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2(2023)년 2월 6일 《우리 민족끼리》

 

병사시절의 한 모습으로

 

오늘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최전연의 대덕산초소를 찾으시고 일당백구호를 제시하신지 60돐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이날을 맞고보니 일당백의 고향인 대덕산을 언제나 마음에 안고 오늘도 병사시절의 모습으로 당과 조국을 받들어나가는 한 영예군인작가에 대한 생각이 절로 갈마든다.

내가 그 영예군인작가에 대하여 알게 된것은 지난해 4월 어느날이였다.

그날 나는 우연한 기회에 문학예술출판사에서 출판한 시집 《나의 옛 총번호를 새겨달라》를 보게 되였다.

시집의 매 시들은 그것이 안겨주는 풍만한 서정과 소박하고 간결한 시어로 하여 첫눈에 나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허나 그보다 나의 심금을 더 울린것은 그 시들이 다름아닌 하반신이 마비된 영예군인이 썼다는 점이다.

여기에 그가 쓴 시집의 머리말의 한대목이 있다.

《나의 시집이 세상에 태여난다니 당과 조국의 고마움이 가슴속에 밀물처럼 차오릅니다.

나는 조선인민군 중대장으로 전투임무수행중에 부상을 당하여 주체69(1980)년 25살의 한창나이에 침상에 누운 몸입니다.

참말로 그때 한몸에 입은 상처보다 제 가슴을 더 아프게 한것은 투쟁열로 청춘의 피가 펄펄 끓던 그 시절에 조국이 나를 믿고 맡겨준 최전연초소와 사랑하는 전우들의 곁을 떠나온 그 아픔이였습니다. …》

시집의 이러한 머리말을 되뇌이며 나는 함흥시 동흥산구역에서 살고있는 필자를 찾아갔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나는 어떤 사람이 애국의 길을 끝까지 걸을수 있으며 나라의 은덕을 순간도 잊지 않고 언제나 보답의 일념을 안고사는 참된 공민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다시금 깊이 깨닫게 되였다.

대덕산초소에서 성스러운 복무의 나날을 보낸 필자가 침상에 매인 몸이 되였을 때의 심정이란 절망, 좌절과 같은 말로도 다 표현할수 없는것이였다.

허나 고향은 조국보위의 길에 더운 피를 아낌없이 바친 장한 아들을 얼싸안아주었으며 그에게 커다란 힘과 용기를 안겨주었다.

의사들과 이웃들은 물론 고마운 사람들이 매일과 같이 찾아와 그의 건강과 생활에 대해 늘 마음쓰며 친혈육의 정을 부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일신상의 괴로움을 빨리 가시고 변함없는 애국의 마음을 간직하도록 고무해주었다.

사회주의조국의 고마움과 수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진정을 가슴뿌듯이 느낄수록 그의 심장속에서는 보답의 일념이 끓어번졌다.

(나는 영예군인이다. 비록 두다리는 없지만 언제나 병사시절처럼 조국과 인민을 위한 복무의 길을 정보로 걸어가리라.)

이런 결심을 안고 그는 원호물자를 마련하여 초소의 전우들에게 보내주었다.

꺾이면 꺾일지언정 굽힐줄 모르는 굳센 의지는 그에게 조국을 위한 일감을 더 찾게 하였다.

그때 그에게 제일먼저 떠오른것은 김시권선생의 모습이였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중기소대장으로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하반신이 마비된 영예군인, 온몸의 3분의 1만이 겨우 살아있는 처지에서 근 30년간 투쟁의 노래를 높이 불러온 열정의 시인을 그도 오래전부터 존경하였던것이다.

그처럼 시인이 될 결심을 품고 붓을 들었으나 문학적기초가 약한 그에게는 욕망뿐이였지 결코 헐한 일이 아니였다. 하나의 시어, 하나의 시행을 고르기 위해서도 몇날, 몇밤을 지새워야 했고 두눈에 피발이 지도록 수십, 수백권의 책을 번져야 했다.

그러나 물러설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시창작은 시인이 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문제이기 전에 조국과 혁명에 끝까지 복무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운명적인 문제였기때문이다.

그때 그의 가슴속에 더더욱 안겨오는것은 대덕산초소에서 복무의 길을 걷던 잊지 못할 나날들이며 오늘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조국이 맡겨준 초소를 굳건히 지켜가고있는 사랑하는 전우들에 대한 그리움이였다.

그는 비록 몸은 정든 초소를 떠났어도 마음은 영원히 일당백의 고향에서 살려는 결심과 의지를 가다듬게 되였으며 끊임없는 사색과 고심어린 노력끝에 마침내 처녀작인 시초 《참호에서 참호에로》를 훌륭히 완성하게 되였다.

그후에도 그는 침상에 누운 불편한 자세로, 생을 위협하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시창작을 계속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지은 시와 함께 성의껏 마련한 지원물자를 안고 인민군부대들과 공장, 광산 등을 끊임없이 찾으며 선동도 하고 그들의 생활을 체험하면서 새로운 시상을 잡아나갔다.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 나날에 그는 조국과 인민이 사랑하는 영예군인작가로 성장할수 있었다.

그의 생활이 보여주는것처럼 인간의 삶과 운명은 신념과 의지에 의하여 결정된다.

붓대와 함께 시창작이라는 먼길을 걸어온 머리희슥한 한 영예군인의 모습에서 굳센 의지는 어떤 인간을 키우며 어떤 성공의 길을 열어주는가를 나는 다시금 깊이 새기게 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그가 새로 쓴 시집 《나의 옛 총번호를 새겨달라》야말로 인간의 의지에 관한 글이라고 말하고싶다.

지금도 청춘의 기백과 열정에 넘쳐 병사시절에 사는 그의 가슴속에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아주신 시가 새겨져있으며 그의 이름은 그가 창작한 시들과 더불어 인민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한 영예군인의 이런 영광과 행복은 어디서 온것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병사시절의 한 모습으로 당과 조국을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칠 굳은 신념과 의지로 하루하루를 빛내여온 참된 인간에게 안겨지는 어머니당과 조국의 축복이다.

나는 그의 시로써 그의 모습을 대신하려고 한다.

《…

아, 조국이여 나를 키워준 어머니이시여

어머니앞에

떳떳치 못한 아들로 백년을 사느니

이 한몸 깡그리 불태워 어엿한 아들로

티없는 하루를 살렵니다

조국을 받드는 억센 거목이 되여

나라의 미더운 기둥이 되여》

함흥시 흥남구역 류정3동 주민 리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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