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회)

제 3 장

8

 

《뉘더라?》

정신옥은 사무실에 들어서는 청년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웃했다.

웃음진 얼굴로 인사를 하는걸 보아서는 초면이 아니라는듯싶었다. 그러나 어데서 만났던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마가 좁고 하관이 퍼진 청년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바투 다가섰다.

《한룡백이라고 부릅니다. 서울에 나갔을 때 정선생님의 아드님을 바로 제가 찾았댔습니다.》

《그럼 지종수군의 밑에서 일을 하겠군.》

《그렇습니다.》

《어서 이리와 앉으시오.》

정신옥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룡백을 반겨맞이했다.

《젊은이가 수고를 해서 그때 우리 기환의 소식을 알게 되였는데 진작 찾아보지 못해서 미안하오.》

진실로 미안했다. 지종수가 지시를 주기는 했겠지만 한룡백이 애를 쓰지 않았다면 기환의 소식을 몰랐을것이다. 신문 한귀에 난 기환이의 이름을 보고 행처를 캐여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한룡백의 관심과 수고를 헤아릴수 있었다.

《그래 기환동무는 잘 있습니까?》

《잘 있네.》

《서울에서 들어온 <조선국군학교>학생들이 모두 평양학원에 편입되였다는데 기환동무도 그리로 갔습니까?》

《아닐세. 평양학원으로 가겠다는걸 내가 못 가게 하였네. 그래서 지금 시민청에서 일을 보네.》

정신옥은 한룡백에게 무엇인가를 대접하고싶었으나 사무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번 우리 집엘 오게. 기환이도 만나면 무척 반가워할걸세.》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나?》

친절히 물었다. 한룡백은 웃음을 가시고 다소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선뜻 대답하기를 서슴어하는 눈치였다.

《나한테 무슨 부탁이 있으면 서슴없이 말하게. 나도 신세갚음을 해야 할게 아닌가?》

한룡백은 출입문쪽에 피끗 눈길을 주더니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경상골에 있는 미군대표부에서 오늘 저녁 선생님을 초청합니다. 스미스각하가 선생님을 한번 꼭 뵈옵고싶다고 했습니다.》

정신옥은 뜻밖의 일에 놀랐다. 시상공부에서 남조선과 물자교역을 하느라고 미군대표부와 련계가 있다는 얘기는 지종수에게서 들었다. 한룡백이 스미스의 심부름을 온데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놀라운것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기를 초청한다는 사실이였다.

《무슨 일로 그 사람이 나를 찾는다나?》

《그건 모르겠습니다. 스미스씨가 그것은 저에게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정신옥은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도 스미스가 초청하는 까닭을 알수 없었다.

《여보게 젊은이, 돌아가서 이르게. 나는 미군대표부의 초청을 받을 까닭이 없으니 안 간다고 말이네.》

《그러면 스미스각하가 몹시 섭섭해할겁니다.》

《스미스라는 미군장교의 군사칭호는 뭔가?》

《중좝니다.》

《소장쯤 된다면 금사를 후하게 쳐서 각하라고 할수 있겠지만 중좌야 무슨 각하겠나. 그건 그렇고 나이는?》

《딱히는 모르겠는데 마흔살쯤 되였을겁니다.》

《내 왜 그런걸 묻는가 하면 스미스라는 미군장교가 백발을 얹은 나더러 자기를 찾아오라는것이 비위에 좀 거슬려서 하는 말이네. 아래사람이 웃사람을 찾아야 인사가 옳지. 그리고 우리 나라 례절에는 손님이 주인을 찾게 되여있지 않나. 모처럼 심부름을 온 젊은이한테는 안됐네만 그 사람이 정 만나고싶다면 이리로 오라고 하게. 나는 아무때고 만나줄 용의가 있네.》

한룡백은 서운한 기색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저녁녘이였다.

스미스가 챨리하사를 데리고 정신옥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하사는 량손에 묵직한 지함을 들었다.

《북조선민주녀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선생, 안녕하십니까.》

스미스는 한자도 빼지 않고 긴 직함을 정중히 부르며 거수경례를 하였다.

한룡백으로부터 들은 소리가 있어서 서뿔리 대할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듯싶었다.

정신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가갔다.

《이렇게 찾아주어 반갑습니다.》

스미스는 빠른 눈길로 정신옥의 자태를 훑어보았다. 흰 모시치마에 은초사적삼을 단정히 입은 조선로파의 그 어디에 그처럼 록록치 않은 자존심이 깃들어있는가를 가늠해보는듯 했다.

《앉으시오.》

정신옥은 걸상을 권했다.

스미스와 앞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그는 아직 서있는 챨리를 띄여보고 손짓을 했다.

《하사도 거기에 앉소.》

스미스옆에 빈 걸상이 있었다.

《부인, 감사합니다.》

챨리는 얼굴에 웃음을 그리며 깍듯이 조선말로 인사를 차렸다.

정신옥은 그가 조선말을 알고있다는것이 놀라왔다.

스미스가 눈짓을 하자 챨리는 밖으로 나가며 정신옥에게 또 한번 고개를 숙여보이였다.

《저 사람은 어렸을 때 조선에서 자랐습니다.》하고 스미스는 설명을 했다.

《아버지가 대구에 와서 10여년간 선교사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말을 잘 압니다. 챨리는 지금 내 통역으로 복무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를 보냈습니까?》

《나는 부위원장선생이 영어를 잘 아신다는걸 알고있습니다. 굳이 통역을 거쳐서 불편스레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을것입니다. 그 무슨 외교적면담도 아닌 사담을 나누는데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스미스는 외교가다운 표정으로 눈에 웃음을 담았다.

《좋습니다. 공식적이든 사적이든 어느 나라 말로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는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무슨 내용을 말하는가 하는것이 중요하지요.》

정신옥은 스미스를 떠보듯이 겨누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조금도 조심을 두거나 긴장을 느끼지 않았다. 일제시기 고위정객들을 상대로 거침없이 론전을 벌렸던 그였다. 하물며 자기 사무실에 불러들인 미군중좌쯤은 손아래손님으로 치부했다. 다만 년장자다운 너그러움과 주인다운 례절을 잃지 않으려고 했을뿐이다.

《어제 저녁 모처럼 초청을 했는데 오시지 않아서 우리는 좀 섭섭했습니다.》

《우리 나라 례절에 어긋나는 당신의 초청이 나는 불쾌했습니다,

얼마전에 쏘련군사령부 어느 부서에서도 나를 부른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후에 쏘련군대좌가 찾아와서 나와 면담을 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였다. 10여일전에 쏘련군대좌도 이 사무실에서 만났었다.

《선생님은 참 자존심이 강하십니다.》

스미스는 웃으면서 고개를 기웃했다.

《여보시오 중좌, 우리 나라에 대해서 깊은 리해가 없는것 같은데 조선사람은 워낙 자존심이 강합니다. 자기의 존엄을 위해서는 생명을 바치는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령토가 작은 나라이지만 자기의 존엄을 귀중히 여길줄 알기때문에 빈번한 외세의 침략도, 일제의 악랄한 동화정책에도 민족의 얼을 지켜왔습니다. 중좌도 쏘미공위에서 일을 하는것만큼 이 점을 알아두는것이 좋겠습니다.》

정신옥은 깨우치듯 친절히 말했다.

스미스는 두팔을 쩍 벌려보이였다.

《선생은 어제 저녁의 초청을 오해하셨습니다. 저는 면담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생에게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연회를 차리려고 했던것입니다.

선생은 태평양전쟁에서 수많은 우리 미군 병사들의 생명을 구원해주었습니다.》

《도대체 그것은 무엇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까?》

정신옥은 어리둥절했다.

《선생은 <황군>에 징모되는 수많은 조선청년들을 돌려세웠습니다. 이것은 곧 <황군>과 대결하던 우리 미군을 크게 도와준것으로 됩니다. 나는 이 사실을 미국무성에도 통보했습니다. 그래서 때는 늦었지만 선생을 위해 환영연회를 준비했던것입니다.》

연회를 준비하고 초청을 했다는것은 거짓이였다. 스미스는 한룡백의 말을 듣고 처음은 모욕감을 느꼈다. 정신옥이라는 조선의 로파가 그렇게도 코대가 높은가? 《해방군》장교의 호출에 토착민로파가 불응하다니.… 하지만 정보활동에는 감정이 아니라 랭철한 리성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나 정신옥과 같은 인물을 손에 넣어야 했다. 스미스는 오랜 정보활동에서 상태의 어느 구석이 제일 약하며 어느 부위를 어루만져야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를 알고있었다. 그래서 방금 펴낸 말을 꾸미였던것이다.

《그런 성의였다면 내가 가볼걸 그랬습니다. 성의를 오해했던 나를 리해하시오.》

아닌게아니라 정신옥은 저으기 감동했다. 도고하고 기개도 높았지만 허위와 교활성을 꿰뚫어보는 눈은 밝지 못했다.

스미스는 군복주머니에서 정방형의 작은 곽을 꺼냈다.

《미국에서도 이름있는 <파카>만년필입니다.》

그는 방바닥에 놓인 지함들을 가리키며 계속했다.

《저기 한 지함에는 포도주가 들어있고 다른 지함에는 통졸임이 들어있습니다. 우리의 성의이니 받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정신옥은 일어서서 스미스의 손을 잡아주고 다시 앉았다.

방안에 떠돌던 미묘한 경계심이 가셔지고 화기가 돌았다.

《나는 조선에 정신옥선생과 같은 녀성반전평화투사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비록 때는 늦었지만 이렇게 알게 되여 정말 기쁩니다.》

스미스는 선망어린 표정을 솜씨있게 꾸며보였다.

《지나친 말씀이요. 나는 어마어마하게 반전평화투사라고 불리울만 한 사람이 못됩니다. 다만 아들딸들에게 총칼을 메워서 전장으로 내보내기를 원치 않는 어머니일뿐이고 사랑과 평화가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원하는 한 녀성일뿐입니다.》

《지나친 겸손입니다.… 아무튼 나는 선생의 평화주의적리념에 경의를 드리고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조선반도의 정치정세는 선생의 그 리념과는 어긋나게 번져지고있습니다.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지금 정규군창설에 박차를 가하고있습니다.》

스미스는 자연스럽게 이쯤 변죽을 울리고 정신옥의 낯색을 살폈다. 정신옥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내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나는 지금 형편에서 저마끔 군대를 건설한다면 동족끼리 류혈을 빚어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듣자니 남조선에서도 리승만, 김구, 리범석 등이 군사학교들을 세웠다고 합니다. 조병욱은 왜정시절보다 경찰을 더 늘이고 경찰학교를 내왔다고 합니다. 북에서건 남에서건 현조건에서는 통일적인 림시정부수립에 힘을 합쳐 매진을 해야 합니다. 이런 때에 왜서 총칼부터 잡으려고 서두르는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나는 선생이 북의 군건설을 저지시키는데 보다 적극적인 활약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라의 오늘과 장래를 진심으로 우려하시는 선생이 지금이야말로 반전평화투사로서의 용기를 발휘할 때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녀자들의 눈물은 총칼보다 더 위력한 힘을 가질수 있습니다. 모든 어머니들과 안해들의 눈물이 강물을 이루면 아무리 맹렬히 달리던 천군만마도 그 강을 건느지 못할것입니다.》

이 순간에 정신옥은 김정숙녀사께서 미제의 침략적본성을 깨우쳐주시던 말씀을 상기했다. 지그시 두눈을 감고 그때를 되새겨본 그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내 한가지 묻겠습니다. 미군정은 어째서 여러 갈래로 군사학교를 내오고 경찰력을 엄청나게 늘이는 남조선의 현실을 묵인하고있습니까?》

불의적인 역습에 스미스는 한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인차 자신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미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정치인들이 군경의 확대에 열을 올리고있습니다. 우리 미국은 어디까지나 <해방자>로서 이 땅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고있습니다.》

《그렇다고 합시다. 그런데 나는 트루맨대통령이나 미국무장관을 만난다면 강력히 항의하고 호소하고싶은것이 있습니다. 미국은 응당 명망높은 독립운동자들인 려운형선생이나 김규식선생을 남조선정계에 내세워야 했습니다. 하필 리승만을 끼고 능력있고 량심있는 그 선생들을 배제하는 리유를 도무지 알수가 없습니다.》

《리승만박사도 잘 아십니까?》

《상해림정에 <애국부인회>에서 모금한 돈을 전하러 갔을 때 만났던 일이 있습니다.

후에 그에 대한 얘기를 듣기도 했지요. 리승만은 질투심이 강한 야심가입니다. 권력의 자리를 위해서는 그 무슨 짓도 할수 있는 위인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 통일정부수립을 외면하고 이른바 <반탁>을 요란스레 떠들면서 분명히 남조선만에서라도 권력의 자리에 오르려고 꾀하는데 미군정은 왜 그를 제지시키지 못합니까?》

《하지중장은 <반탁>소요를 그만두라고 몇번이나 경고했습니다.》

《진심으로 권고한다면 그럴수 없습니다. 남조선에 미군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그 누구의 은근한 사촉을 받지 않고서는 그가 그처럼 날뛸수 없습니다. 남조선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보면 미국측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체1차 쏘미공위가 파탄된 경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북에서는 거기에 참가할 정당사회단체를 10여개밖에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에서는 제출된 정당사회단체가 수백개나 되며 여기에 망라된 당원과 회원수는 총인구수를 훨씬 릉가했습니다. 그것을 쏘련측은 허용할수가 없었고 그래서 파탄되였습니다.

물론 명색뿐인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내온데는 남조선사람들자체에도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치하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것만큼 그것이 단순히 자률적인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것 역시 그 누구의 사촉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스미스의 얼굴에서 내처 떠돌던 웃음이 가셔지고 재빛눈동자에 긴장한 광채가 얼핏 스쳤다.

《알고보니 선생은 우리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짙은 의혹과 불만을 가지고있는것 같습니다. 뜻밖입니다.》

《중좌, 노여워마시오.》

정신옥은 명백한 어조로 계속했다.

《나는 미국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좋은 감정을 품어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해방후 남조선에서 벌어진 제반사태를 놓고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의혹을 가지게 되였고 나아가서는 강한 의분을 느끼게 되였습니다.》

그는 김정숙녀사의 깨우치심을 받은후 새로운 시각으로 미군강점하의 남조선현실을 투시해보았던것이다.

스미스는 쓴입을 다시며 턱을 쓰다듬었다. 징신옥에게 품고온 자신의 기대가 여지없이 허물어지는것을 깨달았다.

정신옥은 너그러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여보시오 중좌, 모처럼 나에게 성의를 안고온 당신에게 정치론담으로 불쾌감을 주었다면 용서하시오. 당신은 해방후 내가 만난 첫 미군장교입니다. 그러다보니 평소에 미군정당국자들에게 하고싶던 말을 당신에게 하였습니다. 상부의 처사와는 달리 당신은 우리 나라의 자주독립국가수립을 위해서 진심으로 선의를 다하리라고 믿습니다.》

스미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였다. 응답을 해야 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품을 들여서 여러가지로 마음의 준비를 갖춘 끝에 찾아왔으나 공연한 걸음이 아니였던가 하는 생각이 가슴을 짓눌렀다. 듣던바대로 정신옥은 역시 간단한 녀자가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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