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12(2023)년 제6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너를 바치라
주 흥 건
(마지막회)
6
행정청사에 잇달려 자리잡은 과학기술보급실에서 정아가 나온것은 황혼이 깃들무렵이였다. 현관문을 나섰지만 왜서인지 발걸음이 무거워났다.
피곤이 몰려서일가? 하긴 점심에 공장합숙에서 밥술을 뜨는둥마는둥하다가 곧장 여기로 온 뒤 오후내껏 콤퓨터앞에서 시간가는줄 몰랐으니 머리가 어지러울만도 했다.
처음에는 자기의 연구자료를 구내망에 띄우고는 돌아설 작정이였는데 뜻밖에도 《ㅌ―8》호연구자료가 또 하나 망에 올라있기에 호기심에 끌려 들이팠던것이다.
그것은 필경 성림을 조장으로 하는 공업시험소의 첨가제개발조가 2년간 축적한 실험자료일것이였다.
정아는 몇번 반복해 읽으면서 모든 실험이 생산현장의 실제조건들에 준하여 진행된것과 같은 우점들도 있고 또 참고할 가치도 적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석연치 않다는것을 느꼈다.
어떻게 할것인가?
생각에 잠겨 계단을 내려서는데 앞에 성림이 막아서있지 않는가!
《기다리는 일이 제일 힘들다는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만. 자, 갑시다. 지배인동지가 집에서 찾습니다.》
《집에서요?》 정아는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성림을 치떠보았다.
《헌데 기다릴것까지야 있어요? 손전화로 알려도 될텐데.》
《그럴수도 있지요. 하지만 어머니가 꼭 데려와야 한다고 당부해서 예까지 온겁니다.》
성림의 말에 정아는 마침 지배인을 만나 자기의 결심을 밝히려던 참이였던지라 더 생각해보지 않고 성림을 따라섰다.
공장정문을 나선 그들이 주택지구의 어느 수수한 단층집까지 가닿는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림이 착실히 열어주는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선 정아는 토방가에 이르러 더 움직일념을 못했다.
불빛이 새여나오는 방문의 틈새로 지배인 내외가 집안에서 한창 옥신각신하는 말소리가 들렸던것이다.
《나도 그 처녀의 연구안이 좋다는것을 알고있소. 공장을 책임진 내가 그래 어느것이 좋고 나쁜지도 분간 못하겠소?》
《다 아신다면서 한사코 부정할건 뭐예요?》
듣기 거북해난 정아가 자리를 피하려는데 곁에 다가선 성림이 그럴 필요는 없노라고 했다. 태연히 토방에 걸터앉은 성림이 옆에 자리를 권했으나 정아는 고집스레 서있었다.
《당신 말대로 우리 성림이가 그 처녀와 공동연구를 한다 치기요. 그렇게 되면 성림이는 연구안은 둘째치고라도 의례히 그 처녀를 주연구자로 내세울거요. 그리구 〈ㅌ―8〉호가 성공하게 되면 당신이 일전에 그랬던것처럼 그 본을 따를게구. 아무렴 당신을 닮은 애가 아니요?》
《그게 그리도 마음에 내려가지 않으세요? 이러나저러나간에 새 첨가제가 성공하여 공장생산에 기여하면 그만이 아니겠어요.》
안해는 남편처럼 언성을 높이지는 않으면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만에야 남편은 애써 입에 담지 않았던 아픈 말을 서슴없이 내뱉았다.
《그런즉 당신은 자기의 과거를 기어코 그애한테 되풀이시키겠단거지? 난 도무지 모르겠구만. 당신 한사람의 희생이면 됐지 왜 아들한테까지 그걸 강요하는지… 어이휴―》
긴 한숨과 함께 자리를 차고 일어선 지배인은 속이 답답해났던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 순간 지배인의 두눈에 삽시에 당황한 빛이 돌았다. 그것은 마당에 서있는 처녀연구사와 정면으로 눈길이 마주쳤기때문이였다.
《그러니… 다 들었겠구만.》
정아는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았다.
《방금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정아는 눈 한번 깜빡 않고 태연스레 단언했다. 지금이 자기 결심을 터놓는데는 더없이 좋은 기회로 생각되였던것이다.
《나도 그렇고 아버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버진 나더러 스무해세월 늘 죄스러웠던
정아는 미리 외워둔 말은 아니였지만 거침없이 진심을 터놓았다.
지배인은 처녀의 말에 공감이 가는지 더 할 말이 없다는 투로 올방자를 틀며 앉아버렸다.
그때에야 정아는 녀인을 향해 돌아섰다. 이만하면 자기의 심정을 지배인에게 터놓은것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이 녀인에게 유감없이 전달했다고 할수 있지 않겠는가!
정아는 당장이라도 《어머니!》 하고 부르며 깊이 허리숙여 인사를 하고싶었다. 그러나 이내 선자리에서 굳어져버렸다.
《너 이자 뭐라구 말했니? 다시 말해봐!》
녀인은 옛 화상자리가 여직 가셔지지 않은 얼굴을 이그러뜨린채 분명 그렇게 꾸짖었다.
얼마나 격했던지 몸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기우뚱했다.
창황중에 정아가 가까이 다가서며 부축하려 하자 녀인은 허리를 안은 처녀의 두팔을 뿌리쳐버렸다.
《그래 넌 한갖 신세갚음이나 하겠다는거지? 연구자료를 공개한것두 내가 이렇소 하는걸 남들이 알아달라는거겠지? 어디 대답해봐!》
안해가
그러는 동안 정아는 못박힌듯 그냥 한자리에 서있었다. 녀인이 자기를 향해 꾸짖은 말이 자꾸만 귀전에 맴돌아서였다. 그것은 하나도 틀리지 않는 말이였다.
이윽고 진숙의 깊은 의미를 담은 목소리가 모두의 가슴을 흔들며 울렸다.
《난 너희들에게 어찌어찌하라고 찍어말할 생각은 없다. 그저 연구사업에서 서로의 마음과 지혜를 합쳐가기를 바랄뿐이지. 그 길에서 누가 주연구사의 역할을 한대서 상대방의 신세를 입는것이 아니며 다른 누가 조수가 된다고 해서 후날 엎음갚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각자가 아무런 사심도 없이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 맡은 일에 성실하라는거다. 20년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런 각오는 반드시 필요한거란다.》
녀인은 몹시 흥분한듯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정아는 못다 들은 그 말을 심장으로 이어들었다. 조국의 전진을 위해 한몸을 초불처럼 깡그리 태울수 있는 과학자만이 자력부강의 등불이 될수 있다는… 그는 눈물이 글썽한채 녀인의 가슴에 와락 얼굴을 묻으며 스무해동안 입속으로만 뇌이여보던 말을 목놓아 불렀다.
《어머니!》
진숙은 품에 안겨든 처녀를 꼭 껴안았다.
《용서해주세요. 어머니가 바라는것이 무엇인지 인제야 알았어요.》
《고맙다. 난 너희들을 믿는다.》
진숙의 얼굴에는 더없는 행복감이 어려있었다.
성림은 어머니를 보며 머리를 끄덕이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또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전세대들이 걸어온 길에 새겨진 값높은 삶의 자욱을 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