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회)

제 5 장

6

 

문건을 검토하던 정신옥은 돋보기를 벗고 머리를 들었다.

《부위원장선생, 안녕하십니까.》

방안에 들어선 낯선 군관이 정중히 거수경례를 하였다.

정신옥은 앉은채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보이며 물었다.

《누구신가요?》

《내무국에서 왔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다. 그곳에서 찾아올 일이란 없을것이다. 아무튼 모처럼 찾아온 손님이니 맞이하여야 했다. 앞탁옆에 놓인 걸상을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고맙습니다.》

손님은 걸상에 앉으며 다시금 인사를 보내여왔다. 무표정한 낯색이였으나 깍듯한 례절을 갖추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왔습니까?》

《우리는 군건설을 방해하려는 반혁명분자들의 음모를 적발했습니다. 이 사건의 진상을 캐는데 선생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차영환은 야전가방에서 수첩을 꺼내놓았다. 이제부터 이쪽의 말을 빠짐없이 적을 잡도리였다.

《그런 일이라면 나에게서 도움을 받을 일이 없겠는데…》

정신옥은 심상한 태도로 응대했다.

《지종수를 잘 아시지요?》

그렇게 묻는 차영환의 눈에 예리한 빛이 흘렀다. 하지만 정신옥은 여전한 표정으로 기꺼이 대답했다.

《아다뿐이겠습니까. 나의 옛 제자입니다.》

《지종수는 스미스의 졸개이며 반혁명집단의 두목입니다.》

차영환은 정신옥을 똑바로 마주보며 명백히 말했다.

정신옥은 숨을 멈추었다. 원 그럴수가 있는가? 너무도 엄청났다. 뜻밖의 충격에 한순간 혼란되였던 의식을 수습하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반동이 아니라는것을 나는 보증할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보증한단 말입니까?》

《그 사람은 과거에 반일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여 감옥살이를 여러해 하였습니다. 해방후에는 인민정권기관에서 일을 잘하고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반동일수가 있습니까?》

정신옥은 자신이 억울한 루명을 쓴것처럼 분격하였다.

《정선생, 나라를 빼앗겼던 과거에는 반일이 곧 애국이였습니다. 그러나 국토가 량단되고 리념대결이 첨예해진 오늘에는 반일투쟁을 하던 사람들도 적의 편에 선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시상공부 부장이라는 직분이 그대로 애국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보다 높은 직무에 잠입한 적대분자도 얼마든지 있을수 있습니다.》

정신옥은 침묵했다. 항변할 말을 찾지 못할뿐이지 지종수가 반동일수 없다는 확신은 여전했다.

《정선생자신의 문제와 관련해서 몇가지 묻겠습니다.》

차영환은 정신옥을 바라보며 수첩우에 필을 들었다. 체포된 반동분자들을 예심하는 과정에 정신옥이 놈들과 관련되여있다는 추측이 짙었다. 부서의 다른 사람들은 그를 당장 구류시키고 예심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차영환은 확고한 증거가 없는 이상 그럴수 없다고 생각했다. 몇가지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알아볼게 있으면 기탄없이 물으시오.》

정신옥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젖히며 도고한 표정으로 상대를 마주보았다.

《지난해에 어머니들과 안해들의 이름으로 아들딸들과 남편들을 군대로 데려가지 말라는 성토문을 쓴 일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있습니다.》

정신옥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평양주재 미군대표부의 스미스중좌를 만났댔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정신옥의 눈에 랭혹한 빛이 떠올랐다.

《나에게서 무슨 도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실은 나를 심문하러 왔군요. 그렇지요?》

목소리 역시 싸늘했다.

차영환은 정신옥의 눈동자를 예리하게 직시했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는 이상 순조롭게 대화가 오고갈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아무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다만 묻는 말에 진실그대로 대답해주기 바랄뿐입니다.》

《좋습니다. 스미스를 만났던 일이 있습니다. 바로 이 사무실에서… 그때 선물을 받았지요. 이게 그날 받은 만년필입니다.》

정신옥은 책상우에 놓여있던 만년필을 들어보였다. 그 어떤 반발심이 강렬하게 치밀었다.

《다른 선물은 없었습니까?》

《포도주와 통졸임도 한지함씩 받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은것자체가 죄로 되는가요?》

《그럴리가 있습니까. 다만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서 묻는겁니다. 그후에도 스미스를 만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는 은근히 그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미군정의 정치실상과 쏘미공위에서 미군측의 태도를 두고 하고싶은 말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또 한가지 묻겠습니다. 얼마전에 직조공장에서 생산한 천을 접수한 일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바로 그 천이 놈들에게 리용되였습니다. 선생이 그처럼 믿고있는 제자 지종수는 수상보안대에서 훔쳐낸 금괴를 그 천에 싸서 서울로 빼돌리려다가 적발되였습니다.》

차영환은 심문한 내용을 사실대로 말했다.

정신옥은 흠칫 놀라더니 인차 자신을 다잡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난 도저히 믿을수가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종수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설사 반동의 길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나의 승인이 없이 그 천을 그런 흉계에 리용할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기엔 그 무슨 오해가 아니면 조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영환의 어성이 더 높아졌다.

《그래 이게 무슨 날조극이라고 생각합니까?》

정신옥은 조금도 기가 눌리는 기색이 없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오히려 도전적인 용기를 드러냈다.

《미안하오만 큰소리는 삼가해주시오. 나이는 들었지만 난 아직 청각이 좋습니다. 나도 당신을 두고 나름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습니다.》

차영환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우리한테 지종수와 그 졸개들이 잡혀와있습니다. 나와 함께 지종수를 직접 만나보지 않겠습니까?》

정신옥에게 진실을 확인시킬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나보겠습니다.》

정신옥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앙녀맹청사의 현관앞에 차영환이 타고온 군용승용차가 서있었다. 차영환을 따라서 밖으로 나온 정신옥은 그 차를 타고 내무국으로 갔다.

지종수는 내무국 한귀에 있는 구류장의 독방에 있었다.

차영환과 정신옥은 보초병이 쇠를 따고 문을 열어주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던 지종수가 일어섰다. 정신옥을 알아보더니 해쓱하니 얼굴이 질리였다. 눈길을 허둥거리며 금시 땅속에 잦아들고싶어하는 기색이였다. 차영환은 그를 이미 여러번 심문했다. 그는 그때마다 다른 졸개들처럼 자제력을 잃지 않았고 비굴한 애원도 하지 않았다. 망책다운 격이 있는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신옥의 앞에 선 그는 고압전류에 감전된 사람처럼 전률하고있었다. 극도의 죄스러움과 후회감이 그의 넋을 혹독하게 비틀며 절망적인 혼란에로 몰아가는듯싶었다.

두사람을 일별하던 차영환이 정신옥에게 말했다.

《이자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억측하고 날조했는가를 알아보시오.》

정신옥은 지종수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임자, 나한테는 진실을 말할수 있겠지?》

어조는 높지 않았으나 서늘한 여운이 흘렀다.

지종수는 몸을 떨며 침묵했다.

《여적 내앞에서까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스미스놈의 졸개로 반동질을 하였다는것이 사실인가?》

《선생님, 사실입니다.》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짓숙인 지종수의 입에서 흐느낌에 젖은 목소리가 간신히 새여나왔다.

정신옥은 놀라운 눈길로 쳐다보며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지종수의 입에서 새여나온 말을 도대체 믿을수가 없었던것이다. 혹시 강박에 못이겨 자포자기적인 심리에 빠져 그러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죄다 사실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속여왔습니다. 인민앞에 용서받지 못할 정치적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사형판결을 면할수 없을것입니다. 죽기 전에 선생님앞에 이렇게 용서를 빌수 있는 기회가 차례진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선생님…》

지종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흐느낌에 젖어들던 목소리가 점차 잠겨버렸다.

《나는 네놈이 그런줄은 몰랐구나!》

정신옥은 억이 막혀 부르짖더니 입술을 앙다물고 종수의 뺨을 쳤다. 지종수는 스승의 손길에 더 매질을 당하고싶은듯 얼굴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옥은 그 매질에 자신이 세찬 타격을 받은듯 비칠거렸다. 차영환이 금시 쓰러질듯 한 그를 부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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