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12(2023)년 제5호에 실린 글
단편실화소설
승자의 주로
한 철 규
(제 1 회)
1
17시경 뻐스는 읍에 도착하였다.
40대의 사람이 도면말이를 손에 들고 맨먼저 뻐스에서 내리였다. 둥그스름한 철색얼굴, 머리칼을 짧게 깎아 씨원해보이는 번듯한 언덕이마, 사색적인 지성미를 풍기는 눈매… 지성인의 체취가 나면서도 날카롭고 돌진적이며 강기가 느껴지는 그가 신양고려약공장(당시) 지배인 김성철이다.
그는 국가과학원에 가서 완성한 새로운 생산설비들에 대한 설계도면을 안고 기쁨에 넘쳐 씨엉씨엉 공장쪽으로 걸어갔다.
공무작업반현장에 도착하니 수리공들인 리철혁과 주영선이 희푸른 용접광을 날리며 한창 용접작업을 하고있었다.
김성철은 그들을 휴계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가지고온 설계도면을 책상우에 펴놓았다.
《자, 좀 보오. 이게 우리가 부러워하던 설비들의 도면이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고심하시더니 끝내 완성했군요.》
28살의 혈기왕성한 리철혁이 벙글벙글 웃으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면을 보았고 나이 예순이 가까와오는 주영선은 별로 흥심이 없는지 소금먹은 황소 굴우물 들여다보듯 머룩머룩해서 물끄러미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김성철은 지꿎은 눈길로 들여다보는 리철혁에게 도면의 여기저기를 짚어가며 설명하였다.
《여긴 감압조건을 형성해주는 진공설비이고 이건 용매를 증발시켜 용질의 농도를 높여주는 증발장치요, 알만하오?》
철혁은 쑥스러운듯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빨개져 고개를 숙였다.
《글쎄… 아무리 보아야 뭐가 뭔지 통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동무야 우리 공장에서…》
철혁이는 성철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불에 데기라도 한듯 황황히 손사래를 쳤다.
《에― 어림도 없습니다. 수리공에 불과한 제가 어떻게… 전 안됩니다.》
김성철은 난색을 하며 실눈을 지었다.
공장에서 제일 기능이 높고 총명하다는 리철혁이 이런 수준이니 주영선아바이는 더 물어볼 여지조차 없지 않는가.
김성철은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단숨을 그으며 망연자실하여 서있었다. 극도의 실망감이 밀물처럼 가슴속에 쓸어들었다.
실로 난감했다. 안타까왔다. 눈앞이 아뜩해났다. 가슴속의것이 졸지에 말짱 뽑혀나간것같은 맹랑한 허무감이 그의 심신을 괴롭히였다.
김성철은 터벌터벌 기계적으로 발을 옮겨짚으며 사무실로 올라왔다.
공장현대화의 첫걸음부터 이런 맹랑한 일에 부닥치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이거야말로 맥도 모르고 침대 뽑아든 격이 아닌가.
그렇다면 할수 없는가? 자체로 만들수 없다면 필요한 설비들을 다 사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 많은 자금은 어데서 마련해야 하는가. 다른 단위의 기술자, 기능공들을 매번 청해들여 제작한다는것도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 일이다.
(그러니 포기해야 하는가? 포기라… 아니, 아니야!)
성철은 흠칫 몸을 떨며 완강하게 도리질을 하였다. 도저히 그럴수 없었다. 공장을 이만큼 일떠세우기까지, 낡고 뒤떨어진 공정을 가까스로 살려내고 생산을 정상화하여 이렇게 공장의 현대화, 정보화라는 높은 목표를 내걸수 있을 수준에로 추켜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고심어린 노력과 아낌없는 지성을 기울여왔던가.
천야만야 밑이 보이지 않는 고민과 사색의 심연속에 깊숙이 빠져든 그의 눈앞에는 지나온 잊지 못할 날들이 영화화면처럼 생생하게 살아움직이며 어제런듯 방불히 떠오르는것이였다.
군대에서 제대된 후 함흥약학대학을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하고 신양군인민위원회 부원으로 있던 성철이 군인민병원(당시) 원장으로 사업하다가 신양고려약공장 지배인으로 임명된것은 2005년 3월초였다.
신임지배인을 맞이한 공장의 실태는 락관적인것이 못되였다.
종업원들의 출근정형도 생활조건도 원만하지 못했다. 고려약생산을 얼마 하지 못했고 생산지표와 관련이 없는것을 만드는데 열중하고있었으며 그러다나니 계획도 가까스로 하고있었다. 생산설비도 락후했고 분석설비도 똑똑한것이 못되였다.
김성철은
그러나 모든것이 걸리였다. 녀성종업원들이 채취해오는 약초라고 해야 그 량이 많지 못했고 설비도 불비했다.
김성철은 워낙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여서 웬간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았으나 너무도 절박한 사정으로 하여 도에서 과장으로 일하고있는 대학동창생인 로상호를 찾아가게 되였다.
로상호는 안타깝게 호소하는 김성철을 자못 측은한 눈길로 여겨보았다.
《지배인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팔방돌이하는걸 보니 사정이 여간 긴박하지 않은것같구만.》
《말도 말게. 지배인이라고 체면을 차릴 형편이 못돼. 좀 도와주게.》
로상호는 난처한 기색을 띠웠다.
《그런데 이거 참 딱하구만.》
《자네야 도에서 한다하는 일군인데 그렇게도 방법이 없겠나, 응?》
《지금형편에서 정말 야단이구만. 오죽하면 내 나이 48살에 머리가 다 희여졌겠나.》
로상호는 짐짓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희슥희슥한 머리칼이 드러난 오른쪽귀밑을 가리켜보였다.
《정말 이러긴가? 그래도 한학급에서 같이 공부한 동창생을 믿고 생각다못해 찾아왔는데 그렇게 무정하게 모르쇠를 할셈인가?》
《허허 참, 나라고 왜 동창생을 도와주고싶지 않겠나.》
《에잇!》 하고 김성철은 벌떡 일어났다.
《자네가 도와줄수 없다면 할수 없지, 평양에 올라가는수밖에!》
《평양에?》
《왜, 못갈줄 아나? 도에서 해결 못해주겠다는데 중앙에라도 올라가서 떼질을 해봐야지.》
로상호의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거나말거나 김성철은 분연히 방을 나왔다.
며칠후 그는 평양으로 가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해당 기관에 도착하여 알아보니 국장은 출장중이고 기사장만 있다고 하였다.
기사장은 예순살이 다된 일군이였다.
그는 김성철이 찾아온 사연을 한참동안 듣고있더니 저으기 민망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였다.
《먼 산골군에서 이렇게 찾아온 지배인동무의 심정은 충분히 리해되오. 그런데 이거 미안하구만.》
《기사장동지, 제가 오죽하면 이런 걸음을 했겠습니까.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지배인동무, 정말… 방도가 없어 그러는거요. 그리 알고 돌아가주오. 난 회의가 있어 가봐야겠소.》
하여 김성철은 말 한마디 더 붙여볼새도 없이 싱겁게도 방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김성철은 기관청사에서 나온 후 정문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그냥 오락가락하였다. 몇걸음 내짚었다가는 돌아오고 또 몇발자국 걸었다가는 다시 돌아오고… 그는 한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였다. 과연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가?
잠시후 김성철은 밤색뚜껑의 수첩을 꺼내들었다. 마치 그속에 걸린 고리를 푸는 열쇠가 있는듯… 그는 한참동안이나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수첩에는 공장의 경영관리와 관련한 자료들과 필요한 자재목록들이 가득 적혀있었다.
한동안 수첩을 들여다보던 그는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나간듯 그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성철은 아침부터 식사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걸린 문제때문에 밥맛을 다 잃었던것이다.
어느덧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봄날치고는 매우 쌀쌀한 밤기운이 온몸을 엄습하였다. 그는 점차 허탈상태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누군가가 《동무! 동무!》 하고 찾으며 마구 흔들어깨우는 바람에 성철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였다.
눈을 떠보니 웬 승용차 한대가 눈부신 전조등을 내쏘며 서있고 앞에는 어떤 나이지숙한 사람이 근심어린 눈길로 자기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있었다.
그 사람은 다시 어깨를 잡아흔들며 다우쳐물었다.
《동문 누구요? 왜 이렇게 한지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앉아있는거요?》
김성철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으나 온몸을 잡아두르는 현기증에 비칠하며 다시 주저앉았다.
그 사람은 운전사에게 물 한병을 가져오게 하여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자, 물을 좀 마시오. 보매 초기가 온것같은데 물을 마시면 정신이 좀 맑아질거요.》
《고맙습니다.》
김성철은 바삭바삭 마른 입술을 감빨고는 물을 마셨다. 좀 있으니 기운이 도는듯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요? 어데서 무슨 일을 하는 동무요?》
그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음― 지배인동무로군.》
《걱정을 끼쳐 미안합니다.》
《괜찮소. 난 여기 당비서요.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보오.》
김성철은 말라드는 입술을 추기며 입을 열었다.
《공장을 살리자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전후사연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였다.
한동안 그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있던 당비서는 자못 감심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이더니 그의 손에 있는 수첩을 가리켰다.
《좀 볼수 있겠소?》
그는 김성철이 내미는 수첩을 받아쥐고 펼쳐보았다.
그의 얼굴에 부지중 기쁨의 미소가 확 피여났다.
《음― 지향과 열정이 대단하구만. 할수 있는 사람보다 하려고 하는 사람이 큰일을 하는 법이지. 이 수첩만 보아도 동무의 사상감정과 리상, 성격을 알수 있소. 가만,여기서 좀 기다리오. 기사장동무가 회의에 갔다가 왔을거요.》
접수실에 갔다온 그는 반색을 하며 기사장이 사무실에 있으니 자기와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성철은 그의 손에 이끌리여 다시 기사장실로 가게 되였다.
때아닌 밤중에 당비서와 함께 나타난 성철을 보자 기사장은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장동무, 일을 잘해보겠다고 속을 태우며 아글타글 애쓰는 이런 동무를 도와주지 않으면 누굴 도와주겠소. 우리 가능한껏 방도를 찾아서 도와줍시다.》
기사장은 당비서의 진심어린 권고를 헌헌히 받아들이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성철은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라 얼굴을 숙이였다.
그들은 정겨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맙긴… 우리가 적극 돕겠으니 지배인동문 꼭 생산활성화를 실현하고 인민들의 호평을 받는 공장으로 만들어야 하오, 알겠소?》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죽으나사나 기어이 우리 공장을 온 나라에 소리치는 공장으로 일떠세우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난 믿소, 지배인동무.》
당비서는 성철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었다.
다음날 평양에서 돌아온 성철은 설비들을 개조하는 한편 여러가지 효능높은 고려약들을 하나하나 생산해내기 시작하였다. 생산이 정상화되는데 따라 의약품생산과 관련이 없는 설비들을 전부 들어내고 새로운 고려약생산설비들을 그쯘하게 차려놓았다.
김성철은 종업원들과 힘을 합쳐 이악한 투쟁으로 해마다 인민경제계획을 지표별로 넘쳐 수행하였고 종업원들의 생활도 향상시켰으며 사회와 집단을 위한 좋은 일도 수많이 찾아하여 군내 인민생활향상에 적극 기여하고 국가에 많은 리익을 주는 공장으로 꾸려갔다. 그러나 김성철은 여기에 만족할수 없었다. 한 단계의 목표를 달성하면 련이어 또 다음단계의 목표를 설정하고 완강하게 실천하는것은 당의 품속에서 일군으로 성장한 나날에 그의 온몸에 체질화된 사업기풍이였고 기질이였다.
그는 가까운 앞날에 공장을 일대 비약시킬
그 첫 순서로 고려약생산의 엑스화공정을 꾸릴것을 결심하고 몇달동안 전국의 이름있는 고려약공장들과
그런데 그렇게 애써 완성한 그 설계도면으로 하여 김성철은 출발선에서부터 인재라는 심각한 문제에 부닥치게 된것이였다. …
김성철의 얼굴에는 비상한 각오와 결심의 빛이 실리였다.
돌진해야 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인재문제해결의 길! 그 길이 바로 우리가 갈 길이다. 인재들을 키우자.
지금부터 잡도리를 단단히 하고 달라붙으면 한 10년후부터는 그 생활력이 여실히 나타날것이다.
김성철은 그 모든 일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립체적으로 내밀기로 결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