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9월 15일 《로동신문》

 

음악예술로 수령을 받들고 혁명을 보위한 참된 문예전사

만수대예술단 고문이였던 박영순동지의 한생을 더듬어

 

노래와 함께 승리하며 전진하여온 우리 혁명의 로정에는 천만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음악포성으로 수령을 옹위하고 혁명을 보위한 참된 문예전사들의 자욱이 뚜렷이 새겨져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문학예술부문 일군들과 창작가, 예술인들은 명작창작으로 수령을 옹위하고 혁명을 보위하며 당의 척후대, 나팔수로 복무해온 전세대 문예전사들의 투쟁전통을 이어받아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우리 당을 앞장에서 받들어나가는 사상전선의 기수가 되여야 합니다.》

당의 기초축성시기부터 위대한 장군님을 일편단심 충심으로 받들며 인민의 사랑을 받는 예술가로, 당의 참된 문예전사로 성장한 박영순동지,

위대한 장군님의 천출위인상에 매혹되여 끝없는 숭배심으로 가슴을 불태운 그는 1970년대에 위인칭송의 노래를 선창한 선구자들중의 한사람이였고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핵으로 하는 만수대정신의 창조자의 한사람이였다.

재능있는 예술인이기 전에 수령께 무한히 충실한 혁명전사였던 그의 한생은 혁명위업에 참답게 이바지하는 문학예술은 충성으로 불타는 심장을 지닐 때에만 창조할수 있다는 고귀한 진리를 후대들의 가슴마다에 새겨주고있다.

 

충성의 노래를 낳은 샘

 

참다운 충실성은 수령에 대한 한없는 매혹과 흠모로부터 시작된다.

수령의 위대성을 심장으로 절감하며 온넋을 바쳐 우러러따르는 마음,

그 숭고한 세계에서 충신의 첫걸음이 시작되는것이며 생명이 다할 때까지 변함을 모르는 일편단심이 량심으로, 도덕의리로, 신념으로 다져지는것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천재적인 예지와 걸출한 령도에 의하여 20세기 문예부흥의 려명이 밝아오던 1960년대의 마지막해,

국립가무단(당시)의 성악배우였던 박영순동지는 만수대예술단의 전신인 국가중창단의 한 성원으로 선발되게 되였다.

당시 국가중창단은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우리의 문학예술을 대표하는 예술단체, 본보기단체를 조직하실 구상을 안으신 위대한 장군님의 손길아래 태여난 전도양양한 예술단체였다.

주체58(1969)년 10월 6일 국가중창단에 나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친히 박영순동지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를 남성중창조의 조장으로 임명해주시였다.

절세위인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주체음악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보람찬 길을 걷게 된 박영순동지의 감격과 환희는 그 무엇에도 비길데 없었다.

비범한 예지와 특출한 음악실력, 만사람의 마음을 한순간에 끌어당기는 친화력과 전사들에 대한 불같은 사랑…

위대한 장군님의 걸출한 위인상은 박영순동지의 심장을 열화같은 매혹으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위대한 장군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그이의 지도를 받군 한 박영순동지였으나 그이곁을 하루라도 떨어지게 되면 북받치는 그리움으로 가슴적시며 뵙고싶은 마음을 달랠길 없어하였다.

1970년대 중엽 만수대예술단의 창작가, 예술인들이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대한 방문공연을 진행할 때였다.

공연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꽃다발속에 묻혀있을 때에도, 깊은 밤 이국의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볼 때에도 박영순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눈앞에 어려오고 그이의 가르치심이 귀전에 들려오군 했다.

정다운 그 품으로 천리이든 만리이든 한달음에 달려가 안기고싶을 때마다 머나먼 조국의 하늘가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속말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라고 불러보던 박영순동지였다.

그는 매일과 같이 위대한 장군님께 마음속진정을 아뢰이며 이런 글줄을 이어갔다.

《1974. 10. 28. 월요일. 알제리에서 첫 관통련습.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오늘 저희들은 알제리의 지방도시인 오랑에서 첫 무대관통련습을 진행하였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세워주신 기준에서 볼 때 미숙한 점이 많았습니다. 특히 리듬이 불안하며 전반적음색통일이 잘되지 않고있는것입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심려를 덜어드리는것을 제일가는 기쁨으로 여기고있는 저희들은 지도자동지께서 세워주신 기준에서 한치의 드팀도, 자그마한 양보도 없을것이며 알제리에서의 첫 공연을 높은 사상예술적수준에서 보장함으로써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충성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외국방문공연의 나날 그는 남성중창조 성원들에게 《우리의 임무는 첫째도 둘째도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세워주신 기준을 고수하는것이요.》라고 강조하군 하였다. 일상생활에서도 늘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라고 하셨는데》라는 말을 자주 하군 하였던 박영순동지는 사업일지나 일기의 구절마다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주신 교시를 인용하고 거기에 자기의 사업과 생활을 비추어보군 하였다.

이런 그였기에 위대한 장군님께서 일단 형상과제를 주시기만 하면 폭발적인 열정과 지칠줄 모르는 탐구와 사색을 기울여 훌륭히 수행해내군 하였고 자신뿐아니라 남성중창조의 모든 성원들을 그렇게 이끌었다.

그 나날 박영순동지의 가슴속에는 하나의 절절한 소원이 자리잡았다. 령도자로서, 인간으로서 만사람의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그이의 위대함을 소리높이 노래하고싶은 억제할수 없는 충동이였다.

절세위인의 품속에서 성장의 걸음마를 떼던 순간부터 심장에 끓는 매혹과 흠모의 불덩이를 세상에 터치고싶은 열망은 자나깨나 그의 심신을 달아오르게 하였다.

1970년대는 위대한 장군님의 출중한 위인상에 대하여 누구보다 깊이 감득하게 된 문예전사들의 충성의 열정이 위인칭송의 노래로 분출하여 온 나라를 울린 격동의 년대였다.

오늘도 우리 인민은 노을이 피여나는 이른아침에 인자하신 그 미소를 생각합니다라는 노래의 구절을 뜨거운 감회와 격정속에 부르군 한다. 위대한 장군님을 처음으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로 높이 칭송한 가요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가 문학예술부문 창작가, 예술인들의 집체작으로 태여나 온 나라를 감격과 흥분에 휩싸이게 한 그 시기에 박영순동지도 열렬한 칭송의 붓을 들었다.

위대한 장군님의 탄생 32돐을 맞는 주체63(1974)년 2월의 명절을 맞으며 그가 가사를 쓴 노래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영광을 드립니다》가 훌륭히 형상되여 무대에 올랐다. 중요한 국가행사보장을 위한 공연준비로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무대와 련습실에서 보내고 밤시간마저도 자질향상과 안삼블훈련으로 지새는적이 많은 그가 언제 그렇듯 훌륭한 가사를 완성해냈는지 누구나 놀라와했다.

늘 봐야 말이 적고 일밖에 모르는 그였지만 가슴속에는 그렇듯 용암처럼 뜨거운것이 끓어번지고있었다.

주체68(1979)년 2월 17일 만수대예술극장에서는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2월의 명절을 경축하는 공연이 진행되였다. 이날의 공연무대에 박영순동지가 가사를 지은 노래 《2월의 명절을 축하합니다》가 합창으로 오르게 되였다. 합창이 끝나자마자 박영순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무대에서 달려내려온 그가 올리는 인사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대뜸 동무가 쓴 《2월의 명절을 축하합니다》의 가사를 《4월의 명절을 축하합니다》로 고치라고 이르시는것이였다. 무대와 객석이 통채로 긴장되여 박영순동지를 지켜보고있는 속에 그는 장군님께 이 노래는 박영순이 쓴 노래가 아니고 인민의 마음으로 쓴 노래이기때문에 고칠수 없습니다라고 가사를 그대로 둘것을 간청드렸다. 억지를 부리다싶이 하는 전사를 바라보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엄하신 음성으로 동무들이 내 말이라면 담벽이 문이라고 하여도 그냥 밀고나가겠다고 맹세하더니 왜 나의 말을 듣지 않는가고 하시였다.

노래를 고치라고 거듭 강조하시는 그이앞에서 바재이고 또 바재이던 박영순동지는 마침내 용기를 내여 4월 15일까지는 아직 날자가 있는데 저희들이 지혜를 모아 그때까지 4월의 명절을 축하하는 노래를 새로 지으면 안되겠습니까, 미력하지만 제가 다시 가사를 써보겠습니다라고 간절히 말씀올리였다.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렇다면 4. 15까지 기다리겠다고, 그때에 나온 노래가 오늘 부른 노래 《2월의 명절을 축하합니다》보다 못하면 이 노래가사를 고쳐야 한다고 다짐을 두시였다.

이때부터 박영순동지는 전심전력하여 새 노래창작에 달라붙었다.

마침내 4월이 왔을 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만수대예술극장에 나오시여 그가 지은 노래를 들어주시였다.

한손에 가사와 악보를 드시고 열광적으로 설레이는 합창대를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더니 노래가 끝나자 숙연히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새로 지은 노래가 아주 좋다고 평가하시였다.

박영순동지는 작가가 아니였다. 가사를 써야 하는 어떤 의무나 책임도 없는 성악가였지만 또 한분의 절세위인을 높이 모신 민족의 영광과 행운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소리높이 노래하는것을 혁명적예술인으로서의 응당한 도리로, 사명으로 간주하였기에 스스로 붓을 잡고 수령송가창작에 온넋을 쏟아부었던것이다.

박영순동지는 가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영상을 우러러》, 《백두산은 혁명의 고향》을 비롯한 수령흠모의 송가들도 훌륭히 창작하여 내놓았다. 만수대예술단 책임일군, 당책임일군으로 사업하고있던 시기에도 새세대 예술인들에게 《예술가는 우선 자기 수령을 잘 알아야 한다.》고 늘 가르치군 하던 박영순동지는 주체92(2003)년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뵈온 자리에서 자작시 《우리의 장군》을 삼가 읊어드려 충심의 고백을 드리기도 하였다.

수령송가는 혁명적예술인의 영원한 주제가이다.

한생을 바쳐 수령의 위대성을 노래하고 그것으로써 혁명위업실현에 이바지하는 예술가야말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가장 참답게 복무하였다고 할수 있다.

이것이 박영순동지의 흔들림없는 신조였고 원칙이였다.

유능한 배우이기 전에 열혈충신이였던 박영순동지의 노래는 능숙한 연기와 예술적기량에 앞서 혁명적예술인으로서의 숭고한 사명감을 간직한 충성의 심장에서부터 샘솟아올랐던것이다.

1920년대 우리 혁명의 첫 기슭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조선의 별》의 노래를 지어불렀던 청년공산주의자들처럼 위대한 장군님을 열렬히 흠모하여 박영순동지를 비롯한 만수대정신의 창조자들이 지어불렀던 수령송가들은 오늘도 인민의 영원한 재부, 가장 귀중한 정신적유산으로 되고있다. 세월은 멀리도 흘러갔지만 그가 남긴 노래들은 길이 남아 새세대 문예전사들과 인민들에게 충성의 넋을 끝없이 새겨주고있다.

 

그는 오늘도 7련대의 대오에 서있다

 

변함없이, 끝까지 가야 하는것이 충성의 길이다.

박영순동지가 한생 드팀없이 걸어온 그 길은 후대들에게 참다운 충실성이란 어떤것인가를, 혁명적예술인의 제일생명은 과연 무엇인가를 말해주고있다.

위대한 장군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배우생활을 하던 홍안의 그 시절부터 만수대예술단 고문으로 일한 인생말년까지 박영순동지의 직무에서는 여러차례의 변화가 있었다. 그 과정에는 뜻밖의 호흡기질병으로 하여 성악배우생활을 포기하고 정든 무대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가슴아픈 곡절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충성의 노래를 단 한순간도 멈춘적이 없었고 위대한 장군님의 슬하에서 참다운 예술을 배우며 몸에 익힌 전사의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림이 없이 살았다.

우리 혁명이 류례없는 난국을 헤쳐나가던 고난의 행군, 강행군시기에도 박영순동지는 어제날의 남성중창조 조장으로서, 만수대정신의 창조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

피눈물의 1994년을 보내면서 박영순동지의 가슴속에는 철석같이 굳어진 신념이 있었다. 이제는 한분밖에 안 계시는 그이, 조국의 운명이고 미래이신 위대한 장군님을 결사옹위해야 한다는 투철한 자각이였다.

자주적인 근위병이 되느냐, 제국주의자들의 노예가 되느냐 하는 엄혹한 력사의 갈림길에서 위대한 장군님의 두리에 굳게 뭉쳐 승리의 래일을 확신하며 고난의 행군길에 나선 천만의 대오,

그 열혈의 심장들을 향해 온 나라가 성새, 방패가 되여 위대한 장군님을 받들고 옹위하자고 웨치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붓대를 틀어잡은 박영순동지의 눈앞에 어려오는 불멸의 군상이 있었다.

1930년대 류례없는 고난의 행군길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옹위하여 불굴의 기상을 떨친 항일의 7련대!

혁명의 가장 어려운 시기 사령부의 안녕을 지켜 한목숨을 내댄 오중흡동지와 항일의 7련대를 마음속에 그려보며 그 대오에 자신을 세워보군 한 박영순동지였다. 바로 그날의 결사의 정신이 오늘의 행군길에 차넘쳐야 한다는 억척의 신념이 박영순동지의 창작적열정을 북돋아주었다.

이렇게 되여 오늘도 우리 인민과 인민군장병들이 부르고 또 부르는 노래 《오늘도 7련대는 우리앞에 있어라》가 류례없이 간고하였던 시기인 주체84(1995)년에 태여났다.

그것은 한 예술인의 손끝에서가 아니라 충신의 심장에서 높뛰는 피방울이 그대로 가사가 되고 그 박동이 운률로 이어진 불같은 충성의 고귀한 결정체였다. 단지 한편의 가사가 아니라 조국과 인민의 운명이 수령보위에 달려있다는 신념의 웨침이였고 천만심장에 결사옹위의 불을 달아주는 불씨였다.

그것은 또한 혁명앞에 어려운 시련과 난관이 겹쳐들 때 우리 예술인들이 서야 할 자리는 과연 어디이며 조국과 인민에게 바칠수 있는 가장 고결한 충성의 열매가 어떤것인가를 말해주는 하나의 제강과도 같은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노래가 나온지 10여년이 지난 주체96(2007)년 8월 어느날에도 노래 《오늘도 7련대는 우리앞에 있어라》를 이번에 다시 들어보니 감회가 깊다고, 그 노래는 우리 혁명이 시련을 겪던 고난의 행군시기에 나왔다고 뜻깊게 추억하시였다.

박영순동지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자기 수령에 대한 변함없는 충실성, 대를 이어가는 백옥같은 일편단심으로 일관된 참다운 혁명전사의 고귀한 생이였다.

주체98(2009)년 4월 4일이였다. 이날 만수대예술단 삼지연악단의 공연을 보아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만수대예술단 고문으로 일하고있는 박영순동지를 만나주시였다. 따뜻한 미소속에 그가 올리는 인사를 받아주신 그이께서는 박영순동무를 오래간만에 만나본다고, 그동안 박영순동무가 더 젊어진것 같다고 하시며 못내 반가와하시였다.

그날의 뜻깊은 좌석은 정녕 박영순동지에게 있어서 한생토록 못 잊을 영광의 시각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과 함께 계시며 환한 웃음을 짓고계시는분이 바로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이시였다.

《발걸음》의 노래와 함께 우리 인민들속에 전설처럼 전해지던 그이의 이야기가 한꺼번에 떠오르며 박영순동지의 온몸은 세찬 격정으로 달아올랐다.

밝은 미소를 보내주시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를 우러를수록 우리 조국과 인민이 맞이한 크나큰 행운이 가슴벅차게 안겨왔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책상을 마주하고 앉은 박영순동지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환하신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려와 장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끝없는 흥분을 안은 그는 새날이 밝아오도록 글줄을 고르며 이어나갔다. 그것이 바로 박영순동지가 생의 마지막시기까지 온갖 심혈을 다 쏟아부어 완성해가던 노래가사인 《그이는 우리의 령도자 김정은장군》이였다.

또박또박 깨끗이 정서하여놓았다가는 또다시 지우고 고치고…

꿈속에서조차 사색을 멈추지 않고 자다가도 일어나 열정의 붓을 달리며 심혈을 기울이는 박영순동지의 모습은 그대로 위대한 장군님께 드리는 첫 송가를 쓰던 1970년대 젊은 시절의 모습그대로였다.

해방전 소년로동으로 고달픈 하루해를 지우던 때에는 죽이라도 한번 배부르게 먹어보는것이 소원이였고 전후 야금로동자시절에는 소박한 자작시가 출판물에 실리는 때가 제일 기뻤던 박영순동지였다. 그런 그가 수령칭송의 붓을 들어 시대를 울리고 오늘은 대를 이어 수령복을 받아안은 민족의 영광을 노래하고있으니 절세위인들의 슬하에서 성장하여 빛나는 삶을 누리는 한없는 긍지감으로 하여 박영순동지는 심장이 세차게 고동쳤다.

70고령의 고문이 정력을 다하여 다듬고 또 다듬어나가던 노래,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 한생 충직해온 참된 문예전사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바치는 순결하고 깨끗한 충성의 넋이였다.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 대를 이어 충성다할 불같은 신념의 맹세였다.

30대 초엽부터 수백차례 절세위인들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우리 당의 주체적문학예술사상을 충직하게 받들어온 전사, 위대한 수령님들을 모신 수많은 당 및 국가행사공연과 중요공연을 성과적으로 보장하였으며 40여개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나라들에서 우리 당정책을 해설선전하고 주체예술의 위력을 떨치는데 이바지한 당의 참된 문예전사 박영순동지,

그가 걸은 한생의 자욱자욱이 선률이 되고 리듬이 되여 남겨진 노래들은 그 얼마인가.

《사회주의 우리 조국 빛내여가세》,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영광을 드립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영상을 우러러》, 《2월의 명절을 축하합니다》, 《축원의 노래》, 《백두산은 혁명의 고향》,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대동강의 밤》, 《노래하자 인민의 내 나라》, 《오늘도 7련대는 우리앞에 있어라》, 《예쁜이》…

박영순동지가 남긴 노래들은 그 어떤 값진 재부에도 비할수 없는 귀중한 유산으로 되여 후대들의 가슴마다에 깊은 뜻을 새겨주고있다.

죽어서도 영생하는 충신의 삶, 그 숭고한 메아리는 박영순동지의 생애의 갈피갈피에 새겨진 감동깊은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전하고있다.

자나깨나 위대한 장군님의 품을 더듬어찾으며 그이께 마음속이야기를 끊임없이 아뢰이며 산 박영순동지의 일기장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영생하는 삶을 위하여.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무의미하게 100년을 사느니보다 단 하루를 살아도 자기 당과 자기 수령을 위하여 조국과 인민앞에 떳떳하게 자기가 한 일을 보고할수 있도록 사는것이 더 영예로운것이며 그것이 세상에 태여난 보람일것입니다.

이것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배워주신 우리 삶의 보람인것이고 영생의 길인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한생을 산 그였다.

수령을 받들고 옹위하는 한길에 충성의 자욱자욱을 수놓아간 박영순동지의 삶이 남긴것은 무엇인가.

수령보위에 혁명의 승리가 있고 인민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진리였다. 이것을 항일의 투사들과 전화의 용사들이 피로 새겼다면 당의 기초축성시기의 문예전사들은 음악예술로써, 한생 변하지 않는 혁명적예술인의 일편단심으로써 조국청사에 아로새기였다.

그 영광스러운 자욱으로 하여 박영순동지의 생이 그토록 빛나는것이며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는것이다.

하기에 박영순동지는 오늘도 오중흡7련대의 대오에 서있다. 열혈충신들의 대오에 영원한 삶의 자리를 정하고 천만인민을 수령결사옹위에로 불러일으키고있다.

 

*    *

 

당 제8차대회 결정을 높이 받들고 문학예술의 모든 전선에서 일대 혁명을 일으켜 주체문학예술의 새로운 개화기를 펼쳐야 하는 어렵고도 중대한 임무앞에서 우리의 창작가, 예술인들은 누구나 되새겨보아야 할것이다.

1970년대 문예인들처럼 충성의 일념으로 심장을 불태우며 시대가 부여한 혁명적예술인의 사명을 다해나가고있는가.

누구나 예술가이기 전에 참된 혁명전사로 산 박영순동지의 생애를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보며 한편의 글을 써도, 노래 한곡을 불러도 수령에 대한 충성의 한마음으로 심장의 메아리를 울려가야 할것이다.

오늘도 영생하는 충신의 넋이 수령결사옹위의 절절한 당부가 되여 혁명의 새세대들을 부르고있다.

주체위업 받드는 일심단결의 대오에

백전백승 힘을 준 혁명의 영원한 7련대

내 나라 내 조국 부강을 지켜가며

오늘도 7련대 우리앞에 있어라

 

본사기자 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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