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 회)

제 4 장

4

 

(2)

 

김정숙동지께서는 저으기 낯빛이 불그레해진 림정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시였다.

《흥미있게 들었어요. 그런 동무였군요.》

《저는 강상호동지로부터 녀사님께서 <건국실>내용을 어떻게 구상하고계시는가를 들었습니다. 녀사님의 지도를 받으며 <건국실>을 꾸리느라면 김일성장군님에 대해 더 잘 알게 될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기어이 그려야 할 장군님의 초상화를 완성하는데 도움이 될 밑천을 마련할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우리 과장동지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여기로 오겠다고 떼를 쓴것은 그때문이였습니다.》

《동무와 같이 좋은 사람을 알게 되여 기뻐요. 우리 함께 손잡고 <건국실>을 잘 꾸려보자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순박해보이는 젊은 화가에게 진정 믿음이 가고 정이 가시였다.

 

×

 

림정하는 정신옥의 집을 향해 걸음을 다그치고있었다.

서분영은 나를 어떻게 맞이할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앞에 맺혀 떨어지지 않았다. 기환의 집에 들렸을 때 한번밖에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처녀의 얼굴모습이 세부까지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었다. 정신옥에게 인사를 드리고 벗 기환이도 만나고싶었지만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분영이를 보고싶었다. 심장을 속이기는 어려웠다. 심장은 잔잔히 고동쳤다. 그날 처녀는 단지 나를 오빠의 친구로 덤덤히 대하였다. 당시로서는 그럴수밖에 없었을것이다. 필경 그후에 기환이는 내가 분영이에게 마음을 두고있다는것을 비쳤을것이다. 그러니 이제 만나면 분영이가 은근히 애틋한 정을 보내줄수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간격을 두고 대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관계에 대한 결심이 섰을테니까.

어느새 집앞에 이르렀다.

《계십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주인을 찾았다. 대답이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기환동무!》

여전히 집안은 괴괴했다. 그제서야 출입문에 쇠가 잠겨있는것을 보았다.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서켠에 기운 해는 미구하여 지평선너머로 사라지며 붉은노을을 하늘가에 펼치였다.

이윽하여 분영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노을빛이 어린 처녀는 그 자태가 더욱 황홀하게 보이였다.

《안녕하십니까.》

정하는 먼저 인사를 했다.

무심히 걸어오던 분영은 첫 순간 흠칫 놀랐다. 이쪽을 알아보더니 고운 얼굴에 어설픈 웃음을 그리였다.

《동무였군요. 그렇게 군복을 입으니까 몰라보겠어요. 어떻께 오셨나요?》

처녀의 목소리와 몸가짐은 자연스러웠다. 보통 풋낯이나 아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얼마전에 평양에 소환되여왔습니다. 어머님께 인사도 올리고 기환동무도 만나고싶어서 왔습니다.》

대답끝에 실은 누구보다도 동무를 만나고싶어서 왔다고 덧붙이고싶었으나 그럴 용기가 없었다. 스스로도 이상하리만큼 처녀앞에서는 주눅이 든다.

《어머닌 좀 있으면 오시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빠는 출장을 갔어요.》

아쉬웠다. 기환이가 있어야 헤여져 몇달동안의 하회도 나누고 분영이의 태도도 알수 있겠는데 그가 없는것이다.

《기환동무는 지금 무슨 일을 합니까?》

《시민청에서 사업합니다.》

《인제는 동무도 직장에 다니는가 보군요?》

《남녀평등권법령 발포이후 중앙녀맹에 문화선전대가 조직되였어요. 녀성들속에서 제반민주개혁을 선전하는 사업을 하지요. 나도 거기에 망라되였어요.》

그러고보니 분영의 손에 바이올린케스가 들려있었다. 기환이는 자기 녀동생이 피아노도 타고 바이올린도 켠다고 했었는데 그것이 사실인듯싶었다. 그러니 분영이는 자기의 음악적소질에 맞는 초소를 찾은셈이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요.》

자물쇠를 딴 분영이가 출입문을 열었다. 정하는 처녀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두사람만 있게 되자 정하는 얼굴이 붉어졌다. 거북하기도 하지만 느닷없이 가슴이 높뛰였다. 남녀사이에 사랑을 고백하거나 은밀한 정을 나누기에는 3자의 개입이 없는 장소가 필요한것이다. 분영의 내심을 타진해보기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저… 전 좀 옷을 갈아입어야겠는데…》

분영이가 그냥 아래방에 서있는 정하에게 말했다. 자리를 피해달라는 뜻이였다. 정하는 웃방으로 올라와 책상에 마주앉았다.

나들이옷을 실내옷으로 갈아입은 분영이가 웃방으로 올라왔다.

《지금 소대나 중대를 지휘하고있겠지요?》

스스럼없이 물었다. 호젓한 방안에서 단둘이 있었지만 분영이는 조금도 어색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표정도 온화하고 목소리도 담담했다. 이성의 감정을 초월한 태도였다. 모르긴 해도 기환이는 나를 두고 녀동생의 의향을 물었을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오는걸 보면 랭담하게 오빠의 권고를 거절한것이 분명했다. 정하는 지금 애타는 사랑의 갈망에 빠진 자기의 심장과 범상스레 안정된 처녀의 심장이 심한 대조를 이루고있다는것을 느꼈다. 화가의 안목으로 처녀의 표정에서 그것을 엿보았다. 화가에게는 인물의 내면세계를 외양의 묘사에 정확히 드러내는 재능이 있었다. 만일 처녀의 얼굴에 엷은 홍조라도 떠올랐다면 그것이 반영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포착하고 기뻐했을것이다. 하지만 얼굴 한번 붉히는 일이 없이 보통 아는 사람을 대하듯이 바라보고있다. 이 집에서 분영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자기의 감정이 허망한 짝사랑이 아니였을가? 서글픈 생각에 고개를 접었다.

《지금 군대에서 무슨 직무를 맡아봅니까?》

다시 묻는 분영이의 목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예?배운것이 그림이다보니 어데서나 그 일을 하지요.》

《군대에도 화가직제가 있는가보지요?》

분영이는 군대에 대해 잘 모른다. 군대에는 총과 대포를 가진 사림들만 있는것으로 알고있었다.

《군대에는 작가와 작곡가, 화가 등 온갖 예술가들이 다 필요하지요.

예술이 없는 생활을 생각할수 없듯이 예술이 없는 군대를 생각할수 없습니다. 조만간에 협주단도 조직된답니다.》

정하는 처음으로 처녀앞에서 론리를 세워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그 어떤 론담이나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에는 누구만 못지 않게 사리를 가지고 말할수 있었다. 그런데 처녀와 말을 할 때에는 안타깝게 혀가 굳어지고 주눅이 드는것은 이상스러운 일이였다.

《우리 어머니는 말이예요.》하고 분영이는 유감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정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동무와 같이 재능있는 화가가 왜 굳이 군복을 입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정신옥의 견해를 빌어서 하는 말이였지만 그것은 분영이자신의 생각이 분명했다.

정하는 저으기 반발심을 느끼며 처음으로 처녀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라가 있고서야 예술도 있는것입니다. 저는 군복입은 예술가가 된것을 긍지로 여기고있습니다. 생활이 예술의 토양이라면 군인생활과 전투현장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예술의 생활적바탕으로 됩니다. 그렇기때문에 저는 한평생 군인예술가로 복무하려고 합니다!》

저도 모르게 말마디에 그루를 박았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니 좋을대로 생각하라는 배심이 생겼다. 애태우며 사랑을 갈망하기는 하지만 구걸은 하지 않을것이다.

《그렇군요.》

놀라움인지 경탄인지 분간못할 말을 나직이 되뇌이며 처녀는 눈시울을 내리깔았다.

(물론 분영동무는 나와 같은 지향을 가진 사람은 사랑하지 않겠지요?)

정하는 이 순간에 이런 물음이 가슴속에서 치미는것을 느꼈다. 하지만 입밖으로 터치지 못했다. 사랑할수 없다는 대답이 두려워서가 아니였다. 처녀의 내심을 모르고 그런 물음을 던진다는것이 경박스럽게 여겨졌으며 여차하면 처녀를 난처하게 만들수 있다고 여겼기때문이다.

울렁이는 가슴을 달래며 화제를 돌렸다.

《참, 분영동무도 녀맹문화선전대에서 예술활동을 한다고 했지요?》

비록 형식이 다른 미술과 음악이지만 군대와 사회에서 다같이 예술활동을 한다는 공통점을 상기시키고싶었다.

《나는 전문음악가도 아니고 예술써클원에 불과합니다. 우리 단체는 전문가집단이 아니예요.》

처녀의 얼굴에 웃음이 어리였다.

《아무튼 좋습니다. 그 선전대에서도 새로 나온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겠지요?》

《우리한텐 아직 보급되지 않았어요.》

사회에는 아직 보급되지 못했다.

《저도 어제 저녁에야 김정숙녀사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분영의 눈이 놀라움과 부러움으로 빛났다.

《녀사님을 뵈웠습니까?》

《요사이 김녀사님을 자주 뵈올 일이 생겼습니다.》

림정하는 군복주머니에서 노래의 곡과 가사를 베낀 종이를 꺼냈다.

《동무네 선전대에서도 이 노래를 불러보십시오.》

《저, 동무는 부를줄 아는가요?》

《악보를 볼줄 모르다나니 아직은 잘 못합니다.》

서분영은 종이를 받아들고 나직이 입속으로 불러보았다. 인차 노래를 익혔다.

《피아노에 맞추어서 우리 함께 불러보자요.》

서분영은 룡설란화분곁에 놓여있는 피아노의 뚜껑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 번져질줄을 몰랐던 정하는 엉거주춤이 피아노옆에 다가섰다. 전주가 끝나고 노래가 시작되였다. 림정하는 2절부터 주저없이 목청을 뽑았다. 정확한 음정을 타고 울리는 처녀의 맑은 목소리에 총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심스레 이끌렸다.

저녁이 으슥했으나 정신옥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녀평등권법령이 발포된 후로 그는 여느때없이 일감이 많아서 매일 늦어서야 돌아온다고 했다.

림정하는 집을 나섰다. 부대로 돌아갈 때가 되였던것이다.

《어머니와 기환동무에게 제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퇴지에 나선 분영이에게 부탁했다. 그리고는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다. 예정된대로 경위대로 가자면 시간이 빠듯했다. 사위는 캄캄했다. 이따금 보이는 거리의 외등들이 빛을 뿜었다. 그 빛이 망막에 비껴올 때 문득 분영이의 모습이 떠오르고 함께 노래를 부르던 순간의 행복감이 되살아났다. 그와 이밤을 함께 걸으며 마음을 합쳐 노래를 부르는듯 한 환영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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