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19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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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머니와 분영이가 마당가로 들어서고있었다.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확 다가오면서 숨이 막히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허겁지겁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어머니!》

소리쳐 불렀으나 목소리는 입밖으로 터지지 못했다. 목이 메였던것이다. 어머니도 두팔을 벌리고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기환은 어머니의 품에 쓰러안겼다. 어머니는 아들의 잔등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의 부드러운 촉감에 기환은 지나온 생활의 고뇌와 어혈이 깨끗이 가셔지는듯 했다.

《네가 돌아왔구나!》

첫 순간의 격정이 어지간히 숙어든 후에야 어머니는 갈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기환은 어머니의 가슴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헤여져 몇년동안에 어머니는 몰라보게 늙으셨다. 희여진 머리카락과 입귀의 잔주름이 아프게 망막을 찔렀다. 분명 그것은 옥고의 자취일것이다. 이 감옥에서 저 감옥으로 옮겨가며 일제교형리들이 어머니에게 강요한 고통은 형언할길이 없을것이다. 필경 옥사했으리라고 생각했던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이 시각이 정녕 꿈이 아닌지.… 서울에서 이미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댔지만 상봉의 오늘을 현실로 감수하기 어려웠다.

뒤늦게 정하가 문밖으로 나왔다. 그는 두손을 앞으로 맞잡고 정신옥에게 깊이 허리를 굽히였다.

《어머님, 안녕하십니까.》

기환은 어머니의 품에서 풀려나 그를 소개했다.

《서울에서 함께 온 내 친구예요. 화가입니다.》

정신옥은 정하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이렇게 만나니 반갑네.》

그들모두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고적이 깃들던 집안이 활기를 띠였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할수 있었으랴. 누구의 가슴이나 오늘의 기쁨과 지난날의 운명에 대한 쓰라린 회억으로 끓어번졌다.

《내 분영이한테서 다 들었다. 내가 잡혀간 후 네가 고생이 많았더구나. 대동공전에서 출학을 당하고 철도역 짐군으로도 일하고 지어는 변소간 청소부노릇도 했다더구나. 오누이가 먹고 살자니까 그럴수밖에 없었겠지.》

마주앉은 아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정신옥은 애달픈 련민의 정에 사로잡혔다.

《저보다야 옥에 갇혔던 어머니의 고생이 더 막심하였지요.》

기환은 헌헌히 웃어보이였다.

《네가 출학을 당하고도 제 녀동생만은 고보를 마치도록 꼭꼭 학비를 마련해주었다더구나, 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부엌에서 흐느낌소리가 들렸다. 저녁을 짓고있던 분영이가 울고있었다. 어머니의 말에서 자기를 위해 헌신한 오빠의 눈물겨운 수고를 새삼스레 상기했던것이다. 기쁨의 이 순간에 터치지 않으려고 꺽꺽 삼키는 그의 흐느낌소리가 애절한 감정을 방안에 몰아왔다.

어머니와 아들은 더 말이 없었다. 곁에 앉은 정하도 숙연히 머리숙이고 눈을 슴벅이였다.

잠시후에 정신옥은 세운 무릎에 손을 짚고 움쭉 일어서더니 부엌으로 나갔다.

《어머닌 손을 적시지 마세요. 방안에 올라가서 이야기나 하세요.》

축축히 물기에 젖은 분영이의 목소리였다.

《이야기야 밤에도 할수 있지 않느냐. 내 손이 간 음식을 저 사람들에게 먹이고싶어서 그런다.》

어머니도 목메인 목소리였다. 아들과 손님앞에서 보이지 않던 눈물을 딸과 함께 흘리는 모양이다.

부엌에서 구미를 돋구는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적쇠우에서 노랗게 구워지는 조기냄새가 분명했다. 기환은 서해의 물고기중에서도 조기를 특별히 좋아했다. 그 식성을 잊지 않고 분영이가 사왔을것이다. 대범한 어머니는 그런 잔사정을 모른다. 코로 흘러드는 조기냄새가 분영이의 다심한 정을 실어왔다. 그 냄새를 페장에 스미도록 들이키며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얼마후에 저녁상이 올라왔다. 노란 완두콩이 다문다문 박힌 흰쌀밥, 알맞추 구운 조기, 기름방울이 노란 문양을 그린 닭고기국, 온실의것이 분명한 청신한 쑥갓과 고추장이 두리반에 올랐다.

《분영아, 술잔을 가져오너라.》

상을 둘러보던 기환이가 일렀다.

《오빠 그사이 술을 배웠나?》

집을 떠나기 전까지 기환이는 술을 입에 대여본 일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한잔 부어드려야지. 내가 마련해온 술이 있다.》

어머니는 술을 즐겼다. 녀자로서는 보기드문 애주가였다. 녀걸스러운 호협한 성품과 다난스러운 생활의 풍파가 술과 인연을 가지게 했었다.

분영이가 부엌에서 유리잔들을 가져왔다.

기환은 무릎을 꿇고 술을 따라서 정히 두손으로 어머니에게 드리였다. 어머니는 달게 마셨다. 정하도 기환의 손에서 목이 긴 술병을 받아들고 정신옥이 비운 잔에 찰찰 넘치도록 부었다.

《어머님, 건강하십시오.》

정신옥은 턱밑으로 다가오는 술잔이 아니라 정하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처음 만난 젊은이로부터 받는 술잔의 뜻을 상대의 얼굴에서 읽기라도 하려는것 같았다.

《고맙네.》

안주도 집지 않고 두잔을 연거퍼 거뜬히 마시고난 그는 빈잔을 분영에게 돌려주었다.

《네가 저 젊은이와 오빠에게 한잔씩 부어라.》

분영이는 얌전한 자세로 술을 부어서 정하에게 먼저 주었다. 처녀의 고운 손에 받들린 술잔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정하는 굳어져버렸다. 벌써부터 취기오른 사람처럼 둥실한 얼굴과 성큼한 목이 붉어졌다.

《어서 드세요.》

《네 네… 감사합니다.》

곁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정하의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기환이가 알기엔 평소에 전혀 술을 마시지 않는 정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거북한 몸가짐으로 목을 젖히고 단숨에 마신다. 기환은 얼른 분영이의 눈치를 살폈다. 분영이는 다소 의아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정하는 빈잔을 분영에게 돌려주며 더듬는 어조로 다시 인사를 보냈다.

《잘 마셨습니다.》

분영은 다시 술을 쳐서 이번에는 기환에게 주었다.

《오빠, 어서 들어.》

《내가 술과 담배와 인연이 없다는걸 네가 잘 알지 않니.》

기환은 생리적으로 술에 거부반응을 했다. 조금이라도 입에 술을 대면 온몸에 알레르기현상이 일어났다.

분영은 그 잔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화기롭고 즐거운 분위기속에 저녁식사가 끝났다. 어느새 해는 져버리고 창가에 어스름이 깃들었다. 기환은 전등을 켜고 배낭속에서 어머니와 분영에게 주려고 마련했던 물건을 꺼내놓았다. 어머니에게는 양말 한컬레, 분영에게는 손수건 하나를 주었다.

《뭘 이런걸 사들고 왔느냐. 객지생활에 푼전이 그리웠을텐데.…》

어머니는 감격했다.

분영이는 말없이 무릎우에 수건을 펼쳐놓고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크지 않은 선물이지만 거기에 스민 오빠의 마음을 손끝으로 감촉해보려는듯이-

《나도 이렇게 기환군의 집에 들릴줄 알았으면 뭘 좀 마련해오는것인데.…》

빈손 들고 온것이 미안해서 정하가 하는 말이였다. 정신옥이 정하와 아들을 일별하며 화제를 돌렸다.

《저 사람은 화가라니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꽃피울수 있겠지. 그런데 기환이 너는 무슨 일을 했으면 좋겠느냐?》

《어머니, 우리는 모두 평양학원으로 왔습니다.》

《뭐 평양학원에?…》

말꼬리를 길게 끄는 정신옥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아들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계속했다.

《함께 온 다른 동무들은 모두 그 학교에 간다고 해도 너는 못 간다!》

《어째서 말입니까?》

기환은 조심히 반문했다.

《통일정부가 서지 않은 오늘의 우리 나라 형편에서는 어느쪽이나 군대를 조직하는것이 당치 않은 일이다.》

정신옥은 조선반도에 조성된 오늘의 정세를 나름대로 장황히 설명을 하고 이렇게 강조했다.

《그러니 너는 군대가 될 생각은 아예 말고 대동공전에 복교를 해서 공부를 계속하든가 시민청같은데 들어가서 사회활동을 하여라!》

기환은 저절로 한숨이 터졌다. 이렇게 완강히 나오는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머니 몰래 《평양학원》으로 갈수도 없었다. 참으로 비극적인 곡절끝에 이루어진 어머니와의 상봉이였다. 어쩌면 좋을가? 절절한 축원을 담아 작별인사를 보내던 려운형선생과 38도선을 넘으며 공통의 희망과 포부를 나누던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장은 곁에 앉은 정하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기쁨과 반가움만이 넘쳐야 할 이 저녁에 어머니와 지향의 대립으로 마찰이 일어나고 피차 괴로운 심정에 잠기게 될줄이야.

밤이 깊어지자 기환은 정하와 함께 웃방에 잠자리를 폈다. 자리에 누웠으나 오래도록 잠 못이루고 뒤채였다.

이튿날 아침 다시 어머니에게 자기 결심을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어제 저녁보다 더 결연하고 노기어린 낯빛으로 말했다.

《나는 어깨에 총을 메우자고 너를 키우지 않았다! 너와 같은 청년들이 민주개혁과 생산에 앞장서 떨쳐나서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청년들의 옳은 좌표이고 진정한 애국의 길이다. 알겠느냐?》

결코 수긍할수가 없어서 다시 입을 열려는데 분영이가 막아나섰다.

《오빠, 어머니가 우릴 어떻게 키웠나요? 어머니를 더 노엽히지 말어.》

정신옥은 기환에게 또 한번 다짐을 놓고 출근길에 올랐다.

정하도 잠시후에 떠나갔다. 기환은 한껏 죄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바래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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