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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청년문학》 주체98(2009)년 제7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박영건, 그림 량수일
관서8경의 절경중의 하나인 평양의 련광정. 평양8경의 하나인 을밀상춘, 을밀대에서 바라보는 모란봉의 봄경치는 절경중의 절경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임진년의 그 봄절경은 이 땅에 몰아쳐온 전란의 살풍속에 소리도 없이 스러져버리고 벌써 7월말에 접어들었다. 룡악산의 뫼부리에 걸터앉아 삼복의 뜨거운 열기를 내뿜던 저녁해도 그만 시진해버렸는지 산너머로 굴러내리고 사그라져가는 석양의 잔광속에 웅크리고앉은 커다란 그 무엇처럼 되고말았다. 고구려때 장대터였던 이곳에 고려시기에 와서 평양성을 보수하면서 다시 루정을 세울 때는 《산수정》이라 하였는데 전망경치가 하도 좋아 《제일루대》, 《만화루》라고도 불리웠다. 그후 이 루정은 《련광정》으로 불리웠다. 이 정각의 들보에는 《천하제일강산》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현판은 언젠가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이라는 명나라사람이 평양성의 경치에 감탄하여 남긴 현판이였는데 한때는 《천하》이라는 글자가 없어지고 《제일강산》이라는 글자만 현판에 새겨져있었다. 푸른이끼 덧쌓이는 세월의 풍상과 더불어 평양성사람들이 련광정의 자랑으로 소중히 간직해온 현판을 란도질했던 놈은 과연 어느 놈이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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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날은 도랑치마에 다홍색적삼을 받쳐입은 순섬이는 이마의 땀방울을 훔칠새도 없이 음식들을 련광정의 다락우로 나르고있었다. 다락안은 자못 소란스러웠다. 체소한 몸집을 꼿꼿이 편채 다락의 웃자리에 오만방자하게 앉아있는 고니시 유끼나가(소서행장)놈이 큰 쇠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좌중을 둘러보는데 여느놈의 곱이나 되는 큰 몸집에 길다란 왜검을 깔고앉은 선봉장놈은 우직스런 성미그대로 동이채로 술을 들이키고 상판전체가 온통 털투성이인 어떤 놈은 알지도 못할 왜노래를 탁성으로 뽑고 동공이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빛으로 정각부연의 모루단청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놈… 다락의 좌석중에서 유표한것은 흰 소복차림의 계월향과 명주두루마기에 통영갓을 쓴 최향리였다. 평양감영에서 향리노릇을 하던 량반이였는데 중화고을의 4촌동생의 집에 피신해있다가 소금을 략탈하러 나갔던 선봉장놈에게 잡혀 끌려왔다고 한다. 순섬이는 다락안에 올라설적마다 꼭 귀신방에 드는것 같아 머리칼이 쭈볏이 일어서군 하였다.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철갑옷들과 괴상한 뿔이 내돋힌 검붉은 투구. 계월향의 시녀인 순섬이는 원래 평양성밖 검포(력포)의 룡산에 있는 왕릉지기의 외동딸이였다. 고구려때 어느 한 장수가 적장의 목을 베고 피묻은 장검을 무진천내가에 씻었다는 검포의 룡산어귀 산당집에서 일찍 어머니를 잃은 순섬이가 홀아버지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냈다. 보이는건 산이요, 들리는건 새울음소리뿐이였으나 외태머리를 짧게 꽁진 순섬이는 릉마당풀판을 좁다하게 뛰여다니던 철부지소녀였다. 여름에는 솔꽃가루날리는 릉안팎 숲속에서 갖가지 풀과 고운 꽃을 뜯어 크고작은 사금파리에 담아 기단돌우에 제상을 차리기도 하였고 겨울에는 아버지를 도와 릉주변의 강산같은 눈을 쳐내느라 역사질을 하였다. 다만 함께 놀 같은또래의 아이가 없는것이 아쉬웠으나 그래도 좋았다. 증조할아버지때부터 대대로 왕릉지기를 물려받았다는 아버지는 사철 왕릉을 떠나본적이 별로 없었다. 아마 순섬이가 열살나던 해였던지. 그때 아버지는 관가에서 령이 떨어져 무진천제방공사에 열흘말미로 부역에 나간적이 있었다. 나어린 순섬이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릉지기로 나온 공첨지와 함께 산당집에 있었다. 그런데 나흘째되는 아침 잠에서 깨여보니 릉의 한쪽 모퉁이에 파헤친 흔적이 있었다. 부역에서 돌아오자바람으로 릉을 돌아보던 아버지는 그 구뎅이를 유심히 살펴보고나서 얼굴빛이 침통하게 흐려져 어린 순섬이를 불러앉혔다. 《휴― 어느 놈이 내가 부역에 나간 틈에 왕릉에 손을 댔구나.》순섬이는 아버지가 왕릉의 기와 하나, 돌 하나는 물론 주변의 꽃과 나무들을 누가 다칠세라 애지중지하는것을 보아왔었다. 《아무래도 평양감영의 최향리놈이 한짓이 분명하다만 이제 어디에 상소하겠느냐. 그놈이 전에도 여기에 나타나 이것저것 묻더니만… 어찌겠느냐, 이 아비는 평양성의 백성으로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릉을 잘 모시지 못했으니 원통하지만 참형을 면치 못할것인즉 어린 너만은… 래일 황주 이모네 집에 몸을 피해야겠다.》 다음날 이른새벽에 들이닥친 관가의 포졸들에게 묶이워 끌려갔던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순섬이는 평양감영의 관비로 되였다. 이렇게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어린 순섬이는 힘겹고 고달픈 관비생활의 짬마다 자기의 어린시절 꿈이 깃든 룡산의 왕릉을 홀로 추억하군 하였다. 그때면 늘 외우던 《잊지 말아라! 이 동명왕릉은 천년강국 고구려의 넋이 잠든 신성한 령지이니라.》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귀전을 두드리군 하였다. 세월의 흐름속에 지긋지긋한 종살이로 채 피지 못한 꽃망울마냥 시들어가던 순섬이는 전전해 봄날에 월향이가 불쌍하다고 데려와 함께 지내고있었다.… 순섬이가 지옥같은 다락안을 빠져나와 정각의 돌계단을 내려서는데 땅딸보 화식병졸이 그에게 손가락질을 까딱까딱 해보였다. 《오이, 나무나 떨어졌다. 빨리…》 순섬은 대동강기슭으로 뻗어내린 오솔길을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들었다. 한 둬발자국 옮기던 순섬이는 웬 인기척에 놀라 소리난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잔뜩 술에 취한 왜놈 하나가 애된 솔가지를 잡고 꿇어앉은채 배속의것을 쏟아놓고있는중이였다. 한참이나 태질하던 그놈이 일어서더니 순섬이의 앞으로 다가온다. 앞대가리를 박박 밀어서 잔뜩 쳐올려놓았던 왜상투는 다 풀어져 너풀거리고 웃적삼은 헤쳐져 그안의 털가슴이 달빛에도 완연한게 꿈속에서도 본적 없는 괴물이였다. 《오이― 헤…》 허리에 매여달린 긴 왜검을 추슬러올리며 그놈은 미친놈처럼 헤식은 웃음을 지은채 무작정 두팔을 벌리고 다가들었다. 《아니?…》 원래 담기가 있는 순섬이였으나 너무 급작스레 부닥친 일이여서 숨이 꺽 막히고 입안이 말라들었다. 순섬이는 뒤걸음치다 소나무에 붙은채 서리발같은 눈빛으로 그놈을 쏘아보았다. 한발자국, 두발자국… 순섬이는 치마언저리를 더듬어 단검을 거머쥐였다. 왜놈들이 평양성에 들어온 날부터 간직하고 다니던 단검이였다. 여차직하면 단검을 뽑아들고 사생결단을 하려는 순간 대동강아래쪽 오솔길에서 물지게를 멘 총각이 불쑥 나타났다. 《덕쇠!》 순섬이는 창황중에도 무등 반가와 힘껏 소리쳤다. 덕쇠는 물초롱을 벗어놓고 급히 달려와 작대기를 추켜들고 순섬이의 앞을 막아나섰다. 《이놈이 미쳤어?》 《뭔가? 죽여버릴테다.》 그놈은 왜검을 쭉 뽑아들더니 덕쇠를 노려보며 한발자국한발자국 다가들었다. 달빛에 번득거리는 검날에서는 살기가 풍겨나와 숨막힐듯 한 대기를 얼구어버렸다. 이때였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계월향이 그들사이로 불쑥 나서며 낮으나 야멸찬 어조로 쏘아붙였다. 《평양성의 계월향이다. 웬 칼부림이냐?》 백옥같은 얼굴빛, 오똑한 코마루, 서늘한 랭기를 풍기는 월향의 눈빛앞에서 당혹한듯 왜놈은 검을 슬며시 내리며 비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 선봉장님의… 실례…》 그놈은 역한 술내가 섞인 황소숨을 씩씩거리며 한참이나 덕쇠와 순섬이를 노려보다가 정각쪽으로 갈지자걸음을 옮겼다. 순섬이는 온몸의 힘이 땅속으로 다 빠져나간듯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흐흑… 옥개아씨처럼 단검을 목에 박았더라면…) 월향의 동무였던 옥개는 왜놈들이 평양성에 들어오던 날 왜장놈의 수청을 거절하고 단검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 《조선녀성들은 왜놈들의 노리개가 아니다!》 하얀 저고리앞섶까지 붉게 물들이며 흘러내리던 뜨거운 선혈, 채 감지 못한 두눈으로 저녁노을에 붉게 타던 련광정의 합각지붕을 꺼져가는 망막속에 영원히 새겨두려는듯 오래도록 바라보던 그 눈빛… (아! 이럴바엔 차라리…) 굴욕감과 수치감에 몸을 떨던 순섬이의 두눈에서 눈물이 번득이고 비장한 광채가 언듯 스쳐지났다. 《어쩌자는거야?》 덕쇠가 다급하게 단검을 뽑아든 순섬이의 손목을 집게같은 손으로 거머쥐더니 앞으로 나꾸어챘다. 《놔요!》 순섬이는 오열을 터뜨리며 몸부림쳤다. 《섬아! 이 무슨 추태냐? 검을 거두지 못하겠니?》 《아씨!》 《어서 눈물을 거둬라.》 《저 짐승같은 왜놈들을 어쩌면 좋아요?》 순섬이는 월향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덕쇠는 아무 말도 못하고 오열에 몸을 떠는 순섬이를 한참 여겨보다가 다시 물지게를 지고 정각쪽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섬아, 어서 눈물을 거둬. 평양성녀인들의 눈물이 그렇게 값눅은게 아니다.》 언제봐야 말에 앞서 눈빛으로 의사를 대신하던 아씨였으나 이즈음에 와선 더욱 말이 적어 어떤 때에는 두려운 생각조차 들군 하던 순섬이였다. 평양성사람들의 적의에 찬 뭇 눈총을 받을 때면 말못하는 괴로움으로 수심어린 낯빛이 더욱 창백해지고 그처럼 도고하던 눈빛도 땅에 떨구고 마주보기 저어하던 아씨. 《섬아, 우린 다같이 평양성의 녀인들이야. 저 짐승같은 왜놈들앞에서 절대 약한 꼴을 보여선 안돼. 어서 눈물을 거두고 내 말을 명심해들어라.》 월향은 땅에 떨어진 단검을 순섬이의 손에 쥐여주며 주위를 살폈다. 《지금 우리 군사들이 평양성수복싸움을 준비하고있다. 그런데 왜놈들이 우리 군사들의 행동을 벌써 냄새맡았다. 최향리가 왜놈의 렴탐군이 되였구나. 이 일을 우리 군사들에게 빨리 알려야 할텐데 어쩌면 좋겠니?》 월향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아는 순섬이였으나 할말을 찾지 못하고 발치만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 이 일을 덕쇠와 잘 의논해보라고 부탁하던 월향앞에서 터놓을수 없는 괴로움으로 속이 타들었던것이다. (아이참, 무슨 사내가 그리도 용해빠졌담.) 어느날 대동강가에 물길러 나온 덕쇠를 붙들고 우리 군사들에게 급히 알려야 할 일이 생기면 도와줄수 있겠는가고 물었으나 덕쇠는 웬일인지 련광정쪽을 침울한 눈빛으로 한참 바라보기만 할뿐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만에야 꾹 다물었던 입을 열고 뜨직뜨직하게 《글쎄― 난 할일이 있어.》라고 하더니 물지게를 지고 휘청휘청 가버렸던것이다. 덕쇠는 어렸을 때부터 평양감영의 관노였다. 뼈도 채 굳기 전부터 물지게를 지고 대동강가를 오르내렸다. 아버지, 어머니도 모르고 이름도 그 누가 지어줬는지도 몰랐다. 그는 너무도 어리무던하고 말이 없어 같이 일하는 사람들조차 그가 있는지없는지 모를적이 많다고 하였다. 《아씨, 덕쇠를 만나 다시 잘 의논해보겠어요.》 월향이와 함께 련광정쪽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에 들어선 순섬이는 이렇게 말하며 덕쇠를 빨리 만나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순섬이는 덕쇠를 작년까지 알지 못했다. 그저 대동강가에 물지게를 지고 오르내리는것을 먼발치에서 몇번 보았을뿐이였다. 그런데 작년 추석을 앞둔 어느날 순섬이는 뜻밖의 일을 당하게 되였다. 그날은 새로 부임한 감사의 생일이였는데 련광정아래 대동강가에서 큰 잔치를 벌리게 되였다. 이미 감영의 연회장에서 한바탕 먹고 마신 후여서 량반들은 저저마다 기생을 끼고 배놀이로 흥을 돋구고있었다. 최향리가 월향에게 배놀이를 청했으나 평소부터 그놈을 밉게 보아오던 월향인지라 배멀미를 핑게로 거절하는 바람에 숱한 량반들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되였다. 《허― 최향리가 월향에게 코를 떼웠네그려.》 《월향이, 저 우거지상이 더 쭈그러들기 전에 배에 오르게나.》… 벼슬은 새끼손가락에 드는 말석아전이지만 성미가 괴벽스러워 감영의 노비들은 최향리만 보면 멀리 피해가군 하였다. 여느 량반들같으면 범상한 롱으로 넘기고말련만 최향리는 이를 갈면서 속을 썩였다. 마침 성격이 호방스러운 례방비장이 월향을 배놀이에 끌어들이는통에 일은 무난히 끝나는듯 했는데 최향리의 괴벽스러운 성미는 갓방 (갓을 만들거나 고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집)의 인두달듯 더 열을 내기 시작하였다. 월향에게 못한 앙갚음이 시녀에게 고스란히 떨어졌다. 대뜸에 돗자리를 펴라, 술을 쳐라, 갓신을 벗겨라… 불호령이 연방 떨어지는데 순섬이가 땀을 철철 흘리며 돌아갔으나 생억지스러운 그놈의 피박스러운 비위를 어찌 다 맞출수 있었으랴. 《이 고현년, 기생의 종년인 주제에… 량반의 령을 허술히 대하는 저 종년을 매우 쳐라!》 허공중에 짧은 원을 그리며 곤장이 떨어졌다. 누구 하나 걱정해주는이도 낯조차 돌리는 사람도 없었다. (아! 종의 신세란 이런것인가.) 매가 아파 울고 마음이 아파 울면서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아버지를 죽게 만든 원쑤놈! 이렇게 모진 마음을 먹으며 눈물을 쏟는데 웬일인지 문득 매질이 멈춰졌다. 간신히 눈을 떠보니 웬 총각이 엎드려 대신 곤장을 청하는것이 아닌가. 《넌 웬놈이냐?》 최향리가 입에 거품을 물고 펄펄 뛰였으나 총각은 멍석우에 그냥 엎드린채 《제가 대신…》 하고 고집스레 되뇌일뿐이였다. 《오냐, 네놈이 대신 맞겠다니 사정보지 말고 곤장 서른대를 쳐라!》 순섬에게 떨어지던 곤장이 대신 총각에게 떨어졌다. 처녀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세상을 원망할뿐이였다. 아! 세상에… 매질은 량반들이 배놀이를 끝내고 강기슭에 나왔을 때에야 끝났다. 간신히 멍석에서 일어선 총각은 옆에 벗어놓았던 지게를 어깨에 걸친채 비칠거리며 걸어갔다. 그날 저녁 월향과 함께 그가 거처하는 방을 찾아갔을 때 총각은 홑이불을 들쓴채 앓음소리를 내고있었다. 이마를 짚어보니 불덩이같았고 부어오른 상처는 보기에도 끔찍했다. (세상에 나를 위해주는 사람도 있다니…) 총각은 나흘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또다시 물지게를 지고 대동강가로 나갔다. 그때부터 순섬이의 가슴속깊은 곳에는 덕쇠라는 물지게군총각이 남모르게 자리잡게 되였고 그들은 대동강가에서 만나군 하였다. 총각은 찬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엔 두터운 얼음장을 까고 처녀의 빨래를 도와주었고 순섬이는 덕쇠의 곱아든 손에 누렁지라도 쥐여주군 하였다. 그런데 총각은 종일 가야 말몇마디 하는 법이 없었고 묻는 말에나 겨우 대답하는 정도였다. 순섬이의 앞에 서면 더욱 몸둘바를 몰라하며 순박한 큰 눈에 눈물이 글썽하여 이윽히 바라보다 말없이 돌아서군 하였다. 순섬이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하소연할 때면 눈빛을 번뜩이기도 하였다. 그것도 순간뿐. 그러나 참으로 이상스러운것은 그가 왜 우리 군사들을 돕는 일에 그처럼 나서기를 주저하는가 하는것이였다. (아이참, 좀 사내답게 굴었으면…) 순섬이는 정각으로 올라가는 월향의 뒤를 따라서며 어리무던한 덕쇠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초저녁에 버들숲 우거진 릉라도우에 떠있던 한쪽이 약간 이즈러진 달은 련광정지붕우에 걸렸다가 미끄러지듯 구름속을 헤염쳐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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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광정 다락우에서 벌어지는 질탕스러운 술놀이는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즐퍽해졌다. 순섬이는 소고기를 삶아내던 가마옆에서 사그러져가는 가냘픈 불티를 내려다보며 덕쇠에 대해 생각하고있었다. (갑자기 어딜 갔을가?) 월향과 함께 정각에 올라온길로 순섬이는 덕쇠를 찾아보았으나 그는 아무데도 없었다. 동자치어멈의 말이 왜놈들 서넛이 덕쇠를 앞세우고 대동강가로 내려간지 벌써 오래되였다는것이였다. (요즘은 왜 그럴가.) 종일 가야 말도 몇마디 없이 수걱수걱 물지게만 져나르는 덕쇠였으나 언제한번 자기 부탁을 거절한적은 없었다. 하긴 부탁이래야 서로 종살이를 하는 처지에 아씨 심부름으로 밤에 보통문근처까지 의원을 데리러 간적이 둬번 있었고 올봄에 모란봉에 함께 가서 더덕, 곰취 등 산나물을 뜯어주었던 일뿐이였다. 아무래도 높은 성벽을 넘어가 밖의 군사들에게 련락을 하는 일은 남정들의 도움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였고 그 일을 할만 한 사람은 덕쇠밖에 없었다. 왜놈들이 성안에 들어와 젊은 남정들은 모조리 죽이는 바람에 성안에는 물지게군 남정들만 남게 되였는데 이것은 예로부터 평양성에 우물이 없어 대동강물을 길어먹기때문이였다. 그러나 평양성 백성치고 젊은이, 늙은이, 지어 아이들과 중들까지 모두가 의병에 떨쳐나 싸움준비를 한다며 윽윽 벼르는데 덕쇠의 행동은 리해할수 없었다. 저으기 마음이 조급해난 순섬이는 빨리 덕쇠를 만나 물어보리라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땅딸보 화식병졸놈이 다락에서 내려오더니 순섬이에게 물통을 가리키며 역정스레 지껄였다. 《젠장, 물이나 떠올려라. 저마다 시켜먹으니 내가 저희들 종이야? 퉤―》 순섬이가 물고뿌와 주전자를 다반에 담아들고 층계를 올라서는데 다락안에서 왜장두목이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뭣이? 부벽루기둥에 붙어있던 미완성시구현판?…》 《예, 그렇소이다. 그날 부벽루가 불탈 때 어떤 놈이 뛰여들어가 그 현판을 안고 대동강 아래쪽으로 달아났소이다. 그런데 뒤따라 가보니 조총에 맞아 죽은놈만 있고 그 현판은 없었소이다.》 《음― 그렇다…》 《예, 수백년전 고려의 이름난 시인인 김황원의 시구이온데 서울량반들도 부러워하던 진품이였소이다.》 《머저리같은것들! 최향리 네가 그 현판을 당장 찾아라. 찾지 못할 땐 네놈의 목이 무사치 못할줄 알라. 알겠는가?》 《하!》 삽살개마냥 꼬리를 젓는 꼬락서니를 보니 최향리놈이 분명한데 이젠 말투까지 왜말을 쓰며 굽신거리고있었다. 《빨리 찾으라. 지금 서울의 우끼다대장은 충주사고에 있던 수천권의 책과 수만개의 동활자까지 로획했다고 하는데 이 평양성에서 우린 도대체 무엇을 얻었는가. 게다가 성안에는 소금이 떨어지고 조선관군이 의병들과 협동하여 평양성을 수복할 싸움준비를 하고있다는 정보가 있다. 지금 우리는 평양성 백성들의 청야전술에 걸려들었단 말이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평양성안의 문화유적들을 샅샅이 찾아내고 문화재들을 모조리 빼앗아야 한다. 알겠는가?》 《하!》 왜장수들이 일제히 돗자리에 넙죽 엎드리며 목례를 하는데 정각의 기둥과 천정대들보들이 드르릉 울리며 몸을 떨었다. 함정에 빠진 이리마냥 으르렁거리는 고니시 유끼나가는 사까이의 대무역상의 아들이였다. 세계문물의 추이로부터 전쟁국면에 대한 판단과 분석에 있어서 칼부림밖에 모르는 가또 기요마사 (가등청정)따위는 게다짝만큼도 여기지 않는 고니시는 자신은 물론 일가의 운명까지 이 전쟁에 걸고있었다. 조선땅을 타고앉아야 대무역상인 애비의 바다장사길이 서해를 거쳐 명나라에까지 뻗칠수 있었고 자신의 권세와 명예, 재부를 생각할수 있겠는데 전쟁의 국면은 날이 갈수록 헌자루꿰지듯 사방에서 구멍이 나는 바람에 요즘은 엉치에 밤송이를 깔고앉은것처럼 심사가 편치 않았다. 고니시는《정복자》의 도취감에 사로잡혀 평양성에 들어서던 첫날에 벌써 오늘과 같은 사태를 예감하고있었다. 그날은 6월 중순 어느날, 그러니 련광정에 처음으로 오른 날이였다. 대동문을 거쳐 조선관군의 지휘처였던 련광정의 돌층계를 오르던 고니시는 이그러진 상통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울긋불긋 단청무늬를 입힌 천정들보에 걸려있던 커다란 현판이 금시 자기를 노려보는듯 한 환각에 사로잡혔던것이다. 《빠가! 〈천하제일강산〉이란 뭐 말라빠진거냐? 당장 떼버려라!》 그러나 다음순간, 련광정의 높은 다락우에서 그만 온넋을 빼앗기고말았다. 푸르른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들어찬 수려한 모란봉과 그속에 흰 돛폭인양 우렷이 보이는 을밀대와 부벽루, 잔잔한 대동강의 푸른 물면우에 거꾸로 서있는 기암의 청류벽, 학두루미 날아예는 릉라도며 젖빛안개 짙은 동대원벌, 뽀얀 물안개가 늠실거리는 검포와 락랑벌, 그뒤에 거밋거밋한 산등성이들은 보일듯말듯… 아름다운 한폭의 산수화인가, 황홀한 동화속의 신비경인가… 아름답기도 하고 장쾌하기도 하고… 《어허― 천하에 이런 절경도 있단 말인가.》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인듯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웬일인지 수치감과 모멸감이 온몸을 휩쓸며 전률비슷한것이 스쳐지났다. 이토록 아름다운 나라의 백성들은 결코 무력하지 않는 법이거늘, 과연 이 전쟁의 결말은 어찌될것이냐? 한동안 넋을 잃고 련광정란간우에 서있던 고니시는 긴 왜검을 뽑아들고 내리워진 현판을 힘껏 후려쳤다. 《천하》라는 두 글자가 현판에서 떨어져나갔다. 《역시 제일강산은 제일강산이로다!》 이렇게 되여 동강난 현판이 파란곡절많은 련광정의 천정들보에 다시 걸리게 되였던것이다. … 고니시는 평양성에 입성한 첫날부터 피에 주린 이리마냥 문화유적들을 닥치는대로 짓뭉개고 불살라버리도록 부하들을 내몰았다. 고구려시기에 영명사의 부속건물로 지었다는 청류벽의 부벽루도 한줌의 재가루로 하늘로 날려보내고말았는데 부벽루기둥에 붙어있던 미완성시구현판이 깜쪽같이 없어지다니?… 예로부터 력대 조선의 왕들이 진귀한 보물을 많이 가지고있다는것을 잘 아는 고니시는 평양성주변에 고구려의 시조왕릉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이 얼핏 되살아났다. 그렇다면…
고니시는 전쟁에서 패한 장수보다 장사에서 성공한 갑부가 되고싶었다. 《에또― 최향리, 머리를 들라. 그러면 평양성주변의 력사유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해보라.》 《예, 평양성은 수천년의 력사를
가진 도시이므로 유적이 대단히 많사옵니다. 단군시기부터 고구려시기까지는 나라의 수도였고 고려때에는
부수도인 서경으로서…》 《이놈아, 촌아낙네처럼
무슨 사설이 그리 긴가?》 《예, 우선 관서8경의 하나인 이 련광정을 꼽아야 하옵니다. 그리고 모란봉의 을밀대와 부벽루… 이건 저 벌써 불타버리고… 다음은 칠성문과 보통문, 전금문, 흥복사의 6각 7층 석탑
등이 유명하옵니다. 그리고 저 장대재에는 숭령전과 숭인전이 있사온데 단군과 동명왕의 명복을 비는 사당이옵니다.》 《무엇이? 단군과 동명왕의 명복을 비는
사당?》 불맞은 노루처럼 놀라는 고니시의 비뚤어진 《그렇소이다. 해마다 개천절이 되면 사당에서 평양성의 모든 량반들과 백성들이 단군하늘님의 화상앞에 향불을 피워놓고 례배를 하는 의식을 지내군 하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넋이 잠자고있는 사당이렷다?》 《예, 예. 이를테면…》 《쾅―》 최향리의 넉두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고니시가 칼자루로 마루바닥을 내려치며 기염을 토했다. 《칙쇼, 우리 일본군은 조선의 땅덩어리만 정복하자는것이 아니다. 조선의 넋을 정복하고 뿌리채 뽑아버리자는것이다. 그래야 조선의 백성들을 일본의 영원한 노복으로 만들수 있는것이다. 선봉장! 래일 당장 숭령전과 숭인전을 불태워 그 조선의 넋이란것을 한줌의 재가루로 날려버려라!》 《하!》 며칠째 피를 보지 못하고 함정에 빠진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던 선봉장놈이 눈에 살기를 번뜩이며 대답했다. 《너희들은 명심하라. 나고야항을 떠나 조선으로 출병할 때 전군에 내린 관백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말이다. 〈조선에 가면 두가지를 많이 가져오라. 하나는 죽은 조선사람의 코이고 다른 하나는 산 조선사람인 중, 학자, 기술자이다. 이것이 전공의 표시이며 그에 따라 상이 차례질것이다.〉알겠는가?》 《하!》섬나라의 오랑캐장수들은 일제히 목례를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순섬이는 자기가 무슨 정신으로 왜놈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지금껏 듣고있었으며 어떻게 정각층계를 내려섰는지도 몰랐다. 모란봉의 부벽루가 불타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터져나가는듯싶은데 이제는 숭령전과 숭인전까지?… 아! 순섬이는 련광정 대들보기둥을 붙안고 통곡하고싶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저 섬나라 오랑캐무리들은 불을 즐기는 부나비족속들인지 경주에 있는 큰 불국사 다보탑과 금산사의 미륵전, 속리산의 범주사와 팔상전 5층나무탑도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 련광정도 지금 왜놈들의 말발굽밑에서 신음하고있다. 원래 깨끗하고 정갈한것을 좋아하는 평양성사람들은 관서8경의 하나인 련광정의 아름다움을 소중한 추억속에 간직하고 티검불하나 날릴세라 정성다해 손질해왔는데 저 짐승의 무리들은 정각이건 계단이건 잔디밭이건 가리지 않는다. 련광정주변에는 말똥들이 굴러다니고 악취에 숨이 막힐것 같다. 순섬이는 련광정의 합각지붕의 모루단청이며 대들보의 비단무늬가 넋이라도 있다면 저 섬나라 오랑캐들을 끝없이 저주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얼마전 충주성에서 피난왔다는 처녀의 말이 생각나 순섬이는 치를 떨었다. 왜놈들이 가는 곳마다에서 아녀자들을 잡아들여 군막에 가둬놓고 릉욕하다 못해 전장터를 옮길 때마다 말에 싣고다니며 세상못된짓을 다 한다지 않는가. 정말 왜놈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치가 떨리고 구역질나는것뿐이였다. 늙은이와 어린이, 아녀자들까지 닥치는대로 쏘고 찌르고도 성차지 않아 죽은 사람의 코까지 베여 소금에 절구어 배낭에 넣고다니는 야만의 무리들이였다. 이때 정각의 돌층계를 내려오는 발걸음소리가 자박자박 들리더니 월향이가 순섬이에게 다가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순섬이에게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섬아,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저 왜놈들이 숭령전과 숭인전을 불태우고는 그길로 검포룡산의 왕릉에 도적질하러 떠난다누나.》 《예? 왕릉에까지?…》 순섬이는 숨이 꺽 막히는듯하여 눈앞이 아찔해졌다. 《쉿! 조용해라. 벌써 룡산의 지형과 동태를 렴탐하러 선발대를 보냈는데 덕쇠도 거기에 끌려갔을게다. 저 최향리란 놈이 왕릉을 도적질하는데 자칭 길잡이로 나섰구나.》 《아씨,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지금쯤 강건너편에 선발대로 떠났던 왜놈들이 도착했다니까 시간이 없다. 빨리 덕쇠를 만나 그와 함께 성을 넘어가야겠다. 덕쇠도 평양성사내가 분명하다면 꼭 너를 도와줄게다. 할수 있겠니?》 순섬이는 너무도 급작스레 부닥친 일이여서 어정쩡해있다가 이제 아씨와 헤여지면 언제 또 만나랴 하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순섬이는 종잡을수 없는 표정으로 인차 대답을 못하고 눈물이 그득 고여오른 눈길로 월향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씬?》 《내 걱정은 말아. 난 저 두령놈의 목을 베여 옥개의 원쑤, 평양성녀인들의 원쑤를 어떻게라도 갚아야겠다. 여기에 김응서조방장님에게 보내는 글이 들어있으니 꼭 전해다오.》 《아씨!》 순섬이는 월향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세차게 어깨를 들먹거렸다. 순섬이의 어깨를 쓰다듬는 월향의 부드러운 손길도 약간 떨리는듯싶었다. 《넌 또 우는구나. 평양성녀인들의 눈물은 그렇게 값없이 흘리는게 아니다. 그래서 난 울고싶어도 참고견디는거야. 어서 눈물을 거둬라.》 《아씨, 제가 꼭 해내겠어요.》 《이제 가는 길에 장대재 숭령전 사당지기로인한테 들려 화상과 제단을 모두 치우고 몸을 피하라고 일러라. 그리고 잊지 말고 집에 들려 장농안의 광목천을 꺼내 띠를 만들어가지고 가야 한다. 그래야 성을 넘을수 있다.》 《아씨, 알았사와요.》 《자, 이젠 헤여지자. 너희들한테 평양성 유적유물의 생사가 달려있고 동명왕릉의 존망이 달려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밤중으로 성을 넘어야 한다. 그럼 믿는다.》 《아씨, 그럼 몸성…》 차마 떨어지고싶지 않는 월향의 품에서 얼굴을 든 순섬이는 마지막말을 맺지 못한채 오솔길을 따라 뛰여갔다. 달음박치듯 달려가는 순섬이의 뒤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는 월향의 창백한 얼굴에는 그 무엇인가 비장한 빛이 어리고 깊은 심연이 비낀 아름다운 두 눈가에는 달빛을 받아 맑은 이슬이 소리없이 반짝이고있었다.
3
대동강기슭의 밤풍경은 언제나 아름다왔다. 잔잔한 수면우에 밤하늘의 뭇별들이 내려앉아 깜빡이고 희미한 보름달이 장난하듯 모이기도 하고 부서지기도 하면서 어데론가 끝없이 헤염쳐가고있었다. 높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던 순섬이는 대동강수면을 이윽토록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서있었다. 덕쇠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것으로 보아 지금쯤 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너올것 같았다. 그가 돌아오면 곧 물지게를 지고 물터에 나올것이라고 짐작한 순섬이는 기슭에서 약간 떨어진 갈섶에 앉아 덕쇠를 기다렸다. (왜놈들이 왕릉을 도적질하려 하다니?) 갑자기 눈앞에 수많은 별찌들이 오락가락하고 또다시 가슴이 활랑거리기 시작했다. 증조할아버지때부터 아버지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선조들의 피와 땀, 숨결과 넋이 깃든 왕릉이였다. 자기의 소중한 어린시절의 꿈과 추억이 깃들어있는 왕릉이기도 하였다. 릉마당의 릉비와 화강석 기단돌… 그 하나하나에 그들의 뜨거운 숨결과 순결한 넋이, 자기의 추억이 슴배여있는 소중한 곳이였다. 《동명왕릉은 천년강국 고구려의 넋이 잠든 신성한 령지이니라!》 포졸들에게 묶이워가면서 아버지가 하시던 피타는 그 절규가 이 순간에는 더욱 귀전에 쟁쟁히 들려오고 흉벽을 쾅쾅 두드리는것 같았다.
(안돼, 절대로 안돼!) 순섬이는 왜놈들의 검은 흉계를
성밖의 군사들에게 한시바삐 알려주어야겠다는 조바심으로 덕쇠가 오게 될 길을 안타깝게 살펴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수 없었고
숲속 여기저기에서 밤벌레가 날아다니고 귀뚜라미울음소리만이 가락맞게 들려오고있었다. 순섬이는 이제 김응서조방장님이 이 련락을 받기만 하면 검포와
중화일대에서 기세를 올리고있는 의병부대들에 령하여 왜놈들이 릉주변에 얼씬 못하게 할것이라고 믿고싶었다. 월향도 그 지역에서 맹활동을 벌리고있는 림중량의병대, 조호익의병대, 한대걸농민의병대 이야기를
자주 하군 하였다. 그럴수록 자기가 맡은 일이 얼마나 중하며 자기도 평양성을 위해 그 무엇인가 큰일을
하고있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때 애타게 기다리던 덕쇠가 물지게를 지고 강가로 나오는 모 《갑자기 그건?…》 얼떠름해 서있던 덕쇠는 성난것같은 순섬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새초롬해진 서늘한 눈빛과 마주치자 허둥지둥 눈길을 황급히 돌려버렸다. 《글쎄 대답할테야? 안 할테야?》 순섬이는 이렇게 다우치며 덕쇠앞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깊은 밤중에, 그것도 호젓한 강기슭에서 처녀와 단둘이 마주서 가뜩이나 가슴이 활랑거리던 덕쇠는 흠칫 뒤로 물러서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글쎄… 참…》 (아유, 속상해라. 어쩌면 저렇게 못나게 굴가. 좀 사내답게 굴었으면…) 순섬이는 가볍게 한숨을 내그으며 안타까움과 실망감이 한데 어우러진 착잡한 눈길로 덕쇠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뜯어보았다. 더부룩한 머리태, 저고리앞섶은 땀에 젖어 시큼한 냄새가 물씬거리는데 걷어올린 궁고(좁은 바지)의 가랭이와 짚신은 온통 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다만 예전과 다름없는 어질고 순박한 큰 눈이 영문을 모르고 호기심을 담은채 자기를 지꿎게 지켜보고있었다. 순섬이는 세상에 이렇게도 용하디 용한 사내가 또 있을가 하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용한 사람이 그때는 어떤 배심으로 최향리의 그 모진 곤장밑으로 선뜻 나설수 있었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였다. 과연 이런 사내가 목숨을 내대야 하는 일에 선뜻 나서겠다고 할런지… 《덕쇠, 부벽루를 불태운 왜놈들이 숭령전과 숭인전까지 불태우려 하고있어. 그뿐이 아니야. 검포룡산의 왕릉까지 도적질하려 하는데 넌 그것도 모르고 왜놈들의 길잡이를 해주었지. 그래 대답해줘. 평양성의 사내로서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말이야?》 여기까지 단숨에 말하고난 순섬이는 웬일인지 눈물이 솟구쳤으나 눈물을 참고견디라던 월향의 말이 떠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덕쇠는 갑자기 고개를 힘껏 뒤로 젖히더니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쳤다. 《아!》 내가 무슨 일을 하였는가? 짐승같은 왜놈들을 도와주다니… 《덕쇠, 어쩌면 좋겠니? 아씨는 오늘밤중으로 성을 넘어가 김응서조방장님을 만나야 한댔어. 그래 함께 가주겠어?》 간절한 기대와 믿음이 담긴 순섬이의 애절한 눈빛앞에서 덕쇠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흐릿해진 눈길을 련광정쪽에 주다가 쥐여짜듯 중얼거렸다. 《아… 어쩌면 좋을가?》 (아니, 그럼? 어쩌면 덕쇠가 저런 사람이란 말인가!) 순섬이의 가슴속에는 크게 믿고 의지하고싶었던 사람에 대한 기대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것 같은 느낌에 머리를 싸쥐고 주저앉은 덕쇠를 쏘아보다가 맵짠 어조로 말했다. 《좋아, 그만둬. 내 혼자라도 성을 넘어갈테야.》 《아, 아니 그런게 아니야…》 《그럼 뭐야? 그렇게도 목숨이 아까워? 평양성사내가 옳긴 옳은가말이야. 내가 믿은게 잘못이였어. 바보같이… 흐흑…》 해쓱해진 얼굴로 눈물을 훔치던 순섬이는 비장한 빛을 띄운채 야무지게 또박또박 말하였다.
《난 가겠어. 하지만 내 말을 똑똑히 들어줘.
이제 우리 군사들이 평양성을 수복하고 련광정에 오 《챠― 에익. 내가 목숨이 아까와서 그런줄 알어? 내가… 내가 부벽루 그 현판을 감추어두었어.》 《뭐? 그 미완성시구현판을? 언제?》 순섬이는 놀라와 덕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으나 덕쇠는 그의 눈길을 외면하며 띠염띠염 말했다. 《부벽루가 불타던 날 모란봉숲속에서 왜놈들 총에 맞아 쓰러진 의병을 보았는데 그는 나와 같이 있던 물지게군이였어. 왜놈들을 평양성에서 내쫓은 날 그 현판을 련광정기둥에 꼭 걸어달라고 하고는…》 《그 현판이 어데 있니?》 《련광정아래 큰 소나무밑에 유지에 싸서 묻어두었어. 그래서 난 련광정을 떠나지 못하구…》 《덕쇠, 넌 정말… 왜 그 말을 이제야 하니? 어쩜!…》 순섬이는 저도 모르게 덕쇠의 거쿨진 손을 와락 그러잡았다. 아! 이렇게 순박하고 속이 깊은 사람을 비겁한 사내라고 욕하다니… 내가 맹꽁이였어.… 《그런데 어쩔가. 내가 떠나면 왜놈들이 그 현판에 손을 뻗칠가봐 그래.》 《일없을거야. 누구도 모르게 감춘걸 왜놈들이 어떻게 찾겠어. 평양성을 해방하는 날 우리 함께 부벽루시구현판을 련광정기둥에 달자. 평양성사람들이 다 보게 말이야.》 그제야 어두워졌던 덕쇠의 얼굴빛이 환해져 마치 딴사람이라도 된듯 활기있게 대꾸하였다. 《좋아, 날이 밝기 전에 어서 떠나야지.》 《가만,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있어. 그 최향리놈을 그냥 두면 안돼. 그놈이 왕릉을 도적질하는 왜놈들 길잡이를 해준대.》 《뭐, 최향리 그놈이…》 《그래, 우리 아버지도 그놈때문에 죽었고 우리도 그놈에게 얼마나…》 《짐승같은 놈. 좋아, 그놈을 죽여버리자.》 어쩌면 사람이 순간에 이렇게도 달라질수 있을가. 방금전까지 그렇게도 용해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담대한 사나이로 순섬이의 눈앞에 비쳐들었던것이다. 적의에 번득이는 커다란 눈매, 어금이를 꽉 깨문 억센 턱, 돌덩이처럼 굳게 틀어쥔 두주먹… 《좋아, 최향리놈을 여기까지 데려와라. 아마 부벽루시구현판을 감춘 곳을 안다고 하면 그놈이 꼭 올거야. 조용히 말해라. 어서 가봐.》덕쇠는 마치 딴사람으로 변한듯 이렇게 호령조로 말하며 순섬이의 등을 떠밀었다.… 한참후에 시커먼 그림자 둘이 련광정쪽에서 뻗어내린 오솔길에 나타났는데 순섬이의 뒤에 따라 선 통영갓을 쓴 최향리는 명주두루마기자락을 걷어붙인채 헐떡거리며 따라오고있었다. 《얘, 아직 멀었냐?》 《이젠 다 왔소이다.》 이때 덕쇠가 작대기를 짚고 최향리앞을 우뚝 막아서며 추상같이 부르짖었다. 《이놈아, 네놈이 찾는 현판이 여기있다.》 《엉? 더… 덕쇠!》 지옥의 사자앞에 선 쥐새끼마냥 최향리는 기절초풍하여 벌써 혼맹이 빠진듯 엉거주춤 뒤걸음치다 강변의 자갈판에 엉뎅이를 찧었다. 《이놈! 평양성사람들의 몫이다.》 덕쇠가 쳐들었던 작대기로 최가의 면상을 힘껏 후려갈기자 그놈은 《헉!》하고 대번에 골통을 싸쥔채 자갈밭에 태질했다. 순섬이가 불이 이는 야멸찬 눈빛으로 태워버릴듯 최가를 노려보며 한걸음 나섰다. 《이 역적놈아! 여우도 자기를 낳은 굴은 잊지 않는다는데 넌 짐승보다 못한 놈이다. 어찌 조선사람으로서 왜놈들과 작당해서 조선의 넋이 잠든 왕릉을 도적질할수 있느냐? 조선의 넋을 팔아먹는 짐승보다 못한 놈, 죽어라!》 《악!》최가는 두 무릎을 꿇어앉은채 순섬이와 덕쇠를 번갈아보며 닭의 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궜다. 《순섬이, 더… 덕쇠, 제발 내가 다 잘못했네. 정… 정말이야.》 덕쇠가 무서운 기상으로 그놈의 멱살을 움켜쥔 두손을 우쩍 쳐들었다. 《네놈은 우리 평양성에 살 자리가 없다. 죽기 전에 똑똑히 알아둬라. 민족의 넋을 팔아먹는 네놈은 나라도 백성도 저버린 짐승보다 못한 놈이다.》… 최향리를 처리하고난 그들은 묵묵히 걸었다. 그들은 먼저 숭령전에 들려 사당지기로인을 만나 사태를 알려준 다음 곧장 칠성문쪽으로 내려가다가 모란봉으로 뻗은 길을 잡았다. 곧추 올라가면 퍽 가까왔으나 왜놈기찰군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여서 그쪽으로 길을 잡았다. 벌써 새벽이 가까와오는지 북녘하늘의 새별은 더욱 총총히 빛나고 두루섬쪽에 걸렸던 이즈러진 달빛도 희미하게 자취를 잃고있었다. 덕쇠의 뒤를 따라 생각에 잠겨 걷던 순섬이가 문득 그를 멈춰세웠다. 《덕쇠, 아무래도 네가 띠를 매야겠어.》 《왜 그래?》 《글쎄 내 말대로 하라니까.》순섬이는 덕쇠가 어쩔새도 없이 띠를 풀어 그의 허리에 감아주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와닿는 처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총각의 허리를 스치며 맴돌았다. 덕쇠는 그만 어정쩡한 표정으로 엄마손길에 몸을 맡긴 어린애마냥 꼼짝 않고 망두석처럼 서있었다. 앞가슴에 와닿는 처녀의 치렁치렁한 머리태에서 풍기는 연한 동백기름냄새에 정신마저 허공중에 날아가버린듯 흐리몽롱해졌다. 한동안 꼼꼼하게 띠를 손질해주고난 순섬이는 허리를 펴고 덕쇠를 바라보다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웠다. 《호호… 꼭 장수같구나, 평양성의 장수.》웬일인지 덕쇠는 한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것 같아 눈굽이 찡해지며 무척 성난듯 한 표정으로 몸을 획 돌렸다. 난생처음 어머니와 같고 누나와도 같은 육친의 정을 느끼게 해준 순섬이였다. 그보다 평양성 백성의 도리에 대하여, 민족의 얼과 넋에 대하여 말없이 가르쳐주고 이끌어주는 스승같기도 했다. 강기슭을 따라 곧게 뻗어간 오솔길은 갈숲이 우거지고 한적했다. 이렇게 얼마나 걸었을가.… 갑자기 숲속에서 벽력같은 웨침소리가 울려나왔다. 《누구야?》 《뛰자!》 덕쇠는 무작정 순섬이의 손목을 나꿔채며 숲속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서라!》 강대안과 숲속 여기저기서 왜놈들이 달려나오고 조총소리가 어지럽게 터져올랐다. 조총탄이 귀전을 윙윙 스쳐지나며 옆의 솔나무를 꺾어놓았으나 덕쇠는 순섬이의 손목을 쥐고 목에 겨불내가 나도록 힘껏 달렸다. 이렇게 성가까이의 둔덕에 거의 이르렀을 때 모두숨을 가까스로 몰아쉬던 순섬이가 끝끝내 멈춰서더니 가쁘게 말하였다. 《나… 난 안되겠어.》 《뭐라구? 빨리 뛰자!》 덕쇠는 성이 난듯 순섬이의 손목을 와락 나꾸어채며 앞으로 끌었다. 이렇게 열둬발자국 가까스로 옮겨가던 순섬이가 덕쇠에게 의지한채 사정하듯 말했다. 《제발 이걸 놔줘.》 《아니야.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거의다 왔어.》 《안돼, 그러다 둘 다 잡혀. 너먼저 이 글을 가지고 성을 넘어가.》 순섬이는 앞섶에서 월향이 써준 글을 꺼내 덕쇠의 손에 쥐여주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덕쇠는 《안돼. 난 혼자서 못 가.》하며 순섬이를 앞으로 잡아끌었다. 순섬이는 너무 안타까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얼굴을 싸쥐였다. 《넌 정말… 빨리 성을 넘으라는데… 흐흑…》왜놈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소리가 퍼그나 가깝게 들려와 덕쇠의 가슴은 타는듯 졸아들었다. 《에익!》덕쇠는 자신도 알지 못할 무서운 충동에 힘껏 떠밀리운듯 순섬이를 닁큼 안은채 와락와락 숲을 헤치며 나갔다. 《안돼…》 순섬이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덕쇠의 가슴에 묻은채 흐느꼈다. 숲이 끝나고 성곽이 가까와졌는지 소나무들이 어설프게 서있는 공지가 나타났다. 덕쇠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순섬이를 내려놓았다. 《이젠 다 왔어.》 덕쇠는 허리에 감긴 띠를 풀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갑자기 《아!》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순섬이가 가슴을 움켜쥔채 몸을 비틀며 모로 쓰러졌다. 《아니? 왜 그래?》 순섬이를 다급히 안아일으키는 덕쇠의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검붉은 피가 순섬이의 저고리앞섶을 흥건히 적시며 흘러내리고있었다. 《순섬이, 정신차려.》 덕쇠가 그를 부둥켜안고 마구 흔드는데 기척이 없이 늘어졌던 순섬이가 힘겹게 눈을 추켜들고 어설픈 미소를 그리려 애썼다. 《난 일없어. 어서 성을…》 《안돼. 함께 가야 해.》덕쇠는 쓰러진 순섬이를 부둥켜안고 성곽에까지 기여가 띠를 풀어 소나무에 비끄러맨 다음 내려뜨렸다. 《자 순섬이, 빨리 내려가.》 《난 안돼. 덕쇠,네가…》 《정신나갔어? 나 혼자선 못 가. 어서 띠를 잡으라니까.》 덕쇠가 억지로 순섬이에게 띠를 쥐여주며 다급하게 말하는데 《덕쇠!》하고 순섬이가 총에 맞은 사람같지 않게 울음섞인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덕쇠, 우린 평양성사람들이야. 평양성을 지키고 왕릉도 지켜야 할게 아니야. 부벽루현판도 련광정에 걸어야 할게구… 난 안돼. 빨리 우리 군사들에게 달려가주렴. 부탁해.》 숲에서 왜놈들의 지껄임소리가 퍼그나 가깝게 들려왔다. 《덕쇠, 빨리 성을 내려!》 순섬이는 덕쇠의 손에서 띠를 나꿔채며 그를 힘껏 떠밀었다. 덕쇠는 성루에 한발을 옮겨짚으며 순섬이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똑바로 쳐다보았다. 약간 갸름한 얼굴모습, 땀과 눈물이 한데 어우러져 흩어진 머리카락, 둥그스름한 정찬 눈매에서 기대와 부탁이 담긴 애절한 눈빛이 자기를 지꿎게 지켜보며 가늘게 떨고있었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처녀, 이처럼 정이 드는 처녀가 또 있을가. 이 순간 덕쇠에게는 순섬이 하나만이 가슴속에 꽉 차있음을 가슴저리게 느끼고있었다. 《죽지 마. 순섬이가 죽으면 나도 죽고말테야. 꼭 내려와야 해.》 《덕쇠, 난 죽지 않아. 왜놈들을 평양성에서 내몰기 전엔 절대로 죽지 않아. 빨리 내려가!》 덕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띠를 타고 성벽을 내리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벗겨져 피가 흘렀으나 덕쇠는 아픈줄 몰랐다.… 덕쇠가 바닥에 내려섰는지 띠가 헐그러워졌다. 순섬이는 꽉 쥐고 섰던 띠에서 가까스로 한손을 떼고 허리를 폈다. 조총과 검을 꼬나든 왜놈들이 숲속 여기저기서 튀여나오는 모습을 띠여보던 순섬이는 단검을 뽑아들었다. (안돼! 절대로 안돼.) 순섬이는 단검으로 소나무기둥에 매놓았던 띠를 뭉텅 끊어버리고 버쩍 머리를 쳐들었다. 릉라도 버들숲에서 희끄무레한 새벽하늘이 희붐히 열리고 붉은 아침해살이 모란봉숲과 성곽의 여기저기를 다정하게 어루만지고있었다. 찬연한 아침해살은 순섬이의 얼굴을 무척 평온하면서도 비장한 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이고있었다. 《이 원쑤 왜놈들아! 안된다!》 순섬이는 단검을 높이 추켜들었다. 《아, 덕쇠―》 모란봉 성곽우의 이끼푸른 성돌에 순섬이 뿌리는 뜨거운 선혈이 점점이 떨어져 붉게 물들여졌다.… 《아, 순섬이!…》덕쇠는 황소와 같은 사나이의 울음을 터뜨리며 성벽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며 몸부림쳤다. 릉라도 버들숲너머에서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던 붉은 태양이 불쑥 솟아오르며 련광정을 더 밝게 비쳐주고있었다. 덕쇠는 순섬이가 바라보던 모란봉의 솔밭을 향해 억센 걸음을 내짚었다.…
그 이듬해 정월, 맵짠 겨울의 눈바람이 두텁게 얼어붙은 대동강기슭에서 회오리치다가 련광정우로 긴 성벽기슭으로는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넓은 벌 동쪽에는 점점이 산이 있네 덕쇠의 눈앞에는 순섬이의 아름다운 얼굴이 련광정 저 멀리에서 우렷이 떠오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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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의 세월속에 푸른 이끼 얹은 성곽 하나하나의 성돌에도, 색바랜 모루단청의 크고작은 점과 선에도 애국에 불타는 이 나라 백성들의 땀에 젖은 재능과 피에 젖은 넋이 깃들어있거니. 하기에 우리 장군님 우리 인민들의 마음을 헤아려 《천하》라는 두글자를 다시 써넣도록 하시지 않았던가. 사람들이여, 무심히 보지 마시라. 오늘 련광정정각의 들보에 걸려진 《천하제일강산》이라는 현판을!
(평안북도 운산군 금산중학교 교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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