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회)

제 4 장

4

 

(1)

 

《재간이 좋은 화가 한명을 데려왔습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건국실》에 전시할 보천보전투략도를 그리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머리를 드시였다. 강상호가 군관 한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녀사님.》

군관이 반겨 거수경례를 했다.

《아니, 동무가 어떻게?…》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를 알아보시였다. 림정하였다. 그가 여기에 나타나다니? 놀랍고 기쁘시였다.

《이미 이 동무를 알고계셨습니까?》

강상호가 물었다.

《알고있었어요. 중앙보안간부학교 개교식날에 만났댔으니 우린 구면이지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장군님을 모시고 아드님과 함께 개교식에 참가하시였다. 그날 장군님께서는 학교에 교기를 수여하시고 력사적인 축하연설을 하시였다. 뒤이어 학생들의 분렬행진을 사열하시고 평양학원 학생들의 축하공연을 보시였다. 그 모든 행사들이 진행되는 과정에 장군님만을 우러르며 기회를 놓칠세라 분주히 화필을 놀리는 한 군관이 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축하공연이 끝난 다음 그를 만나시였다.

《동무는 누굽니까?》

《학교출판소 화가 림정하입니다.》

《그렇군요.》

《저는 오래전부터 장군님의 초상화를 잘 그려보려고 했습니다. 오늘 절호의 기회를 만났습니다. 교기를 수여하실 때, 축하연설을 하실 때, 공연을 보실 때… 여러 정황에서 장군님의 걸출하신 모습을 화폭에 담으려고 했습니다.》

림정하는 흥분된 어조로 말씀 올렸다. 오랜 숙망을 풀게 된 기쁨이 그를 흥분시킨것 같았다.

《녀사님, 장군님의 사진을 보면서 저는 얼마든지 초상화를 그릴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직접 뵈옵고보니 저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위축감이 듭니다.》

《어째서요?》

《정황이 바뀔 때마다 장군님의 모습에서 새라새로운 위인적인 풍모를 느꼈습니다. 연설을 하실 때의 열정이 풍기는 안광, 분렬행진을 사열하실 때의 근엄하신 표정, 예술공연을 보실 때의 특이한 미소… 정황마다 강렬한 매혹을 느꼈는데 그럴수록 장군님의 숭고하고 자애로운 모습과 깊은 내면세계를 화폭에 반영하기에는 저의 재능이 너무도 모자란다고 자인했습니다.》

림정하는 예술가답게 열정적이면서도 솔직했다.

《나는 동무가 장군님의 초상화를 그리기에는 붓이 무디다고 자인하기때문에 앞으로 훌륭히 그릴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싶으셨지만 시간이 없었다. 짧은 시간의 상봉이였으나 젊은 화가에게서 깊을 인상을 받으시였다.

《동무는 지금도 중앙보안간부학교에 있어요?》

《아닙니다. 얼마전에 보안간부훈련대대부 문화과에 소환되여왔습니다.》

《재능이 높으니까 뽑혀왔군요.》

강상호가 림정하에게서 김정숙동지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헌헌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제 훈련대대부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재능있는 화가가 있다는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경위대 <건국실>을 꾸리는데 동원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그곳에서 승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네도 꼭 필요해서 뽑아왔는데 그럴수 없다는거지요. 그런데 이 화가동무가 정숙동지의 관심속에 <건국실>이 꾸려진다는것을 알게 되자 이리로 오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그러자 문화과장도 하는수없이 승인을 하더군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림정하를 대견스레 바라보시였다.

《동무가 왔으니 마음이 놓여요. <건국실>을 잘 꾸릴수 있게 되였어요.》

강상호는 화가에게 수고하여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돌아갔다. 방안에는 녀사와 림정하만이 남았다.

림정하는 책상우에 놓인 보천보전투략도를 기웃해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이 략도를 이제 제가 크게 확대해 그려야 하겠지요?》

《그래요, 동무가 할 일이 많아요.》

림정하는 가지고 온 화구들을 펼치려고 했다. 당장 일에 착수할 작정이였다.

《뭐, 오자마자 화필을 들겠어요. 정하동무, 우리 이야기나 좀 나누자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림정하의 경력을 알고싶으시였다.

《동무는 언제 그런 좋은 재간을 배웠는가요? 그리고 장군님의 초상화를 오래전부터 그리려고 했다는데 그걸 알고싶군요.》

그것은 중앙보안간부학교에서 처음 만나셨을 때 진작 묻고싶었던 물음이였다. 자리에 앉은 림정하는 지나온 자기 생활의 갈피를 번지기 시작했다.

저는 열다섯살에 베이징미술학원 초상화반에 입학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남달리 좋아했는데 그때부터 전문미술교육을 받았습니다. 학비를 감당할수가 없어서 수업이 끝나면 거리에 나가 화판을 펼치였습니다. 사람들의 초상을 그려주고 몇푼씩 돈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고학을 한지 3년째 되는 어느날이였습니다.

그날 강의에 들어온 중국인교수는 과제를 주었는데 그것은 금세기 자기 민족의 가장 뛰여난 인물을 그려오라는것이였습니다. 당시 학원학생들의 민족별구성은 다양했습니다. 한족학생들이 비교적 많았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 학생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조선사람은 저 혼자뿐이였습니다.

현대의 우리 나라에서 가창 걸출한 인물은 과연 누구일가? 고종황제의 초상화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녀사님도 아시겠지만 보스라는 미국인화가가 고종황제의 초상화를 그린적이 있습니다. 보스는 그 작품을 두고 아시아특유의 부드러움과 동방조선의 고전적신선미가 결합되였다고 자찬을 했고 유미화단에서도 일정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초상화를 모사해서 제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화첩을 펼치고 다시 보았을 때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보스가 그린 고종은 안존한 얼굴에 침울한 고뇌가 비낀 유약한 인상이였습니다. 그 어떤 강압에 어쩔수없이 수긍을 하듯 두손을 어줍게 맞잡아서 배허벅에 붙이고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초상에서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가는 망국의 비운을 보는듯 했습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왕조때문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화가 치밀어서 화첩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대상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리준, 안중근, 리봉창, 강우규… 알고있는 반일렬사들이 차례로 떠오르더군요. 만국평화회의에서 의분에 못이겨 배를 가르기도 하고 왜놈괴수들에게 총탄을 날리고 폭탄을 던진 그들은 물론 후세가 잊지 말아야 할 애국자들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민족의 총아로, 영웅으로 내세울수는 없었습니다. 고작 나라잃은 울분을 과시했고 한둘의 왜놈을 저격했을뿐입니다. 적어도 광개토왕이나 연개소문, 강감찬과 리순신과 같이 달려드는 수십만대적을 쳐부시고 기우는 국운을 바로세운 인물이여야 했습니다. 저는 끝내 초상화를 그리지 못했습니다. 자랑높은 애국명장들을 력사에 기록한 우리 겨레가 현대에 이르러서는 어째서 그러한 영웅을 배출하지 못했는가! 절통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녀사님, 부끄럽습니다. 미술의 상아탑속에 파묻혀있던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백두밀림과 만주광야에서 항일대전을 펼치시는 김일성장군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있었습니다. 비극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작품을 발표하던 날 저는 얼굴을 들수가 없었지요. 다른 학생들은 자기가 그린 초상화를 놓고 그가 얼마나 뛰여난 인물인가를 설명했습니다. 그중에는 큰 정치가와 군사가도 있었고 세계가 아는 과학자와 예술가도 있었습니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과 몽매화정책으로 우리 나라에는 과학문화분야에서도 세계적인 인물이 나올수 없었습니다. 작품을 내놓지 못한 부끄러움보다도 나라잃은 슬픔이 가슴에 사무쳐왔습니다. 그날 하숙방으로 돌아온 저는 하염없는 비분의 눈물을 뿌렸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존경을 표시할만 한 인물을 못 가진 슬픈 겨레여! 언제면 나에게 그런 인물을 그릴수 있는 환희를 가져다주려느냐.

애타는 소망에 드디여 밝은 빛이 비쳐오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학원졸업을 앞둔 때였습니다.

졸업작품창작을 위해 열하지방의 승덕에 실습을 갔습니다. 녀사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승덕이라면 중국에서는 려산과 어깨를 겨루는 명승지입니다. 그곳의 수려한 풍치와 고적을 그리는것이 우리의 목적이였습니다. 승덕에는 력사유적이 많고 옛시절의 기담과 비화가 많습니다. 청나라말기 서태후도 승덕에 와서 정적을 괴살하는 여러가지 책모를 꾸미지 않았습니까. 저는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였던 승덕에 반드시 우리 조상들이 남긴 고적도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고적가운데서 어느것이 우리 겨레의것인가를 확인해보려고 주변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력사의 풍화를 거치다보니 어느 고적이 우리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대신 귀가 번쩍 열리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곳에는 조선사람들도 있었는데 개중에는 아들딸들을 항일빨찌산에 보낸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중국사람들중에도 자식들을 장군님부대에 보낸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장군님을 직접 만나뵈온 이는 없었으나 그이의 인품과 신출귀몰하시는 전법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있었습니다. 저는 커다란 흥분속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왜 여태까지 우리 겨레가 낳은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모르고있었는가. 초상화창작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던 한해전을 돌이켜보며 가슴을 쳤습니다.

학원을 졸업한 저는 장군님을 찾아 떠났습니다. 만나뵙고 그이의 초상화를 그리려는 욕망이 강렬하게 불타올랐습니다. 여러 가닥으로 수소문을 하면서 두달이나 만주광야를 밟아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백두산으로 갔습니다. 장군님께서 백두산줄기에서 싸우신다는 소식도 있었고 사람들이 흔히 장군님을 《백두산호랑이》라고 하였기때문입니다. 내도산을 거쳐서 백두산정에 올랐습니다. 물론 장군님을 그곳에서도 뵈옵지 못했지만 백두산의 장엄한 전경에 심취되였습니다. 어찌하여 민간에서 장군님을 《백두산호랑이》라고 하는지 리해가 갔습니다. 세상을 뒤집으며 온갖 불의를 쓸어버릴듯이 노호하며 폭풍치는 기상과 가장 숭고한 리념과 아름다운 정서를 발산하는듯 한 맑은 정기가 변화무쌍하게 교차되는 백두산이였습니다. 저는 흥분을 걷잡지 못하며 백두산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비록 장군님의 초상화는 그리지 못했지만 그이의 풍모를 련상시켜주는 백두산을 그린것만도 소기의 뜻을 이루었다고 생각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보니 부모님들은 그동안 전염병으로 돌아갔더군요. 부모님들의 유언대로 유해를 가지고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저의 고향은 자성입니다. 고향땅에 부모님들의 유해를 묻고는 서울로 갔습니다. 미술창작을 하자면 아무래도 서울에 발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에서 잡지사와 신문사들에서 청탁하는 그림도 그려주고 사람들의 초상화도 그려주었습니다. 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백두산을 그린 그림을 보여주면서 얻어들은대로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들중에 왜놈의 앞잡이가 있었댔는지 어느날 경찰이 나타나 구속하더군요. 여러해 감옥밥을 먹었지만 그 덕에 군대에 징모되여 태평양전쟁에서 대포밥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저같이 젊은 조선청년들은 모조리 《징병》에 걸려들지 않았습니까. 해방이 되여 출옥했습니다. 해방된 서울에는 장군님께서 입성하신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저는 여러날 화판을 메고 수많은 군중과 함께 서울역에 나가군 했습니다. 역시 장군님을 뵈옵고 초상화를 그리려는 욕망에서였습니다. 물론 그때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별로 자랑할만 한 과거가 못되여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녀사님앞에서는 모든걸 터놓고싶어서 이야기가 길어졌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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