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12(2023)년 제6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너를 바치라

주 흥 건

(제 5 회)

5

 

지배인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앞산너머로 마주보이던 해가 어느새 한발이나 솟아올라 머리우에 빗선으로 비쳐지고있었다.

청사밖에 나온 정아는 사람들이 비교적 뜸한 곳에 이르러서야 손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전화는 아버지에게서 걸려온것이였다.

인사말과 함께 인차 응답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딸의 말에 아버지는 너그럽게 웃었다.

《괜찮다. 참, 언제인가 아버지가 해주던 한 녀인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나냐?》

정아는 아버지가 앞에 서있기라도 한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어렴풋해요. 그렇지만 않았다면 여기 지배인동지가 아버지뒤소리를 할 때 콱 면박을 주었을거예요.》

《오, 그래? 그럴줄 알았다. 옛날일을 꺼들면서 널 보고 연구소 도움이 필요없다고 했을테지. 허허.》

그러니 아버진 다 알면서도 딸을 여기로 떠밀어보낸것이다.

《그렇다고 돌아올 생각을 한건 아니냐? 그 공장의 첨가제개발을 성심성의로 도와주라고 한 말을 잊지 않았겠지? 사실 그건 소장이기 전에 아버지로서 하는 부탁이였다.》

아버지는 점점 가늠이 가지 않는 말만 했다.

정아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키는데 다시 아버지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그 녀인소리가 나왔으니 그 이야길 좀 하자.》

아버지의 이야기와 더불어 아까는 좀처럼 생각나지 않던 이야기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

 

도망이라도 하듯 밤중에 공장을 떠난 유민은 평양에 도착하는 길로 병원부터 찾아갔다.

반년이 지나도록 면회 한번 못했다는 죄책감과 함께 환자가 여직 소생하지 못했으면 어쩌랴 하는 우려를 안고 두루두루 물어보며 입원실까지 찾아가니 진숙은 온데간데 없고 간호원이 사품들을 정돈하고있는데 눈물이 글썽해있었다.

유민은 불안한 예감속에 다우쳐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아니예요.》

간호원처녀는 미소를 띠우며 설명했다.

《기사동진 어제까지 치료를 성과적으로 받고 오늘은 퇴원한답니다. 난 그게 너무 기뻐 그만…》

도무지 믿기 어려워하는 유민에게 처녀는 창너머로 뒤마당의 정원을 가리켜보였다.

《저―기에서 집식구들과 만나고있을거예요.》

유민이 딸애를 이끌고 뒤마당으로 나서는데 별안간 마주오며 말을 걸치는 사람이 있었다.

《허허, 멀리 뛰진 못했구려, 연구사선생! 어젠 왜 온다간다 한마디 말도 없이 애를 데리구 야밤도주하셨소?》

《아니, 여길 어떻게?》

진숙의 뒤를 이어 정아를 몇달씩이나 돌봐준 로인내외를 한눈에 알아본 유민은 격했던 나머지 인사말도 못하고 훌쩍 떠나버린것이 후회되였다.

《그러니 려동무의 부모님들이셨구만요. 전 그런줄두 모르구…》

《아닐세. 진숙인 우리 며늘애라네. 퇴원한다구 엊저녁 련락이 왔더라니 당장에 밤차로 떠나왔지. 아애비가 막 달고치질 않겠나. 제 색시 귀해서도 그랬겠지만 실은 선생을 만나 용서의 말을 전해달라는거였소.》

《부기사장동지가요?》

《그 이야긴 우리 며늘애를 만나 들으라구. 자, 어서.》

로인내외는 유민의 손에서 정아를 넘겨받으며 정원의 한곳을 손짓했다.

가을바람이 빨갛고 노란 단풍잎들을 간지럽히며 선들선들 불어오는 정원 한쪽변두리 의자에 산뜻한 옷차림을 한 녀인이 사내애를 한팔로 껴안고 앉아 무슨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유민은 그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몇발자국앞에 이르렀을 때 눈에 먼저 안겨든것은 웃옷주머니에 깊숙이 질러넣은 오른손이였다.

그는 떨리는 눈빛으로 녀인을 이윽토록 여겨보았다. 왜 이렇게 낯설어만 보일가? 려동무가 분명한데! 채 아물지 않은 화상자국이 녀인에게서 이전의 아름다움을 뭉청 가리워버린때문일가?

그는 가슴이 미여지는 속에 젖어드는 목소리로 《려동무!》 하고 불렀다.

《동문 어쩌면… 어쩌면 그리도 모질수가 있소. 한마디 의논도 없이 론문을 발표해치우다니… 자기대신 남의 이름을 올려서…》

진숙은 실눈을 잔조롬하게 뜨고있었는데 눈물이 맺힌 속눈섭이 가늘게 떨리고있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애써 미소를 짓고있었다.

《그러니 내가 론문을 발표한줄 짐작하셨군요.》

《아무리 바보인들 그걸 생각 못하겠소. 나와 안해가 다름아닌 이전의 공동연구자였다는걸 아는 사람이야 려동무뿐이니 십분 우리부부의 이름으로 론문을 발표했을것이라고 생각했지.》

《연구사선생은 론문발표가 나의 〈소행〉인줄 아시면서도 왜 애아버지한테서 모욕을 받을 땐 내내 참기만 하셨어요? 어제 오후에 애아버지가 전화로 내 작간이 아닌가고 따지더군요. 사실대로 인정했더니 한절반 짐작은 했겠으면서도 날 막 욕하더군요. 왜 미리 알리지 않았는가, 그랬더라면 애매한 연구사를 오해하는 일이 없었을게 아닌가 하고요.》

이 말을 하면서 진숙은 유민에게 옆에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그는 앉지 않았고 그냥 서있었다.

《내가 까밝힌들 부기사장동지 속이 풀리겠소? 글쎄 이게 무슨 꼴인가 말이요. 려동문 몸을 상하고 연구사업을 더 못하게 되였는데 난 량심도 없이 학위요 발명권이요 하는 달갑지도 않은 월계관을 잔뜩 받아안게 되였으니…》

다시금 죄의식에 사로잡힌 유민은 고개를 떨구었다.

《왜 그랬소? 꼭 그래야만 했나 말이요?》

《그게 무슨 큰일이라구… 사실 미안한건 나예요.》

진숙은 기어코 유민더러 옆자리에 앉으라며 말했다.

《이리로 후송되여올 때 난 정말이지 죄스러웠어요. 연구사선생에게 모든 짐을 걸머지워놓은셈이였으니까요. 치료를 받으면서 생각했지요. 〈ㅌ―2〉호를 위해 내가 해놓은건 뭐고 이제 할수 있는건 무엇일가 하고요. 참, 정아가 보고싶어요.》

《정아 말이요? 저기 같이 왔소. 내 당장…》

유민이 즉시 자리를 차고일어나는것을 진숙이 만류했다.

《그만둬요. 이 꼴로 그애앞에 나설순 없어요. 공부를 잘해 이담에 쟁쟁한 녀학자가 되면 만나겠어요. 그때 가선 아예 우리 집에 데려와야지요. 물론 내가 아니라 이애가요.》

진숙은 이 말을 하면서 아들애를 더 꼭 껴안았는데 저로서도 우스운지 소리없이 웃고있었다.

《허허, 려동무두 참, 어린애들을 놓고 별 싱거운 소릴 다… 참, 부기사장동지가 보낸 연구자료책을 돌려주오. 난 내 할바를 해야겠소.》…

 

정아는 잠시 손전화기를 귀에서 떼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정아야, 아버지 말을 듣니? 너 우는게 아니냐?》

손전화기에서 아버지의 다우쳐묻는 소리가 거듭 울려서야 정아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가요?》

《그들을 도와야 한다. 도울 방도는 하나다. 네 연구자료를 공장구내망에 공개하고 성림이의 조수가 되여 돕거라. 이 아버지마음까지 합쳐서! 그렇게 되면 지배인도 더 막지 않을거다. 그럼 부탁한다.》

정아는 손전화기를 든 손을 내리우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가슴속을 무겁게 짓누르던 천근바위가 산산이 부서져달아난듯 마음이 가볍고 정신이 맑아진듯했다. 하늘에서는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해가 미소속에 대지를 내려다보며 따스한 빛살의 손길로 처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어루쓸어주고있었다.

한겨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봄날에 가까운 날씨였다.

정아는 여전히 고개를 하늘로 향한채 이윽토록 서있었다. 스르르 눈이 감기였다. 백광을 발산하던 해는 온데간데 없고 붉은 장막이 앞을 덮자 그우에 한 녀인의 얼굴이 그려졌다.

(어머니, 나도 그렇게 살고싶어요! 스무해전에 우리 아버지를 도와 자신을 깡그리 바쳤듯이 이제는 제가 모든것을 바쳐 성림동무를 도우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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