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12(2023)년 제6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너를 바치라
주 흥 건
(제 3 회)
3
(도움이 필요없다?! 그렇다면 내가 더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을가?)
지배인을 만난 뒤 정아는 당장이라도 공장을 떠나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연구소에서 받은 임무를 자각하고는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는 찰나에 손성림이 나타나 함께 지배인방에 찾아가서 다시 만나자고 하는것이였다. 옆에서 하도 부추기는 바람에 정아는 할수없이 따라나섰다.
《리해되지 않아요. 동무가 내 일에 왜 이리도 극성스러운지, 그리고 나의 도움이 필요하기나 한지. … 지배인동진 공장자체로도 얼마든지
정아가 뒤전에서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면서 뾰로통해서 묻는 말에 성림은 내심 긴장해서 대답했다.
《도움이 필요치 않을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시간이지요. 그것이 무제한하다면 자체힘으로 언제든 성공하면 그만이지만 우린 급합니다. 〈ㅌ―8〉호는 당장 필요합니다.》
성림이 한숨까지 내쉬는것을 보고 정아는 십분 리해가 갔다.
《꽤나 어려운 모양이지요?》
《미궁에 빠진셈인걸요. 출로는 두가진데 이제까지 온 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든가 아니면 길을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던가… 이를테면 공동연구 말입니다.》
《그러니 나하고요? 내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도 모르면서… 혹시 내가 동무의 조수노릇도 못하는 정도일수 있잖아요?》
정아가 롱을 섞어 말했으나 성림은 한수 더 떠서 대꾸했다.
《날 업어넘길 생각은 애당초 그만둬야 할겁니다. 난 이를테면 안테나가 높아서 연구사선생에 대해서두 모르는게 없지요, 얼마전에 〈ㅌ―8〉호의 실험실단계에서 성공했다는거랑. 한번 연구자료를 봐야겠는데.》
《설마 내 가방에서 슬쩍 할 생각을 하는게 아니예요?》
정아는 웃으면서도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이 청년은 자기에 대해 많은것을 알고있었다. 자기가 이 공장에 내려온다는것을 지배인도 모르는데 이 청년은 어떻게 알고 마중을 나왔댔을가?
《아니, 뭘 생각하구있습니까. 다 왔는데…》
생각에 골똘해있던 정아는 옆에서 쿡 찔러서야 어느새 지배인방앞에 섰음을 알아차렸다.
《자, 그럼…》
손기척을 하고 문을 열어젖힌 성림은 무작정 처녀를 떠밀었다.
미처 마음의 준비를 갖출새도 없이 지배인앞에 나서게 된 정아는 애써 인상을 밝게 가지며 인사부터 하려고 했다. 그러나… 못하고말았다.
방안에서는 지배인이 웬 녀인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아니, 다투고있었다. 정아는 대뜸 어제저녁 만났던 손성림의 어머니라는것을 알아보았다. 돌아서있다나니 얼굴은 알아볼수 없지만 여기 방안에서까지 오른손을 솜옷주머니에 넣고 앉아있는것을 보고 그렇게 판단한것이였다.
방에 손님이 들어온 기미를 느낀 녀인은 왼손으로 의자등받이를 붙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서도 할 말을 채 못했던듯 이어서 말했다.
《그 처녀가 누구의 딸인가를 까밝혀서는 뭘하자는거예요? 중요한건 그 처녀가 우리 공장의 첨가제개발을 돕겠다고 하는데 있지요.》
그 처녀? 아마도 정아 자기를 가리키는 말일것이였다. 하다면 내가 누구의 딸이란 말인가?
《아아, 됐다는데.》 지배인은 귀찮은듯 문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당신은 그 처녀가 우릴 도울거라지만 난 우리가 그 처녀를 돕는 격이 될가봐 그러는거요. 더 상관말구 집에 가있소. 오늘 저녁은 내 들어갈테니 그때 가서 보기요.》
머리속으로 지배인이 한 말을 새겨보며 정아는 문가로 다가오는 녀인을 보았다. 녀인은 문앞에 거의 다달았을 때 정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녀인의 눈에 말 못할 안타까움이 비껴있는것을 보았다.
녀인은 정아의 옆을 지나쳐 문밖으로 나갔다.
정아가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지배인은 자리에 앉아 콤퓨터를 보고있는중이였다. 정아는 여직 인사를 하지 않고있었다는 생각이 미쳐와 고개를 나부시 숙여보이고나서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지배인은 처음과는 달리 자못 진지한 표정을 하고 콤퓨터화면너머로 처녀연구사를 바라보고있었다. 그새 마음이 변했는가? 아니다. 지배인은 인사성밝은 한 처녀의 아련한 자태에 마음이 동해서 태도가 일변할 사람이 아니다.
지배인은 점직할만치나 처녀를 여겨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부모님들은 무슨 일을 하시오?》
《어머니는 안계시구 아버진…》
뜻밖의 질문이였던지 처녀쪽에서는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연구사선생을 언젠가 봤던것같은데…》
《전 이 공장이 처음인걸요.》
《아니, 내 말은 선생이 어릴적을 념두에 두는거요. 네살쯤 났을 때던가.》
지배인은 다시금 추억을 더듬어 20년전 일을 떠올리였다. …
저녁에 진숙은 아이를 업고 집으로 들어섰다.
《엄마, 내 동생이나?》
그동안 감기를 앓고 해쓱해진 아들애가 그래도 제 엄마가 왔다고 좋아라 치마자락에 매달리며 묻는 말에 진숙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동생이다. 좋지?!》
《웬 애요?》
남편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연구사선생네 애예요.》
《유민연구사 말이요?》
진숙은 침착하게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 선생이 이따금 고민상태에 빠지군 하더군요. 그래 에둘러 물어보니 탁아소선생한테 맡기고온 딸애 생각이 나서 그런다나요. 그때에야 전 그가 연구소를 떠나오기 보름전엔가 안해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어요.》
안해는 같은 녀성의 슬픔을 말하자니 저로서도 서글퍼지는 모양이였다.
《연구사선생이 합숙호실도 마다하고 실험실에서 살다싶이 하는것도 다 모든걸 잊어버리구
《음, 나도 그가 상처한 사람이 아닐가 하는 짐작은 하면서도 자식문제에 대해선 생각도 못했구만.》
《애가 참 곱지요? 아유, 왜 그러고만 있어요? 한번 안아주기라도 하시지.》
《애한테 없는거야 어머니지 아버지야 있지 않소.》
《당신은 정말… 자요. 큰아버지된셈치고!》
진숙은 기어코 애를 안겨주고야말았다. 워낙 싹싹한데가 없는 남편이 투박한 두손으로 안아들자 계집애는 언제 얌전했던가싶게 으앙 울어댔다.
《이크, 요게 낯가림을 다 하구. 뚝 그쳐. 울면 이담에 박사 못돼요.》
남편이 아이를 안고 을러도 보고 얼려도 보는데 진숙은 옆에서 재미나게 바라만 보더니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한마디했다.
《이름을 부르라요. 그럼 딱 그쳐요.》
《이름?! 뭔데?》
《정아예요. 이름두 얼마나 고와요. 유정아!》…
지배인은 잠시 회억에 잠겨 지그시 감고있던 두눈을 그제야 번쩍 떴다.
(그래! 이 처녀가 유민의 딸이 틀림없어.)
아침에 공업시험소에서 가졌던 추측은 확실한것이였다.
(그런즉 스무해전에 아버지가 왔던 공장에 오늘은 또 딸이?! 연구소의 그 많고많은 사람들중에서 하필 이 처녀가 우리 공장에 올건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