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2 장

8

 

따스한 봄볕이 호듯호듯 대지에 흘렀다. 겨우내 땅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난 뭇생명들이 녹아버린 땅껍질우로 머리를 내여밀고 그 볕발의 가닥가닥을 젖줄기처럼 빨아들였다. 소생한 무수한 생명의 약동하는 입김인양 어데서나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피여올랐다. 해마다 오는 봄이련만 이해의 봄은 유난히 환희로운 계절이였다.

토지개혁의 혜택속에 농민들이 처음으로 자기의 밭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보습을 틀어잡고 밭을 가는 남정들의 입에서는 저절로 구성진 노래가락이 울려나오고 뒤따르며 씨를 뿌리는 아낙네들의 얼굴은 떨기떨기 웃음꽃이였다. 그들을 축복하여 종다리는 노래하고 봄바람은 꽃향기를 날라왔다.

축복받은 이 봄에 온 나라 농민들과 함께 김정숙동지께서도 땅을 가꾸시였다. 눈이 녹자부터 저택주변의 공지를 밭으로 만들려고 돌을 춰내시였다. 새로 일군 그 밭은 100여평이 실히 잘되였다.

평양학원개원식에 가셨을 때 학생들에게 남새조차 푼푼히 공급하지 못하던 딱한 사정이 녀사의 가슴에 풀리지 않은 옹이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이 봄을 맞으며 자신의 손으로 가꾼 첫물남새를 보내주려고 밭을 일구신것이다.

오늘 드디여 씨를 뿌리게 되였다.

머리에 수건을 쓰시고 검은색치마허리를 노끈으로 질끈 동이신 차림은 밭일에 나선 농촌아낙네의 모습을 방불케 하였다. 녀사께서는 삽날을 땅에 박고 오른발로 웃턱을 힘있게 누르시였다. 해토가 된 땅에 삽날은 푹푹 박히였다. 뒤번져진 흙에서는 흰김이 안개발처럼 날리며 구수한 냄새를 풍기였다. 오래동안 묵여둔 땅이여서 해마다 제풀에 자란 잡초가 거름이 되였다. 거기에 돼지우리에서 나온 거름까지 뿌렸으니 밭은 기름이 질대로 졌다. 머지않아 봄철남새가 무성하게 자랄것이다.

두팔이 뻐근해오고 맨발에 신은 고무신으로 흙밥이 쓸어들었지만 아랑곳없이 일손을 다그치시였다. 로동의 기쁨이 가슴에 넘치시였다. 풍요한 수확을 그려보며 아낌없이 구슬땀을 흘리시였다. 아침일찌기 나서서 인제는 많은 이랑을 지어놓으시였다.

인복이가 몇이랑너머에서 씨를 뿌렸다. 인복이는 저택에 와서 살다싶이 하였다. 농사를 짓는 김형록삼촌네도 봄철에 접어들면서 일손이 귀하였다. 그렇지만 김정숙동지께서 그리도 바삐 지내시는것을 보고는 며느리를 저택으로 보내주시였다. 삼촌으로서는 아들 원주가 평양학원에 간 후로 독수공방을 하는 며느리를 보기가 딱한 사정도 있었을것이다. 농가에서 자란 인복이는 오늘의 밭일을 무등 즐거워하였다. 도간도간 코노래를 부르며 호미로 이랑을 째고 시금치씨를 뿌리는데 솜씨가 놀라왔다. 씨앗 한알한알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것을 줌안에 넣고 고루 뿌리는데는 오랜 경험과 섬세한 감각이 필요했다. 팔을 저으며 씨를 뿌리고 두발로 묻어가는 인복의 모습이 률동적이여서 마치 춤을 추는것 같았다.

어데선가 고운 새들이 날아들었다. 녀사의 뒤를 따르며 새들은 삽날에 드러난 벌레를 쪼았다. 풍성한 먹이에 마음이 즐거워서 통통 튀여오르듯 자국을 옮기며 청을 돋구어 지저귀기도 했다.

《형님, 일손을 바꾸자요.》

인복이가 다가와서 삽자루를 잡았다. 삽질을 하는것이 씨를 뿌리는것보다 몇갑절 힘겹다는것을 알기에 하는 말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허리를 펴고 머리에서 수건을 벗어 얼굴에 흐르는 땀을 씻으시였다.

《씨뿌리기는 인복이가 해야 해. 나는 그렇게 고루 뿌리지 못해.》

《거짓말, 형님 못하시는 일이 어데 있어요? 그런데 농사일은 언제 배우셨나요?》

《나도 인복이처럼 농사군의 딸이니까.》

《그럼 형님 친정이나 우리 친정은 다같이 농사를 지었군요.》

인복은 비로소 알게 된 그 공통점이 녀사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것이여서 상글상글 웃었다.

《만경대집도 대대로 농사를 지으셨지.》

김정숙동지께서도 따라 웃으시였다.

이때 김명화가 나타났다.

《아니, 정숙동무가 아직 이런 험한 일을 한단 말인가?》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녀사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난 뭐 이런 일을 하면 안되는가요? 제발 나를 전과 다르게 보지 마세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김명화를 언제나 어머니라고 부르셨다. 14년이나 이상이기도 했지만 모녀간처럼 절친한 사이기도 했던것이다.

김명화는 녀사의 손을 쓰다듬었다. 빨찌산시절 총가목을 틀어잡으며 박힌 장알이 그대로 남아있는 손이 해방이 되여 해를 넘긴 오늘에도 험한 일에 잠기여서 더 거칠어졌다. 녀사의 우아한 모습과 거칠어진 손은 심한 대조를 이루었다. 김명화는 녀사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보더니 감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산에서 싸우던 우리 녀동무들은 지난날에 고생이 막심했던것만큼 인제는 락을 누려보자는 생각들을 하고있지. 나부터 말이네. 그런데 정숙동문 여전하구만.… 생땅을 뚜져서 이렇게 밭을 만들고 씨를 뿌리는걸 보니 가책되는게 많아.》

《어머니두 참,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나요. 평양학원 학생들의 식생활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려고 집옆의 공지를 남새밭으로 일구었을뿐인데.…》

《그랬댔군.》

두번 다시 감심을 한 김명화는 표정을 바꾸며 다소 격한 어조로 뒤를 이었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학원을 위해 아글타글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건군사업을 반대하는 성토문까지 쓰고있으니 이게 얼마나 분한 일인가!》

《성토문이라니요?》

김정숙동지의 얼굴에 떠돌던 미소가 순간에 가셔지셨다. 김명화를 바라보시는 시선에는 놀라움과 의혹이 엇갈렸다.

《내 오늘 빨찌산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여러번 부탁을 해오길래 신문사에 갔댔네. 그런데 글쎄 편집국에 중앙녀맹부위원장이 쓴 성토문이 와있질 않겠나. 신문사에서는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지 몰라했네. 기각해버리면 언론의 자유를 묵살한다고 떠들테니까.… 정숙동무가 중앙녀맹사업에 관심이 깊다는걸 알기때문에 그걸 가져왔네. 한번 보라구.》

김명화는 들고온 구럭에서 성토문을 꺼냈다. 성토문은 조선반도에 조성된 오늘의 정세하에서 건군에 몰두하는것은 천만번 부당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계속하여 해방된 온 나라 어머니들과 안해들의 소원은 사랑하는 아들딸들과 남편들이 총이 아니라 오로지 마치와 낫을 잡고 평화적로동에 헌신하는것이라고 썼다. 자기 식의 론리와 주장이 있었고 절절히 호소하는바가 있었다. 다 읽으셨지만 원고를 그냥 손에 들고계시였다. 심중한 생각과 안타까운 감정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런 반동분자가 어떻게 중앙녀맹에 있는지 모르겠어!》

김명화가 의분에 넘쳐 부르짖었다. 만일 정신옥이 곁에 있다면 결판을 낼듯싶었다. 피덩이같은 애기를 남모르는 집 토방에 내려놓고 계속 총을 잡았던 그로서는 참말로 분격하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용히 응대하시였다.

《그 녀자는 반동이 아니예요. 누구보다 못지 않게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뭔가 리해가 부족해서 이런걸 써들고다니는것 같군요.》

《그를 알고있나?》

김명화가 의분이 가셔진 어조로 물었다.

《알고있어요. 우리 집에도 찾아왔댔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날의 정신옥을 그려보시였다. 가식없는 진정과 결곡한 성품을 보여주던 그날에도 정신옥은 은연중에 건군에 대한 그릇된 견해의 한귀를 드러냈다. 처음의 대면이여서 삼가했지만 오늘에 와서 보면 진작 그날에 깨우쳐주었어야 하는것이 아니였을가?

《어머니가 오늘 이 성토문을 나한테 가져온건 참 잘한 일이예요.》

정신옥이 저지를수 있는 엄중한 정치적과오를 사전에 막을수 있게 되였다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였다. 어디까지나 정신옥은 아껴주고 건져주고싶은 녀자로 마음속에 자리잡고있었다.

《그래, 그 성토문을 어떻게 처리하려나?》

《내가 틈을 내서 본인을 만나겠어요.》

이튿날 오후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중앙녀맹을 찾으시였다.

《아니, 김녀사가!…》

정신옥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겨맞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아직 정채를 잃지 않은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정선생님이 보고싶어서 왔습니다.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밝게 웃으시며 머리를 숙이시였다.

《자, 앉으세요.》

정신옥은 의자를 권하며 앞탁을 사이에 두고 녀사와 마주 앉았다. 그는 녀사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장군님께선 건강하신가요?》

《건강하십니다. 참, 장군님께서는 정선생님이 두고간 메밀가루로 누른 국수를 달게 잡수셨습니다.》

《그렇다니 더없이 기쁩니다.》

화기에 넘친 인사가 오고간 후에 한순간의 침묵이 흘렀다.

《제가 오늘 정선생님을 찾아온것은…》

김정숙동지께서는 먼저 침묵을 깨쳤으나 얼른 뒤를 잇지 못하시였다. 기쁨과 반가움이 어린 정신옥의 얼굴을 보시니 서슴어지셨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어서 말씀하세요.》

정신옥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재촉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들고오신 가방속에서 성토문을 꺼내시였다.

거기에 시선이 미친 정신옥은 더욱 반기는 표정이였다.

《신문사에서 녀사의 고견을 듣고싶어서 그걸 보냈던게군요. 기탄없이 읽으신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김녀사의 고견이 담긴다면 성토문이 참말로 더욱 뜻깊은것으로 될것입니다.》

정신옥은 나름대로 추측을 하며 진정으로 기대를 보내여왔다. 녀사께서도 같은 녀성으로 성토문의 취지를 적극 지지하리라고 믿고있는것이 분명했다. 그가 이렇게 나오고보니 김정숙동지께서는 참으로 딱하시였다. 깊은 리해를 바라시며 량해를 구하시는듯 한 어조로 말씀을 떼시였다.

《선생님, 이 성토문은 발표하지 않는것이 좋겠습니다.》

정신옥의 얼굴에 내처 떠돌던 밝은 표정이 순간에 가셔졌다.

《어째서 말입니까?》

《선생님은 지금 우리 나라에 조성된 정세를 피상적으로 보시는것 같습니다. 해방으로 우리 나라에 영원한 평화가 도래했다고 쓰고있는데 결코 그런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강력한 정규군을 건설해야 합니다.》

《좌우익의 리념대립이 벌어지는 지금의 형편에서 저마끔 군대를 세우면 동족상쟁의 류혈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허용할수 없는 일입니다.》

정신옥은 어느새 열기를 띠고 주장했다.

《우리는 동족끼리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래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정규군건설을 다그쳐야 합니다.》

《왜놈은 망하고 세계최강의 쏘미량군이 우리 나라를 지켜주고있는데 누가 감히 덤벼든단 말입니까?》

《바로 남조선을 강점한 미국놈들입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명백히 말씀하시였다.

정신옥은 뜻밖인듯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녀사께서도 잘 아시는것처럼 우리 나라를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할것을 지향한 모스크바성명에 미국도 서명을 했습니다.》

《옳습니다. 미국도 서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명을 뒤집기 위해 리승만을 부추겨서 이른바 <반탁>놀음을 벌리고있습니다. 세계의 면전에서는 해방자로 꾸며보이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침략의 칼을 벼리는것이 오늘날 미국의 대조선전략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맥아더는 얼마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조선반도는 2차대전후 새롭게 시작되는 동서랭전의 열점지역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을 부활시켜 동맹자로 만들고 남조선만이라도 가로타고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만들 때 미국은 동아시아지역에서 공산주의를 타승할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 속심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미제와 대결해야 합니다.》

정신옥은 그 어떤 정신적혼란을 느끼는듯 했다. 당시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것처럼 그는 미제의 침략적본성을 꿰뚫어보지 못했다.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더니 자신을 수습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군이 남조선에서 좌익을 탄압하고 인민위원회를 해산하는데 격분을 느끼고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쏘련군이 있는 북으로 당장 쳐들어올수는 없을것입니다. 당면한 우리의 력사적과제는 국토분렬의 조짐이 짙어가는 현 시점에서 하루빨리 통일정부를 세우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규군건설은 통일정부를 세운 다음에 하여도 늦지 않을것입니다.》

《통일정부를 세운 다음이면 늦습니다. 지금 미국은 뒤에서 통일정부수립을 은근히 반대하면서 어떻게 하나 남조선에 단독괴뢰정권을 세우려고 꾀하고있습니다. 그런 정권을 세운 다음에는 우리가 더 강력해지기 전에 북조선까지 강점하려고 침략의 기회를 서둘러 찾을것입니다. 두고보십시오. 정규군건설을 다그친 우리의 조치가 얼마나 정당하였는가를 증명해보일 날이 몇해안으로 다가올것입니다. 그때에 가서 선생님이 오늘을 후회하지 않도록 이 성토문을 거두었으면 합니다.》

정신옥은 표정이 굳어졌다. 날카롭게 항변을 터칠듯 했으나 녀사의 조심스럽고 온화하신 얼굴에 흐르는 간절한 기대를 읽고는 침묵했다.

녀사께서 다시 말씀하시였다.

《어디까지나 언론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반일애국운동을 하여오신 선생님이 해방된 오늘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되겠기에 숨김없이 권고했습니다. 제 심정을 리해해주십시오.》

《리해합니다. 녀사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와 견해를 전혀 달리하시는 녀사를 발견한것이 괴롭습니다.》

《건군문제를 두고 오늘은 비록 우리의 견해가 다르지만 언젠가는 일치하게 될것입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정신옥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였다. 총을 거부하는 그의 사상의식은 오래전부터 굳어진것이였다. 한때 우리 나라 독립운동사에 흔적을 남긴 개량주의의 영향이였다. 그는 성토문에 《죽더라도 동포끼리는 무저항주의를 쓰자.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듣자. 동포끼리만은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고 사랑하자.》라는 안창호의 말을 거들면서 어머니와 안해들은 그 순후하고 열렬한 사랑으로 리념의 대결이 초래하는 류혈을 막아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에게는 미국에 대한 환상도 없지 않았다. 그런것만큼 한두번의 론담으로써는 굳어진 견해를 바로잡기가 어려울것이다. 그러나 나라를 사랑하고 정의를 지향하는 정신옥은 총대우에 애국이 있고 평화가 있다는것을 반드시 깨닫게 될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담긴 녀사의 미소가 스미듯 안겨왔으나 신옥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다만 녀사를 따라 어줍은 웃음을 얼굴에 떠올렸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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