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회)

제 7 장

3

 

경림이와의 해후가 있은 다음부터 사향의 마음은 더욱 싱숭생숭해지고 아버지의 고향에 가보고싶은 욕망은 참을수 없는것으로 되였다.

병원의 한호실에 입원해있는 기간 사향은 자기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하는것 같은 경림이의 말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사향선생, 이번에 평양에 왔던김에 빨리 병을 고치고 훨훨 날아서 아버지의 고향에 꼭 가보자요.》

그날 경림은 침대에 누워 지난날 자기 가정에서 있은 가지가지의 일들을 들려주고나서 이런 말까지 해주었던것이다.

사향은 가슴이 뭉클하고 불시에 눈굽이 젖어났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가… 훨훨 날아서 못 갈망정 벌벌 기여서라도 가보았으면…》

《기여가다니요? 무슨 그렇게 먼길이고 지쳤다고 기여서 가요?》

경림은 사향이쪽으로 돌아누우며 그렇게 말하는 그를 나무람했다. 그런 때는 경림이 나이지숙한 중년부인이 아니라 발랄한 처녀같았다.

《경림씨,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제 목숨만 건져보겠다고 떠났던 고향을 어찌 그리 쉬이 찾을수 있겠어요. 그 고향에 태를 묻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사는이들은 무슨 낯으로 대하고…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 딸이 머리숙여 용…서를 빌고…싶어요.》

사향은 경림이를 마주보지 못하고 반듯이 누워 천정 한곳을 응시하며 혼자말처럼 뇌이였다. 두눈에는 맑은것이 가득 고여 찰랑거렸다. 약간이라도 움직이면 그 눈물이 눈굽으로 좌르륵 하고 흘러내릴것 같았다.

《사향선생, 공연한 걱정을 하는군요. 우리 시아버님이나 그때 한마을에서 살던 오랜분들이 아직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반가와할가요. 너무도 긴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렇지만 땅속에서라도 알고 기뻐하고 반겨맞아줄거예요.》

경림은 사향의 우수가 비낀 어조와 모습에서 그의 심정을 읽었는지 방금전과는 달리 애틋한 목소리로 그 녀자의 괴로와하는 마음을 감싸주었다.

《이웃리에 우리 친정아버님이 계시는데 아직 정정하답니다. 아마 사돈의 소꿉시절 친구의 자손이 자기 아버지의 고향땅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동구밖에까지 나와 맞아줄거예요.》

《정말 그럴가요?》

《그렇잖구요. 내가 이렇게 병원침대에 누워있지만 않아도 당장…》

《고마와요, 경림씨.》

《내 이제 우리 철림이가 오면 그 앨 시켜서라도 외할아버지한테 련락해놓도록 하겠어요. 그리고 철림의 아버지나 삼촌이 돌아오면 사향선생에 대해서도 알리구요.》

경림이와의 이런 이야기가 오고간 후 사향은 밤에 몇번이나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가는 꿈을 꾸었다.

어느날 밤에는 자기와 경림이가 조선치마저고리로 소복단장을 하고 들국화가 하얗게 핀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둘이 다 소녀들처럼 머리에 들꽃으로 만든 띠를 올려놓고있었다. 그것으로도 성차지 않아 거기에 들가의 꽃을 자꾸 꺾어 더 꽂았다. 그런 다음 둘이 팔을 붙안고 돌아가며 즐겁게 웃었다.

그리고나서 경림이 먼저 저쯤 앞서 달음박질하면 사향은 그를 따라잡겠다고 발끝에 감기는 치마자락을 걷어올리며 달리고 또 달렸다. 어찌된 일인지 고향마을은 나타나지 않았다. 길은 멀기도 했다. 그렇지만 들국화가 곱게 핀 그 길은 아무리 걸어도 싫지 않고 힘들지 않았다.

이런 꿈을 꾸다가 깬 날은 마음이 더 번거롭고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어느날 새벽에도 사향은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이날은 자기가 머리에 백발을 얹고 허리가 굽은 로파가 된것이 아닌가. 별스럽게 탈린 다래나무덩굴을 잘라만든 지팽이까지 짚었다.

길도 엉망이 된 진창길이였다.

지팽이에 몸을 의지하고 힘겹게 걸음을 옮겨짚는데 앞에 웬 사람이 마주 왔다. 사향은 고개를 들어 마주보았다. 그 역시 머리고 수염이고 지어 수북한 장미까지도 온통 하얀 백발로인이였다.

《어디로 가는 길손이요?》

백발로인은 채머리를 하며 묻었다.

《아버지고향으로 찾아가는 소녀웨다.》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가다니? 지금껏 어디 가서 사셨기에 등이 다 굽은 이제야 선친들의 고향을 찾는다는게요?》

로인은 좀 성난듯 한 목소리로 대뜸 질책하려들었다. 아까보다 채머리를 더 세게 떨었다. 수염이며 눈섭까지도 부들부들하였다.

《남이야 어디 가서 살든 로인님이 상관할바가 뭐 있소? 힘들게 가는 걸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훼방을 놀셈인가요? 어서 길이나 비키시우다.》

사향은 마뜩지 않게 응대하며 갈길을 가려고 하였다. 자기의 괴상하게 탈린 지팽이로 땅을 몇번 두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막아선 로인은 좀처럼 길을 틔워주지 않았다. 이쪽저쪽 오가며 사향의 앞을 막고 아래우를 찬찬히 살피더니 다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까와는 달리 말투까지 변하였다.

《으흠- 너 보아하니 변달근이 손녀로구나. 네 할아버지가 이 땅을 버리구 도망갔다가 이국땅에 묻혀있는데 네가 어떻게 선친들의 고향이라며 기신기신 찾아온다는거냐? 무슨 낯으루… 무슨 렴치루!》

로인은 발을 굴렀다. 어찌나 무섭게 다리를 들었다놓는지 딛고선 땅이 드릉드릉 울리는것 같았다.

사향은 와뜰 놀라 쳐다보았다. 기상이 여간 사납지 않았다. 대뜸 몸을 옹송그리며 공손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로인님, 용서하시오이다. 로인님은 뉘신데 우리 집안일을 그리도 말짱히 아시나이까. 실은 그래서 속죄하러 오는 길이예요. 아버지와 함께 새파랗게 젊었을 때 떠난 걸음이 이렇게도 멀어 중도에서 부친은 눈을 감고 난 이렇게 머리에 백발을 얹었어요. 그러니 나라도 숨지기전에 가닿게 길을 좀 내주세요. 머리숙여 비나이다.》

사향은 지팽이에 의지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는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래도 안돼!-》

로인은 또 한번 발을 쾅 하고 굴렀는데 이번에는 땅이 쩍 갈라지며 시커먼 미궁이 나타났다. 사향은 물러설새도 없이 그 천길나락속에 풍덩 빠져들고말았다.

《아앗!》

사향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사향선생, 무슨 일이예요?》

맞은켠 침대에 누웠던 경림이 그 비명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불을 켜고 방바닥에 떨어진채로 있는 사향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다가갔다.

《아이, 이 땀… 무슨 일이예요?》

《꿈을 꿨어요, 꿈… 아유, 무슨 꿈이 그럴가.》

사향은 흐트러진 머리를 자꾸 흔들었다. 온몸의 맥을 다 뽑았는지 멍하니 그대로 앉아있었다. 한참후에야 자신을 되찾은 사향은 머리를 비다듬으며 꿈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는 허거프게 웃었다.

《전번날엔 들국화가 핀 들길을 끝없이 걷는 꿈을 꿨다더니… 안되겠어요. 빨리 병을 털고 일어나 걸음해야지. 그래야 꿈도 좋은 꿈만 꿀것 같아요.》

경림은 사향을 부축하여 침대에 올려앉히며 웃었다.…

그러던 사향의 소원이 드디여 이루어지게 된것이다.

병원에서는 아직 퇴원승인은 하지 않았지만 며칠간 말미로 고향방문을 허락하였다. 그것이 알려지던 날 경림은 사향의 의향을 물었다.

《사향선생, 렬차려행을 할가요, 자동차려행을 할가요?》

경림이도 오래간만에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내려가니 마음이 설레이는것 같았다.

《아무 편이든 다 좋아요. 난 그저 고향땅에 가닿기만 한다면…》

사향은 흥분하여 도무지 자신을 다잡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꼭 어린애가 된것 같았다. 그러던 그가 불쑥 물었다.

《경림씨, 난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할가?》

《아유, 그거야 선생님마음대로지요.》

경림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자 사향은 간청하듯 했다.

《나와 함께 오후에 옷점에 좀 가줘요.》

《옷점에요?》

《아무래도 유형욱아버님의 묘소에는 치마저고리를 입고가야 할가봐요. 우리 아버지가 생전에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던요.》

《예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경림은 그제야 사향의 청에 가볍게 대할수 없는 의미가 담겨져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자기도 가슴이 쩡하였다.

그날 오후 그들은 조선옷점에 갔다. 만들어놓은 조선치마저고리중에서 사향이에게 맞는것으로 고르려 했다. 그런데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성격까지 시원시원해보이는 옷점책임자가 사연을 듣고 그런 옷이면 몸에 꼭 맞게 한벌 지어드리겠다고 했다.

《고맙긴 한데 시간이 급해서… 우린 래일 당장 길을 떠나야 하거던요.》

《그런 걱정은 마세요. 모처럼 조국에 오신분인데 아무리 시간이 급한들… 우리 옷점동무들을 다 동원해서라도 꼭 보장해드리지요.》

책임자는 그 자리에서 재단사를 불러 제꺽 몸을 재게 했다. 옷감은 마음에 드는것을 고르라며 재단탁우에다 여러가지 색갈과 재질의 천들을 주런이 올려놓아주었다.

사향은 초면인데도 친동기간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이들이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자꾸 경림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들이 옷점을 다녀온지 몇시간이 되지 않아서 정말 옷점책임자가 얼굴이 둥글납작하고 얌전하게 생긴 처녀와 함께 꽃보자기에 새로 지은옷을 가지고 찾아왔다. 책임자의 이마에는 자분치가 붙어있고 처녀의 코등이며 입언저리에도 땀이 송골송골 내돋아있었다.

그들은 사향이에게 옷을 입혀보고 품이며 기장이며 꼭 맞는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아이구, 우리 사향선생이 어쩌면 이렇게 더 아름답고 현숙해보일가. 거울에 좀 와봐요.》

경림이 앞가슴에 두손을 가져다 마주치며 감탄했다. 그리고는 사향을 벽에 걸려있는 긴 거울앞으로 끌었다.

사향이도 자기의 그런 차림새는 처음인지라 수집음을 타며 거울앞으로 갔다.

《마음에 들어요?》

경림의 그 물음에 사향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그제야 옷점책임자와 같이 온 처녀는 마음을 놓으며 일어섰다.

《그럼, 부디 려행을 잘하고 오세요.》

사향은 어떻게 사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다가 치마저고리를 입은채로 나들문밖에까지 나가 그들을 바래주었다. 가슴에는 고마운 생각이 꽉 차있고 자기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졌다.

찾아온 그들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한것이 몹시 후회되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이였다.

최성훈이 혜정이와 함께 나타났다.

《일이 바쁜 최선생이 어떻게 또 이렇게?…》

《왜요? 자꾸 찾아오는게 반갑지 않은가 보지요?》

최성훈은 가쯘한 이발이 드러나게 웃으며 능청을 부렸다.

《아니, 그건 무슨 안할 말씀을… 나야 나라의 중한 일을 보는 최선생이 나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는것 같아 미안해서 하는 말인데…》

《허허… 그렇다면 고맙습니다. 하지만 난 어쩐지 선생이 평양에 처음 오셨는데 혹시 불편한 점이라도 없나 해서 늘 마음이 씌여지는군요. 혜정동무를 통해 알아는 보는데 별다른것이 없다고만 하니…》

성훈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함께 온 혜정이를 돌아보았다.

곁에 섰던 혜정이 껴들었다.

《사향언니, 난 우리 부국장동지한테 이번통에 신용을 단단히 잃었습니다.》

《신용을 잃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사향은 두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내를 맡았다는 사람이 사향언니를 참관로상에서 급작스레 병원에 들이닥치게 했지, 가방 잃은것을 제때에 알지 못했지… 그러니 그럴만도 하지요.》

《아유, 그게 내 잘못이지 어디 우리 혜정이 잘못이예요?》

사향은 펄쩍 뛰며 정색해서 최성훈을 나무리려들었다.

《사향선생, 혜정동무편을 들면 안됩니다. 그러지 않아도 요즈음 나를 역습하려고 기회를 엿보는데…》

최성훈이 정말 혜정이 주먹을 들고 매를 안기려고 달려들기라도 하는것처럼 두손을 펴들고 막으며 피하는 시늉을 하였다. 그제야 지금까지 그들들의 대화가 롱담이라는것을 알아차린 사향이와 경림은 입을 싸쥐고 웃었다.

모두 그러고나서 즐거운 기분이 되였는데 최성훈이 좀 정색한 표정을 지으며 일렀다.

《사향선생에게 한가지 알려드릴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사향은 혹시 아버지고향으로 가는 일이 사정이 생겨 뒤전으로 미뤄지지 않았나 해서 불안해했다.

《다른것은 아니고 모처럼 마련된 기회에 사향선생과 나도 같이 가려했는데 다른 급한 일이 제기되여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량해를 구하려고

《아유, 그런 일때문에…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보게 해주신것만도 고마운데 그런 말씀은 걷어주세요.》

《그렇다면 마음놓겠습니다. 혜정동무와 경림동무랑 함께 아무쪼록 의의깊고 즐거운 려행이 되길 바랍니다.》

최성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사향이 따라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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