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8(2009)년 제12호에 실린 글

   

(전국군중문학작품현상모집 2등 당선작품)

     

       단편소설

                                                                 한  일  화      

             

아버지!

조국을 떠나시기 전날 아버지는 저의 손목을 잡고 모란봉의 돌계단을 오르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대학졸업이란 사회생활의 첫 계단이라고… 전 그날 의미깊은 그 말속에서 이 딸이 조국에 필요한 참된 인간이 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웅심깊은 뜻을 읽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졸업이 두려워요.

꿈많던 대학시절과 작별해야 하는 아쉬움만은 아니예요. 이제 사회에 나가면 내가 과연 대학졸업생구실을 할수 있겠는지…

졸업증을 가졌다고 제구실을 다하는게 아니지 않나요.

졸업론문을 준비하는 과정에 전 자신이 할바를 찾게 되였어요.

그것은 화학공업에서 없어서는 안될 ST계렬의 첨가제였어요. 화학공장들에서 《ST―36》첨가제를 수입에 의존한다는게 아니겠어요.

내가 한번 그 문제를 해결해보리라.

저의 결심에 학급동무들은 깜짝 놀라더군요.

이발도 안 나온 갓난애가 뼈다귀를 씹겠다는것과 같다나요. 하지만 저는 물러서고싶지 않았어요.

지상공문과 같은 론문을 내놓고 졸업증을 받고싶은 생각은 꼬물도 없으니까요.

강선의 로동계급이 초고전력전기로를 자체로 만들어야 했을 때 어떻게 했어요?

하면 된다는것이 그들의 결심이고 의지가 아니였나요. 나도 그들처럼 살고싶었어요.

ST계렬의 첨가제에 대한 자료작업을 하던 어느날 10여년전 화학공업분야를 진감시키고 화학비료생산에서 비약을 일으킨 《ST―18》첨가제를 연구한 연구사가 바로 나의 아버지라는것을 알았을 때 전 그만 심장이 멎는듯 했어요.

제가 왜 훌륭했던 아버지의 과거를 여직껏 몰랐을가요.

하긴 10여년전이면 제가 응석받이시절이였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에 아버지는 과학지도기관 일군이
였으니 그럴수밖에요.

아버지의 서재속에 깊숙이 파묻혀있던 연구자료들을 들추던 제가 무엇을 찾은줄 아세요. 소학교 4학년때인가 저의 생일날 안겨주었던 들국화 세송이(지금은 식물표본처럼 말라있음.)와 《귀여운 나의 딸 송미의 래일을 축복한다.》라고 쓴 아버지의 활달한 필체가 실험일지 3권 915페지에 끼여있는게 아니겠어요. 특별히 화려한 꽃은 아니지만 안온한 온실이 아니라 비바람 사나운 들가에 피여 애국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꽃이여서 아버지는 하많은 꽃들중에서 들국화를 사랑하셨고 이 딸도 그 꽃처럼 살라고 저에게 준거지요.

철없던 그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그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겠어요.

아버지! 전 알아요.

이제 걸어야 할 앞길에 가시덤불길도 있고 험한 벼랑길도 있을수 있다는것을…

허나 동요하거나 물러서지 않겠어요.

 

×

 

석양이 설핏하게 비끼는 저녁무렵에야 송미는 대학으로 들어섰다.

지하철도역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온몸이 물먹은 솜마냥 나른했지만 《김일성종합대학》현판이 붙은 대학정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자 저도모르게 힘이 생겼다.

과학토론회에 출연했던 날로부터 어느덧 두달,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내준 고무에 찬 말들과 그속에 비낀 기대가 자기를 딴사람으로 만든것 같기도 했다.

수십리길을 걸었다지만 그 눈빛들, 그 마음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자기가 무척 불만스럽게 느껴졌다.

실험실에 들어서던 송미는 굳어졌다.

등을 돌려대고 선채 실험대를 유심히 살피고있는 밤색솜옷차림의 녀인의 모습이 몹시도 눈에 익었던것이였다.

《엄마?!》

녀인이 돌아섰다. 송미의 입에서는 탄성이 터졌다.

《엄마!》

어머니의 눈가에는 기쁨인지 원망인지 모를 표정이 비꼈다.

《인제야 오는구나.》

녀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깨를 그러안는 딸의 팔을 가볍게 밀어냈다.

《어제 밤에 집엔 왜 안 들어왔느냐?》

엄마를 만난 기쁨으로 한껏 밝았던 송미의 얼굴이 흐려졌다.

《엄마, 미안해요. 사실 성문화학공장에 갔다가 늦었어요. 시약을 받지 못해서 할수없이… 오전에 받긴 했는데 차가 없더군요. 그래서…》

《그래서 걸어왔다는거지.》

어머니는 딸의 시선을 피했다.

《아직 점심밥을 못 먹었지. 어서 밥을 먹어라.》

송미는 머리를 저었다.

《생각이 없어요. 오다가 꽈배기를 사먹었어요. 이렇게!》

다섯손가락을 꽃잎처럼 활짝 펴보이는 모양을 보며 미소짓던 어머니는 딸이 볼세라 눈굽을 훔쳤다.

어느덧 대학졸업반이라지만 아직도 유치원시절의 귀염둥이로 새겨져있는 딸이였다. 딸이 웃으며 말하는 꽈배기 다섯개가 왜 그렇게 눈물을 자아내는것인지.

어머니는 탁자우에 놓여있던 꾸레미를 헤쳤다.

궁금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고있던 송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양복이였다. 진한 자주빛에 세련된 형식의 옷모양이 확 눈길을 잡아끌었다.

《이거 누구거예요?》

《누구겠니, 고집쟁이 송미거지.》

《엄마!》

송미는 덮치듯 양복을 받아들고 몸에 대여보았다.

《한번 입어보렴. 졸업도 멀지 않았는데 사회옷이 있어야지.》

그 말에 송미의 손이 굳어졌다.

어머니는 양복을 차곡차곡 개여놓는 딸의 거동을 놀라서 바라보았다.

《왜 입어보지 않니?》

《엄마, 난 아직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옷을 입은 나를 상상해보지 못했어요.

이제 내가 무슨 일인가 해낸 다음에 입어볼게요. 아마 그때엔 정말 몸에 붙을거예요. 좋지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꾸나. 한데 졸업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 광성정보쎈터말이다. 네가 전국프로그람경연에서 1등한 전적까지 있다고하니 졸업담화할 때 제기하여 자기네한테 오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더구나.》

《…》

《졸업하구 꼭 화학을 해야만 하는게 아니지 않니. 화학은 어쩐지 녀자들 직업같진 않구나. 콤퓨터를 마주하고 일하는게 깨끗두 하고…》

송미는 어머니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어머니의 얼굴에도 어느덧 실주름이 흐른다. 젊었을 때 어머니의 사진에는 뭇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에 내려앉은 그물망같은 잔주름이 세월이 아니라 자기때문에 생긴것인지도 모른다.

송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찌르르 해났다.

《어머니, 나야 화학이 전공분야가 아닌가요. 그런데 남의 일을 하겠어요. 엄만 내가 남만큼 못하면서 남의 흉내를 내는걸 바라지 않겠지요?》

말문이 막힌 어머니는 한옆으로 돌아섰다.

《자, 빨리 밥이나 먹어라.》

밥꾸레미를 풀어놓던 어머니는 깜빡 잊었다는듯 가방에서 하얀 종이장을 꺼냈다.

《자, 아버지에게서 확스가 왔다.》

《확스요?》

아버지가 해외에 나가 일하시는지는 몇해 되였지만 확스를 받아보기는 처음이였다.

호기심에 휩싸인채 송미는 서둘러 접힌 종이장을 펼쳤다.

《송미, 너의 결심을 지지한다. 빨리 모든 자료를 가지고 ○○연구소에 찾아가 류한철연구사를 만나거라. 도와줄것이다. 아버지.》

몇줄 안되는 내용이였지만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로 들려오는듯싶어 몇번이고 읽어보았다.

원탁에 밥을 차려놓은 어머니는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뭐 특별한것이 있니?》

《엄마, 류한철연구사가 누구예요?》

《류한철?!… 그전에 아버지가 연구사업을 할 때 조수가 있었는데 이름이 류한철이라고 했던것 같구나.》

《조수요?!…》

어머니는 머리를 갸웃한채 생각에 잠긴 딸을 독촉했다.

《식기 전에 어서 밥이나 먹어라.》

송미는 어머니가 쥐여주는 수저를 받았지만 류한철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

 

송미는 부풀어오르는 그 어떤 행운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갔던 류한철에게서 랭대를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연구소는 송미가 예상했던것보다는 달리 아담하면서도 화려했다.

3층짜리건물의 외형은 수수했지만 안에 들어서니 더없이 웅장하고 화려했다.

접수실에는 송미보다 어려보이는 단발머리처녀가 앉아있었다.

연구소의 위엄을 시위하듯 무던히도 깐깐히 송미의 학생증을 들여다보며 콤퓨터에 무엇인가를 기입했다. 그리고나서야 예쁘장한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우며 류한철연구사의 방을 가리켜주었다.

류한철은 큰키에 비해 얼굴이 갱핏한 사람이였다.

그는 송미가 내놓는 자료는 본체도 않고 찾아온 사연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이윽고 뚜껑이 바랜 자료들을 한장한장 펼치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쏘는듯 한 그의 눈빛은 책장우에서 꼿꼿이 굳어졌다.

《그럼 학생이… 송문호동무의 딸이로구만.》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송미는 당황했다. 자기가 찾아온것이 류한철연구사에게 예상치 않은 큰 충격으로 되였다는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것이였다.

《저… 아버지가 꼭 가보라고 하기에…》

《아버지가?!》

희슥한 눈섭밑에서 반짝 불이 켜졌다. 그것은 일순간이였다. 다시금 착잡한 생각에 잠긴듯 류한철은 자료철을 번지기 시작했다. 무슨 흠집이라도 끄집어내려는듯 글자 하나, 수자 하나하나를 거듭 훑어보는것이였다. 숨가쁜 침묵이 흘렀다.

한참만에야 류한철은 자기앞에 앉아있는 송미의 존재를 느낀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걸 두고 가라구, 내가 좀 볼수 있게.…》

속을 조이며 앉아있던 송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히 계십시오.》

《후에 내가 련락하지. 그러나 기대는 가지지 말라구.… 그리구 권고하건대 연구쩨마를 바꾸도록 하오.》

《예?… 그건?》

송미는 입이 얼어들어 류한철의 수심에 잠긴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류한철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후날 다 이야기하지.…》

밤은 송미에게 있어서 사색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고요가 깃들고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에 아기별들이 초롱초롱 돋는 때면 아름다운 환상이 활짝 나래를 펼치였다. 그 날개를 펴고 창공높이 훨훨 나느라면 눈앞에 새롭게 펼쳐지는 신비의 세계가 황홀하여 모든것을 잊는 그였다.

하지만 류한철을 만나고 온 날부터 송미의 환상의 연은 실이 끊어지였다. 열흘이 지났건만 류한철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정말 실이 끊어진 연이 되고말았는가. 찾아가고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었으나 간신히 감정을 누르면서 자기의 연구사업에만 몰두했다.

고즈넉한 실험실의 창가에는 하얗게 성에가 내불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송미는 측정기에서 눈길을 뗐다.

《오늘도 여기서 또 밤을 새겠니?》

학급의 녀동무였다. 송미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너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갛게 됐니?》

대답할새도 없이 송미의 이마에 손을 대여보더니 펄쩍 놀래였다.

《아니, 불덩이같구나. 너 큰일 나겠어.》

송미는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조용해.》

《당장 내가 너의 집에 전화를 할게, 어머니한테 알려야지.》

송미는 녀동무의 손을 꼭 쥐였다.

《그러지 말아. 좀 피곤해서 그런거야.》

《피곤이 다 뭐니, 불덩이같은데. 그리구 요새 네 얼굴색이 말이 아니야.》

송미의 손을 뿌리치려던 녀동무는 자기의 손을 꽉 틀어잡는 바람에 눈길을 들었다.

《영심아, 그래두 난 오늘 정말 기뻐. 성과가 있거던.》

《그게 뭔데?…》

《난 방금 〈ST―36〉을 성공할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어. 물론 실험은 해봐야 하겠지만 거의나 확고하게 결과가 나왔어.》

기쁨으로 환히 빛나는 송미의 얼굴을 홀린듯 바라보던 녀동무는 호― 긴숨을 내쉬였다.

《내가 총각이라면 너한테 홀딱 반하겠다. 넌 정말 이악쟁이구… 훌륭해.》

《얘두 참.》

두 처녀는 밝게 웃었다. 그 웃음속에 송미는 모든 피로가 다 날려가는듯싶었다.

별안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서는 사람을 바라보던 송미는 깜짝 놀랐다.

류한철연구사였던것이다.

《여기 있었구만. 대학이 하도 크다나니 찾기가 헐치 않군.》

류한철은 어깨에 멨던 묵직한 가방을 내려놓으며 소탈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련락하시면 제가 찾아가려고 했는데…》

《뭘, 이렇게 바람도 쏘이는거지.》

류한철의 스스럼없는 태도에 송미는 어느덧 긴장이 풀리였다.

두사람의 모습을 번갈아보던 녀동무는 살며시 자리를 떴다.

실험실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류한철이 송미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괜찮구만.》

류한철은 실험탁을 정리하는 송미를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난 오늘 송미한테 다시한번 권고하려고 왔소.》

송미는 심중한 빛이 어린 류한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ST에서 손을 떼라구.》단도직입적이였다.

《손을 떼다니요?…》

류한철은 송미의 시선을 피하듯 창가에서 얼굴을 돌렸다.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ST가 결코 헐하지 않다는거요. 시간과 품이 너무 많이 들수도 있고 예상치 않았던 일에 부딪칠수도 있는데… 송미야 졸업을 앞두고있지 않나.》

《…》

류한철은 송미의 표정변화를 유심히 살폈다.

송미의 심중은 착잡했다. 류한철이 도와줄것이라던 아버지의 확스가 떠올랐다. 아버지와 함께 10여년동안 ST를 연구했다고 했지. 그사이 무슨 일인들 없었겠는가.

송미는 류한철의 무뚝뚝한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전 쉽게 생각하고 떠난것이 아닙니다. 힘들다고 해도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하고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관심속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일한다면 그 과정은 결코 고통과 시련이라고 말할수 없다고 봅니다. 물론 제가 아직 깊은 체험은 없지만… 전 저를 희생한다고 생각해본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류한철은 아무런 응대가 없었다.

《저… 들국화가 생각나십니까?》

《들국화?!…》

어째서인지 류한철은 놀라는듯싶었다.

《실험일지 3권의 915페지에 있는… 들국화말인가?》

《예.》

류한철은 혼자소리처럼 입을 열었다.

《그날이 9월 15일이였지. 그래서 915페지에…》

깊은 감회가 비낀 목소리였다.

《선생님, 전 그 들국화 세송이를 안고 떠났습니다. 저를 키워준분들의 기대가 절 이 길에 세운겁니다.》

《꼭 ST를 해야만 하는건 아니지 않나?》

류한철의 어조에는 완강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을 느낄수록 송미의 마음속에서 큰 목소리가 울리고있었다.

《선생님, ST를 해야 한다는걸 알면서도 외면한다면… 전… 전 저를 키워준…》

《…》

류한철은 더이상 말이 없었다.

한참후에야 류한철은 모든걸 다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가지고온 자료보따리를 책상우에 펼쳐놓았다. 자기의 연구자료와 송미의 연구자료를 하나하나 대조해나가면서 설명을 하는 류한철의 이마에 흥건하게 땀이 내배였다.

그의 설명을 듣는 송미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었다.

드디여 류한철의 길죽한 손가락이 6번공정에 가서 멎었다.

《문제는 여기요. 여기 이 6번공정은 RC가스방출을 피할수 없는 공정이요. 말하자면…》

송미는 연구과정에 어렴풋이 느꼈던 그것이 피할수 없는 사실임을 뚜렷이 느꼈다. 그렇다면…

류한철이 뜨직뜨직 입을 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엔… ST시험은 불가능하오. 그래서…》

그래서 이 연구사도 연구를 중단한것인가.

왜서인지 송미는 마음이 차츰 진정되는것을 느끼였다.

안개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던 물체가 선명하게 드러난듯 한 시원한 맛이 났다.

그가 왜 ST연구사업을 중지하라고 그토록 만류했는지 이제는 명백해졌다.

이것은 생명을 내댈수 있는 위험한 일인것이다.

《그럼 아직… 방도는…》

말소리가 떨렸다.

《없소, 앞으로도.… 왜냐면 ST시험공정은 이 과정을 거쳐야 되기때문이요.》

그러면 답은 명백하다. 누구든 이 실험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ST는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한동안 두사람의 입이 켜지 않은 조롱박처럼 열릴줄 몰랐다. 한초한초가 한시간 맞잡이로 지겹게 흘러갔다.

이 순간 송미의 눈앞에는 대학적인 학과토론무대에 올랐던 때의 일이 불쑥 되살아났다.

《다음은 화학부 유기화학과 5학년 송미동무가 〈《ST―18》계렬의 첨가제의 새로운 개발과 경제적효과성〉이라는 제목으로 토론하겠습니다.》

열기띤 흥분이 안개처럼 서리였던 강당은 물을 뿌린듯 조용해졌다.

송미라는 이름은 모두의 귀에 익었다.

대학예술소조공연무대에서 절찬을 받군 하던 처녀였다.

부드럽고도 깊은 감정으로 황홀한 음악의 세계를 펼치던 독창가수가 학부에서 손꼽히는 실력가이기도 하다는것을 모르는 학생은 없었다.

그러나 이런 공개적인 마당에 가수로서가 아니라 토론자로 나서기는 또한 처음인것이다.

《ST첨가제는 화학공업에서 생명소와도 같은 물질입니다.》

송미는 침착하고도 정열적인 토론으로 학생들에게 《ST》계렬의 세계를 펼쳐보였다.

전공이 다른 학생들에게조차 선명한 륜곽을 그려보이면서 그것이 새 세기 유기화학공업에서 가져올 새로운 전변에 대하여 력점을 찍어주는 토론은 청중의 심금을 틀어쥐였다.

《10년전에 발견된 〈ST―18〉첨가제는 그후에 발견된 MT촉매에게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MT는 〈ST―18〉보다 촉매적성능은 높습니다.

그러나 MT는 그 원료가 우리 나라에 없기때문에 현재는 수입에 의존하고있습니다.》

맑고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며 청중과 호흡을 맞추면서 절정에로 이끌어가는 세련된 웅변술조차 그 토론내용과 하나로 융합되여 과학토론이 아니라 잘 조화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듯싶었다.

《…전 〈ST―36〉을 졸업론문소재로 결심했습니다. ST가 매력있는 물질이면서 그것이 18로부터 36으로까지의 성공의 문을 쉽사리 열어주지 않으리라는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를 키워준 고마운 선생님들에게 드리는 진정의 인사이기도 하다는것을 절감하고있기에 택한 길이기도 합니다.

물론 성공에 대한 담보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알고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졸업론문은 졸업증을 받기 위한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수 있는가 하는 물음앞에 드리는 순결한 량심의 대답으로 되여야 한다는것입니다.

저는 그 길을 고난과 시련에 찬 길이라고만 생각지 않습니다. 좌절과 난관이 있을지라도 모진 광풍과 비바람을 억세게 이겨내는 들국화꽃처럼 아름답게 살겠습니다.》

처녀의 마지막말은 열렬한 박수속에 묻히고말았다.

요란한 맹세에 대한 찬양은 아니였다.

자기들의 마음속에 간직되여있던 소중한 그 모든것에 대한 열렬한 공감이 그대로 뜨거운 흥분의 물결로 뒤설레였다.

《멋있소!》

《훌륭해.》

학생들의 속살거림이 강당안에 퍼져갔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송미에게 연탁에 앉았던 교수가 말했다.

《토론을 잘했소.》

《고맙습니다, 선생님.》

명석한 두뇌와 함께 일단 자기 세계에 들어서면 뜨겁게 자기를 불태울줄 아는 열정을 잘 알고있는 교수의 축복은 봄빛처럼 따뜻했다.…

《저…》

《…》

《연구사동지, 〈ST〉를 위한 실험은 꼭 해야 되지 않습니까?》

《누가?… 동무가…》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듯 류한철이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류한철은 묵묵히 자료보따리를 다시 싸기 시작했다.

《연구사동지…》송미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연구사의 손을 붙어잡는 그의 두눈엔 물기가 그렁하니 내돋았다.

《전… 김일성종합대학 졸업반 학생입니다.》

담담하게 울리는 송미의 목소리에 류한철은 금시 섬광이라도 본듯 화뜰 몸을 떨었다.

급기야 온몸 전체가 강대나무마냥 뻣뻣이 굳어졌다.

《저는 졸업증이나 받자고 대학을 다니지 않았습니다. 나를 키워준 고마운 조국앞에… 제가… 대학졸업생구실을 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안되오.》

괴롭게 입을 연 류한철이 자료보따리를 힝 뺏다싶이 당겨가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에 밀리듯 밖으로 사라졌다.

송미의 두눈에서 걷잡을수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분했다. 그리고 억울했다.

그토록 커다란 희망을 가지고 몇달동안 애써온 그 모든것이 여기서 수포로 돌아갈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나라에 많은 리익을 줄수 있는 연구사업을 놓고 주저하고있다는것이 분했다.

《아버지, 전 아버지와 연구사업을 함께 한분이고 지금껏 과학연구를 해온분이니 제가 거울처럼 자기를 비추어볼수 있을거라구만 믿었어요.

그런데… 그 거울이 깨졌어요. 난… 난… 나의 새로운 거울을 만들겠어요.》

송미는 탐구의 길에 실패와 난관이 많다해도 능히 이겨낼수 있다고 믿어온 자신에 대한 믿음이 이 순간 더욱 든든히 심장속에 자리잡음을 느꼈다.

 

×

 

그로부터 열흘동안 송미는 《ST―36》의 실험공정들에 대한 가설을 세워보았다. 그의 입에선 웃음이 사라졌고 말도 없어졌다. 원래 《ST―18》까지의 실험공정설계에 대한 자료는 있었지만 《ST―36》은 완전히 새로운 실험공정을 요하는것이였다. 공정설계는 문제가 아니였다. RC가스방출을 어떻게 막는가 하는것이였다. 그걸 막지 않고서는 《ST―36》은 그림의 떡이다.

화학공업이라고 하면 그 어느 분야보다 가스방출이 많은 분야일진대 그에 대한 대책이 없이 공장들을 운영할수야 없지 않는가.

송미는 이튿날부터 인민대학습당의 책속에 파묻혀있었다. 인류가 생겨 화학공업의 발전을 위해 기울인 공적들을 집대성한 저서들과 응용편람들을 파고들자니 절대적으로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도 파야 했다.

시간은 송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정하게 흘렀다. 곱던 얼굴이 살이 빠져 해쓱해졌고 조갈이 든 입술엔 덕지까지 붙어 보기에도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대출원들이 분주히 움직였건만 송미를 만족시킬만한 자료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긴 《MT》계렬의 첨가제를 개발한 나라들은 많았지만 그것마저도 극비에 붙인것만큼 자료를 람발할리가 만무하였다.

온몸의 기운이 깡그리 새여나간듯 한 허탈감을 안고 밖으로 나섰을 때는 저녁어스름이 자리를 펴기 시작한 때였다.

허청거리는 다리를 내짚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기둥처럼 송미를 받쳐주었다.

생기없는 눈길을 들어 바라보니 어머니였다.

《송미야!》

《엄마!》

송미를 부축한 어머니의 얼굴은 식은 쇠덩이처럼 컴컴하였다.

《요새 네 꼴이 어떻게 된줄 아냐.》

어머니에게 온몸을 내맡긴 송미는 어설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엄마, 난 괜찮아요. 누군가 말했지요. 사람은 풀솜처럼 날려가기 전까지는 자기 할바를 해야 한다구요.

그래요, 난 주저앉아선 안돼요.

아이, 군고구마냄새… 엄마, 나 군고구마 먹고싶어.》

어머니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떡이였다.

《그래… 그래, 내 인차 사오마.》

송미를 야외의자에 앉힌 어머니는 달짝지근한 냄새를 풍기는 군고구마매대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미구에 군고구마 한봉지를 들고 나타난 어머니는 송미의 손에 따끈한 고구마 한개를 쥐여주었다.

게걸든 사람모양으로 고구마를 한입 문 송미가 어머니에게 생긋이 웃어보였다.

《어머니, 고마와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어머니의 눈가에선 눈물이 반짝이였다.

 

×

 

송미의 마음은 하늘을 날듯 기뻤다.

그렇게도 애타게 찾고찾던 《ST―36》의 RC가스를 제거할수 있는 문고리를 잡아쥐였던것이다.

그날 하루밤이라도 편안히 쉬라는 어머니의 곡진한 만류를 뿌리치고 과학원으로 달려간 송미는 그곳 과학자들로부터 청원광산의 ㅍ광이 탄광의 가스제거제로 쓴다는 말을 듣게 되였다.

탄광의 가스제거제로 쓴다면 《ST―36》에서 나오는 RC가스도 제거할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희망을 안고 기대를 안고 송미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평양에서 청원광산까지는 수백리 잘되는 거리였다. 수백리면 어떻고 수천리면 어떠랴.

RC가스를 제거할수만 있다면 천리, 만리라도 달려갈 송미였다.

반백의 광산공업시험소의 소장은 송미의 말을 듣더니 일산화탄산가스나 RC가스나 성분이 거의 같으므로 ㅍ광으로 얼마든지 제거할수 있다면서 가스제거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ST―36〉만 성공하면 나라의 화학공업이 큰 걸음을 내짚는다니 나도 기쁘구만. 꼭 성공하라구.》

《고맙습니다, 소장동지.》

잔등에는 혹처럼 큼직한 배낭이 매달려 연약한 송미의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눌렀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났다 한들 이보다 기쁘랴.

 

×

 

이틀후 송미는 ○○연구소를 찾아갔다.

접수실에는 전의 그 처녀가 아닌 딱딱한 표정의 장년사나이가 앉아있었다.

류한철연구사는 출장을 가고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송미는 무엇인가 마음속 한귀퉁이가 허물어져내리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가. 혹시 자료는 남겨두고 떠나지 않았을가.

송미는 과학부소장을 만났다.

송미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난 40대의 젊은 부소장은 사람 좋게 보이는 넓은 얼굴에 가득히 미소를 담았다.

《류한철선생 말이요? 선생은 닷새전에 〈ㅂ〉화학공장으로 떠났소. 1 0년전에 채 끝내지 못한ST연구과제가 있다면서 지금 하고있던 연구사업을 뒤로 밀어놓고 말이요.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건데 S
T가 바쁘다면서…》

과학부소장은 해쓱하게 질린 송미의 얼굴을 일별하자 눈이 둥그래졌다.

《어디 편치 않은게로구만.》

송미는 가까스로 자기를 다잡았다.

《아니, 아닙니다.》

과학부소장은 자기나름으로 송미의 내심을 읽은듯 머리를 끄떡였다.

《참 훌륭한분이요. 우리도 어떻게 하나 도와드리고싶소. 이번 ST연구가 잘만 되면 좋겠는데… 참, 무슨 일로 왔다구?》

송미는 될수록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저… 떠나면서 무슨 자료를 맡겨놓은것이 없습니까?》

《아니, 떠나기 전에 여기서 헤여졌는데 다른 말은 없었소.》

송미는 잔등에 바위돌이라도 진듯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돌아가겠습니다.》

《안됐구만. 언제 돌아오겠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오오.》

송미는 대리석계단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왜 갔을가. 그토록 실험을 반대해온 그가 무엇때문에?

이상한 예감으로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안된다고 통나무 자르듯 하고 사라져버리던 그의 꺽두룩한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2년전에 연구자료를 완성해놓고 지금껏 실험을 미루어온 그가?…

어쨌든 빨리 화학공장으로 가야 했다.

송미는 지금껏 다지고다져온 결심을 새로이 가다듬으며 발걸음을 내짚었다.

 

×

 

다음날 오후에 콤퓨터를 마주하고 6번실험공정을 위한 망자료들을 깐깐히 검토해나가던 송미는 어머니가 자기를 찾아왔다는 전달을 받았다.

(어머니가 무엇때문에?!…)

간밤에 집에 들어가지 않아 어머니가 무척 걱정을 했겠는데…

송미는 한달음에 대학정문으로 나갔다.

그는 승용차앞에 서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

어머니의 얼굴에 초조감이 비낀것을 보고 송미는 의아해했다.

《빨리 타거라.》

어머니는 딸이 승용차에 오르는것을 거들어주고는 서둘러 문을 쾅 닫았다.

차는 목적지를 알고있는듯 거침없이 달렸다.

《무슨 일이예요? 어디로 가세요?》

대답없이 차창을 내다보던 어머니는 딸이 팔을 건드려서야 화닥닥 놀랐다.

《음, 류한철선생이 널 찾는다.》

《류한철선생님이?!…》

너무나도 예상치 않았던 말에 송미는 처음 한순간 얼떨떨해졌다.

어느새 차는 적십자종합병원 정문을 통과하고있었다.…

계단을 올라서면서 어머니는 어리둥절해서 따라오는 딸에게로 돌아섰다.

《어제 저녁에… 류한철선생이〈ㅂ〉화학공장에서 여기로 긴급후송되였는데… 의식을 차리자마자 너를 찾았다누나. 어서 만나거라.》

어머니가 호실문을 열어주었다.

방에 들어선 송미의 눈에 안겨오는것은 가운데 놓인 침대와 산소공급기, 인공호흡장치며 그 주위에 둘러서있는 사람들이였다.

연구소 부소장과 의사인듯싶은 사람들이며 측정기의 눈금을 예리하게 살피는 간호원처녀 등 모두가 위생복차림이였다.

그들은 송미를 보자 기다리고있은듯 자리를 내주었다.

송미는 침대에 누운 해쓱하고 파리한 류한철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담당의사인듯 한 사람이 류한철에게 뭐라고 속삭이였다. 류한철이 힘겹게 눈을 떴다.

누군가의 손이 송미를 침대머리로 떠밀어주었다.

가깝게 다가서는 송미를 알아본듯 류한철의 얼굴에 한가닥 생기가 감돌았다.

류한철은 까칠하게 타든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송미… 유독성가스를 제거할수 있는…》

입술사이로 새여나오는 말들을 송미는 가까스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수 없었다. 단지 심장이 금방 흉벽을 헤치고 튀여나올듯 쿵당거릴뿐이였다.

류한철은 눈빛으로 의사를 찾았다. 이미 내용을 알고있은듯 의사가 침대밑에서 두툼한 자료철을 꺼내더니 송미에게 내밀었다.

《받소.》

송미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는 그 자료철이 이전에 자기가 류한철에게 넘겨주었던것임을 알아보았다.

그우에 낯설은 빨간 가위의 책 한권이 놓여있었다.

뚜껑에 《6번실험》이라고 쓴 글자가 송미의 눈을 자극했다.

류한철은 송미가 자료들을 받아든 모양을 보자 마음이 놓이는듯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모양을 옆에서 보고있던 과학부소장이 뜨거운것을 삼키며 한옆으로 돌아섰다.

《나도 얼마전에야 알았지만… ST실험의 6번공정은 RC가스방출공정이였소. 한철선생은… 그 실험공정만은 자기가 맡아하고 넘겨주겠다면서… 생명이 위험하다는걸 알면서도… 참…》

송미는 눈앞에서 폭탄이라도 터진듯 펄쩍 놀랐다.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요.》

《그런데 왜 그 말을… 이제야 합니까?》

부소장은 무겁게 긴숨을 내쉬였다.

《우리도… 실험뒤끝에야 이 모든것을 알았소.》

《아!》

송미는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그는 돌아서서 방을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가슴에 뜨거운 폭풍마냥 격정이 휩쓰는 이 순간을 그는 주체하기 어려웠다.

힘없이 현관을 나서던 그는 멈춰섰다.

마른 가지들이 살랑거리는 아름드리 수삼나무밑에 검은 회색의 외투깃을 세우고 서있는 녀인은 어머니였다. 얼굴은 추위에 얼어들었지만 장갑은 그냥 손에 쥔채 서있었다.

《어머니.》

어머니가 돌아섰다.

격정과 불안이 뒤엉켜 떨고있는 딸의 표정을 일별한 어머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10년전 아버지가〈ST―18〉을 성공시키고 지도일군으로 다른 사업을 맡은 다음 류한철연구사는 〈ST―18〉에 대한 연구사업을 계속 심화시켰다누나. 그 과정에 그보다 더 높은 가능성이 있다는것을 포착하고… 몇년동안 애써서 연구론문을 완성했지만 문제의 그 6번실험공정을 해결하지 못해 지금껏 실험을 진행하지 못했다누나.》

《그래서요?》

송미는 숨이 가빠옴을 느꼈다.

《아무리 에둘러가려 해도 6번공정의 실험은 피할수가 없는것이였지. RC가스방출속에서 실험을 한다는것은 천만번 위험한 일이였지. 하지만 이걸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불쑥 네가 뛰여들었지.》

《그런데 어머닌 그 사연을 어떻게 다 알고있어요?》

어머니는 나직이 긴숨을 내쉬였다.

《류한철연구사가 병원에 실려간 다음 연구소 당비서동지가 날 찾아왔댔다. 그러면서 얘기해주더라.

류한철연구사가 당위원회에 찾아와 가슴을 움켜쥐고 말했다고… 자기도 종합대학졸업생인데… 머리가 수그러진다고, 한 처녀대학생에게서 큰 자극을 받았다고.…

그러면서 실험장으로 떠났다누나. 그러나 당비서동지도 그 실험이 그처럼 위험한줄은 전혀 모르고있었더구나.》

도간도간 말마디를 꺾으며 예까지 말한 어머니는 곁에 있는 송미를 꼭 껴안았다.

《송미야, 다 자란 너를 보니 기쁘다. 난 네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를 다 안다. 다 들었다.》

《어머니.》

송미는 어머니품에 꼭 안겼다.

《류한철연구사동진 얼마나 훌륭한분이예요. 전 그에 비하면 아직도 초학도예요.》

《안다. 하지만 난 네 첫걸음이 장해서 그런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널 목마에 태웠을게다.》

그들은 서로의 높뛰는 심장소리를 감촉하며 오래도록 굳어져 서있었다.

 

×

 

눈부신 해빛이 창가로 흘러들고있었다.

창밖에는 전날에 내린 눈이 군데군데 녹으며 거밋한 땅이 드러나보였다. 이름 모를 뭇새들이 나무아지우에 앉아 깃을 다듬으며 청을 돋구고있었다.

입원한지 20일이 지났지만 아직 산보할 형편까지는 못되여 창가에 기대인채 이 모든 풍경을 즐겁게 바라보고있던 류한철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송미를 보자 놀랐다.

《이게 누군가? 송미!》

송미는 다소곳이 머리숙여 인사했다.

《선생님,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류한철은 자기앞에 서있는 처녀를 보자 눈빛이 흐려졌다.

《난 괜찮아. 힘들지?》

《저보다도 선생님이…》

《나야 뭐. 자, 어서 앉으라구.》

송미는 류한철의 후렁한 환자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몸도 불편하신데 어서 누우십시오.》

《응, 괜찮아. 오래간만에 푹 휴식을 한셈이야.

그런데 여기 병원사람들은 날 놔줄 생각을 안하누만. 뭐 자기네 말을 고분고분 들으니까 난 뭐 영 밸이 없는줄 아는가봐.… 허허허!》

송미는 류한철의 익살에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정신육체적으로 강한 이분앞에 떳떳이 나서야 한다고 자기를 채찍질하며 떠난 걸음이였다.

지금 이렇게 소탈한 모습앞에 서고보니 자기가 더 작아보이는것 같기도 했다.

송미는 들고온 구럭옆에 크지 않은 가방을 나란히 놓았다.

《선생님, 이걸 받아주십시오.》

《이건 뭔데?》

송미는 가방을 열고 ㅍ광에 의한 가스제거방법을 기록한 자료를 꺼내 류한철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류한철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ㅍ광에 의한 RC가스제거방법! 이건… 이건… 어디서 났소?》

《…》

수채구멍으로 빨리여들어가듯 자료에 시선을 박고있던 류한철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이걸 위해 그 먼델 다녀왔단 말인가. 장하오. 정말 장해!》

사랑스러운 눈길로 송미의 얼굴을 더듬는 류한철은 웃고있었다.

《이 방법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방법이요. 난 10년동안 고심을 하면서도 여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소. 확실히 송미는 나보다 나아. 어서 〈ㅂ〉화학공장으로 내려가오.》

송미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이 모든것은 선생님의것입니다.》

《뭐? 내것이라구?…》

류한철은 놀란 눈길로 송미를 쳐다보았다.

《선생님, 여기엔 선생님의 피와 땀이 깃들어있습니다. 10년전에 선생님이 바친 그 모든것과 이번에 선생님이 생명을 내대고 얻은 귀한 자료들을… 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류한철은 놀란 눈길로 송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걸 나한테…》

류한철의 얼굴에서 빛이 꺼졌다.

할 말을 찾지 못한채 서있던 류한철은 힘에 부친듯 침대에 기대였다.

송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 그럼 전…》

어쩐지 목이 메여올랐다. 자기가 할수 있는것 가운데서 가장 큰것을 해냈다는 긍지로 가슴이 후련해왔다.

그처럼 아름답게 그려보던것, 고심참담한 탐구의 나날에 마련한 그 모든것들을 선생님에게 아낌없이 드린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연구성과가 하루라도 빨리 은을 낼수 있다면, 하루빨리 강성대국의 문패를 달기 위해 대고조의 불길높이 전진하는 내 조국의 숨결에 한줄기 빛이라도 더해준다면 대학졸업증을 부끄럼없이 떳떳하게 받을것 같았다.

《송미!》

류한철이 침대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우리 밖에 좀 나가자구.》

《아니? 그 몸으로…》

《일없네. 바람을 좀 쏘이고싶구만.》

정원엔 달빛이 흘렀다. 호실들마다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드러난 거밋한 나무아지들은 숙연한 사색에 잠긴듯싶었다. 발밑에 얼음버캐가 밟히는 소리가 밤의 고요를 더한층 강조해주는것 같기도 하였다. 문득 류한철은 걸음을 멈추었다.

송미는 류한철의 번민에 잠긴듯 한 모습을 보며 자기가 뭔가 선생님을 욕되게 하지 않았는지 마음이 조여들었다.

《난 오늘 기쁘구만. 송미는 자기를 증명했거던. 들국화가 이젠 세송이가 아니라 백, 천으로 내 나라의 대지에 피는 모양이 막 눈에 보이거던.》

《선생님.》

《좀 걷자구.》

류한철은 송미의 찬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내짚었다.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멀리 은하수 흐르는 하늘가를 바라보던 류한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송미도 이제 졸업을 하겠지. 내가 거기서 떠난지도 30년 가까이 됐소.》

《…》

《나도 종합대학졸업생구실을 다해보려고 애써왔지. 그런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늙어버렸거던. 이 마음까지 말이네. 그런 나에게 송미가 경종을 울려주었소. 허… 큰일을 한 아들을 두고 기뻐하던 조국이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이라는걸 알고 키운 보람을 느낀다면 그보다 큰 행복이 어디에 있겠나.

래일은 바로 대학의 졸업증을 먼저 내드는 사람이 아니라 애국의 심장이 뜨거운 사람들을 기다리고있거던. 조국에 심장을 바치려는 송미와 같은 그런 사람을.》

송미는 울었다.

그의 가슴속에 자기가 정말로 인생을, 조국의 기대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배우고있다는 감격이 그들먹이 차올랐다.

《〈ST―36〉을 끝까지 성공시키라구. 내가 조수가 되여 힘껏 도울테니…》

《아니, 그건…》

《됐네, 오늘은 그 말을 그만두자구.》

별들이 빛나고있었다. 그 별들의 이야기가 귀전에 들리는듯싶었다. 뜨거운 심장이야말로 래일로 힘차게 달려가는 힘이라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이 언어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정으로 가슴에 흘러든다.

송미의 얼굴은 행복으로 빛나고있었다.

 

×

 

그로부터 두달후 졸업증을 품에 안은 송미는 《ㅂ》화학공장으로 떠났다.

그날 함박눈이 내렸다.

소담한 눈송이들이 눈부신 백설의 세계를 펼치며 내리고있었다. 송미를 태운 렬차가 눈발속에 사라질 때까지 그냥 손을 젓는 어머니와 류한철의 어깨에도 눈송이들이 내려앉았다.

《송미는 꼭 해낼겁니다.》

류한철의 말에 어머니의 얼굴에는 행복의 미소가 한껏 어리였다.

눈은 그냥 내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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