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112(2023)년 제1호에 실린 글
동화
황철나무 꽃바구니
박원남
(제 1 회)
어느 산기슭개울가에 넓다란 나무그루터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이들 네댓명은 넉근히 앉을자리가 되는 그런 그루터기였지요. 그러니 나무시절엔 어지간히 큰 나무였다는것이 척 보매 제꺽 알렸답니다.
(그땐 나도 남들처럼 멋있었지. 떠가는 구름도 잡을 정도였으니까, 허허…)
황철나무그루터기는 오늘도 나무시절을 그려보았습니다. 나무시절 집기둥이며 대들보로 쓰겠다는데가 많았지만 아이들을 위한 종이원료가 된 그는 지금 학교로 오가는 아이들이 교과서를 펼쳐들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것이 유일한 락이였습니다.
(난 이 땅의 기둥감이 될 아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했어. 암, 그렇구말구.)
황철나무그루터기는 흘러가는 구름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나도 이제부턴 저 구름처럼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
지금까지 훌륭한 목재감이 되기 위해 아글타글 애써오던 그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살고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황철나무그루터기가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있는데 길가에서 오구작작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소리는 점점 가까와졌습니다.
그루터기는 웬일인가 하여 그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처녀애들이 길옆에 무엇인가 심고있었습니다.
《꽃순아, 밑거름이 작은것 같애. 조금씩 더 놔.》
《알겠어.》
꽃순이라는 애가 밑거름을 더 놓자 다른 애가 그뒤로 가면서 꽃씨를 뿌렸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애가 그뒤에서 발로 꽁꽁 묻어주었습니다.
《영미야, 이 꽃씨가 백일홍이라고 했지?》
《응, 백날동안 꽃이 피여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래.》
처녀애들은 이렇게 속살거리며 꽃씨를 다 심었습니다.
그들이 사라지자 그루터기는 생각했습니다.
(백일홍이라고 했지? 백날동안 꽃이 핀다지?!)
황철나무그루터기는 꽃씨를 심은 꽃밭을 그냥그냥 바라보았습니다.
며칠 지나 꽃밭에 심은 꽃씨앗에서는 파란 싹이 뾰족뾰족 돋아났습니다. 그러더니 하루가 다르게 쏙쏙 커졌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황철나무그루터기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였습니다.
(가만가만, 나에게도 저 백일홍을 자래울 힘이 있지 않을가?)
황철나무그루터기는 속으로 생각을 굴리고 또 굴려보았습니다. 노력하면 될상싶었습니다.
(그래그래, 노력하는자에게는 막혔던 길도 열린다고 했어.)
황철나무그루터기는 신심이 생겼습니다.
때마침 목화송이처럼 뭉게뭉게 피여난 송이구름이 그우를 지나가고있었습니다.
《송이구름아, 송이구름아, 날 좀 도와주렴.》
동동 떠가던 송이구름이 그 소리를 듣고 아래를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누가 날 찾았을가?》
《나야, 나.》
황철나무그루터기가 이렇게 다시 소리쳐서야 송이구름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왜 그러나요, 황철나무그루터기아저씨?》
《나에게 비를 내려주렴.》
《갑자기 비는 왜요?》
송이구름이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가물철도 아니여서 숲속에는 습기가 많았던것입니다.
《나한테 소박한 소원이 있어서 그래.》
이렇게 말하고 잠시동안을 두었던 황철나무그루터기는 백일홍을 키우려는 자기의 소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랬댔군요. 그런데 난 당장 비로 될수 없어요. 내 얼른 가서 비구름에게 말하겠어요. 꼭 도와줄거예요.》
《그럴가?》
《그럼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렇게 말한 송이구름은 동동 떠갔습니다.
이때 옆에 서서 여직껏 침묵을 지키고있던 느티나무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 지금 제정신이요?》
《자넨 웬 참견인가?》
황철나무그루터기는 느티나무의 물음에 마뜩지 않게 되물었습니다.
《옆에서 보다못해 너무 어이가 없어 하는 말이요. 제발 그런 우둔한 놀음은 그만두시우. 이제 그러지 않은들 누가 탓하겠어요?》
느티나무는 어이없다는듯 가지를 솨솨 흔들며 말했습니다.
《그루터기가 되였다고 마음까지 다됐겠나? 마지막까지 이 땅을 위해 무엇인가 보태고싶을따름이야.》
황철나무그루터기는 생각깊은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 마음은 우리가 다 알아요. 그러니 옆에서 보기 딱하게 그러지 말고 좀 편히 쉬시우.》
느티나무가 이렇게 핀잔을 주는데 이번엔 반대쪽에 서있던 버드나무가 끼여들었습니다.
《느티나무의 말이 백번 옳아요. 황철나무아저씨는 할만큼 다 했으니 이젠 애를 박박태우며 그럴 필요가 없어요.》
《가만, 내 일은 내가 알아 하겠으니 자네들은 그냥 자기 일이나 하게.》
그루박듯하는 황철나무그루터기의 말에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는 더 말을 못하고말았습니다. 황철나무그루터기는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드디여 기다리고기다리던 비구름이 몰려왔습니다. 비구름은 황철나무그루터기가 있는 곳에 날아오더니 대줄기같은 비를 쏟아부었습니다.
황철나무그루터기는 비를 흠뻑 맞았습니다. 있는 힘껏 몸에 비물을 가득 채워넣었습니다.
《비구름아, 이젠 그만하렴.》
《황철나무그루터기아저씨, 그 정도면 되겠나요?》
《그래그래, 이거면 되겠다.》
《송이구름한테서 아저씨가 품은 소원을 다 들었어요. 부디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래요.》
《정말 고맙다!》
비구름은 멀리로 가버렸습니다.
비를 맞은 황철나무그루터기는 며칠이 지나자 부석부석해졌습니다.
(이젠 어떻게 한다?)
황철나무그루터기는 신통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궁싯거리였습니다.
이때 옆에서 붕- 붕-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꿀벌인가 하여 보니 꿀벌이 아니라 벌새였습니다. 풀색이며 밤색, 보라색이 섞인 윤기도는 아름다운 깃을 가진 벌새가 백일홍이 주는 꽃즙을 가늘고 긴 부리로 빨아먹고있었습니다. 백일홍이 어느새 꽃을 피웠던것입니다.
벌새를 보는 순간 황철나무그루터기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벌새야- 벌새야-》
꽃즙을 빨아먹던 벌새가 긴 부리를 뽑고 물었습니다.
《날 찾았나요?》
《응, 그래. 벌새야, 날 좀 도와주렴.》
《아이, 나무그루터기가 굉장히 크기도 하네. 내가 뭘 도와줘야 하나요?》
벌새는 붕붕거리며 황철나무그루터기의 가녁에 와앉았습니다.
황철나무그루터기는 자기의 소원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위해 자기가 지금 하려는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니 큰 바구니처럼 만들어야겠군요.》
《옳아. 그렇게만 해준다면 백일홍을 키우는건 문제없을것 같애.》
《어디 한번 해보자요.》
벌새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황철나무그루터기에 부리를 가져다 댔습니다. 그런데 부리가 가늘고 길다보니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내 부리론 안되겠어요.》
벌새는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디론가 포르릉 날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