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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청년문학》 주체98(2009)년 제9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리 광 옥
《이젠 모든것을 다 알겠습니다. 리해가 됩니다.》 머리흰 로박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가 문득 주은호를 새삼스러운 눈길로 자세히 바라보았다. 《실례입니다만 한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부원동문 라윤심기사와 어떤 사이입니까?》 범상한듯 한 얼굴이였지만 눈빛만은 정색했다. 과학원에 올려보낸 라윤심연구사의 《ㅎ》광석처리에서의 새로운 시약체제에 의한 선광법을 알아보려고 과학원에서 내려온 이 로박사는 윤심의 새 발명의 가치를 부정하는 젊은 기술과 부원의 심정을 리해는 하면서도 야릇한 의문을 제기하고있는것이였다. 은호는 인차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다르게 생각하지는 마시오. 난 때로는 새로운 과학적발명도 인간의 감정에 따라 각이한 평가를 받을수 있다는걸 알기때문에 묻는거요. 솔직히 대답해주오. 혹시 라윤심기사에 대한 그어떤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있는건 아닌지…》 은호는 이것이 비단 이 로박사만이 아닌 광산의 많은 사람들, 지어는 라윤심자신도 자기에게 묻고싶어하는 말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는 자기가 알고있는 그 모든 사람들의 묻는듯 한 눈빛을 똑똑히 보고있었다. 그는 이제 그 모든 사람들의 눈빛앞에서 대답하여야 하는것이다. 처녀연구사 라윤심의 새로운 선광법은 《ㅎ》광석처리에서의 새로운 혁신안이였다. 이전의 방법보다 적은 원가를 들이면서도 1. 2배의 실수률을 보장하는것이였다. 그런데 이 새로운 혁신안의 가치를 은호가 부정해나섰다. 보통때는 주은호가 라윤심을 남다르게 대한다고 믿어왔던 많은 광산사람들은 의아해하였다. 바로 그것을 이 머리흰 로박사는 그 많은 사람들의 편에 서서 솔직하게 묻고있는것이였다. 은호는 한생을 과학탐구로 늙은듯 한 박사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불의와 가식을 허용하지 않을듯 한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얼굴이다. 문득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눈빛만은 어딘가 모르게 이 박사와 류사하게 느껴지는 아버지다. 소학교시절 은호가 자기가 떨구어 속심이 울려버린 문양고운 연필을 내속을 모르는 한 애가 자꾸만 바꾸자고 따라다니는 바람에 손칼과 바꾸어가지고 왔는데 그것이 아버지를 몹시도 노엽혔다. 아버지는 아들의 종아리를 쳐 선생님과 그 동무네 집으로 용서를 빌러보냈고 그로부터 얼마동안을 아들과 말도 건네지 않았었다. 자동차운전사로 과묵한 편인 아버지에게는 그 어떤 좋은 말보다도 그 침묵과 랭대가 훨씬 더 교양적이라고 볼수 있었다. 지금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계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하군 하시였다. 《오륙을 놀릴수 있을 때까진 너한테 가지 않겠다. 늙은게 가면 이모저모 네가 신경을 쓸 일이 더 많아질테니까. 그러니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네 맡은 일을 잘해라. 그런데 이젠 내 동갑내기들이 손주, 손녀들을 데리고다니는걸 보면 마음이 좀 허전하구나.》 바로 그 아버지와 같은 눈빛으로 박사는 지금 윤심과의 관계를 묻고있다. 그 앞에서는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것이다. 은호는 천천히 들뛰기 시작하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박사의 눈을 마주보았다. 숨이 가쁜듯 천천히 말을 씹어가며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전 그 동무를… 사랑합니다.》 박사는 놀라움도 기쁨도 표시하지 않은채 무표정한 얼굴로 은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침착해보이는 그 눈빛에는 아직도 리해할수 없다는듯 한 검질긴 의문이 감돌고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박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솔직히 말해주어 고맙소. 부원동무.》 《박사선생님.》 박사는 출입문쪽으로 돌아서다가 마음속 짐을 다 덜지 못한 사람모양 주춤거리더니 추위가 모든것을 깡깡 얼구어버리는듯 한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런지 좀 걱정이 되는구만. 동무들은 분명 좋은 사람들인데 이제 동무들이 서로를 리해할수 있겠는지… 내가 알건대 라윤심이는 자존심이 보통이 아닌 처녀같은데… 자기의 살점같은 창조물이 한사람때문에 무시당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절대로 그걸 용서하자고 안할거요.》 박사는 은호를 돌아보았다. 《동문 어떻게 생각하오?》 은호는 대답을 못했다. 박사는 은호의 얼굴을 자세히 여겨보더니 거기서 그 대답을 찾기라도 한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동문 윤심동무를 믿는것 같구만.》 《!…》 《그래, 가장 높은 수치의 강도를 이겨낸 결과물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볼수 있지. 가장 공고한 사랑도 그렇게 넘기 힘든 시련을 이겨낸 사랑이 아닐가.》 《좋은 말씀을 해주어 고맙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그 과정은… 힘들거네. 젊은이, 내 좀 도와달라나?》 박사의 마지막말은 다소 유쾌하게 울렸다. 은호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박사도 은호와 마주앉은 후 처음으로 웃었다. 은호는 웃고있는 박사의 얼굴이 어린애처럼 순진하게보이는것을알아보았다 《하긴 이 늙은게 도와서 될 일이면 동무자신도 얼마든지 해낼것같구만. 사실 학술상의 문제라면 몰라도 그밖의 문제라면 난 유치원생이라고 말할수 있지.》 솔직하게 고백하는 머리흰 로박사의 얼굴에 어줍은 미소가 흐른다. 《하지만 난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소.》 《고맙습니다. 선생님.》 박사는 은호의 손을 힘주어 잡아주고는 돌아갔다. 박사마저 돌아가버리자 방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은호는 사무실창가에 점도록 서있었다. 불쑥 가슴속에 스며드는 불안과 외로움을 느꼈다. 지금 윤심이는 어쩌고있을가. (과연 이렇게밖에 달리 할수 없단말인가.) 은호는 이 며칠사이 벌써 몇번째나 자기마음속에 이 물음을 던져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어는 자기자신마저도 이 물음에 대답할수 없음을 그는 안다. 아연해진듯 한 윤심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얼른거린다. 《은호동진 지금 저의 선광법이 아니라 다름아닌 나자신을 믿지 않고있는겁니다. 말씀해주세요. 그건 어떻게 리해해야 합니까?》 《윤심동무, 난 동무가 참된 과학자의 량심을 가지고 살길 바랄뿐이요.》 《너무 쉽게 말하는군요. 난 이 선광법을 완성하기 위해 6년을 바쳤어요. 그래서 오늘과 같은 수준우에 올려세웠어요. 난 나의 창조물을 믿어요. 그런데 한 인간의 과학적창조물을 모욕하고 짓밟는 그런 사람들의 심장이 과연 어떠한지… 묻고싶어요. 아니 알고싶어요.》 울음이라도 터칠듯 웨치던 처녀의 이 말, 그것은 불과 하루전에 있은 일이다. 그리고나서 그는 어데론가 사라져버렸다. 합숙에도 실험실에도 없었다. 과연 처녀는 어데로 간것일가. 슬픔과 배반감에 못 이겨 모든것을 포기해버리고 마음의 피난처를 찾아 숨어버린것은 아닌지. 은호는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났다. 문득 반년전의 일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날 아침 은호는 저녁에 강변에서 만나자는 윤심의 련락을 받았다. 은호는 만나자는 시간보다 앞서 울렁이는 가슴을 안고 강변으로 나갔다. 자기는 기술과사업의 분망함으로, 윤심은 연구사업의 긴장성으로 언제 한번 다정히 만나 따뜻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그들이였다. 강변의 풍경은 유정했다. 그 어떤 즐거움을 주는 강물소리가 사방에 가득찼다. 그속에서 지꿎은 밤고기사냥군들의 전지불빛과 담배불빛이 여기저기서 번쩍거렸다. 슴슴하고 비릿한 물내와 강변의 수풀들에서 나는 풀내가 어울려 풍겨왔다. 그 향내짙은 어스름 그늘속에서는 청춘남녀들의 정겨운 속삭임소리가 들려왔다. 약속한 시간과 거의 때를 맞추어 윤심이 강변으로 달려나왔다. 《오래 기다리였나요?》 《아니… 나도 좀전에…》 윤심은 손에 들고나온 실험일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저…은호동지, 이젠 과학원에 올려보내야 할것 같아요.》 《과학원에…》 은호는 성급히 손전지를 켜들고 그의 실험일지를 받아 펼쳐들었다. 기발한 착상과 발기들로 일관된 그의 실험일지는 연구가 성공이라는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여기에는 물론 말없이 처녀연구사를 도와나선 은호의 숨은 노력도 어려있다. 은호는 생각을 더듬었다. 하지만… 하지만 연구를 더 심화시킬 여지는 있지 않는가. 은호는 실험일지를 접어들고 천천히 강변을 걷기 시작했다. 윤심이도 천천히 따라걸었다. 은연중 서로에 대하여 느끼고있으면서도 언제 한번 마주서서 따뜻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던 두사람에게는 처음으로 되는 저녁산보였다. 저녁어스름이 강변에 드리워있었다. 은호는 강변을 거닐며 속삭이던 그림자들이 자기들을 보자 숨어버리며 즐겁게 수군거리는 소리들을 들었다. 《연구사언니예요》 《이쪽은 기술과 부원 같은데…》 그러면서 그들은 자리들을 피해주었다. 저녁산보를 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이 강변을 통채로 내주기라도 할듯이 숨어버리는 사려깊고도 유쾌한 마음들이다. 물소리마저 이들의 귀중한 시간을 지켜주려는듯 조용히 들려오는것 같다. 옆에서 말없이 걷고있는 처녀의 숨소리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이런 강변의 이런 때는 침묵조차도 일종의 고백처럼 느껴지기도 하는것이다. 눈에 뜨이고 귀에 들려오는 모든것이 은호에게 련인을 만나는 한 총각으로 될것을 지꿎게 독촉하고있는듯 싶다. 모든것을 다 잊고 이 헌신적이며 리지적인 처녀와 생활에 대해, 미래에 대해 이밤이 지새도록 끝없이 끝없이 이야기하고싶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맺힌것처럼 무죽한 불안의 덩어리를 어서 빨리 이 처녀앞에 터놓고싶었고 그것을 이 처녀에 대한 더 큰 믿음과 신뢰로 바꾸고싶었다. 그리하여 은호는 이런 강변, 이런 저녁에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듯 한 말을 끝내 꺼내고야말았다. 《윤심동무, 난 동무의 선광법을 부식에 의한 표면화학조성의 변화에 따르는 방법으로 더 완성시킬수 있다고 보오.》 뜻밖인듯 윤심의 두눈이 갑자기 커졌다. 《축하하오. 윤심동무, 정말 수고많았소.》라는 말이 나올줄 알았던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올줄이야… 윤심은 긴장하여 말없이 은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앞에 은호는 왜서인지 말이 굳어졌다. 《난… 동무의 선광법을 좀 더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윤심은 고개를 끄떡이였다. 《나도 은호동지가 생각하는 그 문제때문에 고심했어요. 사실 제가 이 방법을 착상하고 현재의 수준까지 올려세우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미흡한 점때문에 많은 시간을 바쳤어요. 이젠 저로서는 더는…》 《아니, 윤심동무는 할수 있소. 물론 동무의 현재의 연구결과는 지금 상태에서도 가치를 가지는 중요한 발명으로 되오. 하지만…》 《아니, 저로서는 더는…》 《윤심동무!》 윤심은 별안간 서름서름해보이는 눈빛으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온몸에서 불시에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은 서먹함과 불신감이 풍겨왔다.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썰렁해진듯 하였다. 《내말이 너무했다면 용서하오. 하지만 난 동무가 조금만 더 분발하면 부식에 의한 표면화학조성의 변화에 따르는 방법으로 동무의 선광법을 더 완성시킬수 있다고 보오.》 처녀는 침묵했다. 이야기는 동강났다. 은호는 윤심에게 자기가 그를 처음 만나던 때의 일을 이야기하고싶었다. 윤심은 아직도 그 잊지 못할 여름날에 자기를 도와나섰던 군인들중의 한 사람이 바로 자기앞에 서있는 은호라는것을 모르고있었다. 그리고 은호가 바로 그때 보았던 처녀과학자의 모습을 잊지 못해 지금도 그에게 높은 요구를 제기하고있다는것을 리해하지 못하고있었다. 하지만 은호는 끝내 그 이야기를 처녀에게 하지 못하고말았다. 처녀는 그와 헤여질 때까지 내내 시름겨운 낯빛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후 처녀는 한동안 실험을 진행하지 못했다. 무거운 낯빛으로 무엇인가를 고심하며 말없이 지냈다. 그러나 끝내 부식에 의한 표면화학조성의 변화에 따르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종전의 선광법에 대한 연구정형을 과학원에 올려보냈던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진것이였다. 은호는 쏟아져내리려는 눈물을 강잉히 참으며 자기를 향해 절규하듯 웨치던 처녀의 그 마지막 말을 뻐근한 아픔속에 상기했다. 《…묻고싶어요. 아니, 알고싶어요.》 은호는 그것이 처녀에 대한 자기의 사랑때문임을 이제 더는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할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사랑이라고 설명하기에는 그에게 가해진 타격이 너무도 아프고 절망적인것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박사도 방금 그것을 걱정하며 떠나간것이 아닌가. 가슴이 답답해와 은호는 방을 나섰다. 모든것이 추위에 굳어져버린듯 한 밖은 별스레 고요하게 느껴진다. 흰눈을 들쓰고있는 먼산도, 성에가 불리워 흰 차광막을 드리우고있는듯 한 사무실과 집집의 창문들도 묵묵해보인다. 다만 선광장의 소음과 함께 광석을 싣고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소리만이 기세차게 들려온다. 은호는 그 선광장가까이에 자리잡은 윤심의 실험실로 향했다. 산중턱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자그마한 실험실이다. 실험실안팎은 조용했다. 실험실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의 조수 철남이도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난로의 불은 죽어버렸는지 썰렁한 기운만이 어디라없이 감돈다. 은호는 창턱에 올려놓은 여러개의 화분중에 자그마한 꽃봉오리가 맺힌 쑥국화화분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보름전 윤심을 만나기 위해 여기에 왔을 때 철남이는 이 화분을 두고 떠들썩했었다. 《연구사누이의 성공을 앞두고 이 화분도 겨울에 꽃을 피우려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화분은 지금 자그마한 봉오리를 아직 터치지 못한채 썰렁한 방안에 놓여있다. 아마도 이 며칠째 실험실에 불을 지피지 못한듯 하다. 은호는 정적과 추위에 얼어붙어버린듯 한 꽃화분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윤심은 화분가꾸기를 즐겨한다. 바쁘고 지어는 구접스럽기까지 하는 실험을 진행하는 이 방에도 봄, 여름, 가을 지어는 겨울에도 꽃을 피우자고 노력한다. 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이 한겨울에도 윤심은 실험실안에 꽃을 피웠을것이다. 하지만 지금 꽃화분은 안타깝게도 봉오리를 맺은채 그냥 놓여있다. 한겨울의 추위에 옹송그려진듯 한 잎새들… 은호는 언제 불을 지폈는지 모를 난로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얼마 안있어 장작들이 탁탁 소리를 내며 불타기 시작하였다. 방안이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은호는 심란하던 마음이 한결 진정되는듯이 느껴졌다. 방안의 화분들도 별로 생기를 띠는듯이 느껴진다. 은호는 그 화분들에 물을 주었다. 물을 주던 그는 문득 윤심이 얼마전 자기가 말해주었던 그 《ㅍ》군 성동리에 간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동리는 여기서부터 수십여리 떨어진 산골마을이다. 어느날 출장길에 성동마을을 지나던 은호는 개울가를 지나다가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였다. 개울가옆에 쌓아놓은 돌담에서 부식된 《ㅎ》광석을 보게 된것이였다. 《ㅎ》광석은 어떠한 돌과 맞닿은 면이 더 부식되여있었다. (어째서 《ㅎ》광석이 부식되였을가?) 은호는 생각끝에 부식된 《ㅎ》광석과 그옆에 놓인 돌을 뽑고 다른 돌로 담을 쌓아놓았다. 알고보니 그 돌은 뒤산에서 굴러내려온 돌이였다. 그는 지체없이 성동마을뒤산에 올라갔다. 간단히 추산해보아도 그 매장량이 적지 않았다. 은호는 그 돌의 물리화학적성분을 분석해보면 윤심의 선광법을 완성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돌을 가져다가 윤심에게 주었었다. 하지만 윤심은 그 돌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해보고는 얼굴빛을 흐렸었다. 그 돌의 성분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또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들이 많아서 당장 리용해볼만한것이 없다는것이였다. 만약 굳이 그 돌을 리용하려 한다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 돌의 비밀을 밝혀내는 미지의 연구를 첫 발자국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것이였다. 그것은 얼마만한 시간과 노력이 들지 알수 없는 일이였다. 그리하여 윤심은 그 돌을 포기하고 종전의 자기 방법으로 돌아간것이였다. 은호는 모든것이 가슴아프게 끝나버린 지금 윤심이가 성동마을로 가지 않았을가 하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퍼그나 놀라왔다. 지금은 자기와 련결된 모든것을 무턱대고 부정하고싶을 처녀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더우기 그들은 언제 한번도 서로를 깊이 리해할수 있는 따뜻한 말을 나누어보지 못했다. 지금 처녀에게 남아있는것이란 너무도 모진 인간, 너무도 랭정하고 실무적인 인간에 대한 원망과 배척감뿐일것이다. 은호가 품고있는 처녀에 대한 따뜻한 감정은 나누어보지 못했고 증명되지 못한 혼자의 감정일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이제 영영 나누지 못할 외로운 감정이 될지도 모른다. 보통처녀의 보통감정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이라고 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로안에서 너울너울 타오르는 불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있는 이 순간은 호의심중에는 자꾸만 그가 성동리로 간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리유를 설명할길없는 그 예감앞에 은호는 당황해나고 의아해졌다. 무엇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것인지. 문득 은호는 윤심을 처음 만나던 그 여름날을 생각했다. 그 여름날에 대한 추억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것인지… 소뿔도 꼬부라든다는 삼복철의 한낮이였다. 그 뜨거운 여름철의 해빛속으로 행군해가던 은호의 소대는 무인지경의 어느 한 나무그늘아래서 잠간 휴식하게 되였다. 그때 은호는 부소대장으로 대오를 이끌어가고있었다. 강행군의 쉴참이라 찬물생각이 몹시 났으나 물통안의 물은 해볕에 달아 벌써 뜨스해져있었다. 정말 지독하리만치 무더운 날이였다. 은호는 샘물터라도 찾고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저쯤 앞길가운데에 서있는 자동차를 보게 되였다. 그런데 해볕이 쨍쨍 내리쪼이는 자동차적재함우에서 한 처녀가 안절부절 못하고있었다. 처녀는 적재함우에 실은 그 어떤 짐들을 들여다보며 거의 울상이 되여 부채질을 하고있었다. 이 삼복더위에 그늘도 찾지 않고 모지름쓰듯 부채질을 하는 처녀의 모습은 은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은호는 자동차에로 다가갔다. 보매 자동차는 고장이 난듯 싶었다. 운전사가 차밑에 들어가 수리작업을 하고있었다. 처녀는 더위에 빨갛게 익은 얼굴로 적재함우에 실은 화학기호와 라틴어글자가 붙은 시약통들에 다급하게 부채질을 하고있었다. 물을 길어다 뿌렸는지 적재함바닥에 물기가 즐벅하였다. 은호는 더 묻지 않고도 사연을 알아차렸다. 시약을 싣고오던 자동차가 고장나 해볕속에 서게 되니 시약들의 온도가 올라가고 그래서 처녀가 다급하고도 애처롭게 모지름쓰고있는것이였다. 《어데까지 가는 차입니까?》 처녀는 어느 연구소로 간다고 대답했다. 《온도가 높아지면 시약들이 변질될수 있는데…》 당황해지고 실망에 잠긴 처녀가 발깃해진 얼굴을 숙인채 울듯이 속삭였다. 은호는 처녀가 연구사임을 알아차렸다. 자기 사업에 대한 헌신성과 시간의 다급함에 쫓기는 처녀, 더위와 힘겨움에 지쳤으나 자기보다 먼저 시약들을 걱정하는 처녀… 은호는 처녀를 돕고싶었다. 아니,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운전사동지, 우선 차를 그늘아래 끌어다 세웁시다.》 사연을 들은 군인들이 떨쳐나 차를 밀고 나무그늘아래 들여세웠다. 그러나 차를 나무그늘아래 들여다 세우고 그냥 떠나자니 왜서인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자동차는 고쳐낼 방도가 막연했다. 운전사는 고장난 부속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처녀는 시간이 다급해 안타까와하고있었다. 이제 인가가 있고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큰길까지 나가자면 십여리길을 가야 한다, 거기까지 가야 다른 차편이라도 리용할수 있었다. 은호는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 말없는 눈빛에서 대원들은 부소대장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말없이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동차를 밀고가기로 하였다. 처녀와 운전사가 깜짝 놀라 반대하였지만 군인들은 막무가내로 운전사를 차안에 태우고 자동차를 밀고가기 시작했다. 평탄한 길에서는 쉬웠다. 그러나 올리막길에서는 자동차가 심술궂게 속을 태웠다. 고임목을 고여가며 목이 터지게 함성을 지르며 자동차를 한치한치 밀고 올라간다. 점점 힘이 진해간다. 온몸을 지지는듯 한 불볕, 점점 가빠오르는 숨결, 입안에 흘러드는 쩝쩔한 땀줄기, 얼른거리는 길바닥… 《군인동지들, 제발 이러지 말아주십시오.》 처녀의 울음섞인 목소리. 문득 자동차가 멈춰섰다. 은호는 처녀가 자동차를 막아선것을 알아보았다. 처녀의 달아오른 두볼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가슴속에 쩌릿하게 와닿는다. 《처녀동무, 우리 병사들이 이 불볕속에서 땀흘리며 훈련하는것이 무엇때문이겠소. 바로 연구사동무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겠소. 우리 병사들의 진정을 받아주오. 어서 갑시다. 처녀동무.》 처녀는 고개를 숙인채 입술을 짓씹으며 울었다. 은호는 어린애처럼 흐느끼는 처녀를 한옆으로 비켜세우고 구령을 주었다. 병사들은 바로 그렇게 십리길을 차를 밀고가 다른 차에 시약들을 실어주었다. 떠나는 순간 처녀는 군인들의 소속을 물었다. 은호는 빙그레 웃었다. 《우리야 조선인민군 군인들이 아닙니까. 그거면 되지요. 대신 연구사동무의 이름이나 압시다. 혹시 신문이나 방송에서 그 이름을 들을 때 축하를 보내줄수 있게 말입니다.》 은호는 그렇게 라윤심을 알게 되였다. 그후 인차 제대되여 대학에 입학한 은호는 그 처녀가 자기 대학의 선배라는것을 알아보았다. 대학기간에 학위를 받은 그의 사진이 대학영예게시판에 소개되여있었던것이다. 그때 은호는 아름답고 성실하며 열정적인 처녀, 군사복무시절 지성과 땀을 바쳐 도와준 한 처녀의 연구사업이 잘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기술과 부원으로 배치받은 광산에서 윤심을 다시 만날줄이야. 하지만 윤심은 은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마도 여러 군인들과 섞여있는 모습을 본탓일것이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어언 수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그날의 그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있는 처녀의 모습은 차츰 은호의 가슴속에 가장 소중하고도 정깊은 모습으로 비끼기 시작했다. 바로 그것으로 하여 은호는 처녀가 자기 창조물의 마지막약점을 극복하고 반드시 완전무결한 창조물을 내놓을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래서 그러한 높은 요구를 제기했던것이다. 하지만 처녀는 지금은 울면서 그를 원망하면서 가버렸다. 어쩌면 다시는 그와 마주서지 않자고 할지도 모른다. 은호는 자그마한 꽃봉오리가 맺힌 쑥국화화분을 생각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불기운이 어려서인지 그 봉오리가 한결 커진듯이 느껴진다. 그러자 가슴속에 무엇이라고 딱히 찍어말할수 없는 기꺼운 감정이 그들먹이 차오른다. 그래, 이 겨울에도 저 화분에는 꽃이 필것이다. 이 겨울에도 어쩔수 없는 자연의 섭리와 생의 본능에 따라 그리고 정성을 바치는 인간의 의지에 떠받들려 이르든 늦든, 크든작든 꽃을 피우고야말것이다. 그 어떤 생의 줄기찬 힘이 꼭 맺힌듯 한 꽃망울이 그것을 약속해주고있다. 바로 이 추위와 정적속에 피여난 꽃이기에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울인 인간의 정성과 사랑이 깃든 꽃이기에 저 꽃은 이제 가장 아름답고 귀중한 꽃으로 될것이다. 은호는 그 꽃우에 눈물에 젖었던 윤심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아플것이다. 괴롭고 힘겨울것이다. 하지만 언제인가는 피여나고야말 저 겨울꽃처럼 윤심도 그 아픔과 괴로움을 이겨낼것이다. 나는 그를 믿는다. 설사 그가 나를 영영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도 자기의 창조물만은 기어이 다시 완성할것이다. 그렇다. 나 하나의 사랑은 깨여질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보다 희망보다 더 귀중한것이 바로 우리 장군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강성대국을 건설해가는 이 땅에서 우리 과학자들이 지녀야 할 량심인것이다. 한점의 티도 없는, 사심없는 량심과 의리로 연구해낸 가장 완벽한 창조물만이 우리 장군님 구상하시는 강성대국건설에 참답게 이바지되는것이다. 이제와서 은호는 처녀가 성동리로 간것이라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고있는 자기를 느꼈다. 만약 그곳으로 간것이 아니라면 결코 어디인가에서 허무감과 원망때문에 울고만 있지는 않을것이라고 은호는 믿었다. 은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로안에 장작 몇개를 더 넣고는 실험실을 나섰다. 문가에서 윤심의 조수 철남이와 부딪쳤다. 그를 보자 철남은 꿈쩍 놀라 서버린다. 그의 얼굴에 당황함과 놀라움, 원망과 질시, 기대와 믿음의 복잡한 감정들이 일시에 날아지나간다. 그는 그만큼 자기를 감출줄 모르는 깨끗한 청년이다. 은호는 자기를 지켜보며 굳어진듯 서있는 청년의 어깨를 힘주어 꾹 쥐여주었다. 《연구사동무가 올수 있으니 방에 불을 뜨뜻이 때놓으라구.》 청년은 대답할 말을 못 찾고 서버리였다. 은호는 말없이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자기의 등뒤에 와닿는 청년의 생각깊은 시선을 분명히 느꼈다. 어느덧 대지우에 저녁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한다. 문득 은호는 성동리로 가고싶어졌다. 이 순간 그는 자기의 믿음을 몹시도 확인하고싶어졌다. 혹시 처녀가 그곳으로 간것이 아니라면 그곳의 광석을 가져다가 실험실에 말없이 전해주고싶어졌다. 얼마후 그는 자동차를 타고 성동리로 향했다. 운전칸에 앉은 그는 주의깊이 마주오는 사람들을 살폈다. 성동리로 오가는 길은 오직 이길뿐이다. 자동차앞으로 숱한 얼굴들이 마주 온다. 아버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토끼뜀을 하며 마주오는 처녀애, 자동차불빛이 비쳐오자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입을 벌리고 좋아라 웃는다. 윤심의 어린 시절에도 저런 때가 있었겠지. 한 청년이 처녀와 마주서서 이야기하다가 너부죽하고 든든한 어깨로 자동차불빛을 막아 처녀를 슬쩍 가려준다. 자기 애인을 뭇눈길이나 불빛앞에 내세우기 두려운 모양이다. 애인에 대한 보호심때문일가, 아니면 애인의 수집음에 대한 남성의 책임감때문일가. 분명 다정한 한쌍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의 살점같은 창조물을 두둔해주는 남자가 되지 못했을가. 모든것이 다 윤심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슬그머니 부끄러워나기까지 했으나 어쩔수가 없었다. 까르르 웃으며 마주 오는 처녀들, 씨엉씨엉 걷는 남자들… 하지만 윤심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공연한 옥생각에 사로잡혀 이러는것이 아닐가. 만약 그가 성동리로 간것이 아니라면. 아니, 그래도 나는 내 할바를 할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눈은 여전히 길가의 얼굴들을 다급하고도 안타깝게 더듬는다. 그러다가 그는 흠칫 놀라며 굳어졌다. 고개를 숙인채 완강하게 걸어오고있는 낯익은 모습. 윤심이다. 전조등빛에 눈이 부신듯 멈춰서더니 길 한옆으로 비켜선다. 그 잔등에 묵직해보이는 배낭이 지워져있다. 그 모습앞에 은호는 환성이라도 올리고싶은 심정이였지만 뜻밖에도 눈가에는 눈물이 핑 하고 고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기쁨인지 감동인지 아니면 고마움인지 아픔인지… 아니, 그 모든것이 다 합쳐진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운전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차를 세워주십시오.》 그는 자동차에서 내려섰다. 저쪽 어둠속에서 또다시 완강하게 움직여가고있는 눈에 익은 그림자를 향해 목청껏 웨쳤다. 《윤심동무―》 처녀는 그 자리에 못박힌듯 움직일줄 모른다. 마치 겁이라도 내듯이 길 한옆으로 물러서서 은호쪽을 지켜본다. 은호는 처녀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윤심동무.》 은호는 또다시 불렀다. 처녀는 그가 누구라는것을 안듯 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까닭없이 굳어진채 움직이지 않았다. 뒤미처 차를 돌려세운 운전사가 그들쪽으로 전조등빛을 환하게 비치며 다가왔다. 마치 조명을 받으며 무대우에 나선듯 그들은 그 불빛앞에 굳어져버렸다. 두 사람중 누구 하나도 선뜻 말을 떼지 못했다. 은호가 먼저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윤심동무, 짐을 차에 실읍시다.》 윤심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필요없어요. 어서 가던 길을 가주세요.》 그는 은호가 짐을 빼앗기라도 할듯 그것을 더 바싹 당겨지였다. 《그러지 말고 어서 타오. 난 동물찾아 성동리로 가던 길이요.》 그 순간 은호는 자동차불빛속에 처녀의 두눈이 불이라도 뿜듯 번쩍이는것을 알아보았다. 《이젠 이 길을 갈수밖에 없는 한 처녀를 조롱하고싶은게지요.》 《윤심동무!》 《그만해요. 어서 가세요. 난 동지가 끌고온 저 차에는 타지 않겠어요.》 《그럼 성동리에는 왜 갔던거요?》 《량심때문이예요. 물론 동지는 제가 한쪼박의 량심도 없이 명예만을 아는 과학자로 만들어버렸지만… 난 모든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한이 있어도 자기를 증명하겠어요. 제발 부탁이예요. 얼마동안만이라도 나를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내가 모든것을 다 잊고 연구에 몰두할수 있는 그때까지만이라도 말이예요.》 절규하듯 울리는 처녀의 말이였으나 은호는 가슴이 찌르르해왔다. 그 절규속에서 그는 이미 모진 고통과 번민속에서 새 길을 결심한 처녀과학자의 모지름을 분명히 들었다. 다만 거기에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가장 큰 아픔을 당한 처녀의 자존심의 몸부림만이 남아있었을뿐이였다. 아픔과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처녀는 이미 새 길을 떠난것이였다. 은호는 처녀의 그 눈물이라도 흘릴듯 한 얼굴에서 그것을 느꼈다. 《그럼 자동차에 싣지 말고 동무 가지고가오. 내가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도와줄거요. 수년전 그 여름날 시약통에 부채질을 하던 동무의 모습이 군인들을 불러왔듯이말이요.》 은호는 처녀의 눈이 놀라움과 의문으로 한껏 커지는것을 보았다. 《동진… 동진 누구세요?》 《동무의 그 선광법을 반대한 사람이지. 그리고 그 여름날에 동무의 시약을 위해 자동차를 밀고간 군인들중의 한 사람이구.》 《예!》 《다른게 있다면 그 군인이 오늘은 군복을 벗었다는 그것뿐이요.》 《그럼 동지가!》 처녀는 말을 더듬었다. 《명심하오. 그날 동무를 도와준 수많은 군인들중의 그 누가 동무곁에 있었다고 해도 동무의 지금과 같은 선광법에 찬성을 안했을거요. 어서 떠나오. 그 뜨거운 불볕속에서도 동무의 그 자동차를 떠밀어주던 그 군인들을 생각해보오.》 은호는 처녀가 밀치우기라도 한것처럼 비청거리는것을 보았다. 마음의 충격에 지친 몸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듯 싶었다. 은호는 가슴이 아팠다. 나는 왜 이런 때 모든것을 따뜻하게 말해주지 못한단말인가. 그 잊지 못할 여름날의 사연도 나는 가장 즐거운 자리에서 따뜻하게 말해주리라고 별러오지 않았던가. 자기 자신이 한스럽기도 했다. 이제라도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말로 그리고 애인들이 주고받을수 있는 평범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로 처녀의 마음을 풀어주고싶었다. 그 충동이 너무도 강해 심장이 마치 첫 고백이라도 앞둔 때처럼 후두둑 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은호는 모진 힘을 짜내여 돌아섰다. 나자신부터 가이 고비를 넘어서야 한다. 힘겹더라도 이겨내야 한다. 박사도 이야기했지. 가장 공고한 사랑은 넘기 힘든 시련을 이겨낸 사랑이라고. 그래, 추위를 이겨내고 피여난 겨울꽃이 진귀하듯이 가장 아름답기를 바라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앞에 가장 높은 요구를 제기할줄 알아야 한다. 은호는 천천히 돌아섰다. 자동차에로 다가갔다. 힘겨워 오르지 못하는 사람모양 잠시 서있다가 자동차에 올랐다. 《떠납시다.》 은호는 그 말을 하는 자기의 갈린 목소리가 마치 남의 목소리인듯 낯설게 들려왔다. 운전사가 모든것을 리해한듯 천천히 차를 앞으로 몰아간다. 전조등빛앞에 아직도 고개를 숙인채 서있는 처녀의 가냘픈 모습이 드러난다. 눈굽이 쿡 달아오르는듯 한 격정을 느끼며 은호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나 망막에 새겨진 처녀의 모습은 칼로 우비고 새긴듯이 모질게도 눈앞에 어려온다. 어느덧 차가 처녀를 스쳐지나 도로를 달리지만 그 모습은 눈앞에서 그냥 서물거렸다. 은호는 끝내 차를 멈춰세웠다. 《운전사동지, 미안합니다. 먼저 가주십시오. 전 걸어가겠습니다.》 젊은 운전사였지만 그는 모든것을 다 리해한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자동차가 성이라도 난듯 윙하고 떠나갔다. 은호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제 처녀가 무거운 배낭을 지고 이 길을 완강하게 걸어오리라는것을 믿었다. 아픔에 울지언정 다른길을 갈수 없는 처녀가 아닌가! 은호는 자기가 수년전 그날처럼 처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싶어한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렇게 차에서 내려 그와 함께 걷는 심정으로 걷고있다는것도 깨달았다. (철남이가 실험실안에 불을 뜨뜻하게 때놓았을가. 혹시 그새 쑥국화가 피여나지 않았을가.) 은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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