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운명의 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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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에서 주작(남쪽)과 백호(서쪽)의 사이방향으로 십여리쯤 거리를 둔 바다가에는 높이가 칠팔여길정도 되는 영가대가 있다.
예로부터 일반객들이나 나라사절들이 바다를 건느기 전에 기풍제(해신, 바다신, 땅신들에게 좋은 날씨를 비는 제사)와 망궐례(임금이 있는 궁궐쪽을 향해 절을 하는 례식)를 지내는 곳이다.
위패를 놓고 음식들을 차릴수 있는 기단과 일행이 대기하고 절할수 있는 자리며 지어 세면하고 음식그릇들을 씻는 자리들이 규모있게 갖추어진 고사터는 사신행차의 기풍제가 진행되는 때면 절모(사신수행원이 지참하는 털을 단 기)와 고각(북과 나팔 등의 신호용군악기) 그리고 돗자리며 장막 등 무릇 사행의 기물과 복식의 화려한 차림으로 인해 그 광경이 번화스럽기가 그지없다.
수일전부터 종사관의 주관하에 택일(좋은 날을 가리는것)을 하여 착실히 준비를 갖추었다가 당일 자시초(밤 12시직후)에 행사가 벌어진다.
가지각색의 희귀한 음식들이 제상에 가득 차려지고 초불, 향불이 타는 속에 전사관(제사집행자)이 축문을 랑독한 후 3헌관(초헌, 아헌, 삼헌으로 세차례 술을 부을 때마다 술드리는 소임을 맡은자)들이 삼배례 하면 하루전부터 목욕재계를 하며 몸과 마음을 바로 가진 일행이 의관을 단정히 차리고서 신패(각종 귀신의 이름을 새긴 나무패쪽)앞에, 순차대로 나와 부복절을 한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례식속에 제사가 끝나면 음복례(제사를 지낸 다음 음식을 나누어 먹는것)를 한 후 남은 제물을 바다물에 싣고나가 뿌려버리면서 《고수래-》를 하고 신패들을 불사른다.
유정이네 사신일행도 바로 그러한 기풍제와 망궐례를 치른 후 바람형세가 좋아진 이튿날 늦아침때에 관사를 떠나 바다가로 나갔다.
출발준비를 갖춘 목선 두척이 닻을 올린채로 사신일행이며 상선할 짐들을 기다리고있었다.
루각기둥과 란간도리마다에 황금일색의 단장을 한 큰 다락배는 손문욱참의를 정사로, 송운대사를 부사로, 마광우별무사를 종사관으로 삼은 조선사신들과 수행인원들을 태울 배이고 그보다 틀거리가 작은 판옥선은 쯔시마의 재판과 봉행(일본관청의 높은 직급의 관원)일행이 탈 배이다.
부산진첨사를 거두로 한 군영의 장수들과 관가의 아전들 그리고 고을내의 량반유생들과 주민들이 사신행차를 배웅하기 위해 미리전부터 부두에 나와있었다.
한성에서 부산으로 통하는 각 고을의 관가들에 《사신행차의 편의를 지극히 도모할지어다.》 라는 조정의 령이 내리기도 했거니와 국운을 떠메고 사지판으로 가는 사람들을 만사불구하고 나와 바래주는것이 한나라강토에 태를 묻고 살아오는 동족으로서 도리상 옳은 처사였기때문이다.
더구나 사람들을 크게 놀래운것은 류성룡이 왜국행에 오른 유정을 바래우기 위해 왕년의 나이에도 직접 역마를 타고 백수십여리의 먼길을 달려온것이였다.
그와 아울러 35살 한창나이에 일류문사로 명성이 자자한 허균이 천리보행을 하여 부산항에 나타나 배웅나온 선비들과 촌민들을 감동시켰다.
어제날의 령의정 겸 3도도체찰사였던 류성룡과 승병대 도총섭이였던 유정의 상면은 전란의 불길속에서 두터이 해온 정으로 하여 남달랐다.
《령상께서 소승을 바래우시려 몸소 수고로이 왕래해주시니 고맙기가 그지없소이다.》
유정이 두손을 합장하여 가슴팍에 얹으며 사례를 하자 평복차림인 류성룡은 허심한 태도로 불도승인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제 나라 땅에서 보행이나 좀 하는게 무슨 큰 대수겠소.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험난한 원쑤의 소굴로 들어가는 송운대사의 막중고초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한 수고일뿐이요. 정말이지 대사앞에 면목이 없소. 한때 령상까지 지낸 이 몸은 한갖 시골의 유생으로 들어박혀 나라와 백성앞에 드닥친 국난을 두고 걱정이나 할뿐인데 불승인 송운대사는 국난을 가시자고 목숨내대고 용약 나섰으니 말이요. 진심으로 머리가 숙어지오.》
그뒤를 이어 허균이 유정에게 례의를 표하고나서 제 보짐속에서 고급한 서사도구를 한조 꺼내여 그한테 기증하였다.
《한뉘 글만 주물러온 선비인지라 험로에 오르신 대사님께 고작 이런것밖에 드리지 못해 실로 미안하옵니다.》
《허, 당대 으뜸인 일류문사의 필봉이 어찌 황금 백냥에 비하리오. 소승은 불의를 타매하는데서는 맹호인 그대의 이 비수와도 같은 붓대를 총창마냥 비껴들고 원쑤의 가슴팍을 명문구로 맞창내리다. 고맙소, 허선생!》
유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량반자손들인 허성, 허봉, 허균 이 3형제 문사들과 친분을 두터이 해온지라 눈굽을 후덥게 적시며 사의를 표했다.
배웅나온 사람들과 잔교에서 친근하게 작별인사를 나누고나서 사신일행은 한사람씩 널판다리를 건너 배에 올랐다.
유정이가 짐바랑을 질끈 둘러띤 자기 호행원인 계명이를 앞세우고 배에 오르려고 하는 때였다.
《송운대사님-》 하고 그들의 등뒤에서 웬 녀인의 은근한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유정은 사람들이 섬벙거리는 만장판에서 자기를 찾는 녀인이 누군가 하여 홀깃 뒤를 돌아보다가 어마지두 놀라며 멈춰섰다. 언덕진 모래터를 지나 잔교쪽으로 종종걸음쳐오는 두 녀승을 띄여보았던것이다.
암갈색의 모시장삼을 늘씬하게 차려입은 나이지숙한 녀승은 가야산의 송화암에서 사는 송희령이였고 그곁에 바투 붙어오는 젊은 녀승은 전쟁때 유정이와 수차 낯을 익힌 희령의 제자승인 봉림이였다.
《이게 누구요, 가야산의 청목선사!-》
유정은 아예 몸을 돌려서 반색을 하며 그를 몇걸음 마중나갔다.
유정이앞에 가까이 다가선 송희령은 숨가삐 오르내리는 앞가슴에 량손을 모아올리며 정중히 읍례를 표했다.
《귀체만강하신 대사님을 뵙게 되여 무상히 기쁘나이다.》
《정말 오래간만이요, 청목!》
유정은 심정이 애틋해져 송희령을 정답게 여겨보았다.
여섯해전 울산도산성전투때 왜놈들한테 붙잡혀가던 희령이때문에 속을 태우던 일을 생각하니 지금 이렇게 몸성해있는 그와 마주 서있는게 도무지 생시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그때 의병 여러명과 녀의승을 조선군사들의 손발을 얽어매는데 쓸 인질로 잡아싣고 가던 가또네 패당은 부산앞바다에서 조선수군의 전함이 급작스레 나타나 추격해오자 저희네 배에 실었던 희령이네를 방패용으로 서슴없이 바다물에 내던지고는 조선수군들이 물속에 떨어진 제 사람들을 구원하느라 멈춰선 짬새를 타서 삼십륙계 줄행랑을 쳤었다.
그날 조선수군들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송희령은 불편한 몸으로 그후에도 전상자치료에 전심전력을 다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의병대들이 해산될 때에야 가야산으로 돌아갔었다.
유정은 전란이 종결되면서 헤여져서는 수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무고하기를 바라면서 봄가을때마다 하늘을 날아 오가는 철새무리에나 안부를 실어보내며 애모삐 그려보던 련인을 오늘 이처럼 직접 만나니 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그새 어떻게 지냈소? 청목.》
《념려덕분에 무고히 지내왔나이다. 불도숙련도 하고 화전농사도 짓고 환자치료도 하면서. 그러루한 생활이 소승의 일생전부인걸요.》
《바다에 내던져질 때 다쳤던 허린 일없소?》
유정이가 다정하게 묻자 송희령은 숫색시처럼 수집음을 타며 나직하니 대꾸했다.
《네.》
세월의 흔적인듯 어언간에 눈가에는 잔주름살이 덮였건만 아직 한창나이때처럼 몸매가 늘씬하고 살결이 희멀쑥한 그의 자태에서는 청신한 기운이 연연히 풍겼고 원숙한 기품과 송죽같은 절개가 엿보였다.
곁에서는 제자중들이 지켜보고 주변에서는 사신일행과 배웅자들이 섬벙거리는지라 두 도승은 애절한 시선으로만 내심의 말을 주고받았다.
(희령이, 그지간 정말이지 보고싶었댔소. 인편에 소식이라도 한장 띄울거지 참.)
(도련님, 소녀도 그대를 일각이 여삼추로 그리워했나이다. 하지만 차마 그대가 있는 금강산으로 갈수는 없었나이다. 그건 불계와 인륜을 거스르는 불상스러운 행실이니까요. 도련님은 너무도 무정하오이다. 소녀가 있는 가야산에 한번 다녀가지도 않았으니 말이예요. 그런 일에서야 사내가 주동이 돼서 걸음을 해야지요.)
(그러고픈 심정은 절실했으나 도저히 짬을 낼수가 없었소. 내 한생이 이다지도 다사분망해질줄은 몰랐소그려. 량해하오, 희령이.)
(다 아옵니다. 일개인의 영달이나 우의감보다도 애국애민사업에 충실한분이니 어차피 그럴수밖에 없었겠지요.)
(희령이, 내 전에도 말하지 않았소. 애국애민의 길을 함께 걸으면 한몸, 한뜻으로 사는것이라고. 하건만 당신을 한번도 따뜻이 품안아주지 못한것이 일생 속에 걸리는구려. 난 정말이지 무정한 사내요. 내 한뉘 당신한테 빚만 지는구만. 용서하오, 희령이.)
유정은 이렇게 속으로 사죄를 하며 따스한 애정과 절절한 소망이 짙게 내비친 희령의 두눈을 들여다보느라니 가슴이 얼얼해져 견딜수가 없었다. 우리 두 인생은 종내 한수레를 타보지 못하고 제마끔 파란만장의 행로를 오불꼬불 엇사귀며 흘러가다가 종말을 내고말겠구나. 수십년전 그때 내가 당시의 나라법이고 인륜이였던 3강5륜의 쇠사슬을 박차고나가 저 녀자를 억척같이 품안아 지켜냈어도 우리의 일은 달리 될수도 있었건만 그러하지 못했으니 그게 내 일생의 한이로구나.
유정은 이런 자격지심때문에 송희령을 대할 면목이 없어 시선을 무겁게 떨구며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헌데 어인 일로 하여 이곳엘 나타났소?》
《…》
희령은 대답을 피하며 차붓이 미소만 지을뿐이였다.
그러자 그의 곁에 그림자마냥 붙어있던 제자승인 봉림이가 제 스님 대신 사유를 터놓았다.
《스님은 왜국행차에 오르신 대사님을 바래주시려고 우야 품을 놓아 먼길을 달려왔사옵니다.》
《허어, 이런 막중수고라구야!》
유정이가 속쩌릿해서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송희령이가 잔등에 둘러메였던 바랑을 벗어 그안에서 유지로 포장한 꾸레미를 하나 꺼내 유정이 손에 쥐여주었다.
《이번 길에 필요한 약품이옵니다. 봉지별로 약명과 사용설명서를 써넣었으니 그대로 하면 뒤탈이 없을것이옵니다. 나라와 백성들의 장래운명이 대사님한테 달렸으니 멀고 위험한 길에서 부디 몸조심하옵시오.》
《알겠소, 청목!》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배에 먼저 올라가 상선한 인원들과 물건들을 점검하던 마광우종사관이 잔교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지체하며 녀승들과 만나는 유정이네를 띄여보고 눈살을 찡그렸다.
《바다길에 나설 때 계집년치마바람이 코등을 스쳐도 재수없어 일이 꼬인다는데 그 참 잘은 놀아대는구나. 다 늙은 사람들이 푼수없이 사랑놀이람? 첫 마수걸이부터 김이 새겠군.》
속이 언짢아 코김을 흥흥 내불던 마광우는 더 참지 못하고 목대를 기웃하며 소리쳐 유정을 불렀다.
《이보시오, 부사님- 어서 승선하소다.》
그 웨침소리에 당사자인 유정은 그저 흔연해서 알았노라고 한마디 건성 대꾸를 하는데 곁에서 말짱 듣고 보던 계명이는 금시 낯색이 새파래져가지고 마광우쪽에 눈총을 쏘았다.
《저게 감히 뉘한테 나발질이야? 저 낮도깨비같은 자식을 아예 탁 그저…》
계명은 당장 배에 뛰여올라가 마광우를 혼쌀내고싶었으나 스님의 엄한 시선이 날아들기에 정작 행동에로는 못 넘어가고 꽉 틀어쥔 주먹만 떨었다. 이미전에 벌써 스님의 된꾸중이 없었더라면 크게 사달을 일으켰을 그다.
엊그제 부산에 도착한 유정이네 일행은 이곳 부산진첨사의 환대를 받으며 관사에 들어서다가 한발 앞서 내려와 사신행차의 출발준비를 맡아하고있는 종사관을 만났었다.
키가 꺽실한데다가 살까지 피둥피둥 져 퍼그나 우람차보이는 무관복차림의 젊은 종사관이 별로 낯이 익어 눈여겨살피던 유정이는 어마지두 놀랐다.
《아니, 이게 마광우 아닌가?》
《허, 용케 알아보옵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군요. 헌데 왜 그리 놀라소이까? 이 마광우라고 한뉘 개창바닥에서 불상놈으로 굴러먹어야 한다는 법이야 없지 않소이까. 이래서 세상살이에선 자고로 양지가 음지되고 음지가 양지될 때가 있다고 하는거지요.》
마광우는 이렇게 뻐기면서도 유정이를 은근히 어려워하는 태도였다.
자기가 비록 오늘날엔 한갖 산속절간의 범승에 불과한 유정을 아무렇게나 처분할수 있는 중앙관청의 종6품의 무관이나 옛적에 도총섭인 유정이한테 명줄이 매였던 일개의 승병이였고 실지로 사신단에 속하면서 제 직임이 부사신밑의 종사관으로 된 상태라 은근히 유정을 어려워하는것이다.
그러긴 하나 어쨌든 왜국행을 끝내면 또다시 둘사이가 중앙관청의 무관과 산속절간의 하찮은 중으로 될 처지라 의연히 우쭐해서 생색을 냈다.
그러거나말거나 유정은 일점의 내색도 없이 꿈만해서 왜국행에 나설 출발준비만 주근주근 갖추어나갔다.
그런데 원가마보다도 곁가마가 더 끓는다고 오히려 곁에서 지켜보던 계명이가 참다못해 성을 냈다.
《마가가 무관감투를 하나 얻어썼다고 으시대는게 분명하오이다. 옛적에 형틀에 매이여 스님보고 살려달라고 량손을 싹싹 빌며 애걸복걸하던게 언젠데 올챙이적 일을 다 까먹은 개구리처럼 놀아대니 이거야 어디 눈꼴이 쏴 견디겠소이까.》
《그까짓거, 귀신 씨나락까먹는것처럼 여겨라. 그러다가 제풀에 가드라들지 않으리. 열매 못될 꽃은 첫삼월부터 알린다고 저 사람은 원체 저렇게 덜돼먹은걸 전쟁때 우리가 곁에서 지내봐 잘 알지를 않나.》
유정이가 심상해서 만류를 하자 계명은 한층더 약이 올라했다.
《빨래줄에 날아오른 수닭처럼 멋대가리없이 놀아대는 저 꼴을 맑은 정신으로야 봐주겠소이까. 저 마가가 아무래도 불상스러운 존재오이다. 저자와 동행하다간 가뜩이나 살기찬 왜땅에서 기필코 곤욕을 치를것 같으니 이제라도 종사관을 갈아치우게끔 조정에 상소하오이다.》
《아서라, 쥐 한마리 잡으려다가 독깨뜨릴라. 총이 센 짐승털일수록 내리쓸어야 부드러워지는 법이니라.》
《어쨌든간에 저 마가하고는 생사를 가리는 왜국에 같이 가기가 싫소이다. 마가를 제껴놓든지 우리가 그만두든지 무슨 매련을 봐야지.》
계명이가 그냥 제 고집을 부리며 오똘거리자 유정이 정녕 성이 나서 그를 다불러댔다.
《거사를 앞두고 웬 잡념이 그리도 심하냐? 지금은 누가 어떤 행세를 하고 어떤 대접을 받는가가 기본이 아니라 각자가 다 나라대업을 실행할 만단의 준비를 갖추는게 급선무임을 알거라. 그러니 잔말을 말고 셈이나 세.》
스님의 엄한 꾸중을 당하고서야 계명은 발딱거리던 밸통머리가 어지간히 숙어들었다. 그는 합장을 하며 속으로 현인군자수양법의 하나인 셈을 세였다.
유정스님은 성격이 발촉해 쩍하면 사달을 내기를 잘하는 계명의 약점을 우려하여 《사람은 웬간한 경우에도 참을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참을 인자 셋을 쌓으면 군자가 된다고 했니라.》 이렇게 훈계를 하면서 신경이 발딱 살아날 때는
바로 그러한 내막이 있는지라 출항을 앞둔 지금도 계명은 마광우 노는 꼴이 역겨워 주먹이 우뚤거렸으나 스님의 엄한 눈총이 두려워 더 어쩌지 못하고 입안소리로 셈을 세면서 애써 자중을 하는터이다.
놋양푼같은 해가 수평선우로 건듯 들리고 바람새 또한 순편해지는 중낮무렵에 조선사신일행과 쯔시마의 재판, 봉행, 도선주일행을 실은 두척의 배는 돛폭을 펴고 느직느직 포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삐거덕- 삐거덕-
안내를 맡은 왜국의 판옥선이 앞에서 길을 잡아 나갔고 조선사신일행이 탄 다락배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떨어져서 따라갔다.
유정이네를 실은 뒤배가 자루목처럼 오목지게 생긴 포구를 벗어날 때 배웅나온 사람들이 량쪽 잔교의 물탁까지 우르르 밀려나오며 배를 에워싸다싶이했다.
삐거덕- 삐거덕-
사공들과 격군들의 노젓는 소리가 물새들이 무리지어 날아예는 허공을 헤가르며 들려와 바래주는 사람들의 가슴을 애절하게 허비였다. 그들은 이제 떠나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수도 있는 사람들을, 나라의 중대사를 해결하기 위해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위험천만한 길에 오른 사신일행을 절절한 기대가 어린 눈으로 바래주었다.
다락란간에 한쪽팔을 얹은채 거연히 뻗치고 선 유정은 설렁설렁 불어치는 미풍에 장발의 수염을 날리며 시야에서 차츰 멀어지는 정다운 사람들과
아울러
잘있으라, 정다운 산천이여!- 귀중한 내 나라여!-
사신일행을 실은 배가 부산앞바다에 나와 항로를 잡고 속력을 내며 한참 달리는데 어데선가 불쑥 나타난 속도 빠른 조선수군의 전함 여러척이 그들을 호행하듯이 일정한 간격을 맞추며 그냥 따라왔다.
승전고인양 북소리를 둥둥 울리고 뿔나팔까지 불어대면서 사신일행이 탄 목선을 호행하던 전함들이 공해에 거의 다달으자 그 자리에 멈춰서고 그중에서 지휘함선 한척만이 속력을 내여 쑥 삐여져나오더니 유정이네를 실은 다락배곁에서 나란히 달리였다.
그들의 류다른 거동에 마음이 씌여져 눈여겨 그쪽을 바라보던 유정은 선체가녁에 전복차림으로 서있는 우람진 체격의 무관들을 알아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3도통제사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인 정기룡, 부산항 통주사로 남해 해상근무를 맡아보는 박인로(애국시인),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김응서, 이 세 무장이 경건한 자세로 서서 유정에게 군례를 표해오는것이였다.
《도총섭님, 부디 성업을 이루고 무사히 돌아옵시오.》
열혈무장들의 뜨거운 진정이 어린 작별인사가 유정의 가슴을 치며 메아리쳐왔다.
유정은 눈시울을 슴벅이며 손을 힘껏 내저어 답례를 보냈다.
(정상공, 박상공, 김상공!… 그대들의 애국념원까지 다해 내 기어이 대업을 이루고 돌아오리니 그동안 건강하여 우리 나라의 바다와 땅을 굳건히 지켜주오.)
사신일행을 실은 목선들이 전함들과 헤여져 한동안 달렸을 때였다.
격군들의 노젓는 소리와 수행하인들의 한담소리만이 근근히 적막을 깨뜨리던 선창에서 별안간에 소동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털빛갈이 누런 중개 한마리가 사공들과 하인배들의 바지가랭이를 물어뜯으며 돌아치는데 그통에 기겁한 사람들은 발을 굴러 개를 쫓느라 야단법석을 쳐댔다.
유정스님과 함께 다락방에 있다가 웬 소동인가 해 선창으로 뎀벙 뛰여내린 계명이가 《제길, 배길에 재수없군. 이놈의 개가 우리 일을 개판이 되게 하자고 이래? 아 이런, 도대체 누가 개를 사신배에 데리고 올랐어?》 하고 고아대면서 발길질로 개를 서너번 걷어차다가 신경이 나서 사공들과 하인배들을 둘러보며 개주인이 누군가고 따져물었다.
한참 그러며 열을 올렸으나 어느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좋소, 주인이 없다면 내가 맘대로 처리하겠소.》
팩해서 소리친 계명은 개를 덥석 안아 바다물에 내던질 태세를 취했다.
그가 홀짝홀짝 피해 달아나는 누런 중개를 잽싸게 따라잡아 요동치는 개의 뒤다리를 막 거머쥐는 때였다.
《가만, 그 개를 다치지 말게.》
열댓명은 나마 돼보이는 사공들속에서 물날은 무명수건으로 상투머리를 질끈 둘러감은 체통이 큰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계명이한테로 겅정겅정 다가왔다.
나이가 삼십대 중엽쯤 되여보이는 젊은 장정이였다.
눈을 되알지게 부릅뜨고 그 장정을 흘겨보면서 《당신이 개주인이였구려. 여보, 당신 도대체 제정신이요? 개는 어쩌자고 사신배에…》 예까지 욕설을 이어대던 계명이가 불시에 입이 항 벌어지면서 우뚝 굳어졌다.
그는 얼굴이 반쯤 가리우도록 상투머리를 질끈 동이였던 무명수건을 벗어들고 땀발이 돋은 굵직한 목등을 슬슬 문지르면서 벙글써 웃는 개주인을 아연해서 건너다보다가 불시에 껑충 올려뛰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오팔형!- 형님-》
그제서야 자기 본색을 드러낸 그 장정도 희색이 만연해지며 너스레를 떨어댄다.
《하하, 우리 계명이 오똘거리는 성미는 여전하구나!》
《형님을 여기서 만날줄은 몰랐군요. 정말 반가워요!》
계명은 눈물이 글썽해가지고 오팔이를 얼싸안고 돌아갔다.
오팔이도 감개무량한 웃음을 얼굴에 넘치게 철철 날리면서 계명을 끌어안고 그의 얼굴과 어깨를 어루쓸었다.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만나게 되는구나. 계명이 너 오륙년새에 완전한 어른이 됐는기라. 이크, 이 팔뚝시랑 굵어지고 허리통이랑 쭉 내뽑힌걸 보지. 어참, 우리 막내동이가 휘뚝 몰라보게 자랐는걸.》
그들이 벅적 떠들며 감회를 나누는 소리가 다락방안에 앉아 검푸른 파도가 들까부는 바다물에 하많은 생각이 실린 시선을 던지고있던 유정이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무어, 오팔이?! 옳거니, 분명 그녀석 목소리야.》
이러면서 성큼 일어나 다락방을 나와 선창을 굽어살피던 유정은 서로 팔을 껴안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명이와 오팔을 띄여보고는 눈이 커졌다
《원, 저런… 진짜로 오팔이가 나타났구나!》
하도 기가 차서 혀를 쩍 내털던 유정은 총총히 목조층계를 걸어내렸다.
석쉼하면서도 웅글은 유정스님의 음성을 어느결에 가려들은 오팔이가 계명을 놓고 스님을 마중하여 반달음쳐가 너푼 문안인사를 크게 드리고는 노죽을 부려댔다.
《총섭님도 참, 언젠 이 소인이 가짜 오팔이였소이까?》
《하기사 천하의 오황소야 임자 한사람뿐이였지. 헌데 어인 연고로 해 사신배엘 올랐느냐? 어벌뚝지가 크기도 하다, 원.》
장발수염이 위풍있게 내돋친 턱을 주억거리던 유정이가 문득 의문을 드러내며 그 연고를 알고싶어했으나 오팔은 엉큼스럽게도 대답을 감추고 상투머리만 썩썩 긁으면서 벌쭉거렸다.
《하늘이 몰아온 우순풍조를 따랐나봅니다. 참, 소인이 반가운 사람을 하나 또 데려왔소이다.》
오팔이가 잉그르르 돌아서며 《이보소, 별초군대장-》 하고 일껏 크게 가다듬어 한소래기 줴치자 그때까지 선미쪽으로 등을 돌려대고 앉아 수걱수걱 노질을 하던 키꼴좋은 사내가 움쭉 일어나더니 유정이네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홍창해였다.
홍창해는 최근 몇해어간 세파심한 인생길에서 오래간만에 만나는 주지님이였으나 하루이틀쯤 헤여졌다가 인차 뵙는 사람처럼 천연스럽게 웃으며 유정에게 속세인간의 투로 꾸벅 머리절을 했다.
《총섭님, 그간 귀체만강하셨소이까?》
그의 범상하면서도 절친한 태도가 또한 유정을 기막히게 만들었다.
《녀석같으니라. 훌쩍 사라졌다가는 불쑥 나타나군 하던 그 몹쓸 버릇은 여전하구나. 확실히 오늘은 길일이로다. 생각지도 못했던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으니 말이다.》
유정은 나라와 백성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였던 전란의 나날에 함께 목숨을 내걸고 사지판을 넘나들던 옛 부하들을 만난것이 기뻐 호함지게 웃으면서 오팔의 듬직스러운 어깨도 두드려주고 홍창해의 짠물에 젖은 손도 어루쓸어줬다.
그러면서 한식경쯤 회포를 나누다가 느닷없이 의혹을 내비쳤다.
《헌데 어찌된 일이냐? 너희들이 동시에 사신배의 노군으로 들어앉았으니 말이다. 혹시 늬들 어떤 작당을 한게 아니냐?》
그 물음에 해오는 대답들이 흐드러울 정도로 걸작들이다.
《우리야 총섭님의 호위병이 아니옵니까.》
《머리가는데 꼬리가 안 따라서야 되겠소이까.》
의미가 깊은 대답을 한마디씩 외우고나서 둘은 저희들끼리 눈을 맞추며 웃기만 할뿐이다.
유정은 필경 그들사이에 어떤 쪼간이 있을것이라고 짐작이 갔지만 곁에서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데다가 구태여 본인들을 따분하게 만들고싶지 않아 더이상 캐묻지를 않았다.
하여튼간에 험난한 원쑤의 소굴로 기필코 자기를 따라들어가 사생동거를 하면서 자기의 신변을 지켜주려는 젊은이들의 소행이 고마와 속으로 뜨거운것을 삼켰다.
유정은 끌끌한 방조자들이 늘어난것으로 하여 마음이 더 든든해지고 앞일에 대한 신심도 생겼다.
유정이 사뭇 흡족하여 장발수염을 슬슬 내리쓸며 턱을 주억거리는데 오팔이가 느닷없이 《총섭님, 이 개가 낯익지 않소이까?》 하더니 좀전에 계명이가 바다에 내던지려고 하던 누런 털빛갈의 중개를 끄당겨 유정이앞에 내보였다.
그 개를 의아하여 굽어보던 유정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어디서 꼭 본것 같기는 한데 생각은 잘 안 나는구만.》
그러자 오팔이 쓱쓱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더니 얼른 주해를 달았다.
《우리가 금강산에서 전장으로 데리고 나왔던 그 누렁이의 3대후손이옵니다. 그때 소인이 물방아간집에 누렁이가 낳은 암강아지를 한마리 가져다줬었는데 그것이 커서 새끼를 퍼친것이옵니다.》
《글쎄 어쩐지 낯이 익다 했지. 거참 그러고보니 모상이 제 조상과 신통히도 같구나. 헌데 임자 멀고 험한 왜국행차에 자발해서 슬쩍 끼이면서 개는 어째 달고 떠났나?》
《이것이 진도개의 순종과 쌍붙임을 하여 낳아서 그런지 저혼자 산돼지도 물어메치고 시라소니까지 잡아온 용맹하고도 령리한 사냥개옵니다. 필경 맹견의 기질을 타고난 명물이 분명하오니 왜국행에 데리고 떠나면 앞으로 쓸 때가 있을것이옵니다.》
《우리 누렁이의 후손이 그토록 명물이란 말이지.》
유정은 가슴쩌릿한 감회가 살아올라 무릎을 꺾고앉아 누렁이의 늘씬한 허리통과 탄탄한 다리를 한참이나 어루쓸었다. 손끝에서 뜨스한것이 마쳐오자 이제는 옛이야기로 되여버린 임진왜란때의 만단사연의 일들이 돌이켜지며 심정이 절로 애틋해졌다.
그러하는데 한쪽에선 계명이가 홍창해와 오팔이의 팔을 각각 하나씩 붙잡고 그들과 엇섞여돌며 정회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다.
《난 정말이지 형님네들이 이렇게 나타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댔어요.》 하고 속심을 기꺼이 드러내며 좋아서 어쩔바를 몰라하는 계명의 볼살을 투실한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주던 오팔이도 기쁨을 금치못해 노상 히죽거렸다.
《천만뜻밖일테지. 하늘에서 억대우같은 장사가 둘씩이나 뚝 떨어지니 말이야. 이봐, 동생- 이처럼 불시에 옛지우들을 만나니 막 숨이 막히지, 응? 하하.》
《숨이 막히는게 아니라 활 숨이 나가요. 펄쩍 나는 싸움군들이 생겼으니 이젠 맘이 푹 놓인단 말이예요.》
《반갑고 다행스러운 감정으로 말하면 우리가 더하다. 정정하신 스님과 몰라볼 정도로 성장한 너를 다시 만나서 말이다. 어참- 우리 계명이가 이젠 어른이 다 됐는걸! 전쟁때만 해도 하불지게 애리애리하더니 오륙년새에 탐이 날 정도로 숙성해졌거던.》
너스레를 떠는 오팔이의 흐덕임에 잇달아 홍창해도 계명의 실팍해진 어깨와 잔등을 툭툭 두드려주며 무척 대견해했다.
손우 사람들 칭찬 몇마디에 으쓱해진 계명은 당장이라도 천하를 횡행할듯이 뻐겨댔다.
《나두 이젠 무적의 싸움군이예요. 택견술이 관동일판에선 두손가락안에 꼽히거던요. 아마 당장이래두 창해형하구 단장놔두 어슷비슷할거요.》
그 우쭐거리는 소리에 오팔이가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내둘렀다.
《괜하니 쫄딱거리다가 사등뼈 부러질라. 네가 그지간에 제아무리 힘이 자라고 법수가 늘었다 해두 아직 별군장한텐 상대가 안돼.》
《쳇, 형넨 둘이서 서로 작당을 했지요? 나를 만나면 드립다 골려주자구. 형님네들 장차로 두고보라요. 이 동생의 무술덕을 입지 않나.》
《오냐. 이찌닥저찌닥해두 우리 동생이 천하에서 으뜸이니라.》
세상만사를 휘걷어잡아 쥐락펴락할듯이 기개를 뽐내다가는 희희락락하며 떠들어대는 젊은이들을 애정스럽게 지켜보던 유정은 선체에 기대앉아 배전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드세차게 불어치는 해풍에 떠밀려 쉬임없이 격랑을 일으키는 망망대해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자연히 속심정이 끓어올라 석쉼한 음성으로 즉흥시를 한수 읊었다.
근래에 성한 백발 해마다 더해지더니
8월가을 배를 타고 남해에 들어섰네
허리굽혀 례절치레 나의 뜻 아니건만
나라일로 원쑤에게 고개숙이고 들어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