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4. 훈장집아씨

 

(2)

 

《그러니 훈장님께서도…》

량기화는 글방에만 묻혀 음풍영월이나 읊조리는 서생으로만 생각해왔던 강서명이 검과 살이 살점을 물어뜯고 피를 쏟게 하는 의병전장터를 누벼온 무사라는것이 아직도 실감이 가지 않는데다가 나라찾는 싸움에 떨쳐나서겠다는 담담한 목소리에 비낀 비상한 용단이 뜨아해서 말끝을 길게 끌었다.

《예. 압록강을 건너가려고 합니다. 그쪽에 넘어가 애국에 피끓는 의사들을 모아 배일독립운동을 재기해보고싶습니다. 이 나라에는 땅을 주물러 낟알을 빚어내는 농사군도 있어야 하지만 이제부터야말로 리순신이나 곽재우, 정문부와 같은 애국지사들이 나와야 할 때입니다. 명색이나마 선각자들이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촌구석에 은둔하여버리고 제 한몸 안위나 도사려간다면 내 나라는 영영 세상밖에 꺼져서 다시 빛을 보지 못할겁니다.》

강서명은 술 몇잔을 걸치자 여느때없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거나해져서 거침없이 결연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이것 역시 량기화도 량세봉도 처음으로 보게 되는 강서명의 새로운 모습이였다.

식사를 마치고나서 강서명은 사랑방으로 그들을 데리고갔다.

강서명은 그리 크지 않은 함짝을 방바닥에 내려 뚜껑을 열었다.

거기에는 강서명이 모아두고 간간이 보아오던 책들이 있었다.

《세봉아, 이걸 이제부터 네가 갖고있으면서 읽어봐라.》

강서명이 뚜껑을 덮어 함짝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많은 책을 저에게 주십니까?》

량세봉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책 한권에 쌀 한말이라는 말도 있다.

《그래, 세봉이가 건사하면서 가까운 동무들에게도 읽게 해라.》

《그럼 훈장님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훈장님께는 이 책들이 농사군이 베고죽는 낟알종자같은것이겠는데 우리 세봉에게 다 주시면…》

량기화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강서명의 뜻이 인차 가늠이 되지 않아 념려부터 앞섰다. 이건 훈장이 남도에서부터 메고온것이 분명하겠는데 이 귀한걸 세봉이에게 다 넘겨주다니?… 그러면 어데 가서 새 훈장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배일운동이라는건 이 책 없이도 되는 일인가?

강서명은 두사람의 얼굴에 비낀 속셈을 헤아리고 헌헌하게 웃었다.

《내 걱정은 마십시오. 내 이제 강을 건너 어데 가서 몸을 담겠는지 예측할수 없는 길에 오르는데 이걸 가지고 어데로 떠돌아다니겠습니까.》

《정 그러하시면 따님에게라도 남겨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애도 이젠 학문탐구를 거두어야 할것 같습니다. 아녀자라고 안방에서 길쌈이나 하면서 살 때가 아닙니다.》

《?!》

량기화는 강서명의 례사롭지 않은 말에 그냥 그 깊은 궁냥이 짚이지 않았으나 무엇인가 비상하고 커다란 산을 안고 사는것이 틀림없는 그의 배포에 입이 호함지게 벌어졌다.

《난 이미 아까 얘기한것처럼 다른 길을 선택하기로 하였습니다. 마구 덤벼드는 일본놈들에게 조선사람은 네놈들의 머슴살이를 원치 않는다, 조선사람을 허술히 보지 말아야 한다 하는걸 깨닫게 해야 합니다.》

강서명의 도도한 말에 량세봉은 경건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가 선택한 새로운 평생길의 의미가 어렴풋이나마 짚이웠다.

그가 이제는 손에 책이 아니라 쟁기를 들고나서려는것이 분명한듯싶었다.

《또 하나 내가 세봉에게 넘겨줄게 있네.》

그리고는 사랑방문을 열고 《연희야.》하고 불렀다. 대답소리가 나더니 인차 정주문이 열리고 그리로 강연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버지, 부르셨나요?》

《오냐, 웃방천정에서 룡천검을 가져오너라.》

《예.》

잠시후 강연희가 비단보자기에 싼것을 가지고왔다.

강서명은 딸이 내미는 룡천검을 받아 보자기를 벗겼다.

강서명은 칼집에서 장검을 뽑으며 머리우로 쳐들었다.

룡천검이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며 서슬푸른 기운을 뿜었다.

강서명은 저도모르게 허리를 낮추었다가 은빛이 번쩍거리는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어 《앗!》하고 소리를 지르며 몸을 솟구쳐 다시 공중에서 반원을 그렸다.

칼날이 공기를 째는 예리한 소리가 《쉬익》하고 났다.

량기화는 기겁하여 뒤로 서너걸음 뒤걸음치고 량세봉도 가슴이 섬찍하였다.

그런데 사랑방문에서 박수소리가 났다.

강연희가 문틈새로 들여다보고있었던것이다.

량세봉도 장검앞에 넋을 잃어버린 자기의 겁질린 꼴이 처녀에게 드러난것이 망신스러워 얼른 자신을 수습하고 박수를 쳤다.

강서명은 검을 잡는 순간 산속에서 무예를 닦고 왜놈들 목을 삼대베듯 하던 옛 시절이 불시에 떠올라 피가 끓어올랐던것이다.

《용서하십시오. 검을 오래간만에 들고보니…》

강서명은 량기화부자가 머리우에서 희번쩍거리는 장검의 서슬에 대경실색해서 물러서는것을 보자 검을 내리우고 벙긋 웃으며 사죄를 하였다.

《세봉이, 이건 내 젊은 시절 다루던 쟁기일세. 사실은 난 이 세리고을에서 눈이 바로 배긴 젊은이들을 뽑아 검술조련도 시키고싶었지. 한데 일도 치기 전에 왜놈들에게 덜미를 잡힐듯싶어 이래저래 미루다가 끝내 뜻을 거두고 떠나네.

래일 하루는 뒤산에 올라 검술의 기초동작만 배워주겠으니 앞으로 이걸 아낙네들이 식칼 다루듯이 손에 익히고 몸에 익히게.

검술이라는게 별게 아닐세. 신과 기를 모두어 원쑤와 마주선 마음으로 휘두르는것이 검술이네. 자기가 익힌 다음에는 앞으로 세봉이와 뜻이 통하는 친구들에게 가르쳐주게.

헌데 검이란 밸뚝시대로 아무때 아무나 상대해서 뽑아드는게 아니라는걸 명심하게. 이건 뒤날 섬오랑캐들과 정식으로 맞서게 될 때에만 휘둘러야 하네. 자, 받게.》

강서명은 엄숙하게 당부하고는 검을 칼집에 쿡 박아넣고 량세봉에게 내밀었다. 순간 량세봉은 저도모르게 《선생님!》하고 열차게 부르며 두무릎을 삿자리에 박고 두손을 머리우로 올리였다. 심장이 후둑후둑 급하게 뛰였다.

그 두손에 묵직한 쇠붙이가 놓였다. 차겁게 느껴지는 쇠붙이, 온몸이 찌르르 떨렸다.

《일어서게!》

강서명은 자기의 애국의 초지를 검에 무겁게 얹어 넘겨주며 말했다.

량세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선생님의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페부에 새기고 허위단심 지켜가렵니다.》

량세봉은 나직하나 어조에 산악같은 용기와 기개를 담아 맹약을 다지였다.

《고맙네. 원체 내가 일전에 이 길에 나서야 되겠으나 그때는 다시 재기해볼 결단이 부족했던탓에 후손들을 키워내는것으로 보람과 의무를 다해보려고 했지. 한데 나라가 망한 오늘에 난 더는 촌구석에 은둔할수는 없네. 망국은 순간이지만 복국은 천년이라는 말도 있네.

이제 삼천리방방곡곡에서 싸움이 시작될거네. 하지만 쉽게 끝나지는 않을걸세. 그러니 우린 단단히 의기를 도슬러가지고 떨쳐나서야 하네.》

강서명은 스스로 비분강개해져서 도도히 열변을 토하였다.

량세봉은 강서명이 떠나는 길이 분명코 독립전이며 생사기약 없는 그길에 한목숨 바칠 각오로 나선다는것을 후둑후둑해지는 마음으로 절감하고있었다.

량세봉부자가 강서명이 넘겨준 책들과 룡천검을 무겁게 둘러메고 사랑방을 나설 때 강서명이 량기화더러 따로 긴하게 의논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멈춰세웠다.

량세봉을 보내고나서 그들은 다시 마주 앉았다.

강서명은 밖에서 멀어져가는 량세봉의 발걸음소리를 듣다가 강의 세찬 흐름마냥 거침없던 기세는 거두고 좀 어줍은 어조로 말을 뗐다.

《세봉의 아버님, 다름이 아니라 이제는 저 세봉이도 나이가 돼오는데 혼수감은 봐둔데가 있습니까?》

강서명의 뜻하지 않은 물음에 량기화는 얼굴이 벌개졌다. 사실 맏이가 기골이 대장부답게 번듯해지고 목소리도 우렁우렁해지는걸 슬하에 두고 지켜보면서 멀지 않아 저애 짝을 맞추어줘야겠다고 하루에도 두세번씩 생각해오던터였다.

하지만 집안의 궁기가 하도 심하니 어느 집에서 제 딸을 주겠다 하랴. 혼사말에는 의당히 인물보다 재물이 앞서던 시절이다.

그래 이따금 김씨와 의논하면서도 그 일에는 매듭이 없이 한숨만 길게 매달뿐 아직도 결심하지 못하고있었다.

《아직은…》

량기화가 슬하에 여러모로 출중한 자식을 두고도 가난때문에 혼기를 놓칠것 같은 설음에 목이 꽉 잠기여 더 대답을 잇지 못하였다.

《그래요? 난 세봉이를 글방에 받아들인 다음부터 세봉의 안팎을 주의깊이 살펴왔습니다. 세봉이는 장차 나라의 큰일을 맡을수 있는 동량감인데 신랑감으로도 욕심이 동하는 젊은이지요. 그래서… 난 벌써부터 세봉의 짝으로 우리 집 연희를 맞추어주면 어떨가 하는 생각도 해왔습니다. 이제 철산을 떠나 내가 닿는 곳이 정처가 없을진대 세봉이가 우리 딸을 맡아준다면 나도 시름을 놓을듯싶기도 하구요.》

《예?… 훈장님의 아씨를?!》

량기화는 강서명의 소리에 눈이 뒤집혀질듯 퀭해가지고 엉뎅이를 들썩거리며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는 너무도 뜻밖에 받는 청혼이 꿈인지 생시인지 언뜻 가늠이 되지 않아 여전히 얼친 눈으로 강서명을 쳐다보았다.

《허허.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내가 강을 건늘 작정을 하고나서 우리 애한테 의향을 비쳤더니 그애도 과히 나빠하는 기색이 아니였구…》

사실 그의 안해는 반대의사를 밝히였다.

량세봉의 집안이 째지게 가난한 집인데다가 아래로 줄줄이 여러 동생을 거느리고있으니 그런 자리에 하나밖에 없는 딸을 들여보내 무슨 고생살이를 시키겠느냐고 머리를 저었다.

그래 강서명이 여러 말로 타일렀다. 한줌에 움켜쥐고 짜면 철산고을 아니, 이 서북관내를 구석구석 뒤져도 저런 신랑쟁이는 찾을수 없다는것이 강서명의 주장이였다. 앞길이 구만리같은 젊은이들에게 오늘만이 있겠는가.

강서명의 처 역시 그걸 모르는바가 아니였다. 량세봉은 딸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낼만 한 사위감이였다.

하여 종시 남편의 뜻을 따랐다.

당자에게 량세봉의 말을 비쳤을 때 딸은 수집게 고개를 숙이는것으로 부모들의 의향을 받아들이였다.

《사실 그애가 평양 가서 여러해 살아오지만 평양성안에서도 세봉이와 같은 신랑감을 찾아보지 못했을겁니다.… 혹 우리 딸이 마음에 차지 않아 그러십니까?》

강서명은 량기화가 고개를 짓수그리고 놀라와하면서도 내키는 기색이 아니여서 이렇게 물었다.

량기화는 미소가 감도는 강서명의 얼굴을 어리숙한 눈길로 쳐다보다가 그의 모습에서 진정을 느끼자 자기가 지금 자기 아들과 가문에 꿈에도 상상할수 없었던 대사를 결정하게 되였다는것을 비로소 느꼈다.

그것이야말로 희한하도록 기쁘면서도 심중한 중대사였다.

그는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깜짝 놀라기도 했으나 인차 자신을 수습하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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