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12(2023)년 제6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너를 바치라
주 흥 건
(제 4 회)
4
똑똑똑 손기척이 나더니 성림이 방에 들어섰다. 그는 이제껏 기다리고있은 모양이였다. 곧바로 지배인앞으로 걸어가던 성림은 일순간 정아가 앉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그 웃음을 정아는 (내가 도와줄가요?) 하는 뜻으로 리해했다.
《이 자료를 좀 봐주십시오.》
지배인의 걸상뒤에 바싹 붙어선 성림이 콤퓨터에 기억기를 접속시키며 하는 말이였다.
《무슨 자료인데?》
《우리에게 도움이 될 자료인데… 우리가 이 연구안을 받아물라는가 말라는가 결론만 내려주십시오.》
성림은 늘씬한 허리를 구부정하고 화면에 현시된 자료들을 요점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소곳하니 고개를 숙인 정아는 둘사이에 오가는 화학술어들에 귀를 강구고있다가 얼핏 놀라며 눈길을 들었다. 그러다가 성림과 눈이 마주쳤다. 두사람은 침묵속에 눈빛으로 묻고 대답했다.
(지배인동지한테 보인 자료가 혹시 《ㅌ―8》호 연구안이 아니예요?)
(이건 연구사선생의 자료가 아닌데요. 언제 나한테 자기 연구자료를 보여주기나 했습니까?)
정아는 그만에야 눈길을 떨구었다. 실지로 그는 공장에 온 어제오늘사이에 단 한번도 손가방속의 기억기를 꺼낸적이 없었던것이다.
성림은 다시 지배인쪽으로 고개를 낮추며 물었다.
《그래 어떻습니까?》
《글쎄…》
《제 보기엔 될것같습니다. 모든 과정들이 빈틈없이 맞물려있습니다. 우리 공업시험소에서 이 연구안을 받아물면 안되겠습니까?》
《아직은 안돼!》
정아는 흠칫 놀랐다. 어째서 안된다는건가?
지배인은 콤퓨터에 접속되여있던 기억기를 뽑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런데 네녀석은 언제부터 바보노릇을 하게 됐어? 남의 떡은 다 커보이던? 그래서 자존심도 다 줴던졌냐?》
《그건 무슨 말입니까? 어디서 난 자료인줄두 모르시면서… 어쨌든 난 가능성이 있길래 한번 해보자는겁니다.》
성림은 뜻밖에 감투를 뒤집어쓴것이 억울하여 펄쩍 뛰였다.
《모르긴 뭘 몰라?》
지배인의 격한 말에 정아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무슨 정신에 그랬는지 자기로서도 알지 못했다.
《혹시 우리 연구소에서 보낸 자료가 아닙니까?》
지배인은 정아에게 눈길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옳소, 촉매연구소 선생님네들은 스무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니까.》
《예?》
정아는 심한 모욕감에 얼굴이 좀전보다 더 빨개졌다.
지배인은 자기가 무근거한 말을 하지 않았음을 론증하려고 했다.
《앞서 얘기한것처럼 헌신을 천성처럼 타고난 녀기사는 첨가제개발은 물론 한 인간을 위해서도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했소.
한해반쯤 지나 첨가제가 성공하였을 때 촉매연구소의 그 연구사는 과학자로서의 모든 명예를 줄줄이 다 지니였소. 하지만 녀기사는 몸을 상한데다 또 아무것도 남지 않았소.
공동저자로 되였어야 할 론문에 녀기사의 이름이 없었기때문이지.
그 연구사와 또 다른 한사람의 이름으로 발표되였소.》
지배인이 하는 말에 정아의 눈앞에 또렷해지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
어머니를 잃고 탁아소선생님의 손에 맡겨졌던 나는 웬 녀인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가 가있는 공장을 찾아가게 되였다. 그때부터 아버지와 나는 공장합숙에서 살았다.
그렇게 한해가 흘러 어언 1년반동안의 고심어린 연구사업이 바야흐로 열매를 맺게 된 때 뜻밖의 일이 빚어졌다. 그것은 예상치 않았던 화재였다. 아버지는 다행히도 한쪽이마에 불길이 슬쩍 지나쳤을뿐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나를 데려온 녀인은 그만 오른쪽반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말았다. 시약폭발에 의한 화상이여서 시급하고도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했다.
녀인은 중앙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렇게 녀인을 바래주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강심먹고 나를 본래 있던 탁아소의 선생님한테 보낼 결심을 하였다. 합숙까지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굳혔으나 그 모진 결심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합숙호실에서는 이미 한발 먼저 찾아온 웬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짝자꿍을 배워주면서 아버지를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준엄한 안색으로 들어서는 아버지에게 그분들은 말했다.
《이애를 그 어데도 못보내네. 우리가 종종 와서 애를 돌볼테니 선생은 연구사업에 전념하시우. 우리가 누군지는 묻지 마우다. 그저 집에서 일손이 남아돌아가기에 애를 돌봐주러온 늙은이인줄로 알면 되네.》
고마운 사람들이 늘 곁에 있어주어 아버지는 다시금 무서운 정열로 연구사업에 달라붙었다.
녀인이 입원한지 석달이 되여올무렵 아버지는 끝끝내 《ㅌ―2》호를 완성시켜 예비시험에 성공하였다. 물론 생산도입이라는 헐치 않은 고비가 아직 앞에 놓여있었지만 하여튼 큰 산을 넘은 기분이였다.
예비시험에 성공한것을 두고 누구보다도 기뻐한것은 부기사장이였다. 화재사고가 있은 뒤부터 락심해있던 그는 안해가 비록 불행을 당하기는 했지만 소원하던 명예는 남았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에게 어서 론문도 발표하라고 요구하였다.
《전 아직 명예같은데는 별로 생각이 없고 그저 힘에 부치기만 합니다. 둘이서 하던 연구사업을 혼자 도맡아하자니 정말 지쳤지요. 어쨌든 끝까지 완성시키고 봐야지요.》
《그렇다?!》 부기사장은 입을 다시면서도 반박할 언턱은 찾지 못했다.
《그럼 결심대로 하오, 론문이 언제 나가든 난 그저 집사람의 이름이 실리면 되니까. 일전에 내가 말했던 거 뭐라더라…》
요구조건을 념두에 두고 말하고있음을 아버지는 넘겨짚었다.
《함께 가꿨으니 열매도 함께 따야 한다고 했지요. 걱정마십시오.》
아버지는 담보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연구자료를 통채로 내놓았다.
《제가 이담에 론문을 쓰겠다고 할 때까지 보관해주십시오. 아무렴 내가 려동무신세를 얼마나 졌게 감히 딴마음을 먹는단 말입니까.
아마 그 동무보다도 우리 애가 이 아버지를 저주할겁니다.》
아버지는 자기가 가슴속의 진심을 터놓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하루빨리 첨가제를 성사시키는것으로 보답하려고 면회갈 며칠간의 짬도 못내고 애오라지 연구에 전심했다.
또 석달이 지나서 생산에 도입한 날 아버지에게로 부기사장이 노발대발해서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과학기술잡지 한권이 들려있었다. 그는 들고온 잡지를 영문을 몰라하는 아버지에게 내던졌다.
《이걸 보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수 있소?》
아버지는 얼떨떨해서 바닥에 떨어진 잡지를 집어들었다. 차례를 보니 《ㅌ―2》호개발에 관한 론문이 있었다. 그런데 개발자란에 아버지이름과 나란히 올라있는것은 다른 사람의 이름이였다.
아버지는 경악하며 두손으로 머리를 싸쥐였다.
《난… 난 론문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동무가 아니라면 누구요? 하긴 누가 발표했는가야 중요치 않지, 이러나저러나간에 려진숙이라는 녀성한텐 아무것도 남는게 없겠으니까. 됐소. 가시오! 다시는 내앞에, 우리 공장에 얼씬 마오. 촉매연구소라면 내 따라가면서라도 해볼테요.》
《아니… 내 어찌 함께 일한 사람을 배반하는짓을…》
아버지는 더 변명할 생각도 잊고 사정없이 들씌워지는 욕을 묵묵히 감수하였다. 부기사장의 심정이 리해되였던것이다. 안해가 당한 불행도 가슴아픈 일인데 연구사업끝에 남은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니… 아, 얼마나 억이 막히랴!
그날 저녁 아버지는 합숙에서 나를 찾아가지고 저녁중에 떠났다고 한다. …
정아는 정신이 번쩍 들어 생각에서 깨여났다. 지배인이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물었다.
《그래 아직도 내 처사가 몰인정하다고 여겨지오?》
《심정이 리해됩니다.》
정아는 맞갖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으나 실지로 맞갖지 않은것은 자기
《그런 훌륭한 녀인을 부디 잊지 말어라.》
지배인은 처녀의 속내를 투시해보기라도 하듯 불그레 상기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넌지시 물었다.
《그 연구사가 누군지 짐작이 갈거요.》
《…》
이름 못할 괴로움속에 잠긴채 처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 사실 지배인동지를 오해했었는데 사연을 들은 이상 저는 스스로 물러나렵니다.》
《아니, 연구소로 돌아가겠다는겁니까?》
이제껏 옆에서 잠잠해있던 성림이 제 먼저 놀라 펄쩍 뛰였다.
하지만 더 놀란것은 지배인이였다. 비록 스무해전의 일로 하여 촉매연구소라는 말만 들어도 불쾌해지고 또 이 처녀연구사가 그때 너무나 아픈 상처를 남긴 연구사의 딸이라는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는 더욱더 귀찮게 보아왔지만서도 정작 돌아가겠다는 말에 속이 띠끔해났다.
방금 처녀연구사의 연구안을 보면서 사람도 연구안도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을 했었기때문만이 아니였다. 자기는 그토록 온곱지 않게 눈을 흘기는 이 처녀를 안해가 친딸마냥 관심하고있다는 사실때문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배인은 당시까지는 누구도 만들지 못했던 첨가제의 개발에 달라붙은 녀기사에게 반하여 가정을 이룰적에는 안해가 그 목표를 하루빨리 달성하여 명예의 절정에 올라서기를 바라서 신혼생활의 진미도 미루었었고 안해가 연구사업끝에 명예를 얻기는커녕 성하지 못한 몸이 되여버린 후로는 마음에 그늘을 지울가봐 될수록이면 의사를 존중해주군 했다.
입술을 깨물며 지그시 눈을 감아버렸던 지배인은 별안간 방안에 노래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펀뜩 눈을 떴다.
정아가 얼른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며 방에서 나가는것을 보고나서야 손전화기착신음이였음을 깨달았다.
정아가 닫으며 나간 문쪽을 한번 돌아보고난 성림이 속상해서 물었다.
《정말 보내시렵니까? 예?! 아버지.》
지배인은 한숨을 길게 톺으며 쥐여짜는 소리로 힘들게 말했다.
《더 간참말구 첨가제생각이나 해라. 넌 아버지심정을 다는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