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3 장

6

 

《부관장의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을 당신이 직접 조직했소?》

지종수는 싸늘한 눈길로 한룡백을 지켜보았다.

한룡백은 버젓이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실은 저택을 기습하려고 했댔는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부관장의 집을 태워버렸지요.》

《저택을?!

지종수의 눈이 커졌다. 엄청난 일에 부닥친듯 일순 놀라는듯하더니 노기어린 어조로 따져물었다.

《그런데 왜 내 승인도 없이 그 일을 벌렸으며 여적 보고하지도 않았는가?》

지종수는 어저께야 때늦게 방화사건이 있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한룡백은 눈시울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그는 이미전부터 지종수를 하찮게 여겨왔다. 적극적인 실천보다 반공리념 설교를 앞세우면서 지사연하는 태도가 역겨웠다. 얼굴이 희고 손가락이 가는 저런 인테리겐챠가 어떻게 망책으로 되였는가. 콩까풀을 씌운듯 한 스미스의 재빛눈은 정말 사람을 볼줄 몰랐다. 망책으로서는 지종수의 됨됨이 여러모로 부족했다. 테로, 살인, 방화와 같은 폭력적인 일을 꾸밀만 한 능력은 더구나 없었다. 안정된 조건에서 반공선전이나 하는데 적당한 사람이다. 단지 미국류학을 하였다는 경력때문에 이 한룡백이가 응당 타고앉아야 할 망책의 자리를 그가 차지했다. 진작 이렇게 생각해왔는데 몇달이 지나자 스미스도 지종수에게 실망을 느낀듯싶었다. 눈치를 보니 큰일을 꾸밀만 한 인물이 못된다는것을 깨달은것이 분명했다. 물론 스미스의 입에서 직접 지종수에 대한 실망이나 불만의 말을 들어본 일은 없었다. 그러나 부책임자인 한룡백이를 조용히 불러서 은밀한 과업을 직접 주군 했었다. 이렇게 되자 한룡백은 지종수를 우습게 알게 되였다.

《왜 대답이 없는가?》

지종수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한룡백은 피끗 치떠보고 외면을 했다.

탕! 지종수는 주먹으로 책상을 울리였다.

《우리 망에서 상부를 속이거나 명령을 거역할 때에는 어떻게 된다는것을 모르지 않겠지?》

한룡백은 가슴이 서늘했다. 혈서로 맹세한 내용에는 상부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조항도 들어있다. 만일 어길 때에는 쥐도새도모르게 저승길을 걸어야 했다.

《지선생, 사실은 저

《사실이 어쨌다는건가?》

《스미스각하가 직접 저에게 임무를 주었던겁니다.》

지종수는 놀라지 않았다. 언젠가 스미스는 북조선지도부에 테로의 화살을 겨냥하는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지종수는 그것만은 량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자기의 어깨너머로 한룡백을 불러서 그 과업을 준 모양이다. 배신감이 끓어올랐으나 한룡백에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지종수는 앞상에 박았던 눈길을 들었다.

《룡백군, 리념이 다르다고 해서 민족의 영웅을 해하려 드는건 무서운 일이요. 김일성장군은 우리 겨레가 낳은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요. 이것은 적아의 벽을 넘어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진실이요. 진실을 인정할줄 알고 력사를 두렵게 생각할줄 알아야 하오. 우리는 적들에게 무자비해야 하지만 후날 력사의 규탄을 받을 일은 삼가해야 하오.》

한룡백은 아무 말도 없었다. 놀라듯 모밀눈을 크게 뜨고 옆으로 퍼진 하악골을 한번 실룩했을뿐이다.

지종수는 살결이 흰 얼굴에 심각한 빛을 떠올리며 물었다.

《지난 3. 1인민봉기 기념행사때 김일성장군이 오르신 주석단에 폭탄을 던진 사건도 룡백군이 꾸민건가?》

《아닙니다. 서울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그 사건을 꾸몄댔는데 저는 다만 길안내와 같은 약간의 협조를 했을뿐입니다.》

《그때에도 진정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댔소. 일제군경이 오랜 세월을 두고 싸우면서도 어쩌지 못했던 김일성장군을 우리 겨레중 그 누가 허하였다면 이것이야말로 민족의 비극이고 수치란 말이요. 알겠소?》

무지한 한룡백은 지종수의 말뜻을 알수 없었다. 이번에도 침묵했다. 그를 안타까이 지켜보던 지종수는 길게 한숨을 내불고 감회깊이 계속했다.

《나는 김일성장군을 직접 만나뵈온 일이 있소.》

그것은 지난해 가을 어느날이였다.

지종수를 찾아온 고모는 여느때없이 주름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조카도 김일성장군부대 정치위원이 평양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나?》

흥분된 어조로 느닷없이 물었다. 기림리에서 맥주집을 경영하는 고모는 소문에 밝았다. 많은 손님들을 상대하기때문이다.

《전 아직 못 들었습니다.》

지종수로서는 처음 듣는 소식이였다.

김일성장군께서는 며칠후에 평양에 입성하신다고 하네. 이제 김장군께서 입성하시면 내 크게 연회를 차리려고 하네. 오늘 저녁 정치위원을 만나서 가슴에 품고있는 간절한 소청을 전하려고 하네. 내 진작 독립운동지사들을 위한 위로연 같은것을 한번 베풀자고 생각해오던터였네. 마침 정치위원이 평양에 왔다니 더는 미루지 말고 오늘 저녁 위로연을 차리자고 하네. 그러니 자네가 조만식선생한테 내 뜻을 알리게. 정치위원을 모시고 참가해달라고 말일세. 듣자니 정치위원과 조만식선생사이에 어제 면담이 있었다네. 면식이 있는터이라 도정치협상회를 이끄는 조만식선생이 청을 드리면 정치위원도 사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네. 내 사오십명가량 대접할 음식을 푼푼히 마련하겠네. 다른 독립운동자들도 되도록 많이 데려오라고 이르게.》

지종수는 고모의 부탁을 받고 조만식을 찾아갔다. 조만식은 종수를 반겨맞이했다. 아득한 년령의 차이가 있었지만 즐겨 정치론담을 나누는 각별한 사이였다. 조만식은 민주당중앙위원회 위원들중에서 제일 젊은 지종수를 남달리 사랑했다. 지종수로부터 찾아온 사연을 듣고난 조만식은 감격해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수군의 고모는 참으로 뜻이 깊은 녀자야. 그 심성이 여북 고마운가. 돌아가서 이르게. 오늘 저녁 일이 튀지 않도록 하겠네. 역시 독립운동에 나섰던 녀자니까 그런 궁냥을 하거던.》

조만식이 일본상품을 반대하고 국내물산을 장려하는 운동을 벌릴 때 고모는 남편과 함께 그 운동에 적극 나섰다. 병으로 남편이 죽은 후에는 홀로 맥주집을 경영하면서 푼푼이 모은 돈을 조선인학생들을 위한 사립학교건설에 아낌없이 기증했다. 후대들의 가슴속에 민족의 얼을 심어주는 교육을 진흥시키면 언젠가는 독립을 이룩할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조만식의 말대로 독립운동에 나섰던 뜻이 있는 녀자라고 할수 있었다.

이날 저녁 예견대로 《기림맥주집》 2층홀에는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자들이 모이였다. 지종수는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은 해방의 기쁨에 용해되여 좌우익의 대립이 표면화되지 않던 때였다. 김용범, 리주연, 김광진을 비롯한 좌익계독립운동자들의 얼굴도 보이였다. 좌석이 정돈된 잠시후였다.

조만식이 정치위원을 모시고 장내에 나타났다. 장내의 시선이 일시에 정치위원에게로 쏠리였다. 군복차림의 후리후리한 키에 준수한 얼굴모습은 모든 사람들에게 황홀한 느낌을 자아냈다.

조선치마저고리를 단정히 차려입은 고모가 정치위원을 맞이했다.

《이렇게 친히 참석해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김일성장군님은 백전로장이시라는데 정치위원어른은 이렇게 젊었구만. 백두밀림과 만주광야를 누비며 왜적을 쳐부시면서 고생인들 오죽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내 오늘 저녁 다른 독립운동자들과 더불어 정치위원어른을 위해서 위로연을 차렸습니다. 변변치 못하다고 허물하지 말고 많이 들어주세요.》

정치위원은 고모의 두손을 포개여잡고 가볍게 머리를 숙이였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제 이리로 오면서 들었습니다. 어머니도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셨다더군요. 고생이야 왜놈의 학정밑에서 어머니도 많이 하셨겠지요. 실상 위로연은 년세도 높고 독립운동도 오래 하신 어머니와 같은분들에게 저와 같은 젊은 사람들이 차려드려야 할것인데 인사가 바뀐것 같습니다.》

감격한 고모는 대뜸 눈굽에 물기가 어렸다.

《원 무슨 말씀을… 내 이제 김일성장군께서 입성하시면 보다 성대한 연회를 차릴 생각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김일성장군께 이 늙은것의 심정을 아뢰여서 그날의 연회가 성사되도록 힘써주세요.》

정치위원은 응대없이 그윽한 시선으로 마주볼뿐이였다.

《그럼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고모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자기는 이 좌석에 참가할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자 정치위원이 고모의 팔굽을 잡았다.

《어머니, 제곁에 앉으십시오. 평양에 와서 어머니를 만나보니 친어머니를 만난것만 같습니다.》

《어머니가 안계시는가요?》

《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맥주집며느리가 얼른 걸상 하나를 가져왔다. 고모는 정치위원의 곁에 앉았다. 그는 어머니다운 정애가 함뿍 흐르는 시선으로 정치위원을 바라보며 무랍없이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무슨 말인가 살뜰히 하려는데 조만식이 두루마기앞섶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러분, 음식을 들기에 앞서 김일성장군부대 정치위원 김영환장군의 새 조선건설경륜을 들어봅시다. 나는 어저께 해방된 내 나라의 앞날을 두고 김영환장군과 허심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정치위원의 뜻이자 곧 김일성장군의 뜻인줄로 압니다. 새 조선건설의 경륜이 하도 명확하고 정당해서 나는 내심 탄복하였습니다. 나 혼자 듣는것이 아쉬웠는데 마침 이렇게 여러분과 자리를 함께 하는 기회가 마련되였습니다.》

만식은 정치위원에게 머리를 돌리고 청을 드렸다.

《어서 사양말고 말씀해주시오.》

정치위원은 전혀 예견치 않았던 일에 부딪친듯 일순 난색을 지어보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과 이렇게 만나게 되여 참으로 반갑습니다. 우리는 백두산과 이역에서 일제와 싸우면서 국내인민들의 반일투쟁에서 커다란 고무를 받았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과 만나기는 처음이지만 모든분들이 나라를 찾기 위해 어떻게 투쟁하였는가는 진작 잘 알고있습니다. 반일독립성전의 한길에서 항시 그립던 여러분들과 상봉을 하게 된 이 순간의 감개는 실로 무량합니다. 우리 부대 모든 지휘관들과 대원들의 심정을 대표하여 여러분에게 열렬한 인사를 보냅니다.》

홍조가 비낀 겸손한 표정으로 보내는 인사에는 듣는 사람의 가슴을 흔드는 진정이 있었다. 좌중은 누구나 눈을 슴벅이며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

정치위원은 박수가 멎자 친근한 어조로 계속했다. 그 무슨 연설을 한다기보다 헤여져 그립던 사람들과 쌓였던 회포를 나누는듯 했다.

《여러분!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성취한 우리앞에는 부강한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야 할 새로운 투쟁과업이 나서고있습니다.》

정치위원은 당면한 투쟁과업으로 인민정권수립과 민족간부양성, 정규군창설을 제시하고 모든 애국적민주력량의 통일단결에 그 과업을 실현하는 방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끝으로 모두가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해 힘과 열정을 다 바쳐 투쟁할것을 열렬히 호소했다. 격동된 청중은 또다시 박수를 보냈다.

지씨의 며느리와 딸이 연회탁의 잔들에 술을 따랐다. 연회는 시종 화기에 넘치는 분위기속에서 벌어졌다.

후날 지종수는 김일성장군님의 개선연설을 접하면서 이 저녁을 상기하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때 정치위원으로 소개되던분이 바로 김일성장군님이시였다! 전체 인민앞에 개선인사를 보내시기전에는 겸허하게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지종수는 회고담을 마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 저녁에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정치위원이 바로 김일성군이 아니실가 하는 생각을 품었다고 했네. 아무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여도 어쩔수없이 내비치는 훌륭한 인품과 인격에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으니까!》

한룡백은 의혹의 눈으로 지종수를 바라보았다. 전날의 지종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듯 했던것이다. 반공을 부르짖는 사람의 입에서 김일성장군에 대한 칭송이 쏟아져나오고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리해할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야 알수 없었다. 초보적인 민족적량심이나 정의감도 없는 그로서는 그럴수밖에 없었다.

《후에 김일성장군님이 공산주의자이시라는것을 알았을 때말이네. 그처럼 존경과 매혹이 가던분이 우리와 리념이 정반대라는것이 말할수없이 아쉽고 서운했네. 조만식선생도 나와 같은 심정이였다고 생각하네. 나역시 <반공>리념은 가슴속에 확고히 자리잡고있네. 그러나 나는 우리 조직을 이끌만 한 재목이 못되네. 그 일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네. 나는 머지 않아 서울로 나갈 결심이네. 그러니 앞으로는 룡백군이 우리 조직을 이끌어주게.》

한룡백은 귀가 번쩍 열리였다. 하지만 선뜻 믿어지지 않아서 진심인가를 확인하듯 지종수의 생각깊은 눈동자를 직시했다.

지종수가 계속했다.

《그 일에는 여러모로 자네가 나보다 훨씬 낫네. 나는 그것을 이미전부터 인정하고있었네.》

《지선생,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한룡백은 가슴이 설레였다. 성취되는 직위욕이 그를 흥분시켰다.

《내가 서울로 나가기전에 우리 망에서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일이 한가지 남아있네.》

지종수는 엄숙한 낯빚으로 뒤를 이었다.

《공산당에서 추진하는 군대건설을 저지시키는것은 우리 망의 급선무이네.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면 장차 우리 민족앞에 무서운 후과가 초래되네. 재삼 이것을 명심해두게.》

《알겠습니다.》

《남포에서 올라온 정보에 의하면 그곳에 수상보안대가 조직되고있네. 수상보안대란 곧 해군을 의미하네. 동해쪽에도 수상보안대가 조직되네. 그런데 해군건설은 륙군건설보다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네. 해군의 기술장비는 륙군에 비할바가 아니니까. 남포수상보안대에서는 필요한 자금을 해결하려고 제련소에 있던 적산금괴를 가져갔네. 그 금괴가 아직은 구매되지 않고 수상보안대장의 철궤속에 있네. 정확한 통보네. 그 금괴를 어떻게 하나 서울로 빼돌려야겠네. 그 일이 성공되면 군의 공적은 후세에 길이 남을걸세.》

《스미스각하와 이미 의논이 있었습니까?》

《물론이네. 나는 스미스씨에게도 룡백군이라면 이 일을 해낼수있다고 했네. 어떤가, 할수 있겠나?》

《할수 있습니다. 도적질에는 귀신도 혀를 털만 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좋네. 나도 보고를 하겠지만 룡백군이 일을 꾸미기전에 스미스씨를 직접 만나보게. 이런 일에 오랜 경험을 쌓은 스미스는 임자에게 귀중한 조언을 줄걸세.》

지종수는 그런 당부가 아니라도 한룡백이 스미스를 만나리라는것을 알고있었다. 과연 망책의 지위를 차지할수 있는가, 금괴를 절취한 공적을 그 누구에게 가로채우지 않겠는가를 확인하려 할것이다. 지종수에게는 직위욕이나 명예욕이 별로 없었다. 다만 망책으로 있으면서 무엇인가 하였다는 스스로의 자부심을 안고 서울로 나가기 위해 금괴절취사건에 큰 기대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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