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13. 해묵은 《왕나비》

 

(1)

 

어느날 저녁시간에 김한석이 량세봉을 찾아왔다.

김한석은 량세봉의 방에 들어서자 깍듯이 거수경례부터 하였다.

량세봉은 자리에서 일어나 례절있게 인사를 받았다.

《사령님, 승진을 축하합니다.》

예나제나 표정이 없는 얼굴에 메마른 어조다. 축하의 감정도 없고 그 어떤 불만이나 질투도 느껴지지 않는 극히 실무적인 의례이다.

《고맙습니다, 상급참모님. 많이 도와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자, 앉으시지요.》

《아니, 돌아가겠습니다. 난 지금 고인허위원장방에서 오는 길입니다. 불쾌한 얘기를 듣고나서 내가 량사령에게 인사말 하나 없이 지낼수 없다는 생각을 늦게야 하고 이렇게 때늦게나마 들렸습니다.》

《예, 저도 불쾌한 소리를 좀 듣습니다. 여기저기서 내가 지나간 일들때문에 상급참모와 감정상 화합이 될수 없고 따라서 거치장스러운 존재가 될수 있으므로 참모장을 측근에서 밀어냈다는겁니다.》

《억울하지요?》

《아니, 그런 험담이 돌아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거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요.》

《나는 억울합니다. 사령님이 우리 총영안에 들어선 그날부터 있었던 일들은 서로간의 감정이 아니라 임무상 제기된 일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걸 코에 걸고 사람들이 사령님인품을 깎아내리려는 험담을 돌리는데 이건 결국 우리 대오안에 리간과 반목을 부식시키는 옳지 않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까짓 나의 체면정도는 론할바가 아니지요.》

김한석은 참모장이라는 전직에 어울리게 짐짓 아량있게 이야기를 엮어나갔다.

《상급참모님이 그렇게 거인적으로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험구쟁이들의 랑설을 우리는 한쪽귀로는 들어두고 다른쪽귀로는 흘려보냅시다. 허허. 이건 오동진총영장이 늘쌍 해주던 말입니다. 자, 어서 앉으시지요.》

《아니, 할 말을 다 했으니 돌아가겠습니다.》

김한석은 여전히 고저가 없는 소리로 사양하면서 돌아서려고 서둘렀다.

《내가 할 말은 이제부터입니다. 앉으십시오.》

량세봉은 김한석이 반드시 자기를 찾아올것이라고 예상해왔다.

그가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놓을것인가 하는것도 짐작하고있었다.

김한석은 각근한 권을 더 사양할수 없는듯 걸상에 앉았다.

《나는 김한석참모장문제를 놓고 많이 고심하였습니다. 근래에 우리 독립군이 파멸직전에 이르렀고 군기도 매우 문란해졌습니다. 이대로 방임해두다가는 독립군은 종말을 고하고야말겁니다.

리진택총사령까지 사라졌으니 마땅히 이에 대하여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참모장을 바꾸게 된 첫번째 리유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지도부를 원하고있으며 새로운 전법, 새로운 체계, 새로운 질서를 기대하고있습니다.

이것이 참모장님을 바꾸어야 할 두번째 리유입니다.

다음으로 나는 앞으로 독립군의 안전과 관련한 특수작전을 조직할 구상을 가지고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문제이고 오동진총영장에게도 한번 여쭈어봤던 문제입니다.

적을 알아야 하겠는데 우리는 적진에 우리의 선을 쥐고있지 못합니다. 적들은 오히려 우리의 뒤문을 열고 들어와 우리의 속을 다 뽑아가고있는데 우리는 지금 속수무책입니다.

우리 총영은 이미 왜놈밀정 오광놈을 끼고있으면서도 그놈의 정체를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쓰라린 교훈을 안고있습니다.

우리도 적진에 우리 사람을 묻어두고 적진을 알아야 하며 당장은 적들을 통하여 우리 대오에 박혀있을수 있는 두더지들을 일망타진하여야 합니다.

이 사업은 지략과 담기와 정밀한 공작을 요구하는 사업입니다. 상급참모님이 이 중요한 일을 감당할 인물을 발탁해보십시오. 떠오르는 인물이 없는지요?》

량세봉이 이렇게 김한석을 참모장자리에서 몰아낸 리유를 그가 놀라지 않도록 조리있게 설명하였다.

《왜요? 그런 인물을 찾아낼수 있지요. 3로군 사령이 된 최윤구가 속이 깊고 아는것도 많으니 적임자입니다. 석태무부교장도 그런 공작을 맡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기는 강연희비서가 특수활동의 조직자로서 조금 눈만 트면 잘할수 있는데녀성들이 특수활동에서 자기 식의 묘기를 발휘한 사례는 동서고금 둘러보면 적지 않습니다.》

김한석은 자기에게 특수활동임무가 미상불 차례질듯싶어 긴장을 느끼며 이사람, 저사람의 이름을 불러댔다.

《석태무와 강연희는 안됩니다. 이자 금방 신접살림을 시작했는데 나이먹은 신혼부부를 갈라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적임자가 있습니다. 이미 현대식군사교육을 받았고 작전경험도 풍부하고 적군연구도 많이 해보았고 언행에서 실수가 없으며 또 생활에서 절제가 있고 오래동안의 무장투쟁에서 검열을 받은 사람… 바로 상급참모님입니다.》

량세봉은 웃음을 담고 이렇게 김한석을 잔뜩 춰올려주었다.

《아, 아니… 내가 어떻게? 그건 안될 말씀이요.》

김한석은 량세봉이 자기를 춰올렸다가 끌어들이자 사뭇 놀라서 두손을 책상에서 떼가지고 흔들면서 사양을 하였다.

《나는 안됩니다.》

김한석은 다시금 딱 잡아떼고는 얄팍한 입술을 철장같이 꽉 닫아붙였다.

량세봉은 그 입이 쉬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껄껄 웃었다.

《해보시지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기초를 닦아보십시오. 이 일은 사실 부사령이나 참모장에 못지 않은 무게가 실린 일입니다.

당면해서는 오광놈을 끌어와야 하겠습니다. 그놈을 끌어오면 놈들이 우리 진중에 뻗쳐놓은 모략선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놈이 쥐고있는 우리 대오안의 두더지들을 들춰낼수 있습니다.

사실 이 공작은 우리 독립군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시각을 다투는 중대사입니다. 난 지금 최시흥대장이며 오동진, 리진택어른들을 련이어 체포한 왜적들의 책동이 꼭 우리 진중에 있는 왜놈들의 모략선과 련결되여 감행된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량세봉은 신중한 기색을 하고 정중하게 김한석의 속주머니를 직통으로 찔렀다.

《그건, 그건 대단히 엄중한 일입니다.》

김한석이 이렇게 말하고는 여유있게 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천정의 한끝에 눈총을 박은채 잠시도록 량세봉의 의중을 타진하느라고 정신을 집중해서 생각을 굴리고있었다. 쩌릿한것이 등줄기를 가르며 심장을 일순간 후두둑 뛰게 하였다.

김한석은 벌써 3. 1인민봉기직전에 의병대장 류린석의 휘하에 기여들었던 왜놈들의 끄나불이였다.

간특한 왜놈들은 김한석을 여러해에 걸쳐 크게 품을 들여 제놈들의 고급한 밀정으로 키워왔다.

류린석의 의병대를 파멸시키는데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던 김한석은 당시 왜놈들의 정치모략기관인 《흑룡회》의 회원으로 정식 등록되여 그놈들의 조종에 따라 손문이 세운 중국국민당계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개석의 국민당군에서 한두해 장교로 복무하였다.

다시 왜놈들이 그어놓은 더러운 민족반역의 인생길을 따라 동만지역에서 독립군운동대렬에 끼여들어 고인허를 등에 업고 오동진총영의 참모장자리에까지 게바라오르는데 성공하였다.

김한석이 총영에서 중대장자리를 차지하게 되였을 때 그의 상전은 《흑룡회》만주지역 본부장으로부터 《조선총독부》의 후꾸시마기관의 책임자 후꾸시마로 바뀌여졌다.

김한석의 보고와 그에 대한 파악을 통해 첩자의 쓸모를 확인한 후꾸시마는 그에게 이렇게 임무를 주었다.

《당신은 <흑룡회>의 성공작이다. 나의 기관은 당신에게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있다. 독립군을 분렬, 와해, 침몰시키는것이 당신의 총적과업이다. 이를 위해 우선 훌륭한 <독립투사>가 되라. 장차 독립군에 대한 지휘권을 틀어쥐라.

당신이 전투에서 자기의 명성을 떨치도록 우리가 도와줄것이다. 당신은 자객이 아니다. 손에 피를 묻혀서는 안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독립군을 대상하는 총성은 허용하지 않는다.

당신의 총성은 오직 우리 황군을 목표로 울려야 한다. 당신의 임무는 특수전에서 제일 고급한 심리전이라는것을 명심하고 독립군을 만주에서 쓸어버린 다음 돌아오라. 재물도 탐내지 말라. 독립군의 재물이 몇푼이 되겠다고 자기를 망치겠는가. 공로에 대한 보상에서 우리 일본은 절대로 린색하지 않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것을 성취하게 되리라는것을 담보한다.》

그에게는 《왕나비》라는 대호가 붙여지고 련락원이 소개되였으며 그와의 접선방법도 전달되였다.

《해파리》라는 대호를 가진 인물사진이 소개되였는데 그가 바로 오광이였다.

후꾸시마는 《해파리》의 사진을 보고 놀라마지않는 《왕나비》에게 엄하게 경고하였다.

《이 사람은 당신의 직속부하가 아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임무가 있다. <해파리>는 <왕나비>를 모르고있고 앞으로도 알지 말아야 한다.

다만 당신은 <해파리>의 공작을 배후에서 도와주어야 하며 자기의 직무에서 그의 안전을 지켜주도록 하라. 그가 당신의 안전에 위험으로 될 때에는 그를 없애치울수도 있으며 탈출명령을 주어 독립군에서 쫓아버릴수도 있다. 이건 당신의 권한에 맡기기로 하겠는데 그 권한은 단 한번만 사용할수 있다. 당신은 오동진총영장과 고인허의 신임을 두터이하다가 오동진의 턱밑에까지 접근한 다음 우리에게 통보하라. 오동진제거는 우리가 할것이다.》

지금까지 김한석은 후꾸시마가 세워놓은 공작선상에서 크게 탈선이 없이 걸음마다 아슬아슬한 위험이 뒤따르는 심리모략의 길을 용이하게 헤쳐왔다.

중대장시절에는 련전련승으로 오동진과 독립군원로들의 총애를 받았다. 후꾸시마가 그의 《승전》을 제놈들의 졸병들을 제물로 바쳐 마련해준것이였다.

《명석한 군사적두뇌》와 《청렴결백》한 사생활로 독립군에서 《보기 드문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군기를 바로잡는다는 구호를 걸고 대오안에 오히려 무질서와 혼란을 묘하게 조성하고 대렬기피자들을 만들어 독립군내부를 소란스럽게 하였다.

독립군의 이른바 위신과 군기라는 이름으로 돌아가면서 독립군의 위상을 떨구고 대오안에 살벌한 반목과 대립, 혼란을 조성하여 독립군을 인민들로부터 고립시키며 대오자체를 무기력하게 하려고 시도하여온 오광의 정체가 량세봉에 의하여 위험에 처하였을 때에는 이미 후꾸시마가 지시한대로 그와의 긴급상면을 조직하고 오광이 총영을 떠나도록 명령을 주어 자기의 로출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김한석은 오동진의 신임을 획득하였으며 독립군의 실권자리인 참모장자리에 드디여 올랐다.

마침내 독립운동에서 커다란 영향권을 행사하여온 오동진을 꺼꾸러지게 하였으며 독립군에 대한 지휘권을 따낼수 있는 결정적인 대목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리진택이 총사령이 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자꾸 쑤셔서 부대가 두쪽으로 갈라지게 하고 그들사이에 처절한 류혈전을 벌려놓게 하여 독립군을 지리멸렬의 벼랑턱에까지 몰아갔다.

후꾸시마는 김한석에게 거듭 《무훈》축하를 보내고 그에게 일본군의 군사칭호가 껑충껑충 뛰여오른다는데 대하여 알려주었다. 뿐더러 그의 가명으로 개설된 은행구좌에 《상》이 그대로 예금된다는것도 전해주었다.

그런데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이제는 줌에 잡혔다고 속으로 쾌재를 올렸던 사령자리는 량세봉에게로 돌아가고 참모장자리에서도 밀려났다. 다행으로 량세봉이 자기에 대한 그 어떤 수상한 감촉을 느끼고 주변에서 밀어낸것은 아닌것 같다.

량세봉이 자기를 실권에서 밀어낸 리유는 자기도 공감이 간다.

량세봉의 잡도리가 만만치 않은것 같다.

중대장노릇 하면서도 제노라하던 독립군원로들과 대원들의 인망을 다 받아안았는데 확실히 이놈은 오동진이나 리진택과는 류가 다르다. 복잡다단한 부대일 전반을 한손아귀에 꽉 그러쥐는 통솔력이 있는가 하면 대원들과 지휘관들을 자기 품에 걷어안는 매력적인데가 있으며 매사를 투시하는 예리한 안목도 있다.

그런 량세봉이 적진에 반선을 늘어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는 가슴이 섬찍하였다. 온몸이 졸아드는것 같은 무서운 압박감에 전률하였다.

금시 《이놈!》하고 그 청청한 목청을 한껏 돋구어 자기의 목덜미를 두손으로 움켜잡는듯 한 환영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아무튼 자기 신상에 들이닥친 예기치 못했던 변화에 대하여 그리고 새로운 사령의 몸무게와 동향에 대하여 한시바삐 후꾸시마에게 직접 보고해야 할것 같았다.

후꾸시마의 움푹 패여든 눈확을 생각하여보느라니 그 역시 등골이 서늘해졌다.

고운 소리만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맵고 짠 회초리를 휘둘러댈것이다.

《총영장자리가 한팔을 뻗치면 자기것이라고 장담하던게 언제라고 그 꼴인가. 오동진도 리진택도 다 쓸어버려주었는데 뭐 참모장자리도 떼우고 고작해야 상급참모야? 어떻게 돼서 그렇게 됐는가?》

후꾸시마가 미상불 이렇게 욕사발을 퍼부을것이다.

그래도 량세봉에게서 이 정도의 신임을 받는것만도 다행스러운것 같다. 대세가 이렇게 기울어질줄 알았으면 당초에 량세봉과의 간격을 좁혀왔을것인데 후회가 컸다. 하기는 아직은 지켜봐야 할 일이다.

량세봉과는 얼렁뚱땅 넘겨볼 일이 없을것 같다.

지금까지 중대를 다스려온 솜씨로 독립군을 몰고가면 쪽발이들이 눈이 휑해질거요, 해묵은 《왕나비》노릇도 베차질것이다. 이제는 총소리를 내야 할것 같다.

이 생각, 저 생각을 재빨리 굴리던 간특한 왜놈의 고등밀정은 마침내 열적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좀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량세봉은 차돌처럼 댕댕한 김한석의 차거운 이마를 그냥 지켜보고있다가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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