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6월 27일 《로동신문》
고마운 그 은덕에 한생토록 보답하리
대동강구역 옥류1동 20인민반 최금숙녀성에 대한 이야기
이 나라 어머니들의 긍지높은 대회합으로 불리워지는 어머니대회에 두차례나 참가한 녀성이 있다. 그는 바로 대동강구역 옥류1동 20인민반에서 살고있는 최금숙녀성이다.
그는 그 어떤 특별한 직업에서 특출한 위훈을 세운 녀성이 아니다.
인민반장, 녀맹초급단체
그 나날에 그는 사회와 집단을 위한 좋은 일을 스스로 찾아하였고 사람들로부터 《애국자할머니》라는 류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어이하여 그는 그렇듯 남다른 삶의 자욱을 새기게 되였는가.
《우리 나라에는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자기 일터를 묵묵히 지키며 당과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진심으로 애쓰는 녀성들이 많습니다.》
최금숙녀성은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어머니의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다심한 눈빛과 따뜻한 사랑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지금도 그는 온 나라 녀성들이 친정집이라고 정답게 부르는 평양산원이 일떠선 그해에 산원에서 첫 아이를 받아안던 그날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있다.
무릇 녀인들은 자식을 낳았을 때 어머니의 사랑을 더욱 그리워한다고 한다.
하지만 첫 아기를 품에 안은 그의 가슴속에 단 한점의 서러움이나 그늘이라도 있었던가.
언제나 그의 가슴속에 꽉 차있는것은 보답의 일념뿐이였다.
그는 당의 은정에 대를 이어 영원히 보답할 불타는 마음을 담아 태여난 자식의 이름을 《은정》이라고 지었다.
그러나 몇년후 그는 보답의 자욱도 뚜렷이 새겨보지 못한채 뜻밖의 병으로 생사기로의 운명에 놓이게 되였다.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는 어느날 깊은 밤 종이우에 한자두자 글을 써나갔다.
나라의 은덕을 받기만 하고 천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고 가는것이 정말 죄스럽다고.
그런데 그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고마운 사람들이 그를 기어이 다시 일으켜세우기 위해 친혈육이 되여 정성을 다하였다.
마침내 병을 털고 대지를 활보하게 된 꿈만 같은 그날 최금숙녀성은 눈물에 젖어 의사들에게 물었다. 내가 쓴 약값이 얼마인가고.
하지만 의사들도 대답을 할수 없었다. 우리 사회에서 사는 그 누가 약값을 알고 치료를 해주고 치료를 받았던가.
썩 후에야 그는 자기가 쓴 약값이 일생동안 일해도 다 갚지 못할 엄청나게 비싼 값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날 그는 맹세했다.
내 남들의 몇곱으로 삶을 살아 기어이 나라의 은덕에 보답하리라고.
그때부터 그는 인민반장으로서, 녀맹초급단체
하지만 보답의 마음으로 불타는 그는 도무지 성차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한가지라도 더 일을 찾아하고싶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주의건설장들을 찾아 지원의 길을 걷게 되였다.
어디엔들 그의 발자욱이 찍히지 않았으랴.
개선문건설장, 모란봉경기장(당시)개건확장공사장, 만수대대기념비 교양마당과 주변정리공사장…
그도 한 가정의 주부였고 사랑하는 자식을 가진 어머니였다. 그라고 왜 자식들을 더 잘 입혀 내세우고싶은 마음이 없고 단란한 가정적분위기속에서 명절의 한때를 보내고싶은 생각이 간절하지 않았겠는가.
힘들고 나약해질 때마다 그는
이 나라의 평범한 녀인이 올린 편지도 몸소 보아주시고 사랑의 친필을 보내주신
그는 애국의 길을 더욱 줄기차게 이어나갔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온 가족과 함께 만수대
최금숙녀성에게 있어서 가꾸고 가꾸어도 또 가꾸고만싶은 꽃과 나무, 그것은 단순히 식물이기 전에 그의 넋이고 숨결이였다. 더없는 행복이고 보람이였다.
하기에 눈보라 휘몰아치는 한겨울의 이른새벽이면 그는 서둘러 만수대언덕으로 달려나오군 했다. 그리고 한그루한그루의 나무에 더욱더 땀을 쏟아부었다.
그렇듯 뜨거운 마음을 안고 그는 금수산
사실 식물학을 전문으로 배우지 못한 그에게 있어서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은 결코 헐한 일이 아니였다. 나무의 생물학적특성과 토양상태를 잘 모른탓에 안타까와 눈물을 흘린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연구사들을 찾아가 배우기도 하고 밤을 새우며 식물학과 관련한 기술도서들을 탐독하기도 하면서 피타게 나무들을 심고 가꾸어나갔다.
그 나날 금수산
그는 비단 나무만 심고 가꾸지 않았다.
금수산
어느날 그는 수목원을 찾아왔던 소년단원들로부터 그 혁명사적지에 깃든
(수목원에 나무를 심는것도 좋지만 그 나무를 심는 어린 학생들의 마음에 보답의 씨앗을 먼저 심어주는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여 그는 스스로
하다면 과연 무엇이 최금숙녀성으로 하여금 그렇듯 변함없이 충성의 한길을 정보로 걸어가게 한것인가.
한번은 그의 자식들이 예순살이 훨씬 넘도록 왕복 수십리길을 오가며 수목원관리사업에 온갖 지성을 바쳐가고있는 어머니의 건강이 념려되여 이제는 집에서 쉴것을 권고한적이 있었다.
그때 최금숙녀성은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갈수록 나라의 은덕은 커만 가는데 내 어찌 보답의 길에서 한시인들 쉴수 있겠느냐.》
맏손녀가 당의 사랑속에 대학생이 되여 새 교복을 받아안았을 때에도,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손자가 날마다 젖제품을 받아안을 때에도 그는 늘 말하군 했다.
이 세상에 어머니들은 많아도 이 나라의 어머니들처럼 복받은 삶을 누리는 어머니들이 또 어디 있겠는가고, 우리는 나라의 은덕에 고마움의 눈물만 흘릴것이 아니라 피땀을 바쳐 보답해야 한다고.
최금숙녀성은 일터의 소문난 로력혁신자도 아니고 온 나라가 다 아는 녀성영웅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삶이 만사람의 감동을 자아내는것은 고마운 사회주의제도가 안겨준 어머니의 긍지와 행복을 심장깊이 새기고 나라의 은덕에 한생토록
보답하기 위해
최금숙녀성이 걸어온 값높은 삶의 자욱은 말해주고있다.
나라의 은혜를 한생토록 못갚았다고 생각하며 생의 먼길을 끝까지 줄달음쳐가는 사람만이 일편단심 충성과 애국의 한길을 걸을수 있다는것을.
글 및 사진 본사기자 정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