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제 1 장

8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을가?

방금 보초소에서 중앙녀맹부위원장 정신옥이 찾아왔다는 전갈이 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현관으로 나가시였다.

그러지 않아도 진작 만나보자고 하셨댔는데 그가 먼저 찾아왔다.

강상호의 안내를 받으며 로파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검은색두루마기에 눈부시게 흰 양털수건을 쓴 그는 오른손에 불룩한 가죽가방을 들었다. 머리를 곧추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품이 듣던바대로 도고한 인상을 풍기였다. 하지만 이쪽을 띄여보는 순간에 그의 눈에는 반가운 기색이 흘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급히 마주향해 다가가시였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깊이 머리숙여 인사를 하시였다.

《아니, 김녀사!》

정신옥은 얼른 두팔을 뻗쳐 김정숙동지의 손을 잡으며 정겨운 미소를 그리였다.

《정작 만나보니 상상밖이군요.》

똑바로 마주보며 그가 경탄조로 뇌이였다.

《무슨 말씀인지?…》

정신옥은 김정숙동지의 얼굴에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숨김없이 이 순간의 인상을 헤쳐보이였다. 워낙 누구앞에서나 내심을 숨기지 않는 성미였지만 늙어가는 나이탓으로 초면의 례절을 고려함이 없이 자기의 감정을 원색 그대로 드러냈다.

《나는 김녀사를 백두산의 녀장수로 알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용모부터가 우람차고 또 범상치 않은 기운이 얼굴에 비껴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서고보니 녀사는 이를데없이 우아하고 온화한 인상이군요. 꼭 꽃이 웃는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김정숙동지께서는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시였다.

그제서야 정신옥은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말씀올렸다.

《너무도 황홀해서 이 늙은게 그만 주책머리없이…》

《자, 방으로 들어갑시다.》

김정숙동지께서 정신옥을 이끄시였다.

강상호는 곱지 않은 눈으로 정신옥을 흘겨보고 돌아갔다. 녀사의 면전에서 지나치게 꺼리낌없는 언행이 불쾌했던것이다.

응접실에 이르신 김정숙동지께서는 정신옥의 두루마기와 수건을 옷걸이에 걸어주고 그와 마주앉으시였다. 만경대고향집에 모였던 청년들을 만나신 후에 정신옥에 대해 두루 알아보시였다. 그리고 산에서 싸우실 때 어느 잡지에서 그에 대한 글을 읽으셨던 기억도 떠올리시였다.

정신옥은 간단치 않은 경력을 엮어온 녀자였다. 젊은 시절에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의 어느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때부터 독립운동에 나섰다. 《광복부인회》의 주역으로 거기에서 모금한 돈을 《상해림정》에 날라가는 일도 하였고 신간회 부녀부에서 활동을 벌리기도 하였다.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서울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아들딸들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보내지 말라는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최남선과 리광수와 같은 이른바 《명사》들이 놈들의 징병에 호응할것을 력설할 때 그의 강연은 대조적으로 이채를 띠였다. 경찰은 정신옥을 구속했다. 총독이 직접 만나서 회유하고 설복했으나 정신옥은 굴하지 않았다. 7년의 중형판결을 받고 옥살이를 하던 그는 2년만에 해방을 맞아 출옥을 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치고는 좌우익을 물론하고 정신옥올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먼저 찾아뵈워야 하는건데 년로하신 몸으로 이렇게 오셨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정신옥에게 차를 권하며 말씀하셨다.

사양치 않고 차잔을 받아든 정신옥은 감개가 무량한 낯빚이였다.

《지난번에 있은 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련석회의 휴식시간에 장군님께서는 저를 만나주시고 잊을수 없는 따뜻한 말씀을 해주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김녀사까지 만나게 되니 평생에 품어오던 소망이 다 풀리는것 같습니다.》

차잔을 비운 그는 들고온 가방에서 두툼한 문건을 탁자우에 꺼내놓았다.

《이걸 좀 봐주세요.》

《무슨 내용의 문건이기에 제가 봐야 하겠습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얼핏 스쳐보던 문건에서 정신옥에게 시선을 옮기시였다.

《각 도 녀맹에서 올라온 진정서들입니다.》

《진정서라니요?》

정신옥을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보시였다.

《내 심정도 그러하지만 전국의 녀맹원들모두가 김녀사께서 중앙녀맹위원장의 중임을 맡아주시기를 청원하고있지요. 그러한 청원을 담은 진정서들입니다.》

어느새 정신옥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셔지고 절절한 빛이 떠올랐다.

김정숙동지께서도 뜻밖의 일에 긴장해지시였다.

《제가 어찌 그런 중임을 맡을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수 없습니다.》

진정서들을 정신옥의 앞으로 밀어놓으시였다.

정신옥은 일순 서운한 기색이더니 표정을 바꾸며 힘주어 청을 드렸다.

《김녀사말고 우리 녀맹을 옳게 이끌어갈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지난해 11월에 녀맹중앙위원회가 나올 때 김녀사가 평양에 계셨더라면 진작 위원장으로 선거를 했을겁니다. 지금 위원장은 고령의 나이도 나이려니와 본인도 인정하다싶이 워낙 녀성정치가의 갖춤새도 부족합니다. 요사이는 사임할 의사를 드러내면서 출근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러한즉 김녀사께서 부디 사양말고 취임해주세요!》

《사정이 그렇다면 정선생이 중앙녀맹사업을 책임적으로 하시면 될것 아닙니까?》

《내가요?》

놀라듯 두눈을 크게 뜨던 정신옥은 쓸쓸한 미소를 그리며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나 역시 환갑을 넘긴데다가 녀맹을 이끌만 한 재목이 못됩니다.》

《무슨 말씀을 저는 정선생의 활동경력을 잘 알고있습니다. 산에서 싸울 때 선생에 대해 쓴 글을 인상깊게 읽었던 일도 있습니다. 정선생과 같이 일정하게 년세도 있고 명망도 높은분들이 녀맹사업을 맡으셔야 합니다.》

《아니, 녀사께서 저에 대해 쓴 글을 읽으셨단 말입니까?》

정신옥은 급히 되물었다. 빨찌산투쟁의 그 준엄한 환경에서 자기에 대해 쓴 글을 읽으셨다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왔던것이다.

《저뿐만아니라 우리 녀대원들이 모두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국내에서 정선생과 같은 녀성애국지사들이 일제의 강제징병제도를 반대하여 과감히 투쟁을 한다는 사실에서 크게 고무를 받았습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정신옥의 얼굴에 잊을수 없는 감회가 그윽히 어리였다. 태평양전쟁이 가열화되던 시기였다. 일제는 조선의 청장년들을 모조리 전선으로 끌어가려고 발광했다. 거기에 발맞추어 친일분자들은 《황군》에 참군하는것을 더없는 애국으로 묘사했다. 어찌 조선사람으로 태여나서 그처럼 매국적인 역설을 할수 있단 말인가. 정신옥은 의분에 넘쳐 분연히 붓을 들었다.

《…나는 내 나라 녀인들의 이름으로 <황군>에 참전하는것을 애국으로 묘사하는 춘원(리광수)과 고하(송진우)의 주장을 반론하고저 한다. 애국이란 자기 조국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말이다. 삼척동자에게도 명백한 애국의 의미를 슬프게도 문사로 이름높은 춘원이나 고하에게 굳이 깨우쳐야 한단 말인가. 그대들의 주장을 놓고 통분에 앞서 악연스러움을 금할길이 없다.

내 나라 녀인들이여, 참전을 애국으로 묘사하는 궤변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라. 그대들은 누구나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고있다. 전쟁은 죽음과 파괴, 피와 눈물의 대명사이다. 저주로운 전쟁에 끌려가 처참히 죽은 남편과 자식들의 시체앞에서 통곡을 터뜨릴 자신들을 그려보시라. 남편과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나서라. 어머니와 안해들에게는 자식과 남편을 지켜 목숨도 바칠 헌신의 용기가 있다. 그대들에게는 금수도 감동시키는 사랑의 눈물이 있다. 그 용기를 가지고 모두다 <총독부>를 찾아가 눈물로 호소를 하자.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딸들을 평화로운 가정에 남겨달라고!》

정신옥은 이렇게 쓴 글에 《내 나라 녀인들의 눈물의 호소》라는 제목을 달아서 어느 신문사에 기고했다. 물론 발표될수 없었다. 정신옥은 그 사건으로 검거되여 재판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그는 발표되지 못한 글을 의분의 눈물로 옮겨보며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여러해의 징역형이 언도된 재판정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던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 말씀하시였다.

《정선생은 일제의 폭압밑에서도 우리 나라 어머니와 안해들의 심정을 과감히 대변했습니다. 그런데 해방된 오늘에 와서 녀맹사업을 못하실게 뭐가 있습니까?》

《미력하나마 남은 여생을 새 조국건설에 깡그리 바칠 생각입니다. 녀맹사업에도 계속 몸을 잠그겠습니다. 헌데 위원장을 대신해서 일을 하기에는 힘이 너무도 부칩니다. 재삼 소청을 드리지만 김녀사께서 위원장직을 맡아주십시오.》

《그렇게 믿어주시는건 고맙습니다만 절대로 그럴수 없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여전히 웃으시는 낯색이였지만 목소리에는 결연한 음조가 울리였다.

《큰 기대를 안고 모처럼 찾아왔는데 내가 헛걸음을 했군요.》

정신옥의 얼굴에 실망의 그늘이 짙게 덮이였다. 눈귀와 입귀의 잔주름이 뚜렷이 드러났다.

《정선생,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한순간의 침묵끝에 김정숙동지께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외면을 했던 정신옥이 시선을 돌렸다.

《저도 이 나라 녀성의 한사람인것만큼 중앙녀맹사업에 무심할수가 없습니다. 이미전부터 중앙녀맹에 찾아가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앞으로는 종종 들려서 정선생의 가르침도 받고 또 제 소견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되지 않을가요?》

정신옥의 얼굴이 저으기 밝아졌다. 그쯤이라도 뜻을 이루었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듯싶었다.

《종종 찾아와준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그는 가져온 자그마한 자루를 탁자우에 올려놓았다.

《내 오늘 걸음에 또 한가지 소청이 있는데 그것만은 꼭 들어주셔야 하겠습니다.》

미리 다짐을 놓는 잡도리가 두번째 소청 역시 간절한 심정인듯싶었다.

녀사께서는 긴장감을 느끼며 물으시였다.

《또 무슨 소청입니까?》

정신옥은 팽팽한 자루를 쓸어보며 대답했다.

《이게 메밀가루입니다. 이걸로 국수를 눌러 장군님께 대접해주세요. 듣자니 장군님께서 메밀국수를 무척 좋아하신다더군요.》

《어데서 그런 얘길 들었습니까?》

《강량욱선생한테서 들었습니다. 장군님을 칠골에 모셨을 때 메밀국수를 대접해드렸는데 그리 달게 잡수셨다더군요. 나도 장군님을 집에 청해서 한번 메밀국수를 대접해드리고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바쁘신 장군님께 어찌 그런 무엄스러운 소청을 드릴수 있겠습니까. 나는 워낙 음식솜씨도 서툴고… 그래 김녀사가 이 늙은이의 심정을 헤아려서 이 메밀가루로 국수를 눌러 장군님께 드려주세요.》

《고맙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메밀가루를 받으시였다. 정신옥은 커다란 소망을 이룬듯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만경대와 칠골의 청년들에게서 들으셨던바와는 전혀 다른 정신옥을 보는듯 하시였다. 불현듯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머리를 돌리시였다.

《듣자니 정선생은 아들딸들을 군대에 내보내서는 안된다는 강연을 녀맹원들에게 하셨다더군요.》

이렇게 운을 떼고 미소어린 시선으로 조심히 그의 얼굴을 살피시였다.

정신옥은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이 응대했다.

《그런 강연을 여러곳에서 했습니다. 지금 공산당과 민주당에서 저마끔 무장대를 조직합니다. 그러다보니 가슴아픈 페단이 벌어지고있습니다. 언젠가 직접 목격한바이지만 평양역앞에서 두 파의 무장대가 맞붙어서 싸운 일이 있습니다. 여차했으면 류혈참극이 벌어질번 했지요. 보고만 있을수가 없어서 내 복판에 나서며 부르짖었습니다.

모두가 한마음한뜻으로 새 조선건설에 떨쳐나서야 할 이 시국에 동족끼리 총부리를 맞대니 이처럼 부끄럽고 미련스러운 일이 어데 있느냐고 했습니다.

들려오는 소문에는 남조선에서도 여러 갈래의 군대가 조직된다고 합니다. 김구나 리승만과 같은 사람들은 말할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군사학교를 내왔다고 합니다. 서로 정치리념이 다른 사람들이 총을 잡으면 동족상쟁이 불가피하지요. 태평양전쟁에 끌려가서 이 나라 청년들이 무수히 죽은것만도 그 한이 구천에 사무치는데 동족상쟁으로 죽어간다면 그처럼 가슴아픈 일이 또 어데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 강연을 했던것입니다.》

정신옥은 자기의 강연에 자부심을 느끼며 싱긋이 웃었다. 그 웃음속에 자기딴의 견해를 완강히 지켜가려는 의지가 비껴있었다.

《정선생은 단신으로 왜놈군경들의 무장을 해제한 일이 있다던데 그 무기는 어떻게 처리되였습니까?》

《그 소문도 들으셨군요.》

정신옥은 긍지로운 감회를 얼굴에 떠올리며 선선한 어조로 계속했다.

《고당 조만식선생이 불러서 그 총을 바치라고 하더군요. 나는 지난날부터 그와 잘 아는 사이였지만 그 요구만은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민주당에서 이미 잡고있는 총도 놓는것이 좋겠다고 권고했습니다. 돌아가는 형편을 보니 왜놈군경들한테서 빼앗은 총을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더군요. 젊은이들을 시켜서 없애버리도록 하였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차탁에 시선을 떨구며 일순 침묵하시였다. 정신옥에게 정규무력건설의 불가피성을 어떻게 설득시킬수 있을가? 지금 당장으로는 그에게 그 어떤 론리도 통할상싶지 않았다. 첨예한 론쟁으로 모처럼 선의의 감정을 안고 찾아온 그의 기분을 흐리게 할수도 없었다. 적당한 기회를 빌어 그를 깨우쳐주리라 생각하시였다.

손목시계를 보던 정신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돌아가보겠습니다. 재삼 말씀드리지만 종종 중앙녀맹에 나와주십시오.》

김정숙동지께서는 마당끝까지 따라서며 그를 따뜻이 바래워주시였다.

 

련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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