없단 말아야!》

처녀와는 대조적으로 홍구의 입에서는 격한 목소리가 튀여나갔다. 춘심이의 목덜미에서 벌겋게 부어오른 매자국을 보니 저도모르게 또다시 분이 치밀었다.

춘심은 적삼깃을 올려서 목덜미를 가리웠다. 그리고는 손거울을 꺼내들고 헝클어진 머리를 비다듬었다. 이런 조건에서도 사랑하는 총각앞에 되도록 곱게 보이고싶어하는것은 처녀들의 본능이라고 할수 있었다.

《한글학교에 간다고 매질을 하다니, 정말 고약해.》

홍구는 여전히 기양호내외에 대한 분격에 잠겨있었다.

《단순히 내가 글을 배우러 다닌다고 그러는것 같지는 않아.》

《다른 무슨 까닭이 있나?》

《내 짐작인데 말이야. 주인이 무슨 꿍꿍이를 하는것 같애. 이따금 밤에 낯선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그들의 술상은 꼭 로친네가 차리게 하지. 나는 얼씬도 못하게 하구. 그리고 밖에도 나다니지 못하게 하구. 장마당에 갔다가 조금 늦어와도 누굴 만났느냐구 따져묻군 했어. 내가 한글학교에 가서 집안일을 퍼뜨릴가봐 못 가게 하는 눈치야.》

공간을 겨눈 춘심이의 눈에는 기양호에 대한 의혹과 경계심이 비끼였다. 잠시후에 홍구에게 머리를 돌리였다.

《일전에 말했지. 기도선의 총에 맞았댔다구. 다리의 어데를 상했댔나?》

그날에는 상봉의 기쁨이 너무도 커서 그것까지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었다. 헤여진 후에야 상처의 후과가 근심되였다.

《바로 여기야.》

춘심은 홍구가 가리키는 허벅다리에 시선을 박았다. 마음같아서는 군복가랭이를 걷어올리고 상처자국을 제눈으로 보고싶었고 살뜰히 쓰다듬어주고싶었다. 하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홍구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며 조심스레 물었다.

《상처가 도지지 않나?》

《일없어.… 전에도 말했지만 놈들을 잘 감시하라구. 놈들에게서 내 기어이 피값을 받아내겠어.》

춘심은 결연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홍구는 해가늠을 해보았다. 저녁해가 서켠하늘로 사라져가고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도 많이 흘렀는가? 해가 한창 길어진 이무렵이니 그렇지 겨울이라면 주위에 어둠이 덮인지 오랬을것이다. 초조한 그는 춘심이와 헤여졌다. 진땀을 흘리며 장달음을 놓았으나 학원에 이르렀을 때는 점검시간이 지난 뒤였다. 저녁식사때부터 돌아오지 않는 홍구를 두고 학원에서는 소동이 일었다. 때늦게 나타난 그를 두고 지휘관들과 동료들이 격분을 터쳤다. 어데가서 무엇을 했는가고 따져묻는 지휘관들앞에서 그저 잘못했다고만 대답했다. 춘심이를 만난 사실이 부끄러웠고 그대로 실토하면 죄가 더 엄중해지리라고 생각했다.

《녀사님앞이니 모든걸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사연의 세부까지를 숨김없이 그려보이며 긴 이야기를 마친 홍구는 김정숙동지앞에 깊이 머리를 숙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의 머리에 시선을 겨누신채 한동안 침묵하시였다. 홍구와 춘심이의 해방전관계는 이미 들으신적이 있었다. 헤여져 오랜 세월 그리움이 사무쳤던 처녀를 두번다시 만나보고싶었던 홍구의 심정은 리해되시였다.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과정에 있었던 일들은 적들과의 투쟁에서 유익한 시사를 주고있다. 하지만 홍구가 학원규률을 엄중하게 위반한것은 사실이다. 동정과 의분이 교차되는것을 의식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홍구동무, 나는 동무가 다시는 그렇게 규률을 위반하는 일이 없이 학원에서 성실히 배우리라고 믿고 돌아가겠어요.》

《알겠습니다, 녀사님. 제 두번 다시야…》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정철의 사무실로 돌아오시였다. 그때까지 조정철과 심태산은 김명화와 회포를 나누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들에게 홍구의 사연을 말씀하시였다. 호기심을 가지고 듣고난 그들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였다.

《일이 그렇게 되였댔구만. 평소에는 순박하기가 이를데 없는데 사랑의 유혹앞에서는 시간관념조차 잃었는가 보오.》

심태산이 하는 말이였다.

《정숙동지앞이니까 그가 진실을 말했구만. 알고보니 리해가 가는 일이요. 짓밟히던 그들의 사랑을 소중히 아껴주고싶은 마음도 없지 않소. 정숙동지가 충분히 교양을 했을테니 그를 영창에서 내놓는게 좋겠소.》

조정철이 의향을 묻듯이 심태산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번에 만나서 그를 특별히 교양한것이 없습니다. 진실을 캐여봤을뿐입니다. 규률을 위반한것자체는 엄중한것만큼 학원에서 규정대로 엄격히 처벌했으면 합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명백히 말씀하시고 화제를 돌리시였다.

《이번 사건으로 학원에서 보다 심각히 주의를 돌려야 할 문제가 있는것 같습니다.

남포시녀맹에서 외곡된 사실을 들고와서 항의를 했는데 필경 여기에는 나쁜 놈들의 작간이 있을것입니다. 나쁜 여론을 퍼뜨려서 학원의 위신을 저락시키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을수 있습니다. 사실을 과장외곡해서 시녀맹을 부추긴것은 의심할바없이 기양호라는자입니다.》

조정철과 심태산은 시선을 마주쳤다. 그이의 예리한 판단에 놀랐다.

《듣고보니 과연 그럴수 있습니다. 당위원회에서 사람을 남포에 파견해서 시녀맹에 진실을 확인해보고 불순한 여론을 막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래야 군민관계도 훼손되지 않을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그 일을 성옥동무에게 맡겼으면 합니다. 녀성이니까 누구보다 그가 잘 처리할것입니다. 우린 점심시간에 그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답니다. 그때 내가 직접 말하지요.》

《참, 그게 좋겠습니다.》

반기는 기색으로 조정철이 말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김명화를 데리고 성옥의 집으로 향하시였다.

점심때가 되여오고있었다. 그이께서는 심중한 생각에 잠겨 학원구내를 걸으시였다. 수상보안대에서는 금괴도난사건이 일어나고 이 학원으로는 외곡된 여론이 미쳐오고있다. 계급적원쑤들은 우리의 정규군건설을 방해하려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얼마나 악랄하게 책동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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