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6 장

4

(2)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그날 아침도 사향은 침대머리를 조절하여 반쯤 높이고 비스듬히 앉아 혜정을 기다렸다. 병이 머리를 숙이고 심신이 거뜬해지면서 또다시 생각이 많아져 닭알낟가리를 쌓듯 속으로 바재이고있는것을 그에게 터놓고싶었던것이다.

한방에 있는 서경림이한테 말할가말가하다가 어쩐지 게면쩍어서 오늘까지 용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사향이 혜정이한테 터놓자는것이란 자기가 병원에 들어와있는 기간 진찰비, 수술비, 약값, 입원비가 얼마나 되며 자기를 위해 정성과 지성을 다한 사례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런 대상중에 경림이와 혜정이가 포함되는것은 두말할것도 없는 일이였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비옥한 토양과 같아서 신세를 지면 열배로 갚아야 한다고 했다. 두배, 세배… 열배로 갚지는 못해도 치료비야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렇게 마음먹은 아침따라 혜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무슨 다른 일이 제기되여 못 오거나 내 병이 완치단계에 있으니 걸음이 떠진것이 아닐가.

이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허전해졌다.

록두지짐을 싸들고 땀에 떠서 호텔에 나타났던 혜정이, 나에게 자기의 피까지도 아낌없이 바쳐준 녀인, 록두지짐을 맛보이라며 등을 떠밀어주었다는 그의 남편되는이와 입원해있는 동안 정성이 그토록 지극한 서경림이라는 녀인, 그는 또 지금 어데 나가고 없는것인가.

사향은 침대머리를 다시 낮추고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두눈을 살풋이 감았다.

그랬는데 경림이 들어서며 알렸다.

《기자선생, 혜정동무가 왔어요.》

사향은 황급히 눈물을 닦고 몸을 일으켜 아까 경림이가 머리맡에 떠다놓은 물을 마시는척 하였다.

《언니, 몸이 더 말짼가요? 이젠 침대를 털고 일어나 바깥공기랑 좀 쏘여야 할텐데… 의사선생들이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혜정이가 없는데 혼자서 무슨 재미루…》

《여기, 경림언니랑 있지 않아요?》

《난 아직 혜정동무보다 못한것 같애요.》

경림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아니 경림씨, 그런건 아니구요. 나때문에 불편해하는 경림씨한테 부담을 드릴것 같아…》

사향은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기도 하였다.

《사향언니, 내 언니한테 무슨 소식을 가져왔는지 알아맞춰볼래요?》

《나한테?!》

《그래요. 알아맞추기를 하자요.》

《애들처럼 알아맞추기는 무슨…》

《애들만 알아맞추기를 하나요 뭐.… 언니, 반가운 일이겠어요, 그렇지 않은 일이겠어요?》

《나한테 무슨 반가운 일이 있겠다구…》

사향의 얼굴에 어렸던 반가움이 쓸쓸한 미소로 바뀌였다.

《음- 언니두… 그럼 눈을 꼭 감고있으라요. 내 요술을 한가지 할테니…》

사향이 천진스러워보이기조차 하는 혜정의 거동을 놓칠세라 살폈다. 곁에 선 경림이도 혜정이의 말과 행동이 재미있다는듯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언니, 눈을 감아야 해요. 뜨면 안돼요. 그렇지, 그렇게요.…》

혜정은 기어이 사향이가 눈을 감게 하고 자기 손바닥을 펴서 그의 얼굴앞에서 빙글빙글 돌리기까지 하였다.

《안 보이지요?》

《눈을 감았는데 어떻게 봐?》

사향이도 어린애가 된듯 한쪽눈을 빼써 뜨려다가 그 말에 다시 꼭 감으며 입까지 옥물었다. 짙은 눈섭이 파들파들 떨렸다.

《언니,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냐 하면 내가 하나, 둘, 셋 할 때 번쩍 뜨세요. 슬며시 뜨지 말고 번쩍 말이예요.》

경림은 그러는 혜정이와 사향의 얼굴표정이며 행동이 재미있고 신기해서 곁에서 시물시물 웃기만 했다. 혜정이 그러는 그에게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며 조용하라는 시늉과 눈을 한번 끔뻑하였다. 그리고는 자기가 들고온 멜가방에서 연한 밤색이 나면서 거부기잔등처럼 얼기설기한 손가방 한개를 꺼냈다. 첫눈에도 값진것이라는것이 알렸다.

혜정은 그것을 들고 사향이 앉아있는 침대에서 한두걸음 물러나며 두손에 정히 받쳐들었다.

《자, 언니, 준비하세요. 하낫… 둘… 셋!》

혜정의 셈세기가 시작되자 긴장해지며 눈시울까지 파들파들 떨던 사향이 정말로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혜정의 두손바닥우에 자기가 잃었던 손가방이 놓여있지 않는가.

그는 흠칫하며 눈을 몇번 껌뻑거리기까지 하였다. 머리를 약간 흔들어보기도 하였다.

이 며칠동안 무던히도 생각이 많았던 가방이였다. 수술을 받고나서 의식을 회복한 다음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고 괴롭히던 가방이였다.

그런데 이 가방이 어떻게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난것인가?!

《사향언니, 날 많이 욕해주세요. 안내라는게 언니한테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줄도 모르고있었으니… 그날 돌아오는 승용차안에서 언니가 의식을 잃기 전에 외워서야…》

혜정은 가방을 들고 사향이앞으로 다가갔다.

《혜정이, 이 가방이 어떻게 나졌어요?》

놀라기만 하고 좀처럼 가방을 받으려 하지 않는 사향의 손에 그것을 넘겨주며 혜정이 자초지종을 터놓았다.

사향이 그날 아침 호텔에서 일찍 나와 공원의자에 앉아있다가 혜정이가 나타나자 바삐 달려가면서 그만 가방을 잊고 그냥 간것은 사실이였다.

그들이 자리를 뜬 후에 공원관리원이 청소를 하다가 그것을 발견하였다. 그냥 놓아둔채로 임자가 나타나지 않을가 해서 한참이나 기다렸다고 한다. 분명 호텔에서 숙식하는이들중에서 누가 실수한것 같은데 좀처럼 찾는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가방을 잃은것을 알면 얼마나 안타까와할가.)

공원관리원녀인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한식경이 지나도록 임자가 나타나지 않자 그것을 가지고 호텔의 해당 일군을 찾아갔다.

그는 공원에서 가방을 얻게 된 경위를 말하고 어떻게 하든지 임자를 찾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다.

드문히 이런 일이 있긴 하지만 가방안에는 어지간히 많은 화페가 들어있었던탓에 호텔일군들도 심중히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가방을 잃은 사람보다 얻은쪽에서 더 안타까이 여기저기에 알아보았다. 그런데 가방안에는 화페와 누렇게 퇴색한 사진 한장이 있을뿐 명함장이나 주소 같은것을 짐작할만 한것은 아무것도 없었던것이다. 바로 그런 때에 혜정이 사향이한테서 있은 일을 알고 뛰여다닌것이였다.

《사향언니, 가방을 열어보세요. 가방을 얻은 녀인과 호텔일군들이 혹시 가방안에 있는것이 정확한지 알아봐서 꼭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사향의 얼굴은 방금전과 달라졌다. 놀라움도 사라지고 별로 반가와하는 기색도 없는것 같았다.

《혜정씨, 솔직히 말해주세요. 누가 이 가방을 혜정씨에게 주었는가요? 자선가인가요? 신사숙녀인가요?》

사향은 가방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굴표정이 좀 성난듯싶었다. 그는 혜정이라고 부르던 방금전과는 달리 정색해서 그를 대했다.

《사향언니, 우리 나라엔 자선가신사, 숙녀도 없어요. 이 가방을 얻어 임자를 찾아달라고 한 사람은 평범한 호텔공원관리원이랍니다.》

《혜정씨, 거짓말이예요! 혜정씨는 거짓말을 하구있어요. 공원관리원이 이 돈을 보구 임자를 찾아주라 했다는건 거짓말이지요?》

사향은 어째선지 항변하였다.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짙은 두눈섭이 더 곤두서고 두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이런 때의 그 녀자는 자기의 미모를 다 벗어버리고 무서운 모습으로 변한것 같았다.

혜정이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그 누구에게 배반당했을 때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치미는 분기를 참는것 같았다. 사향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사향선생!》

말투도 달라졌다. 방금전의 언니가 아니였다. 진정을 진정으로 대할줄 모르는 인간에게는 그에 알맞는 응당한 《대접》이 차례져야 하지 않을가.

《선생이 아무렇게나 생각하셔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선생은 한가지만은 알아두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가방을 얻은 녀인은 호텔공원관리원입니다. 그는 이 가방을 호텔일군에게 맡기면서 임자가 얼마나 안타까와하겠나요. 꼭 빨리 찾아주어야 할텐데…라는 말까지 했어요. 평범한 평양의 한 녀성의 깨끗한 마음에 아픈 못을 박지 마세요. 그리구 우리 나라에선 이런 일이 놀랍거나 신기한것이 아니라 례사로운 미덕이라는것도 알아두어야 해요.》

돌변한 혜정의 표정과 내쏘듯 하는 말을 듣던 사향은 가방을 받아들었던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싸쥐였다. 뒤미처 어깨를 떨었다.

(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난생처음 이런 일을 당하다보니 그 선량하고 깨끗한 사람들의 진정에 칼질했구나. 믿지 않으려 했구나. 이 무슨 천벌을 받을짓이란 말인가.)

사향은 아직도 아래입술을 꼭 옥물고 눈물이 가랑가랑해 서있는 혜정을 향해 두손을 뻗치더니 그를 와락 그러안았다.

그리고는 더 세차게 머리며 어깨를 떨었다.

《혜정이, 날 욕해다오. 날 때려다오!》

그런데 이날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또 벌어졌다.

그것은 사향이 가방에서 한장의 사진을 꺼내여 손바닥으로 쓸고있을 때였다.

돈이 고스란히 그대로 있는데 못지 않게 기뻐하는 사향이에게 손을 내밀며 혜정이 물었다.

《언니, 그건 무슨 사진이예요? 좀 보아도 일없을가요?》

《보아도 알 사람이야 있을라구? 이 사진은 우리 집 가보나 같아.…》

《오래된 사진이구만요.》

혜정이 반짝이는 눈으로 누런 사진과 사향을 번갈아보았다.

《혜정이… 실은… 그 사진때문에 내가 이번에 평양에 왔구 언제부터 부탁하려 하댔는데…》

《이 사진에 무슨 사연이 있게요?》

《그걸 터놓자면…》

사향은 가는 한숨을 내쉬였다.

그때 그들의 등뒤로 다가가 어깨너머로 그 사진을 들여다보던 경림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

그 소리에 둘은 뒤를 돌아보았다. 경림이 머리를 붙안으며 비칠하지 않는가.

혜정이 사진을 사향이에게 맡겨버리고 황급히 일어나 그를 부축했다.

《경림언니, 무슨 일이예요?!》

그의 팔에 몸을 맡긴 경림이 자신을 다잡으며 혼자소리처럼 외웠다.

자기의 가방을 보고 놀라던 사향이처럼 이번에는 그의 얼굴이 해쑥하게 질렸다.

《그 사진이… 그 사진이 어떻게 사향선생에게 있는가요?》

《예?》

사향이 마주 놀랐다.

《뭐라구요?》

이번에는 경림을 부축하고있는 혜정이까지 놀랐다.

잠시후에 자신을 다잡은 경림은 약간 떨리는 손길로 사향의 침대우에 있는 사진을 집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들여다보며 사향이와 혜정이 그 누구에게라없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분은 우리 시할아버님이고 이이는 어릴 때 우리 시아버님이예요.》

《그러면… 이… 이쪽에 선이들도… 알겠지요?!》

《그분들은 전쟁전에 우리 시할아버님네 집과 처마를 나란히 하고 살던 이웃들인데 지난 조국해방전쟁때 미국놈들의 원자탄공갈에 고향을 떠나…》

《경림씨… 경림씨, 그분은 우리 할아버지이고 이 어린이는 우리 아버지예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예요?! 여기서… 여기서 이렇게 알게 되다…니. 흑…》

사향은 자기 베개옆에 있던 타올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또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두뺨으로 물줄기가 터진듯 맑은것이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다시 곁에 있는 혜정이를 와락 그러안고 한팔은 경림에게 맡겨버렸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더니… 혜정이, 이게 웬일이예요.》

경림이도 격정을 누르지 못하고 사향의 팔을 잡은채 흐느꼈다.

아- 그러고보면 사향이 평양에서 이 며칠동안에 당한건 화인가 복인가! 분명 화는 아닐진대 그러고보면 평양에서는 복이 외로 아니라 쌍으로 겹드는것이 아닌가.

이날 세 녀인은 우연같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한 일이 꿈이 아닌가 해서 서로 어깨를 두드려도 보고 머리를 맞비비기도 하면서 오래동안 울다가는 웃고 웃다가는 또 울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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