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12(2023)년 제6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너를 바치라
주 흥 건
(제 2 회)
2
하루밤을 합숙에서 보낸 정아는 아침일찍 공장으로 향했다. 우선 지배인부터 만나야 했다. 물론 성림이 호실에 찾아와 안내를 맡아나섰다.
생산현장으로 곧추 뻗은 큰길을 벗어나 행정청사쪽으로 처녀를 이끌던 성림은 이내 고개를 젓더니 그냥 곧바로 가자고 잡아끌었다.
《지배인동지가 방에 있지 않을가요? 아직 아침모임전같은데…》
정아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면서 묻는 말에 성림은 고개를 저었다.
《가본댔자 없을겁니다. 엊저녁 집에 들어가지 않고 우리 공업시험소 실험실에서 밤을 팼겠으니까요.》
《동무도 함께 밝힌게지요?》
정아는 녀성다운 세심한 마음과 함께 다들 밤새워 일할 때 자기만이 실컷 잠을 잤다는 사실이 어쩐지 미안해나서 물었다.
하지만 성림은 쑥스럽게 웃으며 목을 움츠리는것이였다.
《어제 난 연구사선생을 바래주고는 곧장 집에 가서 늘어져버렸는걸요. 물론 가자마자 늘어진건 아니구 그전에 흥미있는 자료를 좀 보다가 말입니다. 아주 흥미있더군요.》
《내 흥미는 동무한테 가있어요. 동무가 지배인동지의 사업일정을 그리도 잘 안다는것이 이상해요. 어림짐작으로 날 골려넘기려는건 아니예요?》
정아가 짐짓 눈을 할기죽해 보이자 성림은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모를게 뭐 있다구요. 낮엔 공장을 돌보구 밤에는 첨가제개발때문에 실험실에 붙어사는것이 지배인동지 고정일과인걸요. 자, 다 왔습니다.》
정아는 더 까박을 붙이지 못하고 성림이 이끄는대로 공업시험소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아닐세라 지배인이 거기 있었다. 한창 거울앞에서 면도칼로 비누범벅의 턱을 밀고있는중이였다.
성림이 고개를 약간 숙여보이자 지배인도 거울속에서 눈웃음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함께 온 낯선 처녀가 누군가 하는 뜨아한 표정이였다.
정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워올리며 간단한 자기 소개를 했다.
처녀의 입에서 촉매연구소라는 말이 튀여나왔을 때 지배인은 흠칫 놀라 하마트면 면도칼로 실수를 할번했다.
《우리 공장의 첨가제개발을 도우러 왔다?! 으음, 촉매연구소라. …》
면도를 끝내고 수건으로 턱을 대충 훔치고난 지배인이 돌아섰을 때 그의 얼굴은 영문모르게 벌거우리해졌다.
정아보다도 옆에 선 성림이가 더 바빠했다. 그가 몇마디 하려 했지만 지배인이 문쪽으로 눈짓하는 바람에 쫓기다싶이 복도에 나가버렸다.
《그래 무슨 일로 왔소? 우린 청하지 않았는데… 어쨌든 거기 앉소.》
지배인이 자리를 가리켰으나 정아는 그냥 서있었다. 문득 연구소를 떠나기에 앞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반가와하지 않을수 있다더니 공연한 말이 아니였구나. 하다면 무엇때문에?)
지배인은 다시금 앉으라고 손짓하면서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어쩐다? 불원천리 찾아온 손님을 환영할수 없으니… 사실 우리 공장은 촉매연구소의 도움이 필요없소.》
정아는 락심한 표정으로 눈길을 들었다.
《전 이 공장의 첨가제개발을 성심성의로 돕기 위해…》
《성심성의로 돕겠다?!》
지배인의 두터운 입술새로 비꼬는 웃음이 새여나왔다.
《고맙구만, 헌데 우린 이미 개발조를 내오고 잘해나가구있소. 이런 판에 괜히 불청객이 끼여들 필요가 있을가?》
《불청객이라구요?! 어쩌면…》
정아가 모욕감에 입술을 깨물었으나 지배인은 눈섭 한오리 까딱하지 않았다.
《날 몰인정하다고 생각할수도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소. 적어도 20년전에만 해도 그렇지 않았지. 제자랑하자는건 아니구 연구사선생이 인식을 바로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요. 그때도 지금처럼 우리 공장에 연구사가 왔댔소. 공장에서는 그의 연구사업을 적극 도왔지.》
지배인은 몸을 한번 뒤채겨 창문쪽으로 돌아앉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
만만치 않은 학력에 일욕심도 이만저만 아니여서 총각때에 벌써 공업시험소 소장사업을 떠맡았던바 있는 부기사장은 온 공장의 기술발전사업을 보살피는 속에 새로운 첨가제개발에도 무척 관심이 컸다.
자기 안해와 연구사의 《ㅌ―2》호공동개발이 시작된지 반년이 되도록 이렇다할 성과가 없는것이 유감스러웠지만 그럴수록 더 잘 도와주기 위해 하루사업의 어느 틈에라도 꼭꼭 공업시험소에 들려보군 하였다. 그렇게 종일토록 일에 부대끼다가 저녁에 퇴근해들어오면 언제 숨돌려볼 새도 없게 어린 아들애가 애를 먹였다. 어제까지는 배가 아프다고 야단치던 아이가 오늘저녁은 또 어디가 탈이 났는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칭얼대고있었다.
《어디 보자, 우리 성림이… 어디 아프나요?》
아프다는 아이녀석을 허궁 추켜안은 아들을 보며 어머니가 야단을 했다.
《어서 내려놔라, 몸이 불덩이같은데…》
《감기나요? 약은 먹였어요?》
《먹였지. 성림이 에미가 들어오기 전에 열이 떨어져야겠는데… 아이때문에 근심하지 않게.》
머리허연 아버지가 그래도 며느리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였다.
《내 그럼 가서 말하고 올가요? 성림이 걱정은 말고 연구사업만 잘하라고.》
아들애를 내려놓고 다시 집을 나선 부기사장은 공장정문을 지나 곧바로 공업시험소로 향했다.
(21시반이라… 내가 괜히 와서 방해하는건 아닌가? 그러지 않아도 한창 열중하고있을텐데.)
그는 두루 생각해보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문을 두드렸다.
응답하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나오더니 뒤따라 실험복차림의 연구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어둠속에 서있는 손님이 자기 연구사업의 적극적후원자인 부기사장이라는것을 알아보고는 대뜸 반가와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연구사가 열어준 문으로 부기사장은 낯익은 실험실에 들어섰다.
《왜 혼자요?》
《려동문 볼일이 있다며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피뜩 말하기를 연구사업이 부진상태에 있는 원인을 찾았다면서 갔습니다.》
《부진상태의 원인을 찾았다?!》
부기사장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고나서 담배곽을 꺼내들었다.
《자, 한대 태우기요. 그래, 또 좀 진척된게 있소?》
연구사는 부기사장이 담배를 꺼내물려는것을 보더니 두손을 황황히 내저었다.
《아니아니, 여기선 담배를 피우면 안됩니다. 반응시험을 하려던중입니다.》
부기사장은 깜빡 잊었다며 담배대를 다시 곽에 꽂더니 그것을 실험탁우에 올려놓았다.
《이따가 머리쉼을 하면서 피우오. 그런데 어디 갔을가?》
《려동무 말입니까?》
《노상 시간이 모자라 아글타글하던 사람인데…》
부기사장은 갈피를 종잡지 못한채 연구사와 헤여져 밖에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안해가 필경 부득이한 일로 갔을것이라고 리해는 하면서도 엄마없이 앓고있는 아들애를 생각하니 그릇이 큰 마음에도 불만이 일었다. …
여기까지 이야기하고난 지배인은 자기가 쓸데없이 지내 벌려놓았다고 생각했는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는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연구사처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공연히 헛기침을 깇고나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공업시험소마당을 벗어나 큰길에 들어선 그는 한창 출근시간이라 마주오던 로동자들이 깍듯이 인사를 하며 지나치군 했지만 깊은 생각에 빠져 제대로 답례를 하지 못하면서 행정청사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