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제 1 장

4

 

김정숙동지께서는 홍구를 데리고 저택을 나서시였다.

대소한 무렵치고는 온화한 날씨였다. 련사흘 몰아치던 찬바람이 오늘은 고요히 잠들었다. 쌀쌀하고 투명한 대기속으로 해빛이 내려비쳤다. 피부에 닿는 해빛은 따스한 촉감조차 주었다. 어디에나 깔린 흰눈이 눈이 부시도록 해빛을 반사했다.

《홍구동무, 글을 배워야겠어요.》

나란히 걷고있는 홍구에게 말씀하시였다. 그동안 양력설이 끼우고 바쁜 일이 제기되여서 홍구의 학습에 관심을 돌리실 겨률이 없었다.

《제가 말입니까?》

홍구는 놀라서 반문했다. 글을 배운다는것을 자기로서는 너무도 푼수에 어울리지 않는 일처럼 생각하고있었다.

《글을 모르면 눈뜬 소경이예요. 글을 알아야 책이나 신문을 보고 세상리치를 깨달을수 있는거예요.》

홍구는 일순 푸르게 열린 공간을 아득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때는 까막눈의 신세가 한스럽기도 합니다. 일전에 설공급물자를 타러 갔다가 망신을 당한 일을 생각하면…》

녀사께서도 그 일을 알고계셨다. 공급물자를 준 사람은 홍구더러 해당한 명세서에 수표를 하라고 했다. 난생 수표를 하여본 일이 없는 홍구는 말뜻조차 몰랐다. 어정쩡히 서있는 홍구를 지켜보던 상대는 이름을 쓰라고 깨우쳤다. 당황한 홍구는 용서라도 빌듯이 고개를 숙이며 실토했다.

《저는 글을 모릅니다.》

《그래 제 이름 석자도 쓸줄 모른단 말이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부끄러웠던 홍구는 얼굴을 붉히며 침묵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보통 제이름자만은 알고있는것이다. 하지만 스물세살의 나이에 이를 때까지 홍구는 이름석자도 쓸줄 몰랐다.

딱한 표정을 짓고 바라보던 상대는 하는수없이 수표란에 동그라미를 그리라고 했다. 주위사람들이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엇갈린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홍구는 땀을 흘리며 그것을 그리였다. 글자라고 써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였다.

《그런 일이 다시 반복되여서는 안돼요. 홍구동무도 나라의 어엿한 주인이예요. 주인구실을 하자면 무엇보다 글부터 배워야 합니다.》

《저같은게 무슨 나라의 주인이겠습니까?》

홍구는 나라의 주인이라는 말이 너무도 어마어마하게 안겨오는듯 커다란 눈을 휘둥그래 떴다.

녀사께서는 측은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지켜보시였다. 지지리 짓밟혀서 자기 비하의 의식에 멍들어버린 그의 가슴에 떳떳한 존엄이 자리잡기에는 일정한 시일이 걸려야 할것이다.

어느새 장마당에 이르시였다. 홍구에게 주실 학습장과 연필을 사려고 떠나신 걸음이였다. 장마당은 혼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사방에서 자기의 상품을 광고하며 웨쳐대는 장사군들의 멋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걸음을 옮기기 어렵게 사람들이 붐비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포목점을 에돌아 문방구점앞에서 걸음을 멈추시고 학습장과 연필값을 물으시였다.

《해방을 맞아서 자식들에게 글공부를 시키시려는분들에게 한껏 눅게 드립니다.》

매장에 앉은 중년남자는 우선 한마디 억양을 돋구어 너스레를 앞세우고야 값을 불렀다. 한데 눅기는커녕 연필값은 엄청나게 비쌌다.

《아니, 그렇게 비쌉니까?》

《하, 부인님. 모르시는 말씀. 눅은편이올시다. 해방이 된 후로 글을 배우겠다고 너도나도 떨쳐나서지만 연필 한자루 생산하는 공장이 아직은 없지요. 그러니 연필은 부르는게 값일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나는 본전에 품삯이나 얹어서 팔아드립니다.》

녀사께서는 장사군의 엉너리에서 하나의 진실을 보시였다. 향학열은 화산처럼 폭발하지만 연필이 문제였다. 이 실태를 장군님께 말씀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외투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시였다.

떠나오실 때에는 학습장 5권, 연필 5자루정도 사리라고 작정을 하셨지만 돈이 모자랐다. 하는수없이 학습장 4권에 연필 2자루를 사서 홍구에게 주시였다.

《오늘부터 이걸 가지고 글공부를 하자요.》

홍구는 선뜻 받지 못했다.

《왜 그래요?… 어서 받아요.》

《녀사님, 배우고싶은 마음이 노상 없지는 않지만 제 나이에 코흘리개들과 같이 어떻게 학교에 다니겠습니까?》

《글은 학교에서만 배우는게 아니예요. 집에서도 배울수 있지 않나요.》

《어데서든 배워주는 선생이 있어야겠는데 우리 집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녀사께서는 비로소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있는지를 아시였다.

《내가 배워주겠어요.》

《녀사님께서요?!》

홍구의 눈에 빛이 가해졌다. 그것은 인생의 스승을 만난 기쁨이였다. 스승은 누구에게나 전생애에 영향을 미친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것처럼 인생전환의 중요한 계기는 드문것이다. 홍구의 생각은 물론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다만 녀사께서는 모른다고 자기를 탓하지도 않고 친절히 배워주시리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불시로 배우고싶은 욕망이 북받쳤을뿐이다. 그는 두손으로 정히 학습장과 연필을 받았다. 그리고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지나온 자기의 생활과는 너무도 인연이 없었던 학습장과 연필이였다. 그것이 자기 손에 쥐여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랍고 황송했다. 이윽고 시선을 들어 녀사를 우러러보았으나 고마운 심정을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자, 돌아가자요.》

녀사께서 말씀하셨다.

홍구는 그이를 따르면서 양복주머니에 학습장과 연필을 넣었다. 지금 입고있는 무명양복도 녀사께서 설빔으로 사주신것이였다.

장마당을 벗어나 큰길에 나섰을 때였다.

《너 홍구 아니냐?》

등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홍구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녀사께서도 돌아보셨다. 락타직외투에 단장을 짚은 장년의 사나이가 안경알을 번뜩이며 이쪽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를 알아본 홍구는 잘못을 저지르고 덜미를 잡힌 사람처럼 대바람에 기가 질렸다.

《네놈이 옳기는 옳구나.》

사나이는 몇걸음 다가서더니 홍구에게 따져물었다.

《빚을 갚지 못한채 일가식솔이 야밤도주를 하더니 어디 가서 살다가 이렇게 나타났느냐?》

홍구는 고개를 짓숙이고 침묵했다.

《너의 어미와 형놈은 지금 어데 있느냐?》

《형은 세해전에 돌아가고 어머니는 지금 저와 함께 삽니다.》

홍구는 여전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대답했다.

《네 어미가 살아있다니 다행이다. 네 어미는 도망칠 때 나한테 채 갚지 못한 빚액수가 얼마인지를 알고있을테니까. 너의 집을 차압할 때 내가 후하게 50원 각수로 금사를 때렸는데 정작 후에 팔아서 건진 돈은 40원밖에 안되였다. 발길로 차도 무너질 오막살이였으니까 그럴수밖에. 그러나 그 차액은 셈에 넣지 않겠다. 집값을 제하고 물지 못했던 돈만은 받아야겠다. 돌아가면 어미한테 그리 일러라, 알았느냐?》

《주사나으리, 지금 우리에겐 돈이 없습니다. 널리 생각해주십시오.》

홍구는 배허벅에 합장을 하고 허리를 굽히였다.

사나이는 그의 형색을 유심히 살피며 뇌까렸다.

《신수가 멀끔해졌는걸. 보아하니 팔자를 고친것 같은데 그만한 돈이 없을리 없다. 딴생각말고 불원간 빚을 갚도록 해라.》

《해방전 일인데 널리 생각해주십시오.》

《해방전 일이라.》

말마디를 되받아 외우는 사나이의 표정이 사나와졌다. 동시에 목소리도 거칠어졌다.

《이놈, 무슨 개수작이냐. 해방이 되였다고 남의 돈을 떼먹을 작정이냐. 해방바람이 네놈의 배속에 가득찼구나.》

사나이는 단장으로 홍구의 아래배를 내질렀다. 흠칫 물러서며 홍구는 다시금 머리를 조아렸다.

《해방바람이 아니라 사정이 딱해서 하는 말입니다. 후에 제가 벌어서 갚아드릴테니 지금은 사정 좀 봐주시우.》

곁에 서계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사나이의 무례한 행동에 의분이 끓어오르셨다. 그보다 더 참기 어려우신것은 홍구의 비굴한 처사였다. 설사 빚을 졌다 하더라도 해방된 오늘에조차 어쩌면 저렇게 굴욕적일수가 있을가. 홍구의 틀진 체구에 비해 사나이는 체소한편이였다. 홍구의 드센 주먹이면 사나이를 단매에 거꾸러뜨릴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굴욕의 의식에 지배되는 주먹은 무맥했다. 홍구가 다시 빌붙으려는 자세를 보이자 더는 참지 못하시였다.

《홍구동무!》

격하게 소리쳐 부르시였다.

홍구가 피끗 녀사께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구원을 청하는 애원이 흘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한걸음 사나이앞으로 다가서시였다.

《방금 오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슨 사연인지 짐작됩니다. 나는 이미 이 청년이 집을 차압당하고 살길을 찾아 만주로 가게 된 기막힌 과거의 이야기를 들었던바가 있습니다. 바로 당신같은 사람때문에 이 동무네는 눈물겨운 방랑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어요. 그런데 해방된 오늘에 와서도 채 갚지 못한 빚을 내라고 하니 이게 도무지 분별이 있는 처사입니까? 명백히 알아두세요. 돈이 있다고 거들먹거리던자들의 세상은 끝장났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박정하게 오막살이집마저 빼앗던 지난날을 두고 당신은 이 청년한테 용서를 빌어야 해요. 그런데 오히려 길가에서 여러해만에 만난 젊은이에게 참을수 없는 모욕을 퍼붓고있으니 이런 무분별이 어데 있어요? 이 청년일가가 진 빚을 갚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는 조만간에 서게 될 정권기관이 법적으로 판결할것입니다.》

사나이는 안경알을 헤번뜩거리며 어리둥절했다. 녀사의 정연한 론리와 비범하신 기품에 기가 눌리웠다.

《부인은 도대체 누구시오?》

《해방된 이 나라의 녀인입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서리찬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시였다. 사나이는 녀사에게 더는 말을 붙이기가 어려운듯 홍구의 팔소매를 당기며 나직이 물었다.

《누구신가?》

방금전과는 달리 공손한 어조였다. 키가 큰 홍구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눈빛도 공손했다. 비로소 용기를 얻은 홍구는 사나이를 굽어보며 명백히 대답했다.

《빨찌산의 녀장군 김정숙녀사이십니다.》

사나이는 숨을 훅 들이그으며 굳어졌다. 몸둘바를 몰라하더니 녀사께 꾸벅 허리를 굽혀보이고 황황히 달아나버리였다.

그 자리를 떠나신 김정숙동지께서는 홍구에게 준절히 말씀하시였다.

《이자 그 사람앞에서 그렇게도 못나게 구는 동무를 보았을 때 나는 가슴이 찢기는듯 괴로웠어요. 자신이 모욕을 당하는것보다 더 참기 어려웠단말이예요. 왜 당당하게 처신을 못하나요?!》

머리를 짓숙이며 걸음을 옮기던 홍구는 어눌하게 응대했다.

《빚진 종이 아닙니까.》

그 대답이 녀사의 의분을 참을수없이 폭발시켰다. 마음같아서는 정신이 들라고 홍구의 두팔굽을 부여잡고 마구 흔들고싶으시였다. 그럴수도 없는 안타까움으로 불쑥 눈물이 솟았다.

《동무는 종이 아니라 주인이예요. 나라의 주인! 동무와 같이 짓눌리여 살아온 사람들이 버젓이 고개를 들고 살수 있는 새세상을 가져오기 위해서 항일선렬들이 오랜 세월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어요. 동무가 주인의 존엄을 지키지 못하고 여전히 그렇게 주눅이 들어한다면 선렬들의 투쟁과 희생을 모독하는것으로 된단 말이예요! 알겠어요?》

《녀사님!》

목메여 부르며 홍구는 고개를 들었다. 녀사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자 예리한 충격을 받은듯 입귀를 떨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다는 알지 못했지만 자기를 두고 얼마나 안타깝고 괴로우면 저러시랴 하는 생각만은 저릿저릿하게 가슴에 마쳐왔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제가 사람구실을 못하니 녀사님께서…》

홍구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눈물을 씻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더는 말씀이 없이 걸으시였다. 심중에서 세차게 고패치던 격정이 점차 숙어들었다.

《아까 그 사람은 누군가요?》

조용히 물으시였다. 홍구와 얽혀진 과거는 짐작하셨지만 사나이의 래력은 모르고계셨다. 어느새 마음은 진정되셨으나 야밀거리기도 하고 호통을 뽑기도 하던 사나이의 모습은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기양호라는 사람인데 진남포에서 선주노릇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만주에서 나와서 진남포로 가지 못하고 평양에 주저앉은것은 그 사람을 만나는것이 두려웠기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수사납게 우연히…》

홍구는 그 무엇을 한탄하듯 한숨을 쉬였다.

《더는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동무를 두려워하게 떳떳히 처신을 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홍구는 푸른 하늘의 한끝을 멀리 쳐다보며 아래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택에 돌아오신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의 학습장들에 이름을 써주시였다.

《김홍구》.

이름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그의 존재와 인격의 총체를 상징한다. 그가 하루빨리 계급적자각과 인간적존엄을 지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글자의 획마다에 힘을 주시였다.

홍구는 평생 처음 보는 자기의 이름자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글자마다가 튀여나와 소중히 품에 안기며 가슴을 애타게 두드리는듯 한 환각을 느꼈다.

 

련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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