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회)

 

10. 두 모사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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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막까치의 깃으로 만든 오작선을 부치는듯마는듯 하고 앉아서 탁자우에 펼쳐진 종이말이에 눈살을 쏘고있는 후백제왕 견훤의 모사 간무의 얼굴은 잔뜩 이그러져있었다.

(고려임금의 수하에 귀신같은 모사가 있었구나. 그가 내 머리속을 이다지도 말짱히 들여다보고 선손을 써오다니…)

견훤의 둘도 없는 모사로 자처해온 간무는 위험천만하게도 고려임금 왕건을 자객전으로 해치울 흉심을 품고서 그 준비를 해온 끝에 래일 보낼가, 모레 보낼가 날을 고르고 앉았다가 그만에 왕유의 공격을 받은 꼴이 되였다.

《후백제왕이 고려왕과 전장에서 우렬을 겨루는 일은 반대없으나 궁성에 자객을 파하여 고려왕의 신변을 해하려는짓은 절대로 없도록 하자. 고려도 견훤의 신변을 자객으로 해치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는것을 약조한다.》

이런 내용의 밀서를 다른 사람도 아닌 선암사 운암대사가 날라다놓고 간것이다.

운암은 《도선비기》를 써서 유명해진 지리산 선암사 도선대사의 총애를 받은 그의 수제자이고 간무 자기를 견훤의 모사로 소개해준 은사이기도 하다.

신라출신인 간무 자기를 부디 후백제 견훤에게 붙여주면서 나라지경을 따질것 없이 동족을 한처마밑에 그러모을 인물에게 힘을 보태주자고, 자기가 보건대 후백제 견훤이 고려의 왕건에게 가히 짝지지 않는듯하니 당장은 견훤을 돕는것이 순서라고 한 바로 그 운암이 왕건의 모사 왕유가 보낸 편지를 날라다주는 부담을 흔연히 맡아한것이였다.

간무 자기가 품을 넣은 거사를 포기해야 하는 일종의 압박장을 받은것이였다.

그 리면에는 고려국임금 왕건을 보호해야 한다는 운암의 속대사가 깔려있다는 생각에 간무의 기분은 잡쳐지고말았다.

하지만 밀서의 내용이 말해주듯이 대방은 서로 자기 임금을 지키는데서 어느 한쪽이 손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것이여서 간무는 입만 다시고 물러날수밖에 없게 되였다.

전장에서 우렬을 겨루는것은 반대없단 말이지?!

그렇다면 좋다.

간무는 오작선을 활 팽개치고 일어섰다.

왕유, 네가 진짜 내 머리속을 말짱 들여다보는 귀신인지 한번 다시 보자. 군사에 한해서는 그래도 이 간무가 왕유 너보다는 우일테니 어디 너희네 임금을 내가 전장에서 어떻게 해치우나 한번 보아라.

간무는 왕유의 약조문에 응한다는 밀서를 써서 운암에게 보내도록 한뒤 견훤의 내전으로 찾아갔다.

《고려 왕건이 강주(진주)를 순시합네 내려온걸 그대는 아는가?》

대청마루로 다가서던 간무는 견훤의 격노한 소리에 와뜰 놀랐다.

올해 4월(927년 정해년)에 고려수군이 자기들의 남해요충지 강주를 들이쳐 점령한것을 아직까지 수복하지 못해 안달복달하면서도 신라를 쥐기 위한 주도권쟁탈전에서 고려륙군에 련속 패하기만 하는데 더 안이 달아 후백제가 온 정신을 동쪽에 쏟고있는 때에 고려임금의 강주행차라니 이런 수치가 또 어디 있는가? 견훤은 속이 뒤집힐대로 뒤집혀 불에 덴 황소모양으로 천방지축 허둥댔다.

《전하, 너무 상심마소서.》

간무는 그 순간에 이미 세워온 자기 각본을 기어코 실현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있었다.

《전화위복의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고 신은 생각하나이다.》

《지금이 전화위복의 기회라고?!》

《왕건이 우리 후백제의 남해끝까지 내려온것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말이오이다.》

《말같지 않은 소리… 왕건이 이전에 금성, 목포에 내려왔을 때는 천재일우가 아니여서 끝장을 보지 못했나?》

견훤은 발까지 구르며 간무를 힐난했다.

《그게 아니옵고… 그때는 그가 바다길로 돌아가는것을 어쩌지 못하였으나 이번엔 그를 송악으로가 아니라 서라벌쪽으로 유인해서 결딴을 내자는것이옵나이다.》

《그를 서라벌로 유인해?!》

《우리가 서라벌도성을 공략하자는것이옵나이다. 신라궁성을 점령하고 신라가 우리 후백제의 속국이 되였다 선포하면 지금껏 신라를 보호합네 하던 고려의 위신이 납작해지는것은 물론이고 신라를 우리 후백제가 쟁취하게 되여 이후의 승세가 우리쪽으로 기울어지는 일거량득의 효과를 기대할수 있을것이오이다.》

《우리가 서라벌을 먹으라고 왕건이 곱게 앉아 구경만 하고있을상싶나?》

여전히 쓴 외를 씹은상인 견훤에게 간무는 한무릎 더 다가갔다.

《본론은 이제부터이오이다. 불의에 서라벌을 치고 일을 본 뒤에 일단 도성을 탈출하자는것이오이다. 그러면 왕건이 참지 못하고 우리를 치자고 서라벌로 허겁지겁 올것이온즉 합당한 장소를 택해서 대기하고있다가 기습하면 결딴을 낼수 있는것이오이다.》

간무의 끈질긴 설득에 마침내 견훤은 이마살을 폈다.

《내가 자객전은 포기하였지만 전장에서 대결해서 기어코 왕건을 제거하겠소이다.》

《흥, 그따위 장난질을 나에겐 알리지도 않고 하려들더니… 그럼 어디 한번 그대의 솜씨를 보세나.》

견훤은 간무에게 눈을 찔 빨고 돌아섰다.

927년 9월 간무는 견훤으로 하여금 신라도성을 기습케 하고 뒤따라 견훤을 징벌하기 위해 추격해오는 왕건을 공산계곡의 미리사골안에서 포위하여 완전멸살의 위기에까지 몰아가게 하였다.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를 때까지도 왕유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있었다.

룡득이로부터 견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출동하였다는 정보를 받은 왕유는 이 사실을 송악으로 날라가게 하고나서 동쪽 어디에다 목표를 정했는가를 뒤따라 알아내라 이르고 그냥 눌러앉아있었다. 그때 왕유는 송악을 떠나 완산주부근의 빈 절간에 거처를 정하고있었다.

왕유는 견훤이 강주를 목표로 정하고 출동하지 않았는가 생각하고있었다.

이해 4월에 목포에 있던 고려수군은 신라와 접한 남해안의 강주를 점령하였다.

견훤은 빼앗긴 강주를 되찾아놓으라고 수하장수들을 련속 다불러댔다. 하지만 후백제군은 여러차례 강주를 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있었다.

이번에도 견훤이 직접 나섰다니 분명 강주를 탈환해내려고 하는줄로 생각을 모아가고있었다.

하지만 견훤은 강주가 아니라 신라수도를 목표로 정하고있었다.

왕유가 모르고있은것은 바로 그 시각에 왕건이 송악이 아니라 강주에 가있은 사실이였다.

왕건은 후백제의 강주를 점령한 사실에 만족을 표시하면서 일부 측근들이 만류하는것도 마다하고 순시차로 강주까지 들어간것이였다.

견훤은 강주로 내려가는 왕건을 곱게 지나보냈다. 옆구리를 치기에 그 이상 좋은 기회가 아니였으나 간무의 간절한 제의를 받아들여 참고 지나보냈다. 왕건을 강주로 가게 해놓고 서라벌을 치려는것이였다. 그보다 더 노린것은 서라벌을 친 소식을 듣고 왕건이 돌아서 올라올 길목을 지키고있다가 치려는것이였다.

이 모든 계책은 간무가 꾸민것이였다.

《강주를 떼운것은 차라리 잘되였다. 강주땅을 먹이로 주고 대신 왕건을 사로잡자. 큰고기를 잡으려면 미끼가 커야 한다. 왕건만 제거하면 고려는 다 먹은 떡이다.》

간무의 이 말에 견훤은 응해나선것이였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있던 왕유는 송악에 갔던 오복으로부터 왕건이 강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눈앞이 아찔했다.

견훤이 강주로 출동해서 왕건을 공격하려는것으로 판단한것이였다.

후백제군이 총출동하여 강주를 포위해들어가면 왕건의 신변이 어떻게 되리라는것은 더 론의해볼것도 없는것이였다.

왕유는 지금형편에서 강주의 고려군을 도울수 있는 군사는 목포의 고려수군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룡득이네 조에 목포로 련락을 파하라 지시했다.

목포의 고려수군이 강주로 적지 않게 이동해갔을것이므로 증원해갈 력량이 있기나 하겠는지 또 목포수군이 적은것을 알고서 후백제군이 이기회에 남은 력량으로 기습할수도 있어 목포수비력량을 더 떼여낼수 없는 형편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망설이였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시점에서 설사 목포를 떼우는 한이 있더라도 왕건을, 임금을 지키고볼판이다. 이렇게 생각한 왕유는 룡득에게 무슨 일이 있든 목포로 달려가서 아군을 바다길로 해서 강주를 지원하게 하라고 일렀다. 그곳 수비군 장수에게 어떻게든 설득을 해서 꼭 강주로 지원을 가게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나서 송악으로 급히 올라오는 길에 천안성에 들려 완산주방향으로 공격하도록 권유했다. 후백제의 주의를 강주와는 반대쪽인 북으로 쏠리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곳 성주는 임금의 령이 없이는 군사를 발동할수 없다며 임금이 발령을 내리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왕유는 자기의 직분으로는 이들을 설득시킬수도 움직일수도 없다는것을 깨닫는 순간 목포의 군사도 룡득이가 가서 움직이기는 힘들리라는것을 알아차렸다.

왕유는 송악으로 달음쳐올라왔다.

올라와보니 유금필을 위시한 장수들은 이미 서라벌로 떠나간 뒤였다.

왕유는 송악에 올라와서야 견훤이 강주가 아니라 서라벌을 기습했으며 서라벌에서 후백제군의 공격을 알아차리고 고려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서라벌도성이 고스란히 견훤에게 란도질당한것을 알았다.

서북방의 성들을 개축 또는 신설하는 일로 청새진쪽에 올라가있다가 내려온 유금필이 왕건의 신변이 위태롭다고 판단하고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떠나간지도 이틀이 지났다는것을 알고난 왕유는 숨도 돌릴사이없이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말을 때려몰아 이틀만에 리화령(문경고개)기슭까지 가서야 왕유는 퇴군해오는 아군행렬과 마주쳤다.

왕유는 살아있는 왕건을 보고서야 그 자리에 쓰러졌다.

후백제군이 공산(대구근방)계곡에서 매복진을 치고 왕건을 사로잡으려 했다는 사실앞에서 왕유는 몸서리를 쳤다. 왕건의 절친한 부하이고 건국1등공신인 신숭겸이 왕건으로 가장하고 목숨을 바쳐 유인한터에 왕건이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위기를 넘기였다고 하였다.

페하를 이 지경이 되게 하다니

한순간에 우리 고려국이 망할번 하였구나, 아 ! 이 무슨 변이란 말이냐?!

왕유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것과 함께 맥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위기를 넘기였다.

하지만 후백제의 간무는 왕건을 제거할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들었다가 놓쳐버린 아쉬움으로 땅을 쳤다. 서라벌도성을 공략한 첫째목적을 달성한것에 그런대로 위안을 가지고 마음을 달랠수밖에 없는 간무였다.

하지만 그 시각에 왕유는 이마를 대돌에 찧으며 수치감에 몸을 떨었다.

자객전은 절대 금하기로 한 간무의 확답밀서만 믿고서 전장에서의 대결로 왕건을 해치려는 간무의 술책을 내다보지 못한 자기의 무지가 생각할수록 증오스럽기 짝이 없어서였다.

병법의 운용면에서 간무를 따라설수 있는 실력이 자기에게는 없다는 안타까움으로 해서 왕유의 고민은 더 컸다.

(페하의 안녕을 틈없이 도모하고 페하의 정사를 허실없이 보좌하자고 국가대사의 중요직을 스스로 맡아나선 내가 이런 만회할수 없는 실책을 범하다니…)

제딴에 고려국을 받드는 보이지 않는 모사라 자처해온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에 왕유는 머리를 들수 없었다.

일국의 임금이 상대국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여 생사기로에 섰던 그런 끔찍한 변이, 그런 수치가 다시는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것이였다.

왕유는 사흘을 석고대죄하고나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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