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2(2023)년 3월 9일 《민주조선》

 

불구대천의 원쑤 일제의 죄악을 고발한다 

반드시 결산되여야 할 반인륜적범죄

 

지난 세기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첫 시기부터 전대미문의 식민지적폭압정책을 실시하면서 우리 인민의 모든 권리와 자유를 무참히 말살하였다.

일제의 야만적인 무단통치하에서 온갖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오던 우리 민족의 쌓이고쌓인 원한과 분노는 마침내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반일독립투쟁으로 폭발하였다.

시위자들은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 만세!》의 구호를 힘차게 웨치며 일제군경의 총칼탄압에 굴함없이 맞서싸웠다.

3. 1인민봉기가 전국적규모로 급속히 확대되는데 질겁한 일제는 이를 교살하기 위하여 저들의 모든 폭압력량을 다 동원하여 반일독립투쟁에 일떠선 우리 인민들을 류혈적으로 탄압하였다.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한 일제의 만행은 대구참살사건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우리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상북도 대구에서도 수많은 학생들과 인민들이 반일시위투쟁에 떨쳐나섰다.

일제경찰들과 헌병들은 적수공권의 시위대렬에 마구 총탄을 퍼부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거리와 마을의 여기저기에는 일제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널리였다.

야수같은 일제침략자들은 시체를 거두려는 유가족들에게까지 총칼을 휘두르며 폭행을 가하였다. 심지어 부상자를 치료했다고 하여 의사들과 그 가족까지 체포해갔다.

일제경찰은 김용해청년이 시위조직자의 한사람인 아버지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랑독하자 그들에게 달려들어 일본도로 사정없이 찔러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놈들은 그와 아버지를 감옥으로 끌고가 야수적고문을 가한 끝에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일제의 극악한 살인만행으로 대구에서는 130여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하였으며 80여명이 부상을 입고 수백명의 무고한 인민들이 검거투옥되였다.

대구에서뿐이 아니였다.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 기여든 일제살인귀들은 주민들을 강제로 교회당에 모이게 한 다음 문을 닫아매고 건물에 불을 지르고 총을 쏘아대며 300여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학살하였다.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학살만행으로 하여 1919년 3월 1일부터 10일사이에만도 학살된 사람은 1만명, 체포되거나 부상당한 사람은 각각 5만명이상이며 3. 1인민봉기 전기간 목숨을 잃은 조선사람의 수는 무려 10만여명에 달한다.

일제침략자들이 3. 1인민봉기를 진압하면서 조선사람들에게 얼마나 극악한 야수적만행을 가하였는가 하는것은 당시의 기록을 놓고서도 잘 알수 있다.

《…일본인이 수천수만의 무고한 조선량민에 대하여 감행한 그와 같은 란타와 악형은 너무나 흉악하고 참혹하여 사람의 귀로써는 그것을 들어서 믿지 못할 정도이며 사람의 의사로써는 그것을 리해할수 없는 행위로 되였다. 그러나 그 증거가 너무나 명백하여 그 자료를 광범히 인용할 필요조차 없는것이다. …일본인은 이와 같은 극도의 흉포한 만행을 감행하고도 오히려 그것이 부족하여 그이상 더 가혹한 방법이 없다는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정도이다.》

3. 1인민봉기에 대한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책동은 우리 인민의 독립기운을 철저히 말살하고 조선을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감행한 극악무도한 폭거였다.

3. 1인민봉기를 교살하기 위해 우리 인민을 대중적으로 학살한 천인공노할 만행은 일제가 장장 수십년에 달하는 식민지통치기간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반인륜범죄의 일단에 지나지 않는다.

죄지은자는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는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악의 력사에 대한 성근한 사죄와 배상을 한사코 외면하는 일본의 행태야말로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파렴치의 극치가 아닐수 없다.

우리 인민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일본의 과거죄악을 한시도 잊지 않을것이며 죄악의 대가를 반드시 받아내고야말것이다.

 

본사기자 신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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