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12(2023)년 제6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너를 바치라
주 흥 건
(제 1 회)
1
손전화기의 호출신호가 울려나오는 바람에 정아는 붐비는 사람들속을 재빨리 빠져나와 조용한 곳을 찾아갔다. 들가방을 발밑에 내려놓고나서 손전화기를 꺼내들던 정아는 인기척을 느꼈다. 돌아보니 한 청년이 자기를 지켜보고있었다.
《미안하지만 촉매연구소에서 오시는 유정아선생이 아닙니까?》
청년의 손에는 손전화기가 들려져있었다.
《동문 누군데요?》
《연구사선생을 마중나왔지요. 전화를 건 사람은 납니다.》
청년은 빙그레 웃으며 얼른 자기의 손전화기를 들어보였다.
《참, 저의 전화번호를 주소록에 보관해두십시오. 성강섬유공장 공업시험소 손성림입니다.》
《섬유공장이라구요?!》
청년은 대답대신 처녀에게서 짐부터 받아들려고 했다.
그러건말건 정아는 선자리에서 꼼꼼한 손놀림으로 장갑을 끼면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처음 와보는 이 고장에 알만한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는 정아로서 누가 마중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물론 현장에 연구사업을 내려갈 때는 연구소에서 미리 해당 공장에 통지를 하는것이 례상사이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러한 사전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알고 마중을 나왔을가?
《공장에는 스무해전의 〈ㅌ―1〉호로부터 지금의 〈ㅌ―7〉호에 이르는 기존의 ㅌ계렬첨가제보다 더 좋은 다음세대것이 필요한데 글쎄 우리 공업시험소에선 두해가 지나도록 그냥 제자리걸음이지요. 그런데 촉매연구소의 한 연구사가 몇해째 〈ㅌ―8〉호를 연구해왔고 실험실적개발에 성공했다더군요. 그 연구사가 우리 공장을 도우러 온다니 마중나오는게 도리가 아닙니까. 아, 저기 우리 어머니가 옵니다.》
청년이 나이지숙한 녀인을 가리켜보이기에 정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날 마중왔다면서 어머니라니요?!》
《연구사선생이 온다는걸 어머니가 알려주었는걸요. 함께 마중을 나가자더군요.》
《동무 어머니가요?!》
호기심이 동해난 정아는 자기앞으로 다가오는 그 녀인에게 눈길을 주었다. 눈내린 뒤라 푸근한 날씨여서 손이 시려날것같지는 않건만 한손을 솜옷주머니에 깊숙이 지른채 녀인은 미소를 지으며 처녀앞에 다가섰다.
《정아동무지요? 먼길에 수고많았겠어요.》
《저를 어떻게 아시는지요?》
《그걸 이 자리에서 얘기할수는 없구… 날도 저무는데 어서 가자요.》
이 말과 함께 어느새 성림이가 정아의 들가방은 물론 배낭가방까지 등에서 벗겨내는것이였다. 그리고도 성차지 않는듯 《그 손가방도 들어드릴가요? 도울바엔 말끔히 도와야지요.》 하는것이였다.
《호, 괜찮아요.》 정아는 장갑낀 손끝으로 한쪽어깨에 걸려있는 손가방의 가장자리를 다독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안돼요. 연구자료는 절대비밀이니깐요.》
《아하, 손가방안에 연구자료라. … 기억했습니다, 하하.》
한절반 롱으로 응수하고난 성림은 제 먼저 성큼 걸음을 떼더니 앞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자요.》 하며 녀인이 재촉하기에 정아는 마침이라는듯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전 정말 의문스럽습니다. 이곳이 처음인 저를 어떻게 알고 마중을 나오셨는지…》
《글쎄 사연이 좀 긴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 아마 20년전의 일부터 얘기해야 할가봐요. 그 이야기가 정아동무의 의문을 풀어줄수 있겠는지. …》
20년전…
《제가 연구사선생과 함께 〈ㅌ―2〉호 연구를 하게 되였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던 참이였습니다.》
《그러니 동무가 부기사장동지의 안해겠소? 몇해동안 지금의 〈ㅌ―1〉호 첨가제를 개조할 구상을 무르익혔다는 공업시험소 기사구. … 반갑소. 내 어제 연구소에서 오는 길로 부기사장동지를 만나 연구조건을 보장해달라고 제기했더니 다 해결해주겠다면서 공업시험소에 가서 동무를 찾으라더구만, 힘을 합쳐 연구사업을 하라고. … 난 부기사장동지의 그 적극성에 정말이지 탄복했소. 참, 동무이름이…》
《려진숙이라고 합니다. 그저 진숙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진숙의 대답에 연구사는 별안간 털모자를 툭툭 터는 헛동작을 하더니 어줍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난 그저 려동무라고 부르자고 하는데 그래도 일없겠소?》
진숙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는 마음속에 찾아든 기쁨이 너무나 커서 그저 만족스럽기만 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어제까지만도 실험탁에 마주앉아 홀로 속을 태우던 진숙이였던것이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지금까지 그렇게 흘러왔다. 처음 1년은 그래도 동행자가 있었다.
공업시험소 소장인 그는 진숙의 직속상급이면서 협조자였다. 꼭 1년이 되던 날 두사람은 부부가 되였다. 진숙은 남편이 생긴 대신 동행자를 잃었다. 남편이 부기사장으로 되였던것이다. 공장의 기술사업전반을 돌보면서 안해의 연구사업까지 관심해준다는것은 말뿐이지 실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그때부터 진숙은 혼자서 속을 태웠다. 풀리지 않는 문제점들을 놓고 골머리를 앓은적은 얼마였고 실망한적은 또 얼마였으랴. 하지만 고생끝에 락이라고 끝내 이렇게 방조자가 찾아온것이다.
진숙은 들뛰는 가슴을 애써 눅잦히며 다우쳐물었다.
《저… 언제부터 시작하잡니까? 당장 시작해야지요?》
《아아, 려동무두 참, 보다 중요한 문제가 아직 남아있는데…》
연구사는 잠시 진중한 기색으로 덤덤히 있다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연구사업을 우리 두사람이 공동으로 진행하게 된다는거요. 서로의 연구에서 우결함을 종합해서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하여 함께 풀어나가야 하고 이다음에 첨가제개발과 현장도입이 성공해서 누구든 필요에 따라 론문으로 발표한다 해도 거기에는 두명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야 하오.》
《함께 가꾸었으니 열매도 함께 따야 한단 말씀이군요.》
진숙은 연구사가 하려던 말을 이미 알고나있은듯이 앞질러 대답했다.
《바로 맞혔소. 그건 내 말이 아니라 부기사장동지가 내게서 다짐을 받아낸 요구조건이요.》
《그런 말은 새겨듣지 마십시오. 전 그저 조수일뿐이예요. 그러니 하루빨리 성공만 한다면 바랄것이 없지요.》
《하지만… 난 부기사장동지의 제기에 절대찬성했소. 그렇다는걸 알고 공동연구에 착수합시다.》
연구사는 가방에서 실험자료를 꺼내놓았다. 진숙이 역시 자기의 실험자료를 내놓았다. 공동연구의 첫 단계로서 두사람은 실험일지들을 교환하고 서로의 연구정형에 대한 파악에 들어갔다. …
《얘기를 이만 끝내야겠군요. 벌써 다 왔으니 말이예요. 정아동무의 의문을 채 풀어주지 못해서 어쩐다?》
어느결에 공장지구에 들어서는 바람에 이야기는 일단 끝이 났다. 녀인의 눈가에 깊은 감회의 빛이 어린것을 보며 정아는 그후의 일에 호기심이 동했으나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녀인은 불빛이 환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게 공장합숙인데 우리 성림이가 안내해줄거예요. 피곤하겠는데 어서 들어가 쉬세요.》
《자, 갑시다. 연구사선생.》
처녀의 짐을 도맡아안고도 힘든줄 모르는 성림이 어느새 앞에서 씨엉씨엉 걷자 정아는 아쉬운대로 이야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