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길은 하나다
2
길은 아득히 뻗어있었다.
그 길은 황토먼지날리는 산기슭의 신작로가 아니라 량쪽밭속에서 밀보리가 물결치는 들길이였다.
늦봄과 이른여름이 한데 뒤엉켜 아지랑이를 뽀얗게 풍겨올리는 들판에서는 선들바람이 꽃향기를 날리고 들판우의 푸른 하늘에서는 종조리가 유정하게 우짖고있었다.
유정은 힘들어도 자꾸만 그 길을 가고싶었다. 지금처럼 말을 타고서가 아니라 바지가랭이를 씨원히 걷어올린 맨발바람으로 발목이 시리도록 해볕이 자글거리는 그 땅을 자꾸만 걷고 또 걷고싶었다. 그 길이 검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현해탄을 넘어 어린시절 무명고의가랭이를 적시며 물고기잡이로 해지는줄 모르던 고향마을 시내가를 지나 조부모님들이 눈물이 그렁해서 기다리던 동기와집대문에 이어졌으면 그지없이 좋으련만 어이하여 한생 내가 걷는 길은 그렇게 되지를 않는가?
진홍색의 동백꽃이 돌담너머로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구기자녕클이
치렁치렁 순줄기를 드리운 박우물에선 맑은 샘물이 퐁퐁 솟구치던 집!그 집대문가에서는 오늘도 백발의 할머니가 뿌리내린듯이 서서 애타게 유정을 손저어 부르고있었다.
《애야, 리환아- 돌아오거라- 돌아오거라-》
《안되오이다. 아직은 안되오이다.》
유정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잠을 깨였다.
그는 눈을 뜨자 주변부터 살폈다.
오팔이, 백손이 등의 젊은이들은 소바 한기장쯤 떨어진 곳에서 밋밋한 바위에 줄느런히 기대앉아 뙤약볕을 쪼이고 계명은 어디에도 가지않고 제 스님의 머리맡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계명이가 유정이 버쩍 눈을 뜨는것을 어느새 띄여보고 《좀더 주무 시오이다.》 이러는것을 유정이 기지개를 쭉 켠 후 《실컷 찼니라. 늬 들은 어째 앉아만 있는거냐? 허리쉽이라도 좀 할게지. 허, 이거 지기일 이요. 미지기이(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라더니 내 편한것만 알고 임자네들이 고생하는건 몰랐네그려.》 하고 미안쩍게 대꾸하며 움쭉 일어나앉았다.
유정이네는 높다란 외통길 산고개를 넘다가 말도 지치고 사람도 지치여 산중턱의 샘터곁 풀밭에 앉아 다리쉼을 하던중이였다.
그 외통길은 북륙도에서 그중 지형지세가 험하고 일기가 사납기로 소문난 에치고(에슈)고을로 질러넘어가는 산길이였다.
지난 정이월초께 교또를 떠난 유정이네는 동산도의 신주, 우주 등의 여러 고을들을 륙로와 바다길을 통해 유람한 후 련이어 북륙도의 약주 탄슈, 세기슈 등 수십개의 크고작은 고을들을 돌아보았다.
유정은 그곳들을 돌아보면서 왜국의 실태와 경제적잠재력과 군수발전정도를 가늠하였었다.
그 과정에 얻어진 소득은 비할바없이 많았으나 대신에 생소한 수백수천리의 장장험로를 톺아오느라 사람들이 지치였다.
했으나 이제 또 동광산이 있는 에치고에 들려 하루 묵고는 훨씬 더 북쪽지방으로 향할 예정이였다.
교또를 떠난지도 두달이 넘어 어느덧 계절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철이 되였다. 워낙 노랑봄철이면 집안에 가만 앉아있어도 괜히 피곤만 하는 때인데 이른아침부터 저녁늦게까지 내처 걷기만 하니 북륙도에 대
한 유람을 거의 끝내게 된 이즈막에 와서는 일행을 거느리던 유정은 물론 그를 수행하며 호위와 시중을 담당하던 젊은이들도 아예 녹초가 되고말았다.
바로 그런 형편이여서 여느때같으면 사래긴 한이랑의 밭김을 맬새면 휘딱 넘었을 그닥 높지도 않은 령길을 한것씩이나 헤매고있는것이다.
유정은 계명이와 오팔이네(흥창해는 별도의 임무를 맡고 규슈지방으로 떠나간지라 없었다. )는 물론 백손이까지도 자기들이 지친 몸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신변을 지키느라 꼬바기 곁을 뜨지 않고 쪽잠에도 들지 않았다는것을 알고 그들이 고맙고 대견하여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그러는데 누렁이를 량무릎새에 끼고앉아 털이 번지르르한 개목등을 쓸어만지며 놀음을 치는 오팔이와 무슨 애기를 주고받던 백손이가 유정이 일어나앉는것을 보더니 그의 기색을 살피면서 엉금엉금 가까이로 가와앉았다.
《도사님, 저 바다건너 혹가이도엘 부디 가야 하나이까?》
샘물을 한그릇 시원히 떠마시고 물방울이 맺힌 길다란 수염발을 슬슬 내리쓸던 유정은 별다른 생각이 없이 응대했다.
《가야지, 헌데 새삼스레 건 왜 묻나?》
《인제야 이 나라의 실태가 손금보듯 뻔한데 구태여 험난한 바다길 올 헤치며 외진 촌락에까지 가볼 필요가 없지 않소이까. 이러다간 사신행차가 래년 설도 이 땅에서 쇨것 같군요.》
이런 투로 걱정을 표하는 백손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유정은 통 엇 찔렀다.
《임자 사신호행노릇이 지루한게로구만.》
《…》
유정이가 신통히도 그의 심중을 꿰뚫어냈는지 백손은 당황한 기색이 되며 어름어름하다가 물러나앉았다.
그러자 유정이 이번엔 계명이한테 한담삼아 물었다.
《너도 이 길이 지루하게 생각되냐?》
《소승이야 뭐 그저 아무곳이든 스님만 곁에 있으면 되오이다. 헌데 같은 값이면 제 나라에 가있는것이 더…》
이러던 계명이 스님의 눈빛이 흐려지는것을 보고는 말꼬리를 삼킨다.
시간이 이윽하여 피로를 어지간히 폴고난 일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금 길을 떠났다.
그들 일행은 해가 뉘엿해질무렵에 에치고고을에 들어섰다.
일본북부지대에 속하는 이곳엔 남쪽보다 바람이 세차서 그런지 건물들이 대체로 나지막하면서도 지붕들이 뾰족했고 토배기사람들도 키가 작고 날파람있게 생긴것이 특징이였다.
유정은 고을 초입구에 들어설 때도 그렇고 사신행차의 통고를 하느라 관가에 들락일 때도 그렇고 어떤 정체모를 괴한이 자주 복색을 바꿔가며 은밀히 자기네의 뒤를 밟고있는것을 감촉했다.
하긴 그 감촉은 에도성을 떠나 서너 고을을 거쳤을 때부터 생겨난것이였다.
이따금 요긴한 모퉁이때마다 얼핏 자기 눈에 걸려들었다가 바람같이 사라지군 하는 그 이상한 그림자같은 미지의 인물로 하여 유정은 마음한구석이 늘 불안했다.
유정은 히나노고을의 객관에서 사나홀 묵던 어느날 생활용품을 사러 읍저자거리에 나갔던 오팔이가 돌아와서 장돌뱅이로 가장한 히까리를 보았다기에 믿지를 않았었다.
헌데 와가사고을에 속한 어느 외진 산간촌락의 병기제조소를 참관하던 날 점심때인데 식사후 변소에 나갔다오던 계명이가 참나무쑥을 싣고온 마차군이 아무리 봐도 히까리같다는 말을 옮기는것이였다.
그래서야 유정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마음의 탕개를 바싹 조였다.
히까리가 신년연희때처럼 《도자마》 들에게 매수되여 조선사신행차를 보호하는 막부군장수의 위치를 리용하여 자객노릇을 할수 있다는 생각에 잔등이 선뜩해졌던것이다.
그래서 늘 마음을 못 놓아오는중이였다.
원래 도요또미네 부하였다가 세끼가하라격전때 도꾸가와네한테 가붙어 목숨을 유지한 《도자마》 인 그곳 다이묘는 별로 각근히 유정에게 호의를 보이며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유정에게는 뾰족한 턱을 갑삭갑삭 조아리며 헤식은 웃음을 짓군 하는 그자의 언행이 지어낸것처럼 탐탁치 않게 여겨졌고 그자와 연회석에 같이 나앉는것조차도 생밤송이를 밟는것처럼 께름하기가 그
지없었다.
아닐세라 그날 밤 불의의 사달이 생겼다.
다이묘놈은 부하들을 내세워 사신일행의 행수인 유정에게는 특별한 귀빈들만 들인다는 산밑 별당의 독방을 내주게 하고 일반수행성원들은 근처의 객관에 들이였는데 바로 그 숙소배달자체에 불순한 내막이 있었다.
본인인 유정이자체가 헌걸스러운
겨지여 흔연히 주인측의 의사에 순응하려는데 계명이가 발딱 나서며 스님 혼자 숙박을 절대로 하게 할수 없다고 잡아떼며 강경하게 나왔다.
그러할 때에 유정이 일부러 품은 내심이 있는지라 계명을 억지로 눌러
치우고 제스스로가 별당의 독방에 따로 행장을 풀었다.
헌데 그 처사가 스스로 함정에 뛰여드는셈이 되고말았다.
은근히 긴장되여 신경을 도사렸건만 그새 몰린 피곤이 하도 중압스러운지라 여차직하는 새에 깜빡 잠에 빠져들었던 유정은 매캐한 연기
내와 뜨거운 화염에 숨이 막혀와 와당탕 뛰쳐일어났다.
집안이 온통 시꺼먼 연기와 불길에 휩싸여있었다.
펄쩍 정신을 차리며 밖으로 나가려고 손더듬을 하여 출구를 찾았건
만 문은 이미 밖에서 걸려있었고 불길과 연기는 안으로 몰풍같이 밀려
들고있었다. 금시 숨이 막혀들고 정신이 흐려졌다.
유정은 이밤엔 분명코 내가 죽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온몸이 매시
시해졌다.