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일 성

 

문학예술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

1993년 2월 12일

(발취)

 

오늘 문학예술부문에서 오랜 기간 일하면서 많은 공로를 세운 동무들을 만나니 매우 반갑습니다. 나는 동무들과 협의회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정적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식사나 한끼 같이하자고 불렀습니다.

나는 나이도 많고 김정일동지가 나라의 전반사업을 맡아 지도하고있기때문에 드문드문 오랜 친구들을 만나 가정적인 분위기속에서 식사도 같이하고 이야기도 나누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항일혁명투사들과 연고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오늘은 문학예술부문의 로장들인 동무들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였습니다.

나는 며칠전에 피바다가극단에서 창조한 민속무용조곡 《계절의 노래》를 보러 나갔다가 김원균동무를 보기만 하고 만나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였기때문에 돌아와서 김정일동지에게 김원균동무를 한번 만나보면 좋겠다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김정일동지가 김원균동무를 만날 때 문학예술부문 일군들을 몇명 더 같이 만나는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동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찍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동무들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였습니다.

동무들은 해방직후부터 오늘까지 근 50년동안 우리 당의 문예정책을 높이 받들고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나는 문학예술부문에서 오래동안 사업해오면서 많은 일을 한 동무들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며 동무들이 이룩한 성과를 축하합니다.

동무들이 이제는 나이도 많은것만큼 자식들과 후대들의 교양에 깊은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지금 동무들앞에 나서고있는 중요한 과업은 자식들과 후대들을 잘 교양하여 그들이 김정일동지를 잘 받들어나가도록 하는것입니다. 동무들은 앞으로 자식들과 후대들을 잘 키워 김정일동지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세우며 그에게 충성다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김정일동지는 문무와 충효를 겸비한 걸출한 령도자입니다. 그는 뛰여난 사상리론가이고 군사전략가일뿐아니라 나라와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충효의 귀감입니다.

내가 김정일동지의 성품가운데서 제일가는 장점으로 보는것은 나와 같이 혁명투쟁을 한 오랜 혁명투사들을 무한히 아끼고 사랑하는것입니다. 그는 나와 같이 혁명투쟁을 하여온 로투사들을 혁명의 원로로 존경하고 내세워주고있으며 그들의 사업과 생활을 극진히 돌봐주고있습니다. 그래서 항일의 로투사들모두가 김정일동지를 좋아하며 지도자로 높이 칭송하고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개척하여온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완성해나가는데서 매우 좋은 일입니다.

김정일동지는 사람들을 대하고 평가하는데서 언제나 본인의 충성심을 위주로 보며 성분을 따지지 않습니다. 해방직후에는 새 조국을 건설하는데서 손잡고나갈 사람들과 투쟁대상을 갈라내기 위하여 성분을 보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세대들은 다 해방후에 우리가 키워낸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해방후 근 50년동안 두세대의 사람들을 키워냈는데 그들은 다 주체사상으로 무장하였기때문에 성분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

김정일동지는 각계각층 군중을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당의 두리에 묶어세우기 위하여 광폭정치를 실시하고있으며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돌봐주고있습니다.

김정일동지는 나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고 효성이 지극합니다. 내가 나이 80이 넘도록 건강한 몸으로 혁명사업을 하고있는것은 전적으로 김정일동지의 덕분입니다. 김정일동지는 늘 나의 건강에 특별한 관심을 돌리고있으며 모든것을 나의 건강에 복종시키고있습니다. 그는 내가 문건을 많이 보면 시력이 나빠지고 피곤해할것을 념려하여 나에게 보고하는 문건을 록음하여 보내오고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문건을 록음한것을 사무실에서도 듣고 산보하면서도 듣습니다. 자료 같은것도 기술성원들이 옆에서 읽어주기때문에 피곤을 많이 덜고있습니다. 김정일동지는 내가 문화정서생활을 할수 있도록 새로운 영화와 음악이 나올 때마다 그것을 록화하거나 록음하여 보내주고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서생활을 하면서 락천적으로 살고있습니다.

나는 김정일동지가 당과 국가, 군대의 전반사업을 현명하게 령도하고있는데 대하여 매우 만족하게 생각하며 높이 평가합니다. 그래서 김정일동지의 탄생 50돐을 맞으며 송시를 지어 그를 문무충효를 겸비한 위인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동무들이 내가 지은 송시를 보고 몹시 탄복하였다고 하는데 나는 감격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드문드문 시를 짓군합니다. 오늘 신문에 내가 쓴 송시를 가지고 비를 만들어 백두산밀영에 있는 김정일동지의 생가앞에 세우고 제막식을 하였다는 내용이 실렸는데 송시비를 세운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내가 지은 송시를 앞으로 회고록에도 넣자고 합니다.

동무들이 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데 나는 건강합니다. 지금 같아서는 한 10년은 더 일할것 같습니다. 지난해에 인도 부대통령이 우리 나라에 왔댔는데 그는 내가 매우 정정하다고 하면서 나의 생일 90돐에 다시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건강하여 혁명사업을 계속하고있는것은 언제나 비관을 모르고 락관적으로 생활하기때문입니다. 북남고위급회담때 남측대표단 단장으로 왔던 남조선《국무총리》가 나의 건강의 비결을 물었을 때에도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정세가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여도 절대로 비관하지 않으며 언제나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락관적으로 생활합니다.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에도 탄약과 식량이 떨어져 어려운 정황이 여러번 조성되였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생각하고 만난을 뚫고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건강의 비결은 운동을 많이 하는데도 있습니다. 나는 늘 산보를 하며 수영도 하고 여러가지 운동을 합니다. 동무들도 이제는 나이가 많은것만큼 운동을 많이 하여 오래 살도록 하여야 합니다.

동무들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으면서 나의 기억력에 탄복하였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기억력이 좋습니다. 당력사연구소 소장도 나의 기억력에 대하여 놀라와하고있습니다. 내가 언제인가 당력사연구소 소장에게 해방전에 우리 나라에서 발간된 잡지 《개벽》을 본적이 있는가고 물었더니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력사연구소 소장이 《개벽》잡지도 보지 않으면 되는가, 그것을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후 당력사연구소 소장이 《개벽》잡지를 한 70권 구했다고 하기때문에 그에게 《개벽》잡지에 리돈화가 쓴 만주기행문과 8도자랑에 대한 글이 있다, 만주기행문에는 그가 홍경현까지 가면서 보고 느낀것들을 썼는데 거기에 중국사람들이 연기를 많이 피워 공기를 어지럽게 만든다는 내용과 아이가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밖에 버리는 나쁜 풍습이 있다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8도자랑에도 볼것이 많다, 그러니 그 글들을 읽어보고 우리 나라를 자랑하는 글을 많이 써내도록 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당력사연구소 소장은 나에게 《개벽》잡지를 찾아보니 진짜 리돈화가 쓴 만주기행문과 8도자랑에 대한 글이 있다고 하면서 나의 기억력이 비상한데 탄복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개벽》잡지는 해방전에 발간된 잡지이기때문에 지금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나는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있었던 사실들도 다 기억하고있습니다. 동무들이 앞으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아직도 제2차 북만원정때 있었던 사실을 잊지 않고있습니다. 그때 나는 녕안현에서 부대를 이끌고 경박호를 건너 액목현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어느 한 마을에 들어가니 마을이 텅 비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되여 한 집에 들어가보았더니 방바닥이 따끈따끈 하였습니다. 마을에 있는 학교도 비여있었지만 방금 학생들이 공부하다 나간 흔적이 뚜렷하였습니다. 사실 그때 마을사람들은 《고려홍군》이 오면 다 죽인다고 한 일제놈들의 악선전에 속아 우리가 마을에 도착하기전에 숨었던것입니다. 나는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학교마당에 교실안에 있는 풍금을 내다놓고 타면서 청년의용군중대 대원들과 같이 《소무가》를 불렀습니다. 《소무가》는 중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애국적인 노래였습니다. 청년의용군중대 대원들은 공부를 한 사람들이기때문에 중국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그러자 마을주변에 숨어서 우리의 동정만 살피던 마을사람들과 학생들이 우리가 부르는 노래소리를 듣고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마을사람들이 다 모여오자 그들앞에서 중국말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의 연설을 듣고 《고려홍군》이 비적이 아니라 인민혁명군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환영하였습니다. 우리에 대한 소식은 삽시에 액목현일대에 퍼졌습니다. 그 시기 우리는 국제당에 파견하였던 대표들을 기다리느라고 액목현일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조령출동무가 60살도 살지 못할 체질을 가지고 80살이 되도록 장수하고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사회주의제도가 좋기때문입니다.

나는 학생소년궁전에 나갈 때마다 재간둥이어린이들이 그린 그림도 보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도 들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군합니다. 재간둥이어린이들이 많이 나오는것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가 우월하기때문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부자집아이들은 건달을 부리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돈이 없기때문에 재간이 있어도 그것을 꽃피울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당에서 재간둥이어린이들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유능한 선생들까지 붙여 재능을 활짝 꽃피워주고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재간둥이어린이들이 해마다 늘어나고있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은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노래를 부르고 교예를 하라고 하면 교예를 하고 못부리는 재간이 없습니다. 제17차 몽떼 까를로국제교예축전에서 우리 나라 교예배우들이 《공중그네비행》에서 금상을 수여받았다고 하는데 이제는 유치원아이들까지 교예를 합니다. 그전에는 전문요술사들이나 요술을 하는줄 알았는데 지금은 아이들까지 요술을 합니다. 이것은 다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가 좋기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식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더욱 높이 발양시켜야 합니다. 지금 우리 인민은 사회주의제도하에서 자유와 권리를 마음껏 누리고있으며 누구나 다 먹고 입고 쓰고살 걱정을 모르고 무료교육, 무상치료의 혜택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고있습니다. 우리가 경공업혁명을 하여 상점들에 상품만 가득 채워놓으면 더 바랄것이 없을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 경공업혁명을 하여 인민생활을 더욱 높여야 합니다. 전번에 중앙당 경공업부장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여 경공업혁명을 꼭 수행하겠다고 결의하였는데 나는 그의 결심을 믿습니다. 중앙당 경공업부장은 당정책집행에서 이악하기때문에 반드시 경공업혁명을 해낼것입니다.

동무들이 조국이 통일된 다음 나를 제주도까지 모시고 가고싶다고 하는데 감사합니다. 갈라진 조국을 하루빨리 통일하는것은 우리앞에 나선 가장 절박한 과업입니다. 지금 적들이 우리에게 원자탄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우리를 고립말살하기 위하여 악랄하게 책동하고있지만 우리는 조금도 겁나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일군들에게 우리 나라를 이라크와 같은 나라로 잘못 생각하지 말라고 미국놈들한테 말해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적들한테서 칭찬을 받는것보다 욕을 먹는것이 낫습니다. 우리가 적들의 칭찬을 받는다는것은 곧 투항한것이나 같기때문에 절대로 칭찬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속담에 네떡이 한개면 내떡도 한개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만단의 전투준비를 갖추고있다가 적들이 덤벼들면 맞받아나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기어이 미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해야 합니다. 조국이 통일되면 우리 인민들이 잘살수 있습니다. 남조선은 기후가 온화하기때문에 농사를 얼마든지 2모작을 할수 있습니다. 지금도 남조선에서는 논벼의 앞그루로 보리를 심고있습니다.

김원균동무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지은지도 근 50년이 되였습니다. 김원균동무는 《애국가》를 지을 때에도 노력을 많이 하였습니다. 《애국가》를 짓는데서 허정숙동무의 공로가 큽니다. 그는 해방후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을 하면서 《애국가》를 짓는 사업을 책임지고 하였습니다. 허정숙동무는 우리 나라 교예를 발전시키는데서도 공로가 있습니다. 그가 나에게 유자녀학원 학생들을 데려다 교예를 배워주도록 하겠다고 하기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전쟁때 여러곳에 유자녀들을 위한 학원이 있었는데 허정숙동무는 거기에 있는 학생들가운데서 인물이 고운 학생들을 데려다 교예를 배워주도록 하였습니다. 그후 내가 교예학교 1기졸업생들의 공연을 보았는데 그들이 공연을 잘하였습니다. 허정숙동무는 허헌선생의 딸입니다. 허헌선생은 해방전에 변호사를 하였는데 일제놈들이 김책동무를 재판할 때 그를 변호하였고 그가 석방된 다음 간도로 떠난다는것을 알고 려비까지 대주었습니다. 그는 일제놈들이 나와 같이 투쟁하다가 체포된 동무들을 재판할 때에도 그들을 변호하였습니다. 해방후 허헌선생과 려운형선생은 남조선에서 나에게 처음으로 보낸 편지에서 나를 만나자고 하면서 서울에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려운형선생과 홍명희선생은 내가 서울에 올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미국놈들이 남조선을 강점하고있었기때문에 내가 서울에 갈수 없었습니다.

사실 1945년 조국해방작전때 일제놈들이 한 열흘만 더 있다가 항복하였어도 우리가 남조선까지 다 해방할수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전국을 해방할 작전계획을 세우고 오백룡동무의 부대는 쏘련군대와 같이 청진쪽으로 상륙할 준비를 하게 하였고 락하산부대들은 평양과 신의주, 함흥, 서울, 수원, 부산을 해방하기 위하여 비행장에서 대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국해방작전이 시작된 다음 일제놈들이 인차 항복하다보니 우리 락하산부대들이 남조선의 주요지역들에 락하하여 해방전투를 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남조선까지 해방하였더라면 거기에 미군을 들여놓지 않았을것입니다. 조국해방작전과 관련한 내용이 앞으로 회고록에 나옵니다.

신진순동무는 내가 해방직후부터 알고있는 사람입니다. 그때 나는 신진순동무와 자동차도 같이 타고다녔습니다. 신진순동무는 서울에 있던 제국대학을 나온 유일한 녀성졸업생입니다. 나는 중앙당학교에서 신진순동무의 남편이 하는 강의도 들어보았습니다. 내가 신진순동무를 만나면 보이려고 해방직후에 나와 같이 찍은 사진을 한장 가져왔습니다. 신진순동무는 해방직후 녀성들과의 사업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때는 아직 김정숙동무가 평양에 오기전이였기때문에 녀성들과의 사업을 주로 신진순동무가 맡아하였습니다. 신진순동무와 같이 녀성들과의 사업을 하던 녀성이 한명 있었는데 그 녀성은 오기섭이 데리고온 사람이였습니다. 그가 녀성들과의 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함경도판을 만들어놓았기때문에 신진순동무가 그것을 바로잡느라고 수고하였습니다. 그 시기에 신진순동무가 김책, 안길 동무들과 련계를 가지고 사업을 많이 하였습니다. 신진순동무가 조국이 통일된 다음 나를 모시고 제주도와 다도해에 가고싶다고 하는데 고맙습니다. 신진순동무도 조국이 통일될 때까지 건강하여야 하겠습니다.

유경애동무는 소설랑독을 아주 잘합니다. 나는 밤마다 45분~1시간씩 유경애동무가 랑독하는 소설을 록음으로 듣다가 자군합니다. 유경애동무가 랑독하는 소설을 듣느라면 잠이 저절로 오군합니다. 재미나는 대목에서는 잠이 달아날 때도 있습니다. 내가 낮에는 사업과 관련한 문건들을 보느라고 소설을 랑독하는것을 듣지 못하지만 밤에는 꼭꼭 듣군합니다. 나는 요즘 우리 나라의 명장들을 취급한 소설을 록음으로 듣고있습니다. 나는 최근 유경애동무가 랑독하는 력사소설을 많이 듣기때문에 단군과 고주몽, 왕건의 묘들을 잘 꾸리기 위한 대책을 세울수 있었습니다. 유경애동무는 화술수준이 대단히 높습니다. 내가 여러 사람들이 소설을 랑독하는것을 록음으로 들어보았는데 유경애동무가 제일입니다. 유경애동무는 발음이 정확합니다. 나는 유경애동무의 발음은 잘 알아듣지만 다른 사람들의 발음은 알아듣기 힘듭니다. 그래서 유경애동무가 랑독한 소설록음만 가져다 듣습니다. 유경애동무는 발음이 정확할뿐아니라 여러 사람의 목소리도 잘 냅니다. 유경애동무가 소설을 랑독하는것을 들어보면 한 열댓가지 소리를 내는것 같습니다. 유경애동무는 소설에 나오는 여러 로인들의 목소리도 서로 다르게 내고 늙은 녀인과 중년녀인, 처녀의 목소리도 다 다르게 냅니다. 유경애동무는 조선의 화술명장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유경애동무만큼 화술수준이 높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것입니다. 지금 유경애동무가 73살이면 앞으로 한 10년동안은 소설랑독을 더할수 있습니다. 유경애동무가 더 많은 소설을 랑독하여 내가 들으면서 만수무강하도록 하겠다고 하는데 감사합니다.

문예봉동무도 예술영화에 가끔 출연할것입니다. 문예봉동무가 앞으로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 출연하겠다고 하는데 좋은 일입니다. 문예봉동무가 일생동안 나의 배려만 받고 기쁨을 드리지 못했다고 하는데 왜 기쁨을 주지 못하였겠습니까. 문예봉동무는 해방직후부터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만드는데 참가하였습니다. 문예봉동무가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을 나와 김정일동지에게 충실한 충신, 효자로 키우겠다고 하는데 감사합니다. 문예봉동무에게 아들딸 3명과 손자, 손녀가 6명 있으면 대단한 밑천을 가지고있는셈입니다.

여기에 참가한 모든 동무들은 다 공로자들입니다. 오늘 동무들을 위하여 오찬을 차리였는데 사양하지 말고 많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동무들이 시를 랑송하겠다고 하는데 시도 랑송하고 노래도 부르는것이 좋겠습니다. 늙은이들이 시를 랑송하고 노래를 부르면 그것대로 제멋이 있습니다. 유경애동무가 시 《어머니의 당부》를 추려서 랑송하였는데 시랑송을 아주 잘하였습니다. 유경애동무가 랑송한 시를 종이에 써서 나에게 주고가야 하겠습니다. 유경애동무가 손자를 작곡가로 키워 나와 김정일동지를 칭송하는 노래를 많이 짓도록 하겠다고 하는데 고맙습니다. 조령출동무가 송가 《위대한 명절》을 랑송하였는데 감사합니다. 조령출동무가 지어 랑송한 송가도 주고가야 하겠습니다. 김원균동무가 해방직후에 작곡한 노래 《조선행진곡》을 불렀는데 고맙습니다. 나는 오늘 김원균동무를 만난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신진순동무가 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내용으로 작사작곡한 노래를 불렀는데 고맙습니다. 백인준동무도 1947년에 지은 시를 랑송하였는데 고맙습니다. 동무들이 노래 《오직 한마음》을 합창으로 잘 불렀습니다.

오늘 동무들을 위하여 언감자국수를 준비하였는데 많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언감자국수를 먹어보지 못한 동무들도 있을것입니다. 언감자국수는 나한테 와야 먹을수 있지 다른데서는 먹어보기 힘듭니다. 언감자국수는 우리가 항일무장투쟁시기 장백현일대에서 활동할 때 량강도사람들한테서 배워가지고 만들어 먹던 국수입니다. 그때 일제놈들은 인민들이 유격대에 식량을 보내주는것을 막기 위하여 매 집에서 농사지은 량곡을 다 등록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민들은 일제놈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지 않고 넝쿨만 걷어낸 다음 유격대에 어느 밭에 감자가 있다는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인민들로부터 련락을 받은 유격대원들이 그 밭에 내려가 감자를 캐오군하였습니다. 갑자기 눈이 오거나 추위가 들이닥쳐 채 캐지 못한 감자는 겨울에 땅속에서 얼게 됩니다. 봄에 땅이 녹으면 밭에서 언감자를 캐다가 물을 짜서 말리운 다음 가루를 내여 국수를 눌러먹었는데 그것이 언감자국수입니다. 언감자국수는 땅에서 언 감자를 밖에서 명태를 말리우는것처럼 해볕과 바람에 말리워 가루를 내서 눌러야 제맛이 납니다.

내가 미국에서 온 교포들에게 언감자국수를 대접하였는데 그들은 언감자국수가 아주 맛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만드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언감자국수를 만드는 방법을 말해주었더니 그들은 수첩에 그것을 써가지고가서 언감자국수를 해먹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미국에도 감자가 많은데 집에 돌아가서 언감자국수를 해먹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후에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언감자국수를 해먹어보았는가고 하니 집에 가서 감자를 랭동기에 넣어 얼구었다가 말리워 국수를 눌러먹었는데 맛이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감자를 랭동기에 얼구었다가 집안에서 말리워서는 진짜 언감자국수가 안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언감자국수는 량강도사람들이 제일 잘합니다. 해방후에 내가 평양에 나와 언감자국수생각이 나서 김정숙동무에게 언감자가루를 얻어다 국수를 누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양에서 언감자가루를 구할수가 없었습니다. 그후 내가 혜산에 갔을 때 량강도인민위원장을 하던 정동철동무의 집에서 식사를 한 일이 있는데 그때 그가 언감자국수를 눌러주었습니다. 정동철동무는 해방전에 장백현 도천리에서 《구장》노릇을 하면서 지하공작을 하던 사람입니다. 나는 해방후 그의 집에 가서 처음으로 언감자국수를 맛있게 먹어보았습니다. 그후에는 료리사들이 언감자국수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가지고 내가 요구할 때마다 언감자국수를 하군합니다.

나는 오늘 동무들을 만난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동무들이 모두 건강한 몸으로 일을 잘할것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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