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2(2023)년 5월 30일 《로동신문》
한 로병의 추억
《우리의 사회주의조국은 우리 인민의 진정한 어머니품이며 참된 삶과 행복의 요람입니다.》
지난 5월 어느날,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으나 보통강구역 봉화동에 살고있는 최학신전쟁로병은 이윽토록 잠들지 못했다.
그날은 그가 아흔번째 생일을 맞은 날이였다. 결코 짧지 않은 한생을 살아오면서 감동적인 순간들을 수없이 체험해온 그였지만 그날에 받아안은 인상은 참으로 깊었다.
그날 시안의 한 봉사기관으로는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왔다.
그들속에는 로병과 오랜 세월 우정을 맺어온 벗들과 지난날 사업과정에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그의 건강과 생활을 따뜻이 돌보아주는 수많은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로병의 아들과 며느리가 일하고있는 단위의 일군들과 종업원들, 동의 일군들과 마을사람들 지어는 로병의 손녀가 공부하는 학교의 담임교원까지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로병은 친혈육과도 같은 고마운 사람들을 한명한명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70여년전 일가친척을 남녘땅에 두고 공화국의 품에 안길 때에 저는 혈혈단신이였습니다. 그러나 기나긴 세월을 저는 외로움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바로 한식솔과도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고마운 조국의 품이 있었기때문입니다.》
이어 로병의 눈가에는 짙은 회억의 빛이 어리였다.
해방전 전라북도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12살 나던 해에 조국해방의 날을 맞았다. 온 마을에 조국해방만세의 함성이 그칠줄 모르던 그때 그의 가정도 앞날에 대한 크나큰 희망과 기쁨에 휩싸여있었다.
그러나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에 의하여 온 남녘땅은 또다시 외세의 발밑에서 신음하게 되였다.
당시 어느한 사범학교를 다니던 로병은 항쟁의 거리에도 떨쳐나섰고
그로부터 얼마후 전쟁이 일어났다. 인민군대의 노도와 같은 진격에 의해 서울이 해방되고 남조선의 청년학생들속에서는 인민군대탄원열기가 세차게 고조되였다. 그의 심정도 다를바 없었다.
얼마후 고향이 해방되자 그는 많은 청년들과 함께 매일이다싶이 해방지역에 조직된 당조직을 찾아가 인민군대에 입대시켜줄것을 열렬히 청원하였다. 희망대로 인민군대에 입대하게 되였을 때의 기쁜 심정을 로병은 무엇이라고 형언하기 어려웠다.
인민군병사의 군복을 입고 그는 부대로 떠나기 앞서 고향에 들리였다. 그때 버선발로 달려나와 군복입은 딸의 모습이 너무도 장하고 대견하여 눈물짓던 아버지의 모습이며 동구밖까지 따라나와 바래워주던 동생들과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그는 오늘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본 고향의 마지막모습이 될줄 그때에는 미처 알수 없었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그는 적후군단에 소속되여 엄혹한 겨울을 이겨내였고 그후에는 화선방송원이 되여 전쟁이 승리하는 날까지 용감히 싸웠다. 아늑한 방송실이 아니라 적탄이 비발치는 전호가에서 방송을 진행해야 하는 화선방송원은 제1선에 나선 전투원이였다.
생사를 판가리하는 격전장에서 그는 언제나 대담하고 침착하였으며 항상 맡겨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군 하였다. 하여 그는 가슴에 3개의 군공메달을 번쩍이며 전승의 날을 맞이할수 있었다.
전승의 날을 맞고 제대되여 고향으로 떠나가는 동무들의 모습을 보며 그는 남녘땅에 남아있는 혈육들을 생각하였다. 그들도 우리 공화국의 품에 안기였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전후에 그는 당의 은정속에 평양사범대학(당시)에 입학하였다. 교복과 학용품을 무상으로 공급받고 장학금을 받아안으며 그는 어머니조국의 고마움을 더욱 심장깊이 체득하였다.
생일이면 학급동무들이 모두 떨쳐나 생일상을 차려주군 하였고 방학이면 저마다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비록 혈혈단신으로 공화국의 품에 안기였으나 이런 친혈육과 같은 사람들속에서 사는 행복감으로 하여 그는 가슴이 뿌듯해졌다.
대학졸업후 그는 희망대로 기자가 되였다. 사실 대학공부를 하고 문필가가 되고싶은것은 어릴적부터 그가 간직해온 소원이였다. 그러나 남녘땅에서는 이룰래야 이룰수 없었던 꿈이였다.
그후 그가 걸어온 인생길은 공화국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값높은 삶이 꽃피는 진정한 조국이라는것을 실체험으로 절감한 나날이였다.
이렇듯
하기에 그는 밤을 새워 글을 쓰고 또 써도 힘든줄 몰랐고 녀성의 몸으로 머나먼 출장길도 웃으며 걸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전 그는 금강산에서 진행된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에서 뜻밖에도 반세기가 넘도록 소식조차 몰랐던 형제들과 만나게 되였다.
그날 그는 형제들에게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로병은 년로보장을 받은 후에도 문필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값높은 삶을 안겨준 우리 조국의 고마움에 대해, 운명도 미래도 다 맡아안아 보살펴준 어머니당의 은정에 대해 후대들에게 전하고싶었던것이다.
생각에서 깨여난 그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이였다.
(고마운 우리 조국을 위해 내 생의 끝까지, 나의 모든 정열을 바쳐 글을 쓰고 또 쓰리라.)
글 본사기자 유광진
사진 리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