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10월 3일 《우리 민족끼리》

 

은혜로운 사랑속에 복받은 《휘파람가수》

 

내 조국은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 따뜻이 품어주고 보살펴주는 따뜻한 인간사랑의 세계이다.

우리 공화국에서뿐만아니라 세상사람들속에 《휘파람가수》로 유명했던 인기가수 전혜영, 내가 만난 그도 역시 인간사랑의 대화원속에서 활짝 피여난 한떨기 아름다운 꽃이다.

전혜영이라는 이름은 노래 《휘파람》을 떠나 생각할수 없다. 그만큼 그 노래는 전혜영이 가수로서의 명성을 떨치던 나날에 부르던 노래들중 가장 대표적인 노래인것이다.

노래 《휘파람》은 국내에서뿐아니라 해외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주체80(1991)년 일본에 가서 이 노래를 불렀을 때 그곳 사람들은 극장에서 함께 휘파람을 불며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첫 대면부터 퍽 인상이 깊었다. 이제는 40대의 풍만한 중년부인이건만 청순한 눈빛, 해맑은 얼굴은 아직도 10대의 소녀인양 싶었다. 특히 어린애같이 애된 목소리는 참으로 류달랐다.

나는 그에게 어릴 때부터 우리 공화국뿐아니라 해외에서도 인기가수로 널리 알려졌는데 부모나 친척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고 물었다. 그는 아버지는 로동자였고 어머니는 중학교 문학교원을 하였다고 하면서 자기 목소리와는 달리 오히려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였다고 웃으며 말하는것이였다. 자기 가문에서 노래와 인연을 맺고있는것은 자기 한사람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어떻게 되여 노래와 인연을 맺게 되였고 오늘과 같이 성장하였는지 알고싶었다.

기대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나에게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윽고 그는 지나온 나날을 감회깊이 추억하였다.

평양에서 출생한 그는 4살때 아버지를 따라 청진으로 이사를 하게 되였는데 언니가 악기를 배우는 청진시의 포항1유치원(당시)에 자주 놀러 다니군 하였다고 한다.

언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처녀애를 띄여본 그곳의 음악선생이 그에게 악기를 배워주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음악적재능이 뛰여나다는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유치원선생은 어린 전혜영을 훌륭한 독주가로 키우리라 결심하고 여러가지 악기를 배워주기 시작하였는데 못 쳐본 악기가 거의 없었다.

언제인가는 유치원에서 오락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눈물을 똘랑똘랑 떨구며 감정을 잡아 노래 《소쩍새》를 불렀다. 그를 배워주던 선생은 물론 주위의 사람들모두가 깜짝 놀랐다.

악기보다도 성악을 하는것이 더 발전성이 있다는것을 발견한 선생님은 그때부터 그를 가수로 키울 결심을 하고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그로부터 1년후 전혜영은 전국유치원예술축전에 입선하게 되였다.

조선로동당의 인재중시정책에 의하여 포항1유치원을 졸업한 그는 청진예술학원으로 갔으며 곧 평양의 금성중학교(당시)에 올라와 전문적인 성악교육을 받게 되였다. 그는 해마다 설이면 진행되는 학생소년들의 설맞이공연에 참가하였을뿐아니라 해외공연에도 참가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세상사람들은 오늘도 11살짜리 처녀애가 일본에 가서 부른 노래 《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워라》를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그때 객석에 앉은 재일동포들은 색동저고리를 입고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어린 처녀애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렸고 TV로 그 모습을 본 모든 시청자들도 감동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자기를 세상에 부러운것없이 키워주고 내세워주는 공화국의 품속에서 그의 꿈과 희망은 봄날의 꽃처럼 활짝 피여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남다른 고민으로 잠 못 들던적이 있었고 그토록 사랑하는 노래를 부르지 못했던 가슴아픈 나날도 있었다.

그가 중학교 졸업을 앞두었을 때 예술단체들에서 찾아와 후비선발을 하였다. 전혜영은 항상 기량에서 첫번째로 뽑히군 하였지만 최종합격의 영예는 매번 다른 아이에게 차례지군 하였다. 작은 키때문이였던것이다.

그후부터 그는 선발시험에 참가하지조차 않겠다고 떼를 썼고 선생님들도 더 뭐라 위로해줄수 없었다.

그러던 그를 불러주고 키워주신분은 위대한 수령님들이시였다. 전문가들은 그가 키가 작아 무대에 설수 없다고 하였지만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그의 재능의 싹을 귀중히 여기시고 몸소 보천보전자악단으로 불러주시였으며 온갖 품을 들여 인민배우로, 《휘파람가수》로 내세워주시였다.

그가 배우생활을 하는 나날에는 성대마비로 몇년동안 노래는 물론이고 말도 제대로 할수 없었던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아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전혜영의 목소리를 꼭 고쳐주자고, 천만금을 들여서라도 인민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휘파람》목소리를 다시 찾아주자고 하시면서 유능한 의료진까지 무어주시였다.

절세위인들의 따스한 사랑이 있어 그는 자기의 목소리를 다시 찾았고 《휘파람》노래를 목청껏 부르게 되였던것이다.

지방도시의 이름없는 소녀에 불과하였던 전혜영은 이렇듯 위대한 수령님들의 은혜로운 사랑속에 복받은 명가수로, 나라의 예술인재로 자랑떨치게 되였다.

지금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고 하는 나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아직 제 나이가 전문예술인으로 있어도 될 나이인데 왜 아이들을 키우는 교원으로 되였는가고 묻군 합니다. 제가 어떻게 자랐습니까. 조국의 고마운 교육체계속에서 배우고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보답을 하는것은 응당한 일이지요. 꼭 훌륭한 가수후비들을 키워내렵니다.》

어려서부터 당의 품속에서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꽃피우고 오늘은 참된 보람과 희열속에 꼬마재간둥이들을 훌륭하게 키워가고있으니 참으로 그에게 아름다운 생을 준 어머니조국의 사랑은 얼마나 따스한것인가.

몇해전 수도 평양의 인민극장에서 성황리에 진행된 예술공연 《추억의 노래》에 출연하여 《휘파람》을 부르던 전혜영의 모습이 떠오른다.

1980년대에 우리 식 전자음악으로 온 나라를 들끓게 한 보천보전자악단에서 《휘파람》을 흥취나게 부르던 전혜영을 다시 보는것만 같았다.

은혜로운 사랑의 품속에서 오늘까지도 《휘파람가수》로 만사람의 사랑을 받고있는 인민배우 전혜영,

오늘도 《휘파람가수》 전혜영은 위대한 어버이의 그 사랑, 그 믿음을 가슴에 새기고 예술인재육성에 자신의 지혜와 열정을 다 바쳐가고있다.

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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