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회)

제 5 장

4

 

《당신의 망원들은 몇달째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있습니다. 내가 보기엔 그것이 당신의 무책임성때문입니다. 당신은 내란과 파괴를 위한 어떤 공작도 조직하지 않고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스미스는 내심을 꿰뚫어보려는듯 지종수의 눈동자에 집요한 시선을 박았다. 지종수는 그의 재빛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대답했다.

《수상보안대에서 금괴도난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평양의 반탐기관은 최대한으로 각성을 높이고있습니다. 여차했으면 그때 벌써 우리조직은 괴멸될번 했습니다. 그후 무슨 일을 또 꾸며댔다가는 여부없이 우리 정체가 드러날수 있었습니다.》

《정탐활동이나 내란공작은 언제나 생명의 위험을 동반하기마련입니다. 조선반도에서 량극대결은 더욱 날카로와지고있습니다. 현하정세는 당신과 같이 북에 있는 반공투사들이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싸울것을 요구하고있습니다. 당신은 혹시 죽음을 겁내고있는것이 아닙니까?》

천만에, 내 조국에 자유와 민주주의리념이 지배하는 독립국가를 세우는 성스러운 위업에 한목숨 바칠 각오를 오래전에 가진 사람이요, 이런 항변이 불쑥 치밀었으나 종수는 입을 열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쉬였다. 이즈막에 와서는 그렇게 자기를 주장할 용기가 없었다. 스스로도 알수 없는 동요와 혼란이 내부에서 일어나고있었다. 한순간의 침묵끝에 침울히 대답했다.

《옳게 보았습니다. 난 죽고싶지 않습니다. 아직 젊었으니까요.》

그 어조에 자신에 대한 비양이 풍기였다.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자유민주주의리념에 충실한 반공투사로 알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점차 실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수 있습니다. 실상 나는 정보활동이나 내란을 꾸밀만 한 재목이 못된다는것을 이미전부터 자인했습니다.

스미스씨, 이제라도 내 자리에 한룡백군을 앉히는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스미스는 놀랐다. 자기의 속심을 정확히 짚어보고 던지는 물음이였기때문이였다. 사실 이즈막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일뿐더러 다루기도 말짼 지종수보다 한룡백을 망책으로 내세우는것이 낫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품어왔다. 룡백은 사고가 단순하고 명령과 지시에 무조건 복종한다. 《반공》의식도 투철하다. 그대신 인격이 없고 두뇌가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체포되는 만약의 경우에 자기의 동료들을 배신하기가 쉽고 두뇌가 없는 사람은 서툴게 일을 꾸미기마련이다. 적어도 지종수는 체포되여 사형을 당하는 경우에조차 자기 성원들을 불지 않을것이다.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던터에 지종수의 그런 제기를 받았다. 스미스는 한순간의 침묵끝에 자기의 속심을 숨기고 몹시 서운한 기색을 꾸며보이였다.

《난 당신이 그렇게 나올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평양에 와서 느낀 가장 큰 기쁨은 당신을 알게 된것이였습니다. 공통된 리념을 가졌을뿐아니라 모교를 같이한 당신이야말로 나와 끝까지 손잡을수 있다고 여겼기때문이였습니다. 방금 당신에게 실망을 느끼고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만큼 당신을 믿고있기때문에 자기 마음을 숨김없이 헤쳐보인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런 제기를 하다니

스미스는 너무도 유감스러운 감정에 목이 메는듯 말끝을 삼키며 두팔을 쩍 벌려보이였다. 그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지종수는 감복했다.

《스미스씨, 내가 자기의 무능을 원망하던 나머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당신은 언젠가 서울로 가겠다는 의향을 표시했는데 내가 평양을 떠날 때 함께 갑시다. 미쏘공동위원회는 조만간에 류산되고말것입니다.》

《쏘미공위의 전망이 그렇게 암담합니까?》

지종수는 제꺽 말꼬리를 잡고 반문했다.

스미스는 그의 호기심어린 낯빛을 살피며 얼결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비쳤다고 생각했다. 미국측은 표면상으로는 미쏘공동위원회에 기대를 건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은 그 류산을 꾀하고있었다. 오래동안 휴회로 들어갔던 공동위원회가 마샬과 몰로또브의 회담끝에 다시 열리였다. 미국측은 세계의 면전에서 모스크바선언에 서명하였던 자기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공동위원회에 참가하여 조선의 통일정부수립을 운운하기는 하지만 속심은 다른데 있었다. 남반부에 단독정부를 세워서 조선의 절반땅이라도 가로타고 앉으려는것이 미국의 대조선전략이였다. 겉과는 다르게 이 전략을 추구하기 위해 리승만을 부추겼다. 리승만은 모스크바선언과 미쏘공동위원회를 완강히 거부해나섰다.

이른바 《반탁》운동을 벌릴 때와 같은 현상이 재현되였다. 하지는 세계여론을 기만하기 위해 그를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엄한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하였다. 그럴수록 리승만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 무슨 성명을 련이어 발표하면서 유엔에 상소도 하였다. 굳이 귀띔을 하지 않아도 상전의 속심이 무엇인지를 알고있었다. 꼭두각시로서는 나무랄데 없는 슬기와 재주를 가진 리승만이였다. 미국은 그를 리용하여 공동위원회가 류산되는 책임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꼭두각시역을 솜씨있게 수행하는 리승만은 자못 주대가 있고 민족정신이 강한 정치가로 자신을 분식할수 있었다.

내막은 이러했으나 스미스는 달리 대답했다.

《미국측은 미쏘공동위원회가 모스크바선언대로 추진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남조선의 주도적인 정치세력은 공동위원회에서 그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하여도 접수하지 않는다는 립장을 보이고있습니다. 우리는 조선국민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두고봐야 알겠지만 재개된 미쏘공동위원회는 공연한 시간랑비로만 될것입니다.》

《남조선의 주도적인 정치세력이란 리승만의 우익세력을 념두에 둔거겠지요?》

지종수는 그늘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서울에는 려운형선생이나 김규식선생과 같은 명망높은 독립운동자들이 있는데 미군정은 왜 하필 리승만을 끼고도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정신옥부인이 나에게 그런 의문을 표시해왔는데 당신 역시 그렇군요.》

《정선생의 말에 의하면 리승만은 정치활동의 오랜 기간에 문명사회의 정치는 배우지 않고 권력의 자리를 노린 파쟁만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것은 일면적인 편견입니다. 내가 알기엔 리승만박사는 반공리념이 투철하고 로련한 정치가입니다. 사제간이라 하더라도 정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오. 나는 그에게서 실망을 느꼈습니다. 그는 분명히 우리와 손을 잡을수 없는 녀성입니다. 그에게는 절대로 우리의 관계를 말하지 마시오.》

《당신은 나를 어린애로 아시는군요.》

지종수는 싱긋이 웃었다. 스미스도 따라웃었다.

《어지간히 나이가 들다보니 나에게는 지나친 로파심이 없지 않습니다.》

스미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되돌아가며 계속했다.

《우리의 대북공작에서 여전히 주되는 과업은 가능한대로 이북의 군건설을 파괴하는것입니다. 당신도 아다싶이 이북은 지금 정규군건설을 마지막단계에서 다그치고있습니다. 이에 대처해서 맹렬한 활동을 벌려주기 바랍니다. 나와 함께 서울로 나갈 때 당신의 목에 승리자의 월계관이 걸려야 할것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지종수는 미군대표부를 나섰다. 경상골을 빠져나오는 그의 머리속으로 무거운 상념이 밀려들었다. 발길이 닿는대로 걸음을 옮겼다. 최근 몇달동안 망책의 책임을 포기하다싶이한것은 스미스의 면전에서 말한것처럼 생명의 위험을 느껴서가 아니였다.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옳은것인가? 때없이 그런 의문이 떠오르며 마음이 뒤흔들리는것을 의식하기때문이였다. 해방직후에는 몰랐으나 두해가 지나자 북과 남에는 판이한 현실이 펼쳐졌다. 북에서는 제반민주개혁의 실시로 경제장성이 이룩되고 생활이 안정되였다. 지난해의 농사작황은 식량문제를 완전히 해결할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 어느때에나 38도선이북지역은 부침땅면적이 적어서 남부평야지대의 알곡을 실어와야만 했었다. 해방이 되자 북조선사람들은 굶주리게 될것이라는 여론이 나돈것은 까닭없는 일이 아니였다. 력사적으로 굳어진 상식으로 보면 그럴수밖에 없는 예견이였다. 그런데 그 예견을 뒤집으며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되였으니 이것은 토지개혁이 가져온 하나의 기적일수밖에 없었다. 산업국유화법령으로 국가의 소유로 된 공장, 기업소들은 생산이 놀랍게 상승하고 운수, 체신부문도 활기를 띠였다. 교육사업 역시 새로운 발전의 길에 들어섰다. 배움의 시기에 살고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학교가 세워지고 때를 놓친 어른들을 위해서는 문맹퇴치운동이 벌어지고있었다. 민족사에 지금처럼 배움의 글소리가 높았던 때는 일찌기 없었다.

반면에 남조선은 어떠한가? 지종수는 서울에 가본 일이 없지만 여러 경로를 통하여 남조선의 현실을 알고있었다. 예로부터 남조선은 곡창지대로 알려졌건만 해를 이어가며 기아가 전역을 휩쓸고있었다.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들이 쌀을 달라고 아우성치며 처처에서 파업을 벌리였다. 워낙 보잘것없던 공장, 기업소들은 아직도 숨을 죽이고있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상승하고있다. 미군정과 리승만은 민생은 아랑곳없이 좌익세력탄압에만 열을 올리고있었다. 지난해 10월인민항쟁이 있은 후에도 로동자, 농민들의 폭동은 그칠새없이 일어났다. 이 세상에 정치가 생겨난 때로부터 어느 시기에나 위정자들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여왔다. 미군정과 리승만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의 정당성은 말로써 증명되는것이 아니라 현실로 증명된다. 백성을 배불리 먹여살려서 그들의 지지를 받는것이 옳은 정치지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그들의 한을 사는것이 옳은 정치일수야 없지 않는가.

지종수의 머리속에는 이미 일제시기에 사회주의가 프로독재의 철권정치를 편다는 인식이 뿌리깊이 박혀있었다. 그래서 해방된 조국에 자유민주주의리념이 구현된 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지향이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해방직후에는 적의에 찬 눈으로 북반부의 정치현실을 주시하여왔다. 그러나 병적으로 삐뚤어진 시각을 가지고있지 않는 이상에는 주관적인 앙심과 달리 점차 객관적현실이 있는 그대로 뇌수에 반영되기마련이다. 북남간의 대조적인 현실은 그의 사고를 혼란시켰다. 확실히 북반부에서 실시되는 정치는 여태껏 알고있던 《공산정치》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였다. 전에는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인민민주주의정치가 펼쳐지고있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해방직후에 선택을 달리 했어야 하는것이 아니였을가. 막연한 후회가 문득문득 떠오르며 마음을 괴롭혔다. 하지만 되돌아서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산정에서 굴러떨어지는 운명의 관성에 자신을 맡기는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스미스에게 서울로 나가고싶다는 의향을 내비쳤지만 거기에 가면 암담한 현실에 부딪치며 새로운 고민이 시작될것이다. 뜻대로 할수 있다면 서울을 거쳐서 미국으로 망명을 하는것이다.

사흘후 였다.

정신옥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아니 선생님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가 시상공부에 나타나기는 처음이였다.

《내 임자한테 긴히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네. 들어주겠나?》

《선생님의 부탁이라면야… 그런데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저를 부를것이지 왜 이 더운 날에 예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지종수는 책상우에 놓여있던 부채를 들어 권하였다. 정신옥은 그것을 펼쳐들고 몇번 부치더니 입을 열었다.

《며칠전에 남녀평등권법령발포 한돐을 성대히 기념하기 위한 도 녀맹위원장들의 협의회가 있었네. 그들이 들고나갈 프랑카드를 비롯해서 기념행사의 장식물에 쓸 천이 얼마간 필요하다고 제기됐네. 두루 생각다 못해 임자의 도움을 받아야 해결될듯싶어서 이렇게 찾아왔네. 번번이 신세를 져서 미안한줄 알면서도…》

미안스러운 표정속에 간절한 기대가 어렸다.

지종수는 정신옥을 마주보던 시선을 떨구었다. 참으로 어려운 부탁이였다. 적산품으로 상공부가 가지고있던 얼마간의 천은 이미 오래전에 동이 났다. 난감한 기색으로 앉아있던 그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동평양조면공장에서 얼마전부터 광목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배정표를 떼여준다고 하여도 지배인이 내놓자고 하지 않을것입니다.》

《아, 그런가? 지배인은 념려말게. 그 녀자는 내가 걸음을 하면 문제없네.》

정신옥은 귀가 번쩍 열리여서 확신적으로 말했다.

《지배인을 잘 압니까?》

《아다뿐이겠나. …내 부탁이라면 어떤 경우든지 마다할수 없는 녀자일세.》

지종수는 즉석에서 필요한 량의 배정표를 써주었다.

《고맙네.》

정신옥은 손가방에 배정표를 넣고 기쁨에 넘쳐 일어섰다.

 

×

 

정신옥은 사무실로 들어서는 젊은이를 반가이 맞이했다. 이미 낯이 익은 한룡백이였다.

《무슨 일로 왔나?》

《어제 저녁에 들었는데 중앙녀맹에서 각 도 녀맹들에 천을 보낸다더군요. 황해도에도 보내겠지요?》

《그야 물론 이지.》

《그쪽으로 가는 배편이 있어서 날라다 드리려고 그럽니다.》

《종수군이 그런 부탁을 하던가?》

《그렇습니다.》

한룡백은 흔연히 대답했다. 그러나 거짓말이였다. 지종수로부터 각 도 녀맹에 천을 보낸다는 말을 들었을뿐이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피긋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수상보안대에서 훔쳐낸 금괴를 여적 서울로 빼여돌리지 못하고있었다. 경계가 심하여서 어쩔수 없었다. 해주로 보내는 천퉁구리속에 금괴를 감춘다면 일은 순조롭게 될것이다. 38도선 접경인 해주에는 서울에서 임무를 받고 파견되여오는 행동대가 있다. 그들과의 련계는 내가 직접 할것이다. 다른 그 누구에게 맡길수 없었다. 접선암호는 나만이 알고있다. 해주까지 천을 실어가는 임무는 기양호에게 줄것이다. 이쯤하면 모든 일이 틈없이 꾸며지는셈이다. 문제는 정신옥이 나를 믿고 천을 실어보내도록 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지종수가 나선다면 두말할것없이 선뜻 응할것이다. 하지만 종수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어떤 경우든지 존경하는 스승을 자기의 계책에 끌어들일 그가 아니였기때문이였다.

한룡백은 웃음진 얼굴로 정신옥을 바라보았지만 마음은 더없이 긴장했다.

그가 과연 어떻게 나올것인가?

정신옥은 감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종수군은 번번이 내 일이라면 그렇게 발벗고 나서지. 임자네들이 천을 실어다주기까지 하겠다면 참으로 고마운 일일세.》

한룡백은 막혔던 숨을 길게 내불었다. 마침내 절호의 기회가 온것이다.

《그런데 선생님, 상선출항절차가 전과는 달리 여간 까다롭지 않습니다. 후송증을 한장 써주십시오.》

《그거야 못하겠나.》

정신옥은 중앙녀맹의 큼직한 공인이 찍힌 후송증을 즉석에서 써주었다.

후송증을 받아가지고 사무실을 나선 한룡백은 느닷없이 가슴이 설레였다.

 

련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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