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2. 하늘땅에 다진 맹세

 

(2)

 

량세봉이 서당에서 첫자리를 차지하고 성품이 굳세면서도 붙임성 좋고 너글너글해서 제또래 동무들도 늘 밤마다 모여들어왔다.

하루도 건늬지 않고 찾아오고 곁에서 목침 하나씩 베고 자기도 하는것은 량세봉의 아래집 석태무와 국수집 최현수였다.

석태무도 이악스럽고 눈썰미있어 강서명이 귀여워하였다.

글공부에서 량세봉보다는 뒤져도 서너번째 순서에 있었다. 석태무는 나이가 들어가자 생일이 서너달 앞선 량세봉을 형님이라고 깍듯이 부르며 벌써 철산일경에서 상씨름군으로 뽑히는 량세봉더러 씨름수를 배워달라고 그냥 쫓아다니였다. 맞붙으면 뻥뻥 나자빠지면서도 지꿎게 새끼줄로 만든 샅바를 들고 달려들군 한다. 석태무는 이따금 뒤산에 함께 올라 땔나무도 하고 서당의 뒤치닥거리도 같이하면서 량세봉을 무척 따랐다.

최현수가 량세봉을 따라다니는데는 좀 류다른 리유가 있었다.

그는 집에서 쌀알도 골라먹으며 자라는데 어찌된 일인지 허리가 량세봉의 허벅다리만 하고 키만 껑충한게 기운꼴이 없어 자주 동갑아이들이 날리는 손길, 발길질에 이마가 터지고 코피를 쏟으며 지냈다.

그런 최현수가 자기보다 두달 앞선 동갑내기인 량세봉을 형님이라 올리며 옆자리에 앉혀놓고 살갑게 대하는데는 량세봉의 힘을 빌어 다른 애들의 시달림을 적게 받으려는 약바른 타산도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사실 최현수가 량세봉의 큰 그늘에 들어간 이후부터 얼굴에 피칠을 하고다니는 일이 없어졌다.

한편 최현수덕에 량세봉은 그가 베잠뱅이주머니에 넣어주는 엿가락을 집에 가지고가서 동생들의 입에 물려줄수가 있었고 이따금 그에게 끌려가 국수추렴도 하군 하였다.

이렇게 날과 달과 해가 바뀌여갔다.

량세봉은 일요일이나 명절날이면 집에서 새벽일찍 일어나 부모들을 도와 농사일을 하였다.

그러면 량기화와 김씨는 서당에서 밤에는 뜬눈으로 집을 지키고 낮에는 공부하며 틈나는껏 나무하고 서당집을 청소하는 자식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 《아서라, 밤낮으로 고생하니 네 몸이 견디겠니. 잠이나 푹 자고 동생들과 놀거라.》하며 그의 손에서 쟁기를 빼앗군 하였다.

그러면 량세봉은 《제가 무슨 고생한다고 그러세요. 그까짓 서당지기나 하는게 아버지, 어머니 고생에야 비기겠나요.》하여 부모들의 코마루를 저리게 하였다.

우줄우줄 커가는 자식의 몸과 마음을 보는것이 량기화량주에게는 제일 큰 기쁨이요, 락이였다.

어떤 날에는 동네로인들과 녀인들이 애들까지 데리고 량세봉을 찾아 서당에 모여오기도 했다.

량세봉이 훈장 못지 않게 옛이야기들을 재미나게 한다는 소리가 동네를 한바퀴 돌아갔던것이다.

그들은 평소에 말수 적고 자못 진중해보이는 훈장은 불러낼수가 없어 량세봉에게 달라붙었다.

그날도 동네사람들이 가득 모여왔다.

《세봉이 이 사람, 임자가 서당공부를 착실히 한다고 훈장이 늘 칭찬인데 그새 배운 옛말얘기나 좀 해달라구.》

마을의 좌상로인이 올방자를 틀고앉아 몽당수염을 내리쓸며 이렇게 량세봉의 말꼭지를 건드렸다.

로인들과 마을녀인들은 사나이답게 이목구비가 번듯해지고 몸통이 실팍해져가는 량세봉을 부러운 눈길로 넘보며 어서 이야기를 하라고 졸랐다.

《맏이야, 어서 재미있는걸루 한마디 하려무나.》

김씨도 아들이 대견스러워 이런 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나타나군 하였다.

량세봉은 처음에는 사람들의 눈길에 묻히는게 게면쩍어 얼굴이 벌겋게 익어들었으나 어머니의 기대어린 독촉까지 받자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우리 철산고을에 있는 전설이야기를 할가 합니다.》

《우리 철산고을전설이라니?… 우리 철산에도 전설이 있었던가? 이 철산에 뭐이 볼거 있다구.…》

한 중년토배기가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뒤구석자리에서 목청을 돋구는 이가 있었다.

《아, 거 무슨 게정이요? 세봉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으면 입은 꾹 다물고 귀구멍만 열어놓으면 될게 아니요. 왜 말꺼내기 바쁘게 훼방 떠는거요?》

《아따, 내 한마디 해보는 소린데 거기서는 왜 끓는거요? 우리 철산의 전설이라니 내 하도 희한해서 한마디 한걸 가지고…》

《세봉의 얘기뚜껑 열리자마자 뚝딱해버리니 그게 어디 말동냥하러 온 사람행실이 됐소?》

《아, 됐수다. 내 이제는 입에다 방치돌을 괴여놓겠으니 세봉이 이 사람, 어서 하게나. 우리 철산땅의 전설이라면 철산사람들이 의당히 알고지내야지.》

《허허… 임자들 싱갱이질도 재미나는군 그래.… 자, 이제는 모두 정하게 앉아서 세봉의 전설얘기 들어보세나.》

좌상로인이 이렇게 두사람의 언쟁을 조용히 눌러놓자 방안은 물뿌린듯 잠잠해졌다.

량세봉은 통채로 암송해두었던 전설인 《장화홍련전》을 뜬금으로 책읽듯 엮어가기 시작하였다.

《화설 해동조선국 세종대왕시절 여기 철산고을에서 한 재상이 떠올라 성은 배요 이름은 무용이라 본시 량반으로 좌수를 지냈다 하더라. 권세있고 재물있으니 부러울것 없는데 다만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어 부부매양 슬퍼했더라.…》

이야기에 취해들자 량세봉은 저도모르게 흥에 떠서 허리를 앞뒤로 흔들며 이야기에 고저장단을 붙여 제법 류창하게 엮었다.

《하루는 부인 장씨 몸이 곤하여 잠간 조을제 하늘로부터 한 신선이 내려와 꽃 한송이 선사하고 돌아갔거늘 그날부터 태기가 있어 드디여 귀여운 옥동녀를 낳았으니 이름은 장화라고 지었느니라.…》

원래 목소리가 귀맛좋게 쩡쩡 울리고 웅변도 좋은 량세봉이 장화가 곱게 커가는데 불행하게도 어머니가 죽고 계모가 들어온 이야기며 심술사납고 욕심많은 계모의 슬하에서 갖은 멸시와 억울한 모해를 당하게 되는 장화의 가긍한 정상을 펴나가자 듣는 사람들모두가 눈물을 머금었다.

량세봉은 전설을 끝까지 거침없이 내리엮고나서 밤이 깊었는데 오늘저녁에는 《장화홍련전》으로 끝내고 다음기회에는 장수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고마우이. 여보게들, 두고보세. 이제 저 량씨댁 장손이 나라의 장수가 되지 않나.》

좌상로인이 이렇게 몽당수염을 내리쓸며 대견스레 말하고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다른 늙은이들과 녀인들도 한마디씩 량세봉에 대한 치하를 해주고는 서당방을 나섰다.

량세봉의 서당생활은 꿈속처럼 빨리도 흘러갔다.

그가 서당지기로 들어선 때로부터 여러해가 흘렀다. 서당지기라는 《직무》를 걸머지고 힘겹게 걸어온 나날들이였다.

그러나 그 나날 량세봉은 까막눈이 횅창해지고 생활을 보는 안목도 트기 시작하였다. 세상을 살피는 랭철한 넋을 지니게 되였으며 멀지 않아 행전을 감고나서야 할 인생의 궤도를 선택하게 되였다.

여기에는 강서명의 목적의식적인 교육과 교양이 결정적작용을 하였다.

강서명은 이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더불어 민족이 후손만대로 전해가는 명장, 명인들에 대한 이야기들과 왜나라의 침략을 분쇄한 임진조국전쟁, 청나라의 침략을 반대하는 병자년전쟁, 미국함대를 족친 신미양요와 임오년의 군인폭동, 김옥균의 갑신정변과 갑오년의 농민전쟁, 전국을 휩쓴 의병투쟁 등 세대를 이어 그칠 길없었던 조국수호전의 이야기로 량세봉의 가슴을 애국의 피로 끓게 하였다.

어느날에는 간악무도한 왜놈들이 제놈들의 국권찬탈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나라의 왕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칼탕치고 시신마저 불에 태워 없애버렸다는 비화를 들려주면서 왜놈들의 포악한 만행과 제 나라 왕후도 지켜내지 못한 통치배들의 무능, 쇠퇴몰락한 나라의 국력을 놓고 가슴을 치며 통탄하였다.

또 어느날에는 자기가 남달리 사랑하는 몇몇 청년들만 남겨놓고서 의사 안중근이 침략의 괴수 이또 히로부미를 격살한 통쾌한 애국적장거에 대하여 세세히 들려주었다.

그리고 《학생들! 우리 민족의 애국정신은 살아있다! 조선 만세! 내 나라 만세!》하고 목청껏 소리치며 더운 눈물을 쏟았다.

이날 강서명은 분명 자기가 지은것 같은 노래를 배워주고 량세봉이네와 함께 팔을 저으며 열창하였다.

 

    참으로 존경하노라 안중근이여

    이등박문 격살하였으니

    민족의 망국의 한 풀었도다

    세상사람들 하나같이

    그대 숭고한 넋에 머리 숙이노라

    그대 렬사의 호호탕탕한 기상

    이 나라 청사에 아름답게

    무궁빛나려니

    맹약하노라 우리모두

    그대 뒤를 이어 장검을 들리라

 

량세봉은 강서명과 함께 이 노래를 여러번 부르면서 안중근이 려순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기전에 면회온 동생들에게 남겼다는 말을 심장에 쪼아박았다.

《슬퍼하지 말라. 대장부로 태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것을 바쳤는데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

다음날 저녁 하숙을 덥힐 땔나무를 하려고 뒤산에 오른 량세봉은 그를 따라나선 제일 가까운 글방친구들인 석태무와 최현수에게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분연히 웨쳤다.

《하늘과 땅을 우러러 맹세한다. 세월이 흘러 내가 나서야 할 때면 나도 안중근의사처럼 왜놈들을 족치겠다! 대장부로 태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것을 바친다면 백번 죽은들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

우렁찬 맹세에 메부리가 흔들리고 수림이 세차게 설레이는듯싶었다. 그것은 왜놈들에게 짓밟히고 수난당하는 조국땅에 다지는 소년 량세봉의 맹약이였다.

원쑤 일제를 노려보는듯 한 그의 두눈에 숯불같은 불이 황황 일었다.

량세봉의 그 비상한 웨침에 최현수는 누가 듣는 사람이 없는가 하여 겁질린 눈으로 긴 목을 빼들고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석태무는 량세봉의 격동에 덩달아 속이 달아올라 그의 웨침을 얼른 받았다.

《세봉형! 세봉형이 나서면 나도 따라갈테야!》

석태무가 이렇게 소리치자 최현수도 제 홀로 입다물고있을수 없어 덩달아 기세를 올렸다.

《나두!》

《그래! 우리모두 선생님말씀대로 더 열심히 배우고 힘을 키우자. 그래서 나라지키는 큰 싸움에 우리도 장검을 들고 나서자!》

그들 셋은 주먹과 주먹을 합치며 열차게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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