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6월 23일 《로동신문》
친딸, 친누이로 20여년
《사회적으로 전쟁로병들을 존대하고 우대하는 기풍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우리앞에 부피두툼한 여러권의 일지가 있다. 나라가 어려움을 겪던 고난의 시기부터 오늘까지 시안의 전쟁로병, 영예군인들을 위해 뜨거운 진정을 바쳐온 평양시제2인민병원 과장 고수미동무의 수십년세월이 비낀 일지이다.
《1996년 4월 25일,
오늘 전쟁로병들이 우리 병원에서 소박한 공연무대를 펼치였다. 수도의 곳곳을 다니며 새세대들에게 조국수호정신을 심어주는 그 모습에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며 다시 만날것을 약속했다.》
고수미동무는 전쟁로병들과 이렇게 인연을 맺었다. 맡은 일에서 언제나 첫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그는 이른아침에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길에 올랐어도 집이 아니라 수도의 건설장들에서 흙 한삽 뜨고 벽돌 한장이라도 날라야 속이 시원해하였다. 그리고는 새벽녘까지 전쟁로병들에게 보내줄 보약재를 만들군 하였다.
그러던 주체87(1998)년 9월 18일 그는 병원구내에서 사륜차에 몸을 실은 한 녀인을 보게 되였다.
그날 고수미동무는 일지에 이렇게 썼다.
《약을 타러 왔다고 해서 약국에까지 사륜차를 밀어주었다. 얼른 과에 올라가 보약재도 가져다 안겨주었지만 마음이 가볍지 않다. 녀성의 몸으로 영예군인이 되였으니 얼마나 불편한 점이 많겠는가. 이제부터 내가 그를 돌봐주자.》
이렇게 되여 영예군인가정방문이 시작되였고 그길에서 많은 영예군인들과 혈육의 정을 맺었다.
이때부터 그의 일지에는 수도의 여러 구역에서 사는 전쟁로병들과 함께 영예군인들의 이름과 나이, 건강상태가 적혀지게 되였다. 그 일지를 늘 펼쳐보며 고수미동무는 수십년세월 그들과 혈육의 정을 이어왔다.
결코 바친것뿐이 아니였다.
《2007년 12월 31일,
대성구역에 사는 송영복전쟁로병의 집을 찾았다가 전쟁때의 상처자리를 보게 되였다.
〈나는 이 상처자리를 볼 때면 락동강모래불에서 숨진 전우들의 당부가 들려오군 하네.〉라고 하던 그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애국의 길을 걸으려는 고상한 지향이 가슴을 울려주었다.》
《2011년 7월 25일, 서성구역에 사는 전수경로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전승절에 중학교 졸업반학생들앞에서 할 공연의 첫 〈심사자〉가 되여달라는것이였다. 몸은 비록 늙었어도 애국의 마음만은 변함이 없다.》
고수미동무는 전쟁로병, 영예군인들을 위해 걸어온 나날에 늘 그들처럼 살자고
그 나날에 고수미동무는 발명증서와 함께 석사학위를 받았고 사회주의애국공로자가 되였다.
받아안는 사랑이 커갈수록 고수미동무는 전쟁로병, 영예군인들에게 더 뜨거운 지성을 바치였다.
무엇이 그를 그렇듯 헌신적이고 열의 인간으로 되게 하였는가.
일지의 한 갈피에 그에 대한 대답이 있다.
《우리 일곱남매모두가 고마운 당의 품, 사회주의조국의 품에서 대학공부를 하고 희망을 꽃피웠다. 그 품에서 나는 소원대로 의사가 되고 당원이 되였으며 단란한 가정의 주부가 되였다. 나는 더 바랄것이 없이 행복하다. 하지만 이 나라 공민이라면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 청춘을 바친 고마운분들이 있다는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이 누리는 모든 행복은 그들이 흘린 피의 대가이다.》
본사기자 오은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